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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 사랑의 배반

창세기 3: 1 ~ 7

김지철 목사

2018.03.18

에덴동산이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결혼, 사랑의 신비’라는 제목 아래 부부와 가정의 기쁨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별히 LOVE 라는 단어의 각 글자에서 의미를 가져와 가정에서도 실천해 보실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중 V는 Value, 곧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L은 Listen, 듣는 마음을 가져야 상대방이 존중 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O는 Offer, 상대방을 위해 시간과 돈과 정성을 내어 놓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네 번째 E는 Embrace, 포옹 곧 부부가 서로 스킨십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기쁨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실 때, 그들에게 ‘사랑놀이’를 하며 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태초의 에덴동산은 놀이터, ‘play ground’였습니다. 그곳에서 마음껏 뛰놀라고, 너희가 가진 지혜와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에덴동산을 잘 관리하라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play ground가 battle field가 되었습니다. 싸움터로 변질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누군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거짓말로 말입니다. 그는 뱀으로 분장한 사탄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지성과 이성을 지닌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인간을 떨어뜨려 놓을까’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짓이 동반된 유혹으로 인간을 무너뜨려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이간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사탄의 성격을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규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가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8:44 중)

마귀의 가장 큰 특징은 거짓에 있습니다. 그는 거짓말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그는 매우 철저히 전략을 짰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지닌 존재이면서도 감성을 지닌 존재임을 간파했습니다. 그러니 이성적 전략만 갖고는 인간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하곤, 거기에 감성을 추가합니다.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며 그의 마음을 뒤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며, 의심을 심어 넣습니다.

이성과 이성이 부딪히면 더 논리적인 이성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논리란 옳고 그름을 가르는 분별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만이 아닙니다. 감성을 지닌 존재요, 그렇기에 감성적 위기에 빠지게 되면 그렇게 곤고하던 이성도 쉽사리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성이란 굉장히 필요하고 긍정적인 것입니다. 오랜 기간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지혜와 총명, 판단력, 사고의 축적을 통해 얻어진 결과가 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비이성적인 말과 행동을 하면, 이성 스스로가 견제합니다. 하지만 그 이성에도 감성이 과잉되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감성이란 이성과 달리 순식간에 조성될 수 있는 강력한 격앙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감성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성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감성의 중심에 있는 자존심이 흔들리면, 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즉 감성적인 유혹이 성공하는 법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사탄이 바로 이 전략을 취했습니다.
우리나라에 토론 문화가 잘 정착되지 못했습니다. 토론을 하다 “너 같은 사람이 뭘 알아?”라고 한마디 하면 금세 토론이 종결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인신공격도 시작됩니다. 부부가 대화를 하다 종종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것도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당신, 남편이란 사람이 내게 해 준 게 도대체 뭐가 있어?” 이렇게 한마디 했다가 “아내라는 사람이 집에 있으면서 뭘 하는 거야?” 하고 자존심을 긁는 질타만 돌아올 뿐입니다. 지금까지 주고받던 모든 이성적인 질문과 대답은 사라지고, 그동안 쌓였던 감정적인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화할 때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분야가 사탄의 전문 분야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그의 이성을 쉽게 무너뜨립니다. 그러면서 심어놓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의심’입니다. 의심의 해석학을 사람의 마음에 심어 놓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헛갈리기 시작합니다. “정말 그래? 확실한 거야?”라고 되묻고 질문하게 됩니다.
물론 진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더 알고자 하는 물음은 필요합니다.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물음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진리가 무엇이지’ 질문함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물음은 우리를 타락의 늪에 빠지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은 아주 교활하고 위험한 사람입니다. 이미 답을 알면서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소위 상대방을 떠보는 것입니다. 계략을 가지고 질문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탄의 질문이 바로 그런 류입니다. 그는 여기서 ‘참으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1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 3:1 중)

