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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인생 수업』을 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운동을 불러일으킨 분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랑 없이 여행하지 마라.” 삶을 여행하는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난 당신이 자신의 삶과 사랑을 놓치게 될까 봐 걱정이야. 사랑만큼은 절대 놓치지 마. 삶이라는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해야만 해. 누구를,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당신이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지. 그걸 놓치지 마. 삶이라는 이 여행을 사랑 없이는 하지 마.”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며 인생을 여행하고 있습니까? 삶에 체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랑입니다. 고통이 우리를 쉽게 절망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랑 없음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아는 이가 없다고 여깁니다. 사랑할 사람도 없고 스스로 사랑 받을 존재도 아니라고 여기며 외로움 속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동시에 고통과 고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 자체이면서 고난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것도 사랑 때문에 고난당하셨습니다. 고난 받고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연 어떤 종교가 그토록 고난을 자세히 서술할까요? 자기 교주가 고난 속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 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의 길을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곳곳에 그 내용이 서술돼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중 하나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처절히 간구하며 저항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피와 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너는 33살에 죽어라. 청년 때 인생을 마감해라.”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비참한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라.”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 십자가형은 사라졌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죽임에 내몬다면 세계 각국 인권 단체들이 인권모독이라며 맹비난을 퍼부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해 죽으라고 합니다. 과연 어느 누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33세 청년의 때에 십자가에 달려서, 그것도 남의 죄로 인해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면, 그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해 아래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앞에서 왜 그렇게 처절하게 기도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보통 사람들처럼 고통의 과정을 경험하셨습니다. 저항과 분노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인간적인 물음도 반복하셨습니다. “왜 저입니까? 왜 제가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이 잔이 너무 씁니다. 받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십자가에 저항하며 고통의 길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어떤 심적 고통을 느끼셨는가는 33절에 잘 기록돼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마가복음 14:33)
심히 놀라며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영혼과 마음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심히 고민되어 죽을 정도까지 되셨다고 합니다. 육체적인 죽음 이전에 마음에서부터 이미 죽음을 경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부정하며 분노하며 저항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냐며 따지지 않았겠습니까? 왜 이런 고난의 길에 들어서야 하는지 질문하고 또 질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절규하며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셋, 곧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동행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도 기도의 동지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곁에서 함께 기도해 주길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복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도의 동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명백히 내가 해야 되는 것이지만,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또한 소중한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 말씀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해서 깊은 잠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이 탄식하십니다. 37절입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가복음 14:37)
고난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친구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저항과 체념의 기도가 수용의 기도로 변화됩니다.
우리의 인생과 함께 갈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같이 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고난입니다. 특히 죽음을 향하고 있는 고난은 어느 누구도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고난은 인간을 홀로 있게 만듭니다. 아니, 홀로 인생의 고통을 지고 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내 고난을 함께 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도,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나눠 질 수 없습니다. 내 고난은 오롯이 나 홀로 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인간을 외롭게 합니다. 기댈 곳을 찾지만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고난에 점차 복종하게 되고, 고난으로 인해 절망하게 되며, 체념을 경험합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도 접어버립니다. 그래서 우울감이 찾아듭니다. 패배주의적 사고도 들어섭니다.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슬퍼지며 표정도 사라집니다. 그야말로 체념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보지 않습니까? 거울을 보며 내 얼굴과 눈동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혹시 마음의 분노가 얼굴에 서려 있지는 않은지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무표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슬픈 얼굴이나 분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낫습니다. 무표정은 체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만약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무표정하다면, 그것은 내가 체념 상태에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죽음 앞에서 체념하셨을까요? 체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저항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싫습니다.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까? 내가 꼭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신데 이 일도 해결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36절 전반부를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마가복음 14:36 중)
얼마나 간곡한 간구입니까? 생명을 건 간절한 호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위기가 다가옵니다. 모든 것을 걸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하지만 그때도 우리는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간혹 점잖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점잖게 기도하고, 교양 있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자녀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얼마나 우리 마음이 흐뭇합니까? 하나님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다리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소한 기도 제목을 듣기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또한 우리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지 않았는데 뭔가 이루어지면 마치 그것이 내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자 응답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영혼의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도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기도도 다 받으십니다. 저항의 기도, 분노의 기도, 아픔의 기도도 다 들어주십니다. 불평의 기도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모든 문제를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기도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36절 후반부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중)
참 놀랍습니다. 그 전까지는 체념의 저항이었습니다. 저항하면서도 체념했습니다. 항의하면서도 체념합니다. 불평하면서도 체념합니다. 그런데 ‘그러나’에서 기도가 바뀝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체념의 신앙에서 수용의 신앙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이제 죽음조차도, 어떤 고난도 예수님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체념이 아닌 수용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포기가 아니라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수용의 신앙을 얻게 합니다.
