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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2016년입니다.
오늘은 기쁜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보통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합니다. 즐거운 성탄절이 되라는 뜻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슬프고 아픈 소식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1월엔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흔들리면서 대한민국은 2월에 개성공단 폐쇄를 결정합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서로간의 소통이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지난 9월에는 경주 일대에 강도 5.8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한반도 지진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의 지진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도 지진에 안전한 지역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축 시 내진 설계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생겼습니다. 요즘엔 조류독감 AI의 발생으로, 현재까지 2,500만 마리 이상의 닭과 오리가 살처분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3,000만 마리 이상 살처분 될 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환경오염이 가속화 되고 있고, 먹거리 위기까지 닥쳐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올해 가장 나쁜 사건이 있다면,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일 것입니다. 대통령의 탄핵소추가 결정되었고, 참담한 시국에 온 국민이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노선에 상관없이 정의와 공의가 상실될 때,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층 역시 그 자리에 안주하려고 하니 부정부패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과거 정치사 속에서 이념적 색깔에 상관없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위기를 경험해 왔던 것을 압니다.
더욱이 국내적 위기를 넘어 국제적으로도 나쁜 소식들이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모기를 통해 전염되는 지카바이러스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뇌가 없이 태어나는 신생아도 생겼습니다. 소두증을 앓게 되고, 뇌신경장애를 유발케 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의 어머니들이 공포에 빠졌습니다. 시리아 내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십 만, 수백 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내전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의 테러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의 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로 인해 국제적인 정치・경제적 격변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미국의 다음 정권이 트럼프 정권입니다. ‘혹시 보호무역주의를 하지 않을까? 미국이 자국 이기주의에 우선하는 정책들을 더 확대하진 않을까?’ 하는 정치・경제 전문가들의 우려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은 또 어떻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아니, 젊은 나이에도 아프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수술하고 병상에서 회복을 기다리는데, 회복이 더딘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가족 전체가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또,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앓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장래 건수가 한 해 당 250건 내외입니다. 연세가 있으셔서 부르심을 받으시는 분들도 있지만, 젊은 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예수 탄생은 이 땅에 드러난 하나님의 뒤집기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렇게 험난합니다. 언제 어디서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고,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기쁨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성탄은 정말 기쁜 소식일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이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일까?’ 오늘 말씀 중 10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누가복음 2:10)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마 눈앞에서 천사를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녹록지 않는 현실에 두려워 떨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음성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의 선언입니다. 더욱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도래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나심이 지구촌 구석구석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여러분, 세상의 법칙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법칙은 어떻게 하든 이기려고 합니다.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입니다. 강한 자가 빼앗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기려고 합니다. 약한 자들은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게 우리네 현실입니다. 심지어 그 욕망을 더욱 부추기는 게 오늘날의 실태입니다. 시장 경제라는 게 무엇입니까? 철저한 경쟁 사회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기업의 모든 직원들이 밤잠도 못 자면서 동원되고 있습니다. 기업뿐만 아니라 힘을 얻으려는 모든 곳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여야의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싸움을 합니까? 목숨을 걸면서까지 투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승리해야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삶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심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질서를 뒤바꾸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뒤집겠다는 뜻입니다. 힘 있는 자들을 향해 내려올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억눌린 자를 향해서는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다시 꿈을 꾸고 도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누가복음 2:8)
여기 목자가 나옵니다. 밤에, 그것도 밖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탄생을 먼저 알게 된 사람이 힘 있는 자, 잘 사는 자, 지식이 많은 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이 목자였다고 밝힙니다. 이는 당시 소외된 자들, 율법이라는 안전지대에서 도움을 받지 못 한 대표적인 부류였습니다. 본래 법이란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에서도 당시 목자들은 비켜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 할 정도로 열악한 현실에 처해 있었던 이들이 목자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밤이 되어도 편안히 쉬지 못 했습니다. 밤이 되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집으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해야 또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잠도 못 자고 양떼를 돌보는 이들이 목자입니다. 자기 집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사회적 하층민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암하레츠’라고 해서 ‘땅의 백성들’로 불립니다. 사회적 혜택을 누리지 못 하는, 소위 상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소유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알아도 이행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식일에도 양떼를 돌봐야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도 양에게 풀을 먹여야 하고, 안식일에도 늑대와 짐승에게서 양떼를 지켜야 하고, 그들의 공격에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한 날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안식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 율법 바깥에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결코 목가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전원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로부터 예수 탄생이 증거 되었단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이 세상 질서를 전복하시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다음 장면을 보면 더욱 또렷해집니다.
