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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모습은 충격적이고 놀랍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초대 교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렬한 언어로 충격적이고 놀랍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자기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자기 밭과 자기 집을 팔아 사도에게 바쳤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
이 말씀을 읽고 있으면 너무 귀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마음에 뭔가 부담감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괴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이 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자기 재물은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초대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말씀은 아닐까요?
초대교회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 보면 사람이 좋은 일에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쁘고 악한 일에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사탄의 유혹과 미혹에 걸려서 야기된 ‘한 마음과 한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의 열매를 보니까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했습니다. 또한 지혜롭게 할 만큼 아주 탐스러웠습니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만과 탐욕에 더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욕심으로 서로 뭉쳐 악을 행하는 데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사실, 역사에 가정법이란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 중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여 말렸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때로 거짓과 부정을 행할 때, 이를 막는 동료와 친구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좋은 친구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행하면서 합작하고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악한 일에 도모한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창세기 11장에 노아의 후손들은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4)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원합니다. 그래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면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 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악한 일에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성을 짓는 건축자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노아의 후손에게 ‘땅에 충만하라.’, ‘땅에 퍼지라.’, ‘내 지경을 넓혀 세상을 향해 나가라.’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씀을 거절하며 자기들끼리 모여서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지경을 넓혀 퍼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편협하고 오만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가 온 땅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을까요?
본문은 인간의 악한 본성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악하거나 교만한 마음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또한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무엇보다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의 역사 속에 함께 들어와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자기의 스승이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셨을 때, 죽음 앞에서 가슴을 찢으며 통곡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것도 모든 기대와 소망을 두었던 그들의 스승이 죽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그 때,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욕심과 개인적인 야망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에 대한 기대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정치적인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그들의 오만과 야망, 교만함도 함께 소멸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성숙해졌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할 때 일어납니다. 내 생각과 목표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항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생은 영적으로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좌절의 상황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죽음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병에 걸리고 나서야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인생이 꺼져가는 등불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한계를 느끼면서 우리는 다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인간은 욕망의 노예라는 신분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욕심은 소유욕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강력한 욕망입니다. 사람들을 강렬하게 얽어매는 힘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 곳곳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비리의 핵심 밑바닥에는 소유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있는 자는 더 많이 가지려하고, 없는 자는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초대교회는 부활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놀랍게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소유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슬러서 자신이 가진 재물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열정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사도들이 행한 기적에 놀라서 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영적으로 흥분된 상태에서 어느 정도는 강압적이거나 충동적으로 바치게 되었을까요?
초대교회가 부활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큰 은혜를 받은 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인간관계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감탄할 수 있습니다. ‘아!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하나님의 축복이구나! 하나님이 내게 잠시 맡겨 주신 것이구나! 돈, 시간, 생명, 소유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구나!’ 이것을 깨달은 성도들은 욕망의 노예의 신분에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 이후로는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인간은 가장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용기이고 비겁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깨달은 한 마음과 한 뜻이었습니다. 애초에는 그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가 다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하면서부터 부활 공동체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제물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 4:32)
이것이 큰 은혜를 받은 부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제 이 공동체에는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부탁하시고 위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고 마음속의 시기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마음속의 질투와 미움을 끊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주님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위기를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젊을 때는 그냥 사랑에 빠져서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어느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매일 매일 경험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사랑하려면 내 몸과 마음 전체를 던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때로는 가슴에 멍이 들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위기가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베푸신 것은 하나님의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 「네 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분명 아픔을 느낄 것이며, 어쩌면 부서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상처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아플 수 있으며 부서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요소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아무 손상 없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얽히는 관계를 피하십시오. 마음을 당신의 이기심이라는 작은 상자에만 넣어 안전하게 잠가 두십시오.
마음을 이기심 속에 가두고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를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전체를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서질 수도 있지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사랑 없이 ‘나’라는 껍질을 싸고 ‘우리끼리만’, ‘나만’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살면 평화와 안식이 있을까요? 오히려 더 큰 마음의 공허와 외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한 인생의 덧없음과 부끄러움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 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나눔에는 반드시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는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힘들었다면, 이제 내가 힘이 들 차례입니다. 고통을 스스로 품고 사랑의 축복을 나눈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자신이 가진 것을 사도들 앞에 드린 교회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게 사도들의 권위가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성도들이 모든 것을 드리면 사도들이 그것을 어렵고 곤고한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습니다. 비로소 교회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섬김의 공동체로 축복받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집단주의나 공산주의에 사로잡힌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백 년이 못되어 무너진 이유는 그 사상의 핵심에 의심과 미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것을 끌어내리고 무너지게 하려는 증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우선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랑의 공동체는 2000년의 역사를 이어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눔과 섬김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르게 응답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물질을 드린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드렸습니다.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축복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를 통해 복음의 축복, 사랑의 축복, 은혜의 축복이 전해졌습니다. 성경은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세움을 받았다고 끊임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또 다른 부류의 인물도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은혜를 받아 모든 재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둘 중 하나만 바뀌어도 변화가 있었을 텐데, 부부가 같이 거짓과 불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비참한 저주와 죽음의 역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드릴 때도 자기 스스로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철회할 때도 스스로 허물어 버렸습니다. 은혜로 시작했지만, 율법으로 인생을 비참하게 마쳤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한 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헌금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10개 중 모두가 하나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10개 중 하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드립시다.
초대교회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에서 벗어나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가슴으로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자기의 욕심을 부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께 시간의 십일조 운동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의 십일조를 잘해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란트의 십일조,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기 원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을지라도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이웃을 넉넉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 번 경험합시다. 하나님께 나의 나 된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시다. 우리 인생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이웃들을 위해서 살아갑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도행전 4: 32~37
32~37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대교회의 모습은 충격적이고 놀랍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초대 교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렬한 언어로 충격적이고 놀랍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자기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자기 밭과 자기 집을 팔아 사도에게 바쳤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
이 말씀을 읽고 있으면 너무 귀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마음에 뭔가 부담감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괴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이 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자기 재물은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초대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말씀은 아닐까요?
