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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집과 잔칫집 – 전도서의 질문 4 –

전도서 7: 1 ~ 4

김지철 목사

2015.03.15

우리는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삽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우리는 매일 그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작은 죽음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본래 죽음이란 아무도 경험한 적이 없는 것 아닙니까? 죽음이 찾아온 순간 그 누구도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리셋(reset)이 안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이란 왕복 티켓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작은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매일 잠을 잡니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내일 아침에 눈을 못 뜨는 건 아닌가? 그냥 이 밤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날 때 기쁘고 감사한 것은 내 인생이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깊은 잠을 통해 작은 죽음을 경험합니다.
또 하나의 작은 죽음이 있습니다. 바로 질병입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독감을 앓으면서 ‘이제 독감 하나 견뎌내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늙어가는구나. 면역력이 떨어졌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무리 없이 회복이 될 때는 문제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성 질병이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듣게 되면, 우리는 또 하나의 작은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을 설계할 때, ‘내 인생에 이만큼은 질병의 기간이 있을 거야’하며 미리 계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질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생에 포함시키지 않고 인생의 계획을 짭니다. 그래서 뜻대로, 계산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다고 절감하는 순간에 질병이 있습니다. 특히 병이 깊어질수록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는 슬픔,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주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겼던 죽음이 바로 내 옆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 게시판에서 80, 90살이 넘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란의 글들을 보게 되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저분들을 받으시고 동행하옵소서.” 그런데 40, 50대 때로는 20, 30대 청년들의 부고 소식이 들리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 아픈 마음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무엇보다 저들의 가족에게 특별한 위로와 은혜, 특별한 소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마지막을 알아야 지금의 소중함을 압니다.

죽음이란 늘 우리를 아프게 하고 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러한 우리의 가치관을 뒤집는 말씀이 나옵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이 말은 사실, 욥이 고통 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이것은 허무를 경험하고 있는 전도자의 표현입니다. 도대체 그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전도서 7:2)

인생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혼인집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는 잔치 자리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을 기대하는 자리이기에 기쁜 곳이고,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초상집은 어떤 곳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자리입니다. 상실의 아픔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한 생명이 사라지는 자리입니다. 그곳에는 울음이 있습니다. 슬픔과 애통함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오늘 전도자는 일곱 가지 사건을 비교급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뜻일 것입니다. 웃는 것이 복이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은 더 복이다. 출생이 복이다. 그러나 죽음은 더 복이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온 가치관을 뒤집는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삶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삶을 누리려면,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받아들이려면, 삶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인생에 마지막이 있음을 기억하며 삶을 바라볼 줄 알아야 삶을 복으로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결코 죽음을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예찬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전도자는 이미 삶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3:13)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수고함으로 일하는 것,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주신 축복이고 선물인 것을 전도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가 말하는 이 삶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방식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왜 그는 말씀을 뒤집어 놓듯이 우리를 가르치려는 것일까요?

끝에서 바라보면 달라 보입니다.