위대하신 주님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곳은 아주 작고 소박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바꾸실 위대한 인물이 아주 작고 낮은 곳에서 나셨습니다. 1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가복음 2:11)
여기 보면, 예수님을 표현한 세 가지 놀라운 표현이 나옵니다. 먼저는 ‘구주’입니다. savior, 곧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입니다. 퀴리오스, 곧 주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자이자 메시아, 곧 온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이 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고향이 어디십니까? 시골이십니까? 농어촌이십니까? 그런데 지금 이곳 서울까지 오셔서 이만큼 살게 되셨다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이와 같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가장 영광스러운 주님이 가장 작고 낮고 비천한 곳에 오셨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의 요람이 구유였다는 사실입니다. 구유란 동물의 여물통입니다. 12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12)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기를 낳을 여관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흙수저에 해당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의 가문은 다윗의 가문이었지만, 현실적인 삶은 아주 초라했습니다. 세상 어떤 남편이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고 하는데, 구유에서 아이를 낳게 하겠습니까? 그런 미련한 남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만큼 요셉이 가난하고 가진 게 없었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가난하고 비천한 요셉과 마리아 부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십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모든 힘 있는 자들아, 네 힘을 좀 빼라! 목이 뻣뻣한 자들아, 겸손해라!” 또, 힘없는 자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얘야, 탄식하지 말라. 너의 가난한 자리, 연약한 자리, 슬픔의 자리, 거기에 내가 동참할 것이다. 너보다 내가 더 낮아졌노라. 너는 나를 보고 위로를 받아라. 용기를 내거라. 나를 통해 새롭게 도전하고 일어서거라.” 이렇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탄생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인생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성탄은 모든 이에게 차별 없는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성탄절의 메시지도 분명합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핍박하며 존엄성을 깨뜨리는 게 있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억압이든 경제적 수탈이든 교육적 무지든, 그 모든 악과 불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 사건의 숨은 뜻입니다.
또한, 이 성탄절은 저 북녘의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사건입니다. 저들 역시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악한 권력자가 진리를 은폐하며 백성을 호도합니다. 바로 이곳이 자상천국이라며, 이곳에 자유가 있고 풍요가 있다고 백성들을 세뇌시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습니까? 부모로서, 또 지도자로서 그 자손을 어떻게 인도했습니까? 그들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별 볼일 없는 백성이었다. 가난한 자들이었고, 소수였고, 애굽에 종노릇하는 노예였어.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단다. 우리를 택하셨고, 애굽 땅에서 우리를 탈출시키셔서 가나안이라는 땅을 약속해 주셨어. 우리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다.” 이렇게 끊임없이 자녀들을 가르치며, 신앙을 전수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녀들이 가르치는 게 무엇입니까? 십자가 복음, 부활의 복음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본래 죄인이었는데 죄악에서 용서 받았다고, 우리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시고 영원한 생명까지 허락해 주셨다고, 나아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하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이 진리를 반복해서 가르쳐야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 자유와 해방을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예고하며, 이렇게 찬송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중)
하늘의 영광이 이 땅에 평화의 소식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great joy, 곧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 로마 황제가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권력자였습니다. 그가 시저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로마에 일어났던 일이 로마의 평화입니다. 이른바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란 어떤 평화였을까요? 로마 황제의 권력과 강압으로 만들어진 평화입니다. 가진 자들의 평화입니다.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 의한, 그래서 결국은 그들을 위한 그들만의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이런 평화가 아닙니다. 있는 자의 평화, 힘 있는 자들만 누리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고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자체가 새로운 평화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역발상의 평화를 선언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전해 주신 평화가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것은 없는 자들도 함께 누리는 평화입니다. 있는 자들과 함께 나누는 평화, 없는 자들도 기뻐 뛰놀며 누리는 평화인 것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을 기억하며 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됩시다.