그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포괄적으로 질문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냐고 말입니다. 아주 교묘한 수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진실성과 자비를 의심하게 합니다. 즉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만 뒤틀리고 왜곡되어도 엄청난 효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땐 그분 안에 신뢰가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신뢰한다. 너도 나를 신뢰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면서 그에게 허락하신 내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관계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는 교묘하게 우회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아, 하와야, 하나님은 없단다.” 이렇게 무신론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보이지 않는단다. 하나님은 너에게 관심이 없어서 너를 지켜보지 않는단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이 네게 자유를 준다고 했지? 그런데 그 자유는 사실 너를 제한하는 자유가 아닐까? 네가 탁월성을 계발하면 하나님도 너를 겁내지 않겠어?” 이렇게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에 대한 하와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2~3절입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세기 3:2~3)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며 하나님을 옹졸한 분으로 만듭니다. 이미 사탄의 미끼에 걸려든 모습입니다.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난 안 먹을 거야. 그러나 한 번 만져보곤 싶지. 어떻게 생겼길래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셨을까? 그저 한 번 만져보기만 할까?’ 강력한 호기심을 내비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또 한 번 바꿉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 열매를 먹으면 죽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죽을까 하노라’ 하고 말씀을 왜곡합니다. 어쩌면 죽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입니다. 의심의 해석학, 혹은 그간 마음에 품었던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의심의 미끼를 던진 사탄의 전략에 덥석 걸려들고 만 것입니다.
저는 낚시를 해 본 적이 없지만, 하루 종일 앉아서 낚시하시는 분들을 보면 ‘무슨 재미가 있어서 저런 시간을 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모르셔서 그럽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 낚싯대로 전해 오는 흔들림, 그 섬세한 무게감! 그 짜릿한 전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바로 그 맛 때문에 낚시를 합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탄도 인간에게 미끼를 던진 뒤 인간이 덥석 무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일 걸? 위선과 거짓의 신일 걸? 하나님은 너를 두려워해서 너를 제한하려 했을 걸?”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는 게 사탄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때로는 축소시키고, 때로는 과장합니다. 거짓말을 하되 거기에 진리를 조금 섞어놓습니다. 매우 고도의 전략입니다.
여러분,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이렇습니다. 거짓말만 하면 쉽게 들통나기 때문에 거짓 속에 진리를, 진리 속에 거짓을 섞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할 때도 제일 효과 있는 방법이 거짓말입니다. 전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약간 섞은 거짓을 말하며, 사람의 감정을 뒤흔듭니다.

사탄은 인간의 교만을 자극하면서 유혹합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식을 다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아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 이유를 설명할 때는 거짓에 진실을 섞습니다. 거짓이란 미끼를 이용해 사람의 마음을 낚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4)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해도 괜찮을 거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라고, 그로 인해 죽을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거짓을 심어 넣습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선포한 뒤엔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땐 감성적으로 접근해 인간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그는 이렇게 유인합니다. “너는 굉장히 중요한 존재야. 너는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존재야. 이 열매를 먹으면 너의 눈이 밝아질 거야. 그래서 네 모든 판단력이 하나님의 수준처럼 될 거야. 너희가 얼마나 탁월한 존재인지 모르고 있지? 너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억압 받아서는 안 돼.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변해. 그분과 대등한 위치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어서 이 열매를 먹어 봐.” 이렇게 아담과 하와를 부추겼습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팽창시킴으로 그의 교만을 부추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게 제한 받거나 지배될 수 없다며, 인간의 교만을 확장시켰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이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감성을 건드립니다. 그래서 감성이 풍부한 여성, 하와에게 먼저 접근했습니다. 여성이 더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더 상상력과 감성이 풍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다가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물음, ‘왜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말라고 했을까?’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하나님과 비슷하게 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을 자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남자 곧 아담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사탄과 여인이 대화하던 그 당시 아담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딘가 숨어 있는 걸까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가 그녀 바로 곁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탄과 여인의 대화 장면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말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너’라는 2인칭 단수를 사용하지 않고, ‘너희’라는 2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여인 역시 ‘나’라는 1인칭 단수를 사용한 게 아니라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와 바로 옆에 아담이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사탄과 하와가 대화할 때, 아담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건 안 돼.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라고 말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와에게 모든 결정권을 맡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그 길을 침묵하며 동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하와가 주는 열매를 아무 말 없이 함께 먹었습니다.
이런 창세기의 내용을 이해한 신약의 사도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 아담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그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아담 속에 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 속에 아담이 있어서 아담과 같은 죄악을 우리 인간이 범해 왔다는 뜻입니다.