초대교회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 보면 사람이 좋은 일에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쁘고 악한 일에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사탄의 유혹과 미혹에 걸려서 야기된 ‘한 마음과 한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의 열매를 보니까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했습니다. 또한 지혜롭게 할 만큼 아주 탐스러웠습니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만과 탐욕에 더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욕심으로 서로 뭉쳐 악을 행하는 데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사실, 역사에 가정법이란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 중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여 말렸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때로 거짓과 부정을 행할 때, 이를 막는 동료와 친구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좋은 친구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행하면서 합작하고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악한 일에 도모한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창세기 11장에 노아의 후손들은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4)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원합니다. 그래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면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 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악한 일에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성을 짓는 건축자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노아의 후손에게 ‘땅에 충만하라.’, ‘땅에 퍼지라.’, ‘내 지경을 넓혀 세상을 향해 나가라.’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씀을 거절하며 자기들끼리 모여서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지경을 넓혀 퍼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편협하고 오만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가 온 땅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을까요?
본문은 인간의 악한 본성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악하거나 교만한 마음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또한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무엇보다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의 역사 속에 함께 들어와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자기의 스승이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셨을 때, 죽음 앞에서 가슴을 찢으며 통곡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것도 모든 기대와 소망을 두었던 그들의 스승이 죽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그 때,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욕심과 개인적인 야망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에 대한 기대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정치적인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그들의 오만과 야망, 교만함도 함께 소멸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성숙해졌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할 때 일어납니다. 내 생각과 목표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항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생은 영적으로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기도하는 마음이 생겨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좌절의 상황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죽음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병에 걸리고 나서야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인생이 꺼져가는 등불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한계를 느끼면서 우리는 다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인간은 욕망의 노예라는 신분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욕심은 소유욕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강력한 욕망입니다. 사람들을 강렬하게 얽어매는 힘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서 곳곳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비리의 핵심 밑바닥에는 소유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있는 자는 더 많이 가지려하고, 없는 자는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초대교회는 부활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놀랍게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소유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슬러서 자신이 가진 재물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열정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사도들이 행한 기적에 놀라서 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영적으로 흥분된 상태에서 어느 정도는 강압적이거나 충동적으로 바치게 되었을까요?
초대교회가 부활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큰 은혜를 받은 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생명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인간관계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감탄할 수 있습니다. ‘아!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하나님의 축복이구나! 하나님이 내게 잠시 맡겨 주신 것이구나! 돈, 시간, 생명, 소유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구나!’ 이것을 깨달은 성도들은 욕망의 노예의 신분에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 이후로는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인간은 가장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용기이고 비겁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깨달은 한 마음과 한 뜻이었습니다. 애초에는 그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가 다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하면서부터 부활 공동체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제물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 4:32)
이것이 큰 은혜를 받은 부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제 이 공동체에는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부탁하시고 위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고 마음속의 시기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마음속의 질투와 미움을 끊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주님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위기를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젊을 때는 그냥 사랑에 빠져서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어느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매일 매일 경험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사랑하려면 내 몸과 마음 전체를 던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때로는 가슴에 멍이 들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위기가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베푸신 것은 하나님의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 「네 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분명 아픔을 느낄 것이며, 어쩌면 부서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상처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아플 수 있으며 부서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요소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아무 손상 없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얽히는 관계를 피하십시오. 마음을 당신의 이기심이라는 작은 상자에만 넣어 안전하게 잠가 두십시오.
마음을 이기심 속에 가두고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를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전체를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서질 수도 있지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사랑 없이 ‘나’라는 껍질을 싸고 ‘우리끼리만’, ‘나만’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살면 평화와 안식이 있을까요? 오히려 더 큰 마음의 공허와 외로움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한 인생의 덧없음과 부끄러움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 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나눔에는 반드시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는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힘들었다면, 이제 내가 힘이 들 차례입니다. 고통을 스스로 품고 사랑의 축복을 나눈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자신이 가진 것을 사도들 앞에 드린 교회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게 사도들의 권위가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성도들이 모든 것을 드리면 사도들이 그것을 어렵고 곤고한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습니다. 비로소 교회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섬김의 공동체로 축복받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는 집단주의나 공산주의에 사로잡힌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백 년이 못되어 무너진 이유는 그 사상의 핵심에 의심과 미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것을 끌어내리고 무너지게 하려는 증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우선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랑의 공동체는 2000년의 역사를 이어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눔과 섬김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르게 응답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물질을 드린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드렸습니다.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축복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를 통해 복음의 축복, 사랑의 축복, 은혜의 축복이 전해졌습니다. 성경은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세움을 받았다고 끊임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또 다른 부류의 인물도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은혜를 받아 모든 재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둘 중 하나만 바뀌어도 변화가 있었을 텐데, 부부가 같이 거짓과 불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비참한 저주와 죽음의 역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드릴 때도 자기 스스로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철회할 때도 스스로 허물어 버렸습니다. 은혜로 시작했지만, 율법으로 인생을 비참하게 마쳤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한 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헌금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10개 중 모두가 하나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10개 중 하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드립시다.
초대교회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에서 벗어나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가슴으로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자기의 욕심을 부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께 시간의 십일조 운동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의 십일조를 잘해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란트의 십일조,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기 원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을지라도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이웃을 넉넉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 번 경험합시다. 하나님께 나의 나 된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시다. 우리 인생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이웃들을 위해서 살아갑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