그의 의도는 삶을 한 번 뒤집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삶을 끝에서부터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삶을 뒤집어서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나를 보지 말고, 저 끝의 자리에서 나를 보면 이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뒤집어 보는 것은 우리 인생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 키가 165cm입니다. 10cm만 더 커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던 선반 위가 10cm만 더 크면 보입니다. 10cm로도 바라보는 것이 달라지는데 남산에 올라가면 어떻습니까? 남산에 올라 가 보셨습니까?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서울이 한 눈에 보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자동차는 점 하나의 크기로 지나갑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뒤로 물러나서 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만족하거나 불평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나의 전체인 줄 알고 거기에 연연합니다. 전도자는 그것을 바꿔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또 추락했다고 해도 늘 밑바닥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 때로 엇박자로 달려드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성숙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미성숙함을 깨닫습니다. 반면 목이 뻣뻣한 사람들은 자신은 완전하며, 자신의 판단은 옳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면 여유가 없어집니다. 내가 부족하고 미성숙하며,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배움의 마음을 갖게 되며 성숙의 길을 향해 나가게 됩니다.
사람이 ‘온전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온전하기 때문에 온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온전함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게 지식이 있지. 이만하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거지’라고 스스로 생각할 때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양면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힘 중 하나가 복원력입니다. 회복력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기 몸살을 앓아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암에 걸렸다고 하면 왜 겁을 먹습니까? 암에서 회복된 사람이 많지 않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친구 중에 암 때문에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회복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이 회복력을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모든 질병과 모든 죽음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회복력 안에 인생을 뒤집어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문과학, 인문사회, 자연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창의력이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현상이나 사물을 뒤집어 볼 수 있을 때 창의력이 나옵니다. 뒤집어 볼 줄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또 하늘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뒤집어서 네 인생을 돌아볼 줄 아는가!”하고 말입니다. 높이 올라갔을 때 낮은 자의 자리에 있던 나를 기억하는가, 낮은 자리에 있을 때 내 인생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사실을 기대하며 살고 있는가 하고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인생에는 양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웃음이 넘칠 때, 울음을 잘 모릅니다. 행복할 때는 불행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울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웃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행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존엄하고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인지를 알고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잘나갈 때도 겸손할 줄 알고, 못 나갈 때도 희망을 품는 인생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인 김소엽은 ‘죽음의 찬가’라는 글에서 삶과 죽음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인생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 /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죽어간다는 것을 / 우리는 왜 진즉 몰랐을까? / 하루를 잘 사는 길이 잘 죽는 길이요 / 순간순간을 잘 사는 길이 인생을 잘 사는 길인 것을.” 죽음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사람이 삶을 예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잔칫집에 가서 국수 한 그릇 먹는 것을 더 좋아합니까? 아니면 초상집에 가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것에 더 마음을 기울입니까?
오늘날의 위기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중 하나가 공감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행복에는 기뻐하고 박수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불행에 같이 아파하는 능력은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현상도 비슷합니다. 극단적인 편 가르기가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편 가름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내 삶을 호시탐탐 노리는 적군으로 몰아갑니다. 그들을 대할 때 언어가 사나워지고, 행동은 잔인해집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무너뜨려야 내가 살아갈 것 같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다보니 배려심이 사라집니다. 넉넉함이 사라집니다. 남을 향한 따뜻함이 사라집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울음이 웃음보다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이유는 인생의 고통과 슬픔, 아픔을 헤아리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생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배려의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감사할 수 있고, 상대방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종말에서부터 오늘을 다시 볼 줄 알아야 인생이 감사로 가득 찰 수 있다고 말입니다. 모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이 흘러가는 시간을 ‘다가오는’ 시간으로 바라봅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그저 아쉬워하면서 살지 말고,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예배드리러 올 때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주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그냥 한 시간 드리고 나면 일주일 동안의 의무는 다했다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아마 기대하는 마음,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자 오셨을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기대는 삶의 윤활유와 같습니다. 우리 삶을 반짝반짝 빛나게 합니다. 삶에 대한 기대가 내 시간을 생동감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죽음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전도자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죽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죽음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부활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억하며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기쁨이 있는 것일까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난 받으시는 이유를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 (요한복음 10:17∼18)