1945년 독일 나치 정권의 유대인 수용소 벽에서 발견된 낙서입니다.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나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I believe in God, even when God is silent.)
아마 이 유대인은 끊임없이 체념 상태에 놓였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인생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최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는 게 최악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체념하시는 것 같았으나 십자가를 수용하셨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고통의 연속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고통을 받게 돼 있습니다. 우리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고통도 뒤따라옵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사이에 고통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체념에서 수용으로 나아가셨을까요? 어떻게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을 뚫고 나가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가장 원초적인 신뢰와 사랑의 언어로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아직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더 열악하게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치유 받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분 안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마음에 새 용기가 채워지고 있음을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체념이란 아주 수동적입니다.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패배감도 느끼게 합니다. 그로 인해 자존감도 사라집니다. 열정도 없어집니다. 의욕도 상실됩니다. 숨고 싶고 세상에서 등지고 싶은 마음이 체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마음을 부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용’입니다. 주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용기 말입니다.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신뢰와 사랑의 고백입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신앙의 체념과 수용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라지 뭐. 하나님 마음대로 여태 내 인생도 이끌지 않았어?’라고 하나님을 탓하는 건 체념입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 상처가 제일 아픈 법입니다. 누구나 자기 문제가 제일 크고 해결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최악의 고난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이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새 생명을 얻으셨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역시 체념적 신앙에서 부활 신앙 곧 수용의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성적 신앙인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데 부활은 못 믿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위대한 선생이나 지혜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보혈 속에 구원의 능력이 있고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체념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영혼의 기쁨과 감사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체념은 현재를 포기하게 만들고 미래로 나아갈 힘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체념과 수용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현실만을 들여다보면 체념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수용의 신앙을 얻게 됩니다. 상황만 보면 체념하게 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하고 나아가면 수용의 신앙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억누르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며 체념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내가 호흡하며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체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거두게 하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보다 더 큰 고난을 받으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처참한 자리까지 내려가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난보다 우리의 고난의 낫지 않습니까? 그분보다 아프고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 내 현실을 직시하고 주님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동행해 주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며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며,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14: 32 ~ 38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사랑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인생 수업』을 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운동을 불러일으킨 분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랑 없이 여행하지 마라.” 삶을 여행하는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난 당신이 자신의 삶과 사랑을 놓치게 될까 봐 걱정이야. 사랑만큼은 절대 놓치지 마. 삶이라는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해야만 해. 누구를,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당신이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지. 그걸 놓치지 마. 삶이라는 이 여행을 사랑 없이는 하지 마.”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며 인생을 여행하고 있습니까? 삶에 체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랑입니다. 고통이 우리를 쉽게 절망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랑 없음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아는 이가 없다고 여깁니다. 사랑할 사람도 없고 스스로 사랑 받을 존재도 아니라고 여기며 외로움 속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동시에 고통과 고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 자체이면서 고난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것도 사랑 때문에 고난당하셨습니다. 고난 받고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연 어떤 종교가 그토록 고난을 자세히 서술할까요? 자기 교주가 고난 속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 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의 길을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곳곳에 그 내용이 서술돼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중 하나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처절히 간구하며 저항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피와 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너는 33살에 죽어라. 청년 때 인생을 마감해라.”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비참한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라.”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 십자가형은 사라졌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죽임에 내몬다면 세계 각국 인권 단체들이 인권모독이라며 맹비난을 퍼부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해 죽으라고 합니다. 과연 어느 누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33세 청년의 때에 십자가에 달려서, 그것도 남의 죄로 인해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면, 그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해 아래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앞에서 왜 그렇게 처절하게 기도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보통 사람들처럼 고통의 과정을 경험하셨습니다. 저항과 분노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인간적인 물음도 반복하셨습니다. “왜 저입니까? 왜 제가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이 잔이 너무 씁니다. 받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십자가에 저항하며 고통의 길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어떤 심적 고통을 느끼셨는가는 33절에 잘 기록돼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마가복음 14:33)