가장 영광스러운, 가장 힘 있는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짐승의 먹이통인 여물통에 누워 계십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힘 있는 자의 겸손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낮아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낮은 곳으로 임하신 고난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승자만이 독식하는 평화가 아니라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가 함께 누리는 평화의 소식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내가 왔다. 그래서 내가 작고 낮은 베들레헴의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난 것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를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내면의 세계가 어떤지 돌아 보거라. 혹시 불안하냐? 혹시 근심이 있느냐? 열등감에 붙잡혀 있진 않느냐? 아니면, 우월감을 자랑하고 있느냐? 그렇다면, 그 교만을 내려놓아야 한다. 깨뜨려라. 그리고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거라.” 또, 가진 게 없다고, 나는 부족하고 아무것도 없다며 억눌려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보다 더 가난해졌단다. 나는 너보다 더 비참한 곳에서 인생을 시작했단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거라. 나를 보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거라. 내가 너의 곁에 있으니 나를 의지하며 나아가거라.”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며 격려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보다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보다 가난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보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더 많이 당해 본 사람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가진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힘이 있느냐? 네가 가진 게 좀 있느냐? 그럼 그것으로 네 이웃을 돌보아라. 네 본래 시작이 그렇게 잘났던 게 아니지 않느냐? 너도 연약한 자였지 않느냐? 그러니 겸손하게 행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소식은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교만해져 있다면,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아무것도 없다고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다면, 그것마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오실까요? 여물통 같은 마음을 가진 이에게 오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분을 바라보며, 잘났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내려놓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도 주님께 맡기면서 우리보다 연약한 자들을 돌보며 나아가는 주님의 교회,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2: 8 ~ 14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다사다난했던 2016년입니다.
오늘은 기쁜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보통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합니다. 즐거운 성탄절이 되라는 뜻입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슬프고 아픈 소식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1월엔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흔들리면서 대한민국은 2월에 개성공단 폐쇄를 결정합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서로간의 소통이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지난 9월에는 경주 일대에 강도 5.8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한반도 지진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의 지진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도 지진에 안전한 지역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축 시 내진 설계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생겼습니다. 요즘엔 조류독감 AI의 발생으로, 현재까지 2,500만 마리 이상의 닭과 오리가 살처분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3,000만 마리 이상 살처분 될 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환경오염이 가속화 되고 있고, 먹거리 위기까지 닥쳐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올해 가장 나쁜 사건이 있다면,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일 것입니다. 대통령의 탄핵소추가 결정되었고, 참담한 시국에 온 국민이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노선에 상관없이 정의와 공의가 상실될 때,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층 역시 그 자리에 안주하려고 하니 부정부패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과거 정치사 속에서 이념적 색깔에 상관없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위기를 경험해 왔던 것을 압니다.