예수님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자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겠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자리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음 앞에 선 우리를 위로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며 오늘을 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속에 앙금처럼 남아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앞에 토해내십시오. 특별히 남자들에게 운다는 것은 오랫동안 아주 창피하고 못난 일로 여겨졌습니다. 실패자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어 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억누르는 것이 있으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있으면 토해내야 합니다. 우는 것이 웃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음도 주셨지만 울음도 주셨습니다. 오히려 울음이 더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을 보시며 우셨고, 죽음 앞에 떠는 사람을 보면서 우셨습니다. 나는 내 실존 앞에서, 내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울음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가 됩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토록 많은 미움과 분노가 있는 것일까요? 울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는 순간, 미움과 분노와 탄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우는 것, 이것이 치료제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기억하며, 죽음이 가까이 올 지라도 지금 살아있음에 기뻐하십시오. 죽게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감사하게 받으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을 주신 것, 직장을 나가게 해 주신 것, 믿음의 동지들 주신 것 모두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주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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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 1 ~ 4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우리는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삽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우리는 매일 그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장이 뛰고, 호흡을 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작은 죽음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본래 죽음이란 아무도 경험한 적이 없는 것 아닙니까? 죽음이 찾아온 순간 그 누구도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리셋(reset)이 안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이란 왕복 티켓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으면서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작은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매일 잠을 잡니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내일 아침에 눈을 못 뜨는 건 아닌가? 그냥 이 밤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날 때 기쁘고 감사한 것은 내 인생이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깊은 잠을 통해 작은 죽음을 경험합니다.
또 하나의 작은 죽음이 있습니다. 바로 질병입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독감을 앓으면서 ‘이제 독감 하나 견뎌내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늙어가는구나. 면역력이 떨어졌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무리 없이 회복이 될 때는 문제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성 질병이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듣게 되면, 우리는 또 하나의 작은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을 설계할 때, ‘내 인생에 이만큼은 질병의 기간이 있을 거야’하며 미리 계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질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생에 포함시키지 않고 인생의 계획을 짭니다. 그래서 뜻대로, 계산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다고 절감하는 순간에 질병이 있습니다. 특히 병이 깊어질수록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는 슬픔,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주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겼던 죽음이 바로 내 옆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 게시판에서 80, 90살이 넘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란의 글들을 보게 되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저분들을 받으시고 동행하옵소서.” 그런데 40, 50대 때로는 20, 30대 청년들의 부고 소식이 들리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 아픈 마음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무엇보다 저들의 가족에게 특별한 위로와 은혜, 특별한 소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마지막을 알아야 지금의 소중함을 압니다.

죽음이란 늘 우리를 아프게 하고 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러한 우리의 가치관을 뒤집는 말씀이 나옵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이 말은 사실, 욥이 고통 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이것은 허무를 경험하고 있는 전도자의 표현입니다. 도대체 그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전도서 7:2)

인생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혼인집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는 잔치 자리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을 기대하는 자리이기에 기쁜 곳이고,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초상집은 어떤 곳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자리입니다. 상실의 아픔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한 생명이 사라지는 자리입니다. 그곳에는 울음이 있습니다. 슬픔과 애통함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오늘 전도자는 일곱 가지 사건을 비교급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뜻일 것입니다. 웃는 것이 복이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은 더 복이다. 출생이 복이다. 그러나 죽음은 더 복이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온 가치관을 뒤집는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삶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삶을 누리려면,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받아들이려면, 삶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인생에 마지막이 있음을 기억하며 삶을 바라볼 줄 알아야 삶을 복으로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결코 죽음을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예찬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전도자는 이미 삶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3:13)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수고함으로 일하는 것,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주신 축복이고 선물인 것을 전도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가 말하는 이 삶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방식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왜 그는 말씀을 뒤집어 놓듯이 우리를 가르치려는 것일까요?

끝에서 바라보면 달라 보입니다.