심히 놀라며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영혼과 마음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심히 고민되어 죽을 정도까지 되셨다고 합니다. 육체적인 죽음 이전에 마음에서부터 이미 죽음을 경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부정하며 분노하며 저항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냐며 따지지 않았겠습니까? 왜 이런 고난의 길에 들어서야 하는지 질문하고 또 질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절규하며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셋, 곧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동행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도 기도의 동지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곁에서 함께 기도해 주길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복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도의 동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명백히 내가 해야 되는 것이지만,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또한 소중한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 말씀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해서 깊은 잠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이 탄식하십니다. 37절입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가복음 14:37)
고난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친구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저항과 체념의 기도가 수용의 기도로 변화됩니다.
우리의 인생과 함께 갈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같이 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고난입니다. 특히 죽음을 향하고 있는 고난은 어느 누구도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고난은 인간을 홀로 있게 만듭니다. 아니, 홀로 인생의 고통을 지고 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내 고난을 함께 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도,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나눠 질 수 없습니다. 내 고난은 오롯이 나 홀로 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인간을 외롭게 합니다. 기댈 곳을 찾지만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고난에 점차 복종하게 되고, 고난으로 인해 절망하게 되며, 체념을 경험합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도 접어버립니다. 그래서 우울감이 찾아듭니다. 패배주의적 사고도 들어섭니다.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슬퍼지며 표정도 사라집니다. 그야말로 체념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보지 않습니까? 거울을 보며 내 얼굴과 눈동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혹시 마음의 분노가 얼굴에 서려 있지는 않은지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무표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슬픈 얼굴이나 분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낫습니다. 무표정은 체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만약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무표정하다면, 그것은 내가 체념 상태에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죽음 앞에서 체념하셨을까요? 체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저항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싫습니다.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까? 내가 꼭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신데 이 일도 해결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36절 전반부를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마가복음 14:36 중)
얼마나 간곡한 간구입니까? 생명을 건 간절한 호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위기가 다가옵니다. 모든 것을 걸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하지만 그때도 우리는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간혹 점잖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점잖게 기도하고, 교양 있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자녀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얼마나 우리 마음이 흐뭇합니까? 하나님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다리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소한 기도 제목을 듣기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또한 우리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지 않았는데 뭔가 이루어지면 마치 그것이 내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자 응답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영혼의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도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기도도 다 받으십니다. 저항의 기도, 분노의 기도, 아픔의 기도도 다 들어주십니다. 불평의 기도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내 모든 문제를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기도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36절 후반부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중)
참 놀랍습니다. 그 전까지는 체념의 저항이었습니다. 저항하면서도 체념했습니다. 항의하면서도 체념합니다. 불평하면서도 체념합니다. 그런데 ‘그러나’에서 기도가 바뀝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체념의 신앙에서 수용의 신앙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이제 죽음조차도, 어떤 고난도 예수님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체념이 아닌 수용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포기가 아니라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수용의 신앙을 얻게 합니다.
1945년 독일 나치 정권의 유대인 수용소 벽에서 발견된 낙서입니다.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나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I believe in God, even when God is silent.)
