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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용사에서 힘없는 자로!

사사기 16: 15 ~ 22

김지철 목사

2014.02.09

삼손은 본래 ‘큰 자’였습니다.

지난 주일, 기드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소심했던 사람, 겁먹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을 하나님은 큰 용사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는 300명이라는 작은 군사로 수만 명의 미디안 군대를 물리친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삼손의 이야기는 기드온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본래 삼손은 힘 있는 큰 용사였습니다. 사자를 맨주먹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겁이 없는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무력한 자가 되고 맙니다. 두 눈을 빼앗겼고 감옥에 갇힌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기드온과 삼손, 이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점이 나타난 것일까요?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용기 있게 나아갔습니다. 반면에 삼손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를 사모하기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을 더욱 열망했고 거기에 시간과 정열을 쏟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떠나셨습니다. 그 순간, 거대했던 용사는 아주 초라한 졸개로 변모하고 맙니다.
여기서 ‘작다’, ‘크다’는 분명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힘센 삼손의 몰락은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처럼 힘센 자가 되기를 원하는 남성들, 그들이 받을 유혹이 삼손의 이야기 속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명예를 사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주신 축복들을 자기 발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도대체 삼손에게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일까요? 첫 번째, 그는 부모님의 신앙을 전수받는 데 실패했습니다. 부모의 교육에 문제가 있었는지, 혹은 삼손이 너무 철부지였는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였는지 성경은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듯합니다.
삼손은 늦둥이였습니다. 천사는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부모에게 와서 태어날 아들이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나실인이란, 예물을 드리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삼손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독주와 포도주를 삼갔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은 것은 물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축복으로 삼손의 생애는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태어났을 때 받은 축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사사기13:24∼25)

나실인이라는 이 명예는 하나님의 사명이자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명예는 늘 멍에와 같이 움직입니다. 우리는 종종 명예는 원하지만 멍에는 싫어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셔야 됩니다.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다, 내가 특별한 사명을 맡았다, 그것이 내게 명예다.’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멍에와 같이 갈 때 명예로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멍에를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지어야 할 십자가가 있는 것을 괘념치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 삼손은 어린 시절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나실인이 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지명해서 불렀다는 사실이 삼손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신앙인이어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신앙인들이 계십니까? 어머니가 종종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네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기도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너를 낳고 키웠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좋기도 했지만,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숨이 턱턱 막히면서, ‘아이고, 내가 어머니의 이 자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 어머니와 아버지의 신앙을 내게 강요합니까. 나는 납니다. 나는 나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이라는 말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것은 부담입니다!’ 사춘기 시절, 모태신앙인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부모의 영역에서, 부모의 간섭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이 내면에서 소리 쳤을 것입니다.
삼손의 위기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고와 행동은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부모님과 의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와 상관없이 이방 지역을, 블레셋 마을을 넘나들었습니다. 아마 유대인 속에 있는 것이 부담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방 지역을 넘나들면서 행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딤나, 가사, 소렉 골짜기 등 장소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인의 품에서 인생을 시작했고, 여인의 품에서 삶을 끝마쳤습니다.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을 무너뜨리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자란 남자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한 남자를 살리기도 하고 반대로 죽이기도 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선배들을 통해서 경험했고, 역사를 통해서도 경험했습니다.
삼손이 만난 여인들은 복 받은 여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삼손을 미혹하여 무너뜨리게 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녀들에게 다가왔던 삼손의 태도도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을 만난 여인들은 그를 통해서 무언가 얻기를 원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속내를 속이고 삼손과 함께 있었음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사사기 14:16)

여기에는 삼손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골려주려고 수수께끼 하나를 내고는, 만약 맞추지 못하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답을 알기 위해 삼손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매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인으로 하여금 “당신이 내게 답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에요!” 라며 삼손을 졸라대도록 만든 것입니다. 사사기 16장 15절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사사기 16:15)

