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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 전도서의 질문 5 –

전도서 12: 1 ~ 14

김지철 목사

2015.03.22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3년에 서울시에서 사람들의 사망 원인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10대부터 30대까지는 자살이 가장 많았습니다. 10대 사망자 중 35.1%, 20대 사망자 중 51.6%, 30대 사망자 중 39.7%가 자살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40대 이상부터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알려진 암이 사망 원인 1위였습니다.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이 참 마음 아픕니다. 생명으로 충만한 시절이 10대부터 30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시절에 삶의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고 싶지 않다는 자기 선언, 즉 자살로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자살은 절망이 극한에 도달한 행위입니다. 일찍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살은, 삶의 무의미성에 대한 일종의 항복입니다. 자발성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자기 선언이며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응답하고 반응할 만한 가치 있는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합니다. 또 다양한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색맹’이라고 말합니다. 컴퓨터를 잘 못하는 것을 두고 ‘컴맹’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맹’은 망할 망(亡)자 밑에 눈 목(目)자를 씁니다. 한마디로 어둡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의미맹’이 늘고 있습니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또는 ‘자맹’,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가 무언지, 내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무언지, 인생에 왜 공허가 생기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의미맹이 되고 자맹이 됩니다.
영적인 위기가 무엇일까요?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동기부여가 되지 않습니다. 동기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것은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근본적으로 내 속에 삶의 근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삶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삶의 이유와 목표를 알게 됩니다. 그래야 생명이 약동하기 시작합니다.

전도자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전도자는 우리에게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나이가 들면 창조주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우리가 제일 먼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젊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인생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늙는다는 것은 내 세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내 세계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3절에서 6절까지는 젊음이 지닌 축복들이 사라지는 것을 하나하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곤고한 날의 풍경입니다. 아름답게 떠오르던 태양이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는 때, 그런 때가 다가옴을 경험하는 전도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꽤 종교적으로 들립니다. 왜 나이가 들면 저절로 종교적이 되는 걸까요? 인생이 끝나고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삶의 정체성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것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전도자는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의 때가 어떤 때입니까? 왕성한 성취와 업적을 세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인생의 모든 것을 전력투구하는 때입니다. 그때는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습니다.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인생에는 위험이 많아집니다. 청년의 때가 가지는 위험은 무엇일까요? 바깥 세계는 잘 보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눈이 나이가 든 사람에 비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과 욕구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볼 시간이나 여유가 없습니다. 육체의 욕구만 솟구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음을 다 지나보낸 전도자는, 젊을 때에,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 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헛된 인생을 살았구나!’ 탄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젊어서부터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알고, 삶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지혜자의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정신적인 위기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인 현대 사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21세기가 된 한국 사회는 전근대주의부터 근대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서구에서 백년, 이백년, 삼백년에 걸쳐 지나온 시대를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근대주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사고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나는 생각하는 주체자이며 나와 너는 다릅니다. 나와 남을 이분법적으로, 객관적으로 끊임없이 구분하면서 분별하는 능력이 근대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근대주의는 뉴턴의 과학주의와 결합되면서 산업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은 많은 공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점들을 낳았습니다. 바로 우주는 냉정하고 기계적으로 흘러간다는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관을 가지면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 연약함에 쉽게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과학주의는 고립감과 무력감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근대주의를 탈출하겠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삶의 다양한 세계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삶의 가치관을 인정하다보니 다양성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문제는 사람들의 생각이 파편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진정한 믿음, 진정한 소망, 진정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진정한 진리가 과연 존재할까?’ 하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터전 위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이 너무나 황폐해졌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치유와 고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이 시대는 회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사람들 사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질병들을 살펴보면, 환경과 위생의 결함, 신체적 기능의 결핍이 근본 원인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진단하려는 사람들은 근원적인 원인이 영적인 데 있다고, 정신적인 측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에이치 로렌스(D. H. Lawrence)가 쓴 ‘치유’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래의 시를 천천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 부분으로 조립된 기계가 아니라네
내가 아픈 것은 기계가 잘못 작동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
내가 아픈 것은 영혼의 깊은 상처,
저 깊은 정서적인 자아에 입은 상처 때문이네
영혼의 상처는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하고
오직 시간만이 해결할 문제
오랜 참음, 그리고 어려운 뉘우침, 길고도 어려운 뉘우침,
내 삶의 잘못을 깨닫고,
똑같은 실수의 끝없는 반복에서 벗어나야 하리
인류 전체는 성화를 위해 이 길을 택했네