아마 이 유대인은 끊임없이 체념 상태에 놓였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인생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최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는 게 최악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체념하시는 것 같았으나 십자가를 수용하셨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고통의 연속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고통을 받게 돼 있습니다. 우리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고통도 뒤따라옵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사이에 고통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체념에서 수용으로 나아가셨을까요? 어떻게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을 뚫고 나가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가장 원초적인 신뢰와 사랑의 언어로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아직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더 열악하게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치유 받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분 안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마음에 새 용기가 채워지고 있음을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체념이란 아주 수동적입니다.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패배감도 느끼게 합니다. 그로 인해 자존감도 사라집니다. 열정도 없어집니다. 의욕도 상실됩니다. 숨고 싶고 세상에서 등지고 싶은 마음이 체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마음을 부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용’입니다. 주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용기 말입니다.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신뢰와 사랑의 고백입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신앙의 체념과 수용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라지 뭐. 하나님 마음대로 여태 내 인생도 이끌지 않았어?’라고 하나님을 탓하는 건 체념입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 상처가 제일 아픈 법입니다. 누구나 자기 문제가 제일 크고 해결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최악의 고난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이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새 생명을 얻으셨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역시 체념적 신앙에서 부활 신앙 곧 수용의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성적 신앙인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데 부활은 못 믿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위대한 선생이나 지혜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보혈 속에 구원의 능력이 있고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체념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영혼의 기쁨과 감사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체념은 현재를 포기하게 만들고 미래로 나아갈 힘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체념과 수용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현실만을 들여다보면 체념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수용의 신앙을 얻게 됩니다. 상황만 보면 체념하게 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하고 나아가면 수용의 신앙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억누르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며 체념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내가 호흡하며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체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거두게 하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보다 더 큰 고난을 받으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처참한 자리까지 내려가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난보다 우리의 고난의 낫지 않습니까? 그분보다 아프고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 내 현실을 직시하고 주님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동행해 주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며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며,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7월 3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체념의 영, 수용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78, 28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막 14:32-38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인생수업이라고 하는 책을 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당신이 자신의 삶과 사랑을 놓치게 될까봐 걱정이야. 사랑만큼은 절대 놓치지 마. 삶이라는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해야만 해. 누구를?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하는 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당신이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지. 그걸 놓치지 마. 삶이라는 이 여행을 사랑 없이는 하지 마.”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사랑을 얼마나 갖고 여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을 체념하게 하지 않고 용기를 다시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은 바로 사랑 뿐 입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서른세 살의 나이, 네 인생을 마감하라.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으라. 그것도 네 죄가 아니라 남의 죄 때문에 네가 죽으라. 여러분 이 생각을 갖고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왜 그렇게 이것을 피하고자 하셨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동지들을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은 잠들어 버렸고,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많이 아파해야 했습니다(37절). 인생을 살면서 함께 할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고난입니다. 특별히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고난이란 결코 어느 누구도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그 길에서 사람들은 복종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결국 ‘체념’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하나님 싫습니다! 이 잔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까? 내가 꼭 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체념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반전을 이루어 내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전까지는 체념의 저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체념의 신앙에서 수용의 신앙으로 바꿔놓으셨습니다. 포기가 아니라 가슴으로 용납하셨습니다.
유대인 수용소 지하실 벽에서 발견된 낙서가 있습니다.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나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I believe in God, even when God is silent.).’
예수님은 어떻게 체념적인 상황 속에서 자발적 참여로 그것을 뚫고 나갈 수가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기도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보여드렸습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하는 결단의 용기였습니다.
체념과 수용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현실만을 들여다보면 체념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수용의 신앙을 갖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라 말하고 있습니다. ‘Never. never give up.’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내 현실을 직시하고 주님과 함께 꿰뚫어 나가겠습니다. 주님 동행해주세요.’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나누기
1. 내 인생에서 내가 ‘체념’해 버린 것을 ‘내려놓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2.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수용’의 경험을 하였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3. 예수님께서 체념의 상황 속에서 제자들을 기도의 동역자로 요청하신 것처럼, 이 한 주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수용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지금 당면하고 있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오니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신뢰합니다. 우리의 마지막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 사랑합니다. 다시 일어서는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