“당신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발 나에게 가르쳐 주세요!” 들릴라가 삼손을 졸라댄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제시한 돈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들리라가 삼손을 얼마나 졸라댔는지에 대해 ‘그것 때문에 괴로워서 죽게 되었다’라고 삼손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부터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탁하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네가 조심해야 될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네 혀를 조심하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세 치 혀를 네 욕심대로 놀리지 말라. 두 번째는 네 손과 주먹을 조심하라. 도박을 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세 번째는 색(色)을 조심하라.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남자들이 가장 흔들리고 가장 먼지 무너지는 자리가 이 세 가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손은 이 세 가지에 모두 실패합니다. 모두 무너집니다. 혀를 함부로 놀렸습니다. 수수께끼를 낸다고, 자기자랑을 한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또 그것을 피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결정적일 때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인의 치마 속에서 평생 헤어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손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파멸시키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침몰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냥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받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그에게 문제가 일어난 이유는 그가 타협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실인인 그에게 명령하신 것들이 있었습니다. ‘술은 금하라. 부정한 음식은 먹지 말라. 여인을 금하라. 시체에 손대지 말라. 몸에 삭도를 대지 말라.’ 하지만 그는 그것들 중 하나, 머리카락만 자르지 않으면 나실인으로서의 특색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자기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내가 나를 보여주는 표지가 무엇일까요? 옛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주일 성수, 둘째는 십의 일조 헌금, 셋째는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백여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굉장히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의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나에게 우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예배드리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껏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예배드리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3이 되니까 1년 동안 학원에 나가고 1년 후에 교회에 나가도록 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공부보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공부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그 마음으로 공부해.”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예배를 빠뜨리면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망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십의 일조 헌금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 십의 일조 헌금을 통해 복을 받았습니다. 돈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번 것의 십의 일을 드린다는 게 쉬운 일일까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삶의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닫는 사람들만이 십의 일조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놀라운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술 먹고 술독에 빠지는 것, 술 먹고 정욕에 빠지는 것, 술 먹고 색에 빠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술 먹지 말고 담배피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이런 전통들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이 보여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특별히 술 먹는 문제가 그러합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술을 잘 먹는 러시아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들이 곱절로 술을 더 먹고 있다고 합니다. 방송에서는 술 먹는 것을 자랑합니다. 술을 먹지 않으면 마치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광고를 하는 이 시대는 분명히 위험한 시대입니다.

삼손에게는 하나님이 머물 공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해야 할 것과 금해야 할 것들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우선임을 알고 살아가라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 다른 모든 명령들은 무시한 채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한 가지만으로 나실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삶은 무질서 했습니다. 술과 여인에 의해서 삶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신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6:20)

이미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습니다. 머리카락이 잘려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계실 공간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삼손은 여러 번의 경고를 받았지만 모두 무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살아가면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빨리 멈추어 돌아갔어야 하는데 무질서하고 타락한 삶을 살면서도 머리카락만 자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여인의 거짓말이 반복될 때도,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힘이 너무 컸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의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 삼손을 움직였다는 말이 사사기 13장, 14장, 15장, 16장에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역설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지 않을 때,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이었지만 나실인답게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실수가 마치 습관처럼 삶 속에 젖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뭐라 그래!’ 하며 실수 안에서 나오기를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될 때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묻지 않고, 그저 닥치는 위기만을 넘기려고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너무나 강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건강과 그의 강력한 힘이 오히려 저주가 되고 화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인의 유혹에 쉽게 빠졌기에 여인을 경배했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 자신만만했기에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만큼의 건강을 가진 것, 축복 아닙니까? 이만큼의 재물을 가진 것, 축복 아닙니까? 이만큼의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 축복 아닙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달란트는 또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내 욕심에 의해 사용되면, 그 축복이 저주가 됩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자신의 잘못을 언제 깨닫게 되었을까요? 두 눈을 빼앗기고 무력한 자가 되어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고통을 받을 때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뼈아프게 되돌아 봤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삼손에 대한 마지막의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동안 기도를 하지 않았다가 마지막 때가 되어서야 기도를 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사사기 16:28)

다곤 신전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축제가 있을 때, 그는 그곳의 기둥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것보다 삼손이 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더 많이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패한 삼손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용사로 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삶의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금처럼 계속 살아가면 내 인생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미리 예견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금 잘못한 것들이 있다면 멈추고 바꾸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지금 돌아오는 것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달려가다가 육체의 쾌락 속에 빠져 인생이 추락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은 가장 미련한 태도입니다.
우리 삶에 삼손이 갖고 있었던 모습들은 없습니까?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까? 있다면 잘라버려야 합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기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내게 주신 삶의 축복들을 감사하며 나누어야 합니다. 잠깐의 쾌락 때문에 영원한 즐거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신 달란트, 건강, 능력들이 저주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기드온처럼 작고 연약한 자였지만 용사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삼손처럼 모든 것을 가졌지만 무력한 자로 무너진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여기서 돌리겠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여기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며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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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6: 15 ~ 22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삼손은 본래 ‘큰 자’였습니다.