이것이 정신적인 위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인 고통입니다. 오래 참아야 하고 길고도 어려운 뉘우침을 해야 하는 것. 그런데 누구 앞에서 뉘우침을 해야 하는지가 빠져 있습니다. 어디에서 치유를 받을 것인지 그 장소와 대상 없이 그저 앓고만 있습니다.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이러한 앓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섯 번에 걸쳐 전도서가 갖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인 질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도자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많습니다. 생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11장까지 왔습니다. 쳇바퀴 돌듯 돌다가 어느 순간 그것마저 멈추어 버리는, 참으로 헛되고 헛된 것이 인생 본연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그가 결론 부분에 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도서 12:1∼2)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뭐가 어두워집니까? 내 귀가 어두워지고, 내 눈이 침침해집니다. 내 감각이 무뎌집니다. 즉 이 말은, 내 인생이 더 늙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는 무슨 의미입니까?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겨울이 우기입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진 다음에 구름이 다시 모여 들면, 본격적인 폭풍우가 밀어닥칠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름이 햇볕을 가리듯 노년이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가리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가르치는 인생을 살아가는 법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나를 만드신 그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호흡을 하고, 내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때, 내 발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인생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허무주의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허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의 허무를 꿰뚫고,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며 소중히 받아들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하고 헛된 것이니 ‘빨리 죽자!’ 탄식하며 인생을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보이고 들리고 손과 발이 움직일 때 내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고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전도자는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하면서 맨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3∼14)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를 심판하시고, 우리의 마지막을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는데 너는 세상에서 멋지게 살았느냐? 내가 네게 준 생명을 즐거워하며 기쁘게 살았느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젊을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일주일만 젊었으면….’ 이것은 헛된 생각 아닙니까? 어떻게 일주일을 젊을 수가 있습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더 늙게 마련입니다. 결국 지금 이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지금,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깨닫고, 사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을 기쁨과 감사로 온전히 누리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선물입니다. 전도자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삶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악에서부터 떠나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철학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에 철학을 뛰어넘어 신앙의 본분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철학과 종교의 차이가 뭐라고 이야기했었습니까? 철학은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진 계시 종교는 듣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에 관해 인간이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은 철학이고,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신앙입니다. 전도자는 그동안 철학자로서 쉬지 않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에 신앙인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수많은 질문을 했다. 내가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항의했다. 인생이 헛되고 헛된 것을 내가 보았다. 그러니 더 이상 이런 질문은 그만해라.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해라.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기쁨으로, 감사와 즐거움으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이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불만, 미움, 탄식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살아있다는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랑할 줄 아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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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2: 1 ~ 14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3년에 서울시에서 사람들의 사망 원인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10대부터 30대까지는 자살이 가장 많았습니다. 10대 사망자 중 35.1%, 20대 사망자 중 51.6%, 30대 사망자 중 39.7%가 자살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40대 이상부터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알려진 암이 사망 원인 1위였습니다.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이 참 마음 아픕니다. 생명으로 충만한 시절이 10대부터 30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시절에 삶의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고 싶지 않다는 자기 선언, 즉 자살로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자살은 절망이 극한에 도달한 행위입니다. 일찍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살은, 삶의 무의미성에 대한 일종의 항복입니다. 자발성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자기 선언이며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응답하고 반응할 만한 가치 있는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합니다. 또 다양한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색맹’이라고 말합니다. 컴퓨터를 잘 못하는 것을 두고 ‘컴맹’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맹’은 망할 망(亡)자 밑에 눈 목(目)자를 씁니다. 한마디로 어둡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의미맹’이 늘고 있습니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또는 ‘자맹’,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가 무언지, 내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무언지, 인생에 왜 공허가 생기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의미맹이 되고 자맹이 됩니다.
영적인 위기가 무엇일까요?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동기부여가 되지 않습니다. 동기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것은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근본적으로 내 속에 삶의 근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삶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삶의 이유와 목표를 알게 됩니다. 그래야 생명이 약동하기 시작합니다.