더욱이 국내적 위기를 넘어 국제적으로도 나쁜 소식들이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모기를 통해 전염되는 지카바이러스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뇌가 없이 태어나는 신생아도 생겼습니다. 소두증을 앓게 되고, 뇌신경장애를 유발케 할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의 어머니들이 공포에 빠졌습니다. 시리아 내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십 만, 수백 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내전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의 테러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의 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로 인해 국제적인 정치・경제적 격변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미국의 다음 정권이 트럼프 정권입니다. ‘혹시 보호무역주의를 하지 않을까? 미국이 자국 이기주의에 우선하는 정책들을 더 확대하진 않을까?’ 하는 정치・경제 전문가들의 우려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은 또 어떻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아니, 젊은 나이에도 아프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수술하고 병상에서 회복을 기다리는데, 회복이 더딘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가족 전체가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또,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앓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장래 건수가 한 해 당 250건 내외입니다. 연세가 있으셔서 부르심을 받으시는 분들도 있지만, 젊은 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 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예수 탄생은 이 땅에 드러난 하나님의 뒤집기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렇게 험난합니다. 언제 어디서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고,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기쁨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성탄은 정말 기쁜 소식일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이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일까?’ 오늘 말씀 중 10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누가복음 2:10)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마 눈앞에서 천사를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녹록지 않는 현실에 두려워 떨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음성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의 선언입니다. 더욱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 도래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나심이 지구촌 구석구석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여러분, 세상의 법칙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법칙은 어떻게 하든 이기려고 합니다.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입니다. 강한 자가 빼앗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기려고 합니다. 약한 자들은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게 우리네 현실입니다. 심지어 그 욕망을 더욱 부추기는 게 오늘날의 실태입니다. 시장 경제라는 게 무엇입니까? 철저한 경쟁 사회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기업의 모든 직원들이 밤잠도 못 자면서 동원되고 있습니다. 기업뿐만 아니라 힘을 얻으려는 모든 곳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여야의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싸움을 합니까? 목숨을 걸면서까지 투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승리해야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삶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심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질서를 뒤바꾸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뒤집겠다는 뜻입니다. 힘 있는 자들을 향해 내려올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억눌린 자를 향해서는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다시 꿈을 꾸고 도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누가복음 2:8)
여기 목자가 나옵니다. 밤에, 그것도 밖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탄생을 먼저 알게 된 사람이 힘 있는 자, 잘 사는 자, 지식이 많은 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이 목자였다고 밝힙니다. 이는 당시 소외된 자들, 율법이라는 안전지대에서 도움을 받지 못 한 대표적인 부류였습니다. 본래 법이란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에서도 당시 목자들은 비켜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 할 정도로 열악한 현실에 처해 있었던 이들이 목자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밤이 되어도 편안히 쉬지 못 했습니다. 밤이 되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집으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해야 또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잠도 못 자고 양떼를 돌보는 이들이 목자입니다. 자기 집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사회적 하층민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암하레츠’라고 해서 ‘땅의 백성들’로 불립니다. 사회적 혜택을 누리지 못 하는, 소위 상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소유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알아도 이행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식일에도 양떼를 돌봐야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도 양에게 풀을 먹여야 하고, 안식일에도 늑대와 짐승에게서 양떼를 지켜야 하고, 그들의 공격에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한 날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안식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 율법 바깥에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결코 목가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전원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로부터 예수 탄생이 증거 되었단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이 세상 질서를 전복하시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다음 장면을 보면 더욱 또렷해집니다.
위대하신 주님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곳은 아주 작고 소박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바꾸실 위대한 인물이 아주 작고 낮은 곳에서 나셨습니다. 1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가복음 2:11)
여기 보면, 예수님을 표현한 세 가지 놀라운 표현이 나옵니다. 먼저는 ‘구주’입니다. savior, 곧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입니다. 퀴리오스, 곧 주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자이자 메시아, 곧 온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이 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고향이 어디십니까? 시골이십니까? 농어촌이십니까? 그런데 지금 이곳 서울까지 오셔서 이만큼 살게 되셨다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이와 같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가장 영광스러운 주님이 가장 작고 낮고 비천한 곳에 오셨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의 요람이 구유였다는 사실입니다. 구유란 동물의 여물통입니다. 12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누가복음 2:12)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기를 낳을 여관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흙수저에 해당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의 가문은 다윗의 가문이었지만, 현실적인 삶은 아주 초라했습니다. 세상 어떤 남편이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고 하는데, 구유에서 아이를 낳게 하겠습니까? 그런 미련한 남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만큼 요셉이 가난하고 가진 게 없었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가난하고 비천한 요셉과 마리아 부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십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모든 힘 있는 자들아, 네 힘을 좀 빼라! 목이 뻣뻣한 자들아, 겸손해라!” 또, 힘없는 자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얘야, 탄식하지 말라. 너의 가난한 자리, 연약한 자리, 슬픔의 자리, 거기에 내가 동참할 것이다. 너보다 내가 더 낮아졌노라. 너는 나를 보고 위로를 받아라. 용기를 내거라. 나를 통해 새롭게 도전하고 일어서거라.” 이렇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탄생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인생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성탄은 모든 이에게 차별 없는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는 명백합니다. 성탄절의 메시지도 분명합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핍박하며 존엄성을 깨뜨리는 게 있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억압이든 경제적 수탈이든 교육적 무지든, 그 모든 악과 불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 사건의 숨은 뜻입니다.