그의 의도는 삶을 한 번 뒤집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삶을 끝에서부터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삶을 뒤집어서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나를 보지 말고, 저 끝의 자리에서 나를 보면 이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뒤집어 보는 것은 우리 인생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 키가 165cm입니다. 10cm만 더 커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던 선반 위가 10cm만 더 크면 보입니다. 10cm로도 바라보는 것이 달라지는데 남산에 올라가면 어떻습니까? 남산에 올라 가 보셨습니까?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서울이 한 눈에 보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자동차는 점 하나의 크기로 지나갑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뒤로 물러나서 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만족하거나 불평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나의 전체인 줄 알고 거기에 연연합니다. 전도자는 그것을 바꿔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또 추락했다고 해도 늘 밑바닥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 때로 엇박자로 달려드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성숙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미성숙함을 깨닫습니다. 반면 목이 뻣뻣한 사람들은 자신은 완전하며, 자신의 판단은 옳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면 여유가 없어집니다. 내가 부족하고 미성숙하며,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배움의 마음을 갖게 되며 성숙의 길을 향해 나가게 됩니다.
사람이 ‘온전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온전하기 때문에 온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온전함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게 지식이 있지. 이만하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거지’라고 스스로 생각할 때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양면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힘 중 하나가 복원력입니다. 회복력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기 몸살을 앓아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회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암에 걸렸다고 하면 왜 겁을 먹습니까? 암에서 회복된 사람이 많지 않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친구 중에 암 때문에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회복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이 회복력을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모든 질병과 모든 죽음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회복력 안에 인생을 뒤집어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문과학, 인문사회, 자연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창의력이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현상이나 사물을 뒤집어 볼 수 있을 때 창의력이 나옵니다. 뒤집어 볼 줄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또 하늘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뒤집어서 네 인생을 돌아볼 줄 아는가!”하고 말입니다. 높이 올라갔을 때 낮은 자의 자리에 있던 나를 기억하는가, 낮은 자리에 있을 때 내 인생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사실을 기대하며 살고 있는가 하고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인생에는 양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웃음이 넘칠 때, 울음을 잘 모릅니다. 행복할 때는 불행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울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웃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행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죽음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존엄하고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인지를 알고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잘나갈 때도 겸손할 줄 알고, 못 나갈 때도 희망을 품는 인생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인 김소엽은 ‘죽음의 찬가’라는 글에서 삶과 죽음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인생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 /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죽어간다는 것을 / 우리는 왜 진즉 몰랐을까? / 하루를 잘 사는 길이 잘 죽는 길이요 / 순간순간을 잘 사는 길이 인생을 잘 사는 길인 것을.” 죽음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사람이 삶을 예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잔칫집에 가서 국수 한 그릇 먹는 것을 더 좋아합니까? 아니면 초상집에 가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것에 더 마음을 기울입니까?
오늘날의 위기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중 하나가 공감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행복에는 기뻐하고 박수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불행에 같이 아파하는 능력은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현상도 비슷합니다. 극단적인 편 가르기가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편 가름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내 삶을 호시탐탐 노리는 적군으로 몰아갑니다. 그들을 대할 때 언어가 사나워지고, 행동은 잔인해집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무너뜨려야 내가 살아갈 것 같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다보니 배려심이 사라집니다. 넉넉함이 사라집니다. 남을 향한 따뜻함이 사라집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울음이 웃음보다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이유는 인생의 고통과 슬픔, 아픔을 헤아리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생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배려의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감사할 수 있고, 상대방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종말에서부터 오늘을 다시 볼 줄 알아야 인생이 감사로 가득 찰 수 있다고 말입니다. 모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이 흘러가는 시간을 ‘다가오는’ 시간으로 바라봅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그저 아쉬워하면서 살지 말고,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예배드리러 올 때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주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그냥 한 시간 드리고 나면 일주일 동안의 의무는 다했다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아마 기대하는 마음,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자 오셨을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기대는 삶의 윤활유와 같습니다. 우리 삶을 반짝반짝 빛나게 합니다. 삶에 대한 기대가 내 시간을 생동감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죽음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전도자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죽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죽음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부활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억하며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기쁨이 있는 것일까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난 받으시는 이유를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 (요한복음 10:17∼18)

예수님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자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겠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자리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음 앞에 선 우리를 위로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며 오늘을 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속에 앙금처럼 남아 나를 억누르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앞에 토해내십시오. 특별히 남자들에게 운다는 것은 오랫동안 아주 창피하고 못난 일로 여겨졌습니다. 실패자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어 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억누르는 것이 있으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있으면 토해내야 합니다. 우는 것이 웃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음도 주셨지만 울음도 주셨습니다. 오히려 울음이 더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을 보시며 우셨고, 죽음 앞에 떠는 사람을 보면서 우셨습니다. 나는 내 실존 앞에서, 내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울음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가 됩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토록 많은 미움과 분노가 있는 것일까요? 울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는 순간, 미움과 분노와 탄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우는 것, 이것이 치료제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기억하며, 죽음이 가까이 올 지라도 지금 살아있음에 기뻐하십시오. 죽게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감사하게 받으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을 주신 것, 직장을 나가게 해 주신 것, 믿음의 동지들 주신 것 모두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주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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