전도자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전도자는 우리에게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나이가 들면 창조주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우리가 제일 먼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젊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인생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늙는다는 것은 내 세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내 세계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3절에서 6절까지는 젊음이 지닌 축복들이 사라지는 것을 하나하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곤고한 날의 풍경입니다. 아름답게 떠오르던 태양이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는 때, 그런 때가 다가옴을 경험하는 전도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꽤 종교적으로 들립니다. 왜 나이가 들면 저절로 종교적이 되는 걸까요? 인생이 끝나고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삶의 정체성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것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전도자는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의 때가 어떤 때입니까? 왕성한 성취와 업적을 세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인생의 모든 것을 전력투구하는 때입니다. 그때는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습니다.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인생에는 위험이 많아집니다. 청년의 때가 가지는 위험은 무엇일까요? 바깥 세계는 잘 보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눈이 나이가 든 사람에 비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과 욕구만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볼 시간이나 여유가 없습니다. 육체의 욕구만 솟구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음을 다 지나보낸 전도자는, 젊을 때에,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 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헛된 인생을 살았구나!’ 탄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젊어서부터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알고, 삶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즐거워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지혜자의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정신적인 위기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인 현대 사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21세기가 된 한국 사회는 전근대주의부터 근대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서구에서 백년, 이백년, 삼백년에 걸쳐 지나온 시대를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근대주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사고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나는 생각하는 주체자이며 나와 너는 다릅니다. 나와 남을 이분법적으로, 객관적으로 끊임없이 구분하면서 분별하는 능력이 근대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근대주의는 뉴턴의 과학주의와 결합되면서 산업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은 많은 공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점들을 낳았습니다. 바로 우주는 냉정하고 기계적으로 흘러간다는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관을 가지면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 연약함에 쉽게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과학주의는 고립감과 무력감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근대주의를 탈출하겠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삶의 다양한 세계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삶의 가치관을 인정하다보니 다양성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문제는 사람들의 생각이 파편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진정한 믿음, 진정한 소망, 진정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진정한 진리가 과연 존재할까?’ 하는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터전 위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이 너무나 황폐해졌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치유와 고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이 시대는 회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사람들 사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질병들을 살펴보면, 환경과 위생의 결함, 신체적 기능의 결핍이 근본 원인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진단하려는 사람들은 근원적인 원인이 영적인 데 있다고, 정신적인 측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에이치 로렌스(D. H. Lawrence)가 쓴 ‘치유’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래의 시를 천천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 부분으로 조립된 기계가 아니라네
내가 아픈 것은 기계가 잘못 작동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
내가 아픈 것은 영혼의 깊은 상처,
저 깊은 정서적인 자아에 입은 상처 때문이네
영혼의 상처는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하고
오직 시간만이 해결할 문제
오랜 참음, 그리고 어려운 뉘우침, 길고도 어려운 뉘우침,
내 삶의 잘못을 깨닫고,
똑같은 실수의 끝없는 반복에서 벗어나야 하리
인류 전체는 성화를 위해 이 길을 택했네

이것이 정신적인 위기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인 고통입니다. 오래 참아야 하고 길고도 어려운 뉘우침을 해야 하는 것. 그런데 누구 앞에서 뉘우침을 해야 하는지가 빠져 있습니다. 어디에서 치유를 받을 것인지 그 장소와 대상 없이 그저 앓고만 있습니다.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이러한 앓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섯 번에 걸쳐 전도서가 갖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인 질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도자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많습니다. 생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11장까지 왔습니다. 쳇바퀴 돌듯 돌다가 어느 순간 그것마저 멈추어 버리는, 참으로 헛되고 헛된 것이 인생 본연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그가 결론 부분에 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도서 12:1∼2)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뭐가 어두워집니까? 내 귀가 어두워지고, 내 눈이 침침해집니다. 내 감각이 무뎌집니다. 즉 이 말은, 내 인생이 더 늙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는 무슨 의미입니까?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겨울이 우기입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진 다음에 구름이 다시 모여 들면, 본격적인 폭풍우가 밀어닥칠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름이 햇볕을 가리듯 노년이 따뜻한 생명의 기운을 가리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가르치는 인생을 살아가는 법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나를 만드신 그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호흡을 하고, 내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때, 내 발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인생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허무주의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허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의 허무를 꿰뚫고,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며 소중히 받아들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하고 헛된 것이니 ‘빨리 죽자!’ 탄식하며 인생을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보이고 들리고 손과 발이 움직일 때 내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고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전도자는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하면서 맨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3∼14)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를 심판하시고, 우리의 마지막을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는데 너는 세상에서 멋지게 살았느냐? 내가 네게 준 생명을 즐거워하며 기쁘게 살았느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젊을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일주일만 젊었으면….’ 이것은 헛된 생각 아닙니까? 어떻게 일주일을 젊을 수가 있습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더 늙게 마련입니다. 결국 지금 이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지금,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깨닫고, 사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을 기쁨과 감사로 온전히 누리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선물입니다. 전도자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삶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악에서부터 떠나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철학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에 철학을 뛰어넘어 신앙의 본분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철학과 종교의 차이가 뭐라고 이야기했었습니까? 철학은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진 계시 종교는 듣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에 관해 인간이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은 철학이고,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 신앙입니다. 전도자는 그동안 철학자로서 쉬지 않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에 신앙인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수많은 질문을 했다. 내가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항의했다. 인생이 헛되고 헛된 것을 내가 보았다. 그러니 더 이상 이런 질문은 그만해라.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해라.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기쁨으로, 감사와 즐거움으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이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불만, 미움, 탄식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살아있다는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랑할 줄 아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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