지난 주일, 기드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소심했던 사람, 겁먹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을 하나님은 큰 용사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는 300명이라는 작은 군사로 수만 명의 미디안 군대를 물리친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삼손의 이야기는 기드온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본래 삼손은 힘 있는 큰 용사였습니다. 사자를 맨주먹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겁이 없는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무력한 자가 되고 맙니다. 두 눈을 빼앗겼고 감옥에 갇힌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기드온과 삼손, 이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점이 나타난 것일까요?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용기 있게 나아갔습니다. 반면에 삼손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를 사모하기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을 더욱 열망했고 거기에 시간과 정열을 쏟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떠나셨습니다. 그 순간, 거대했던 용사는 아주 초라한 졸개로 변모하고 맙니다.
여기서 ‘작다’, ‘크다’는 분명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힘센 삼손의 몰락은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처럼 힘센 자가 되기를 원하는 남성들, 그들이 받을 유혹이 삼손의 이야기 속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명예를 사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주신 축복들을 자기 발로 걷어차 버렸습니다. 도대체 삼손에게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일까요? 첫 번째, 그는 부모님의 신앙을 전수받는 데 실패했습니다. 부모의 교육에 문제가 있었는지, 혹은 삼손이 너무 철부지였는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였는지 성경은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듯합니다.
삼손은 늦둥이였습니다. 천사는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부모에게 와서 태어날 아들이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나실인이란, 예물을 드리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삼손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독주와 포도주를 삼갔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은 것은 물론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축복으로 삼손의 생애는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태어났을 때 받은 축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사사기13:24∼25)

나실인이라는 이 명예는 하나님의 사명이자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명예는 늘 멍에와 같이 움직입니다. 우리는 종종 명예는 원하지만 멍에는 싫어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셔야 됩니다.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다, 내가 특별한 사명을 맡았다, 그것이 내게 명예다.’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멍에와 같이 갈 때 명예로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멍에를 포기했습니다. 자기가 지어야 할 십자가가 있는 것을 괘념치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 삼손은 어린 시절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나실인이 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자신을 지명해서 불렀다는 사실이 삼손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신앙인이어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신앙인들이 계십니까? 어머니가 종종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네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기도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너를 낳고 키웠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좋기도 했지만,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숨이 턱턱 막히면서, ‘아이고, 내가 어머니의 이 자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 어머니와 아버지의 신앙을 내게 강요합니까. 나는 납니다. 나는 나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이라는 말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것은 부담입니다!’ 사춘기 시절, 모태신앙인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부모의 영역에서, 부모의 간섭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이 내면에서 소리 쳤을 것입니다.
삼손의 위기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고와 행동은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부모님과 의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와 상관없이 이방 지역을, 블레셋 마을을 넘나들었습니다. 아마 유대인 속에 있는 것이 부담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방 지역을 넘나들면서 행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딤나, 가사, 소렉 골짜기 등 장소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인의 품에서 인생을 시작했고, 여인의 품에서 삶을 끝마쳤습니다.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을 무너뜨리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자란 남자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한 남자를 살리기도 하고 반대로 죽이기도 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선배들을 통해서 경험했고, 역사를 통해서도 경험했습니다.
삼손이 만난 여인들은 복 받은 여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삼손을 미혹하여 무너뜨리게 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녀들에게 다가왔던 삼손의 태도도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을 만난 여인들은 그를 통해서 무언가 얻기를 원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속내를 속이고 삼손과 함께 있었음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사사기 14:16)

여기에는 삼손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골려주려고 수수께끼 하나를 내고는, 만약 맞추지 못하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답을 알기 위해 삼손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매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인으로 하여금 “당신이 내게 답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에요!” 라며 삼손을 졸라대도록 만든 것입니다. 사사기 16장 15절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사사기 16:15)