또한, 이 성탄절은 저 북녘의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사건입니다. 저들 역시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악한 권력자가 진리를 은폐하며 백성을 호도합니다. 바로 이곳이 자상천국이라며, 이곳에 자유가 있고 풍요가 있다고 백성들을 세뇌시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습니까? 부모로서, 또 지도자로서 그 자손을 어떻게 인도했습니까? 그들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별 볼일 없는 백성이었다. 가난한 자들이었고, 소수였고, 애굽에 종노릇하는 노예였어.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단다. 우리를 택하셨고, 애굽 땅에서 우리를 탈출시키셔서 가나안이라는 땅을 약속해 주셨어. 우리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다.” 이렇게 끊임없이 자녀들을 가르치며, 신앙을 전수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녀들이 가르치는 게 무엇입니까? 십자가 복음, 부활의 복음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본래 죄인이었는데 죄악에서 용서 받았다고, 우리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시고 영원한 생명까지 허락해 주셨다고, 나아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하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이 진리를 반복해서 가르쳐야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 자유와 해방을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예고하며, 이렇게 찬송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중)
하늘의 영광이 이 땅에 평화의 소식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great joy, 곧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 로마 황제가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권력자였습니다. 그가 시저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로마에 일어났던 일이 로마의 평화입니다. 이른바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란 어떤 평화였을까요? 로마 황제의 권력과 강압으로 만들어진 평화입니다. 가진 자들의 평화입니다.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 의한, 그래서 결국은 그들을 위한 그들만의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이런 평화가 아닙니다. 있는 자의 평화, 힘 있는 자들만 누리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고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자체가 새로운 평화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역발상의 평화를 선언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전해 주신 평화가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것은 없는 자들도 함께 누리는 평화입니다. 있는 자들과 함께 나누는 평화, 없는 자들도 기뻐 뛰놀며 누리는 평화인 것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을 기억하며 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됩시다.
가장 영광스러운, 가장 힘 있는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짐승의 먹이통인 여물통에 누워 계십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힘 있는 자의 겸손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낮아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낮은 곳으로 임하신 고난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승자만이 독식하는 평화가 아니라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가 함께 누리는 평화의 소식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내가 왔다. 그래서 내가 작고 낮은 베들레헴의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난 것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를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내면의 세계가 어떤지 돌아 보거라. 혹시 불안하냐? 혹시 근심이 있느냐? 열등감에 붙잡혀 있진 않느냐? 아니면, 우월감을 자랑하고 있느냐? 그렇다면, 그 교만을 내려놓아야 한다. 깨뜨려라. 그리고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거라.” 또, 가진 게 없다고, 나는 부족하고 아무것도 없다며 억눌려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보다 더 가난해졌단다. 나는 너보다 더 비참한 곳에서 인생을 시작했단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거라. 나를 보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거라. 내가 너의 곁에 있으니 나를 의지하며 나아가거라.”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며 격려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보다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보다 가난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보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더 많이 당해 본 사람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가진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힘이 있느냐? 네가 가진 게 좀 있느냐? 그럼 그것으로 네 이웃을 돌보아라. 네 본래 시작이 그렇게 잘났던 게 아니지 않느냐? 너도 연약한 자였지 않느냐? 그러니 겸손하게 행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소식은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교만해져 있다면,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아무것도 없다고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다면, 그것마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오실까요? 여물통 같은 마음을 가진 이에게 오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분을 바라보며, 잘났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내려놓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도 주님께 맡기면서 우리보다 연약한 자들을 돌보며 나아가는 주님의 교회,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