“당신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발 나에게 가르쳐 주세요!” 들릴라가 삼손을 졸라댄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제시한 돈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들리라가 삼손을 얼마나 졸라댔는지에 대해 ‘그것 때문에 괴로워서 죽게 되었다’라고 삼손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부터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탁하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네가 조심해야 될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네 혀를 조심하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세 치 혀를 네 욕심대로 놀리지 말라. 두 번째는 네 손과 주먹을 조심하라. 도박을 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세 번째는 색(色)을 조심하라.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남자들이 가장 흔들리고 가장 먼지 무너지는 자리가 이 세 가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손은 이 세 가지에 모두 실패합니다. 모두 무너집니다. 혀를 함부로 놀렸습니다. 수수께끼를 낸다고, 자기자랑을 한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또 그것을 피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결정적일 때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인의 치마 속에서 평생 헤어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손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파멸시키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침몰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냥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받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그에게 문제가 일어난 이유는 그가 타협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실인인 그에게 명령하신 것들이 있었습니다. ‘술은 금하라. 부정한 음식은 먹지 말라. 여인을 금하라. 시체에 손대지 말라. 몸에 삭도를 대지 말라.’ 하지만 그는 그것들 중 하나, 머리카락만 자르지 않으면 나실인으로서의 특색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자기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내가 나를 보여주는 표지가 무엇일까요? 옛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주일 성수, 둘째는 십의 일조 헌금, 셋째는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백여 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굉장히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의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나에게 우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예배드리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껏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예배드리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3이 되니까 1년 동안 학원에 나가고 1년 후에 교회에 나가도록 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공부보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공부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그 마음으로 공부해.”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예배를 빠뜨리면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망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십의 일조 헌금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 십의 일조 헌금을 통해 복을 받았습니다. 돈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번 것의 십의 일을 드린다는 게 쉬운 일일까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삶의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닫는 사람들만이 십의 일조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놀라운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술 먹고 술독에 빠지는 것, 술 먹고 정욕에 빠지는 것, 술 먹고 색에 빠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술 먹지 말고 담배피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이런 전통들이 흐트러지고 있는 것이 보여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특별히 술 먹는 문제가 그러합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술을 잘 먹는 러시아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들이 곱절로 술을 더 먹고 있다고 합니다. 방송에서는 술 먹는 것을 자랑합니다. 술을 먹지 않으면 마치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광고를 하는 이 시대는 분명히 위험한 시대입니다.

삼손에게는 하나님이 머물 공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해야 할 것과 금해야 할 것들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우선임을 알고 살아가라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 다른 모든 명령들은 무시한 채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한 가지만으로 나실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삶은 무질서 했습니다. 술과 여인에 의해서 삶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신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6:20)

이미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습니다. 머리카락이 잘려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계실 공간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삼손은 여러 번의 경고를 받았지만 모두 무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살아가면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빨리 멈추어 돌아갔어야 하는데 무질서하고 타락한 삶을 살면서도 머리카락만 자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여인의 거짓말이 반복될 때도,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힘이 너무 컸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의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 삼손을 움직였다는 말이 사사기 13장, 14장, 15장, 16장에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역설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지 않을 때,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이었지만 나실인답게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실수가 마치 습관처럼 삶 속에 젖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뭐라 그래!’ 하며 실수 안에서 나오기를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될 때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묻지 않고, 그저 닥치는 위기만을 넘기려고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너무나 강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건강과 그의 강력한 힘이 오히려 저주가 되고 화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인의 유혹에 쉽게 빠졌기에 여인을 경배했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 자신만만했기에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만큼의 건강을 가진 것, 축복 아닙니까? 이만큼의 재물을 가진 것, 축복 아닙니까? 이만큼의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 축복 아닙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달란트는 또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내 욕심에 의해 사용되면, 그 축복이 저주가 됩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자신의 잘못을 언제 깨닫게 되었을까요? 두 눈을 빼앗기고 무력한 자가 되어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고통을 받을 때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뼈아프게 되돌아 봤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삼손에 대한 마지막의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동안 기도를 하지 않았다가 마지막 때가 되어서야 기도를 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사사기 16:28)

다곤 신전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축제가 있을 때, 그는 그곳의 기둥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것보다 삼손이 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더 많이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패한 삼손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용사로 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삶의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금처럼 계속 살아가면 내 인생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미리 예견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금 잘못한 것들이 있다면 멈추고 바꾸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지금 돌아오는 것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달려가다가 육체의 쾌락 속에 빠져 인생이 추락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은 가장 미련한 태도입니다.
우리 삶에 삼손이 갖고 있었던 모습들은 없습니까?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까? 있다면 잘라버려야 합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기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내게 주신 삶의 축복들을 감사하며 나누어야 합니다. 잠깐의 쾌락 때문에 영원한 즐거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신 달란트, 건강, 능력들이 저주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기드온처럼 작고 연약한 자였지만 용사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삼손처럼 모든 것을 가졌지만 무력한 자로 무너진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여기서 돌리겠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여기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며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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