타락으로 잃은 창조적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 종종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예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적인 문학가들이 그랬고, 무신론적인 철학자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무너뜨리려 한 시도들입니다. 대체로 이들은 세 가지 주장을 전개합니다. 첫째, 인간은 본래 지혜가 없는 자였으나, 선악과를 먹음으로 지혜자로 승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 억압 받던 상태에서 해방자, 자유자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셋째,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세상을 향해 저항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믿음의 사람들을 호도하는 거짓입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지혜자로 만들어졌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허락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며, 모든 생물과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즉 타락 이후 인간에게 지혜가 생긴 게 아니라 타락 이전 곧 창조의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혜를 허락하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셨습니다. 진정한 자유, 곧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도 억압 받지 않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위대한 자유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자유를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입니다. 구약 출애굽에서도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시고 구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또한 사탄과 죄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유를 허락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 역시 죽음도 하나님의 사람을 억압할 수 없다는 위대한 승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바로 이 ‘자유’의 선언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세 번째 저항의 능력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것에 도전하고, 관리하고, 다스리는 독보적인 권한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거짓의 세력, 억압의 세력에 저항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진정한 저항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타락이 인간의 저항 정신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받은 유혹을 예수님도 똑같이 받으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럼 이 돌을 떡덩이로 바꾸어 봐라. 저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려 봐라.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자. 그리고 나에게 절해 봐라.”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네 시대는 끝났다. 인간은 오직 ‘말씀’으로 살아야 진정으로 인간다워진다.”
오늘도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악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놀라운 축복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참 지혜자가 되려 한다면,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참된 자유를 얻고 싶다면,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악과 불의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 한다면, 다른 누가 아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자랑하는 이유, 그분을 믿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이미 명백합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복,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은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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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 1 ~ 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에덴동산이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결혼, 사랑의 신비’라는 제목 아래 부부와 가정의 기쁨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별히 LOVE 라는 단어의 각 글자에서 의미를 가져와 가정에서도 실천해 보실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중 V는 Value, 곧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L은 Listen, 듣는 마음을 가져야 상대방이 존중 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O는 Offer, 상대방을 위해 시간과 돈과 정성을 내어 놓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네 번째 E는 Embrace, 포옹 곧 부부가 서로 스킨십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기쁨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실 때, 그들에게 ‘사랑놀이’를 하며 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태초의 에덴동산은 놀이터, ‘play ground’였습니다. 그곳에서 마음껏 뛰놀라고, 너희가 가진 지혜와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에덴동산을 잘 관리하라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play ground가 battle field가 되었습니다. 싸움터로 변질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누군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거짓말로 말입니다. 그는 뱀으로 분장한 사탄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지성과 이성을 지닌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인간을 떨어뜨려 놓을까’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짓이 동반된 유혹으로 인간을 무너뜨려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이간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사탄의 성격을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규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가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8:44 중)

마귀의 가장 큰 특징은 거짓에 있습니다. 그는 거짓말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그는 매우 철저히 전략을 짰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지닌 존재이면서도 감성을 지닌 존재임을 간파했습니다. 그러니 이성적 전략만 갖고는 인간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하곤, 거기에 감성을 추가합니다.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며 그의 마음을 뒤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며, 의심을 심어 넣습니다.

이성과 이성이 부딪히면 더 논리적인 이성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논리란 옳고 그름을 가르는 분별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만이 아닙니다. 감성을 지닌 존재요, 그렇기에 감성적 위기에 빠지게 되면 그렇게 곤고하던 이성도 쉽사리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성이란 굉장히 필요하고 긍정적인 것입니다. 오랜 기간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지혜와 총명, 판단력, 사고의 축적을 통해 얻어진 결과가 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비이성적인 말과 행동을 하면, 이성 스스로가 견제합니다. 하지만 그 이성에도 감성이 과잉되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감성이란 이성과 달리 순식간에 조성될 수 있는 강력한 격앙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감성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성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감성의 중심에 있는 자존심이 흔들리면, 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즉 감성적인 유혹이 성공하는 법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사탄이 바로 이 전략을 취했습니다.
우리나라에 토론 문화가 잘 정착되지 못했습니다. 토론을 하다 “너 같은 사람이 뭘 알아?”라고 한마디 하면 금세 토론이 종결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인신공격도 시작됩니다. 부부가 대화를 하다 종종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것도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당신, 남편이란 사람이 내게 해 준 게 도대체 뭐가 있어?” 이렇게 한마디 했다가 “아내라는 사람이 집에 있으면서 뭘 하는 거야?” 하고 자존심을 긁는 질타만 돌아올 뿐입니다. 지금까지 주고받던 모든 이성적인 질문과 대답은 사라지고, 그동안 쌓였던 감정적인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화할 때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분야가 사탄의 전문 분야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그의 이성을 쉽게 무너뜨립니다. 그러면서 심어놓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의심’입니다. 의심의 해석학을 사람의 마음에 심어 놓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헛갈리기 시작합니다. “정말 그래? 확실한 거야?”라고 되묻고 질문하게 됩니다.
물론 진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더 알고자 하는 물음은 필요합니다.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물음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진리가 무엇이지’ 질문함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물음은 우리를 타락의 늪에 빠지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 질문하는 사람은 아주 교활하고 위험한 사람입니다. 이미 답을 알면서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소위 상대방을 떠보는 것입니다. 계략을 가지고 질문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탄의 질문이 바로 그런 류입니다. 그는 여기서 ‘참으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1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 3:1 중)

그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포괄적으로 질문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냐고 말입니다. 아주 교묘한 수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진실성과 자비를 의심하게 합니다. 즉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만 뒤틀리고 왜곡되어도 엄청난 효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땐 그분 안에 신뢰가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신뢰한다. 너도 나를 신뢰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면서 그에게 허락하신 내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관계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는 교묘하게 우회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아, 하와야, 하나님은 없단다.” 이렇게 무신론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보이지 않는단다. 하나님은 너에게 관심이 없어서 너를 지켜보지 않는단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이 네게 자유를 준다고 했지? 그런데 그 자유는 사실 너를 제한하는 자유가 아닐까? 네가 탁월성을 계발하면 하나님도 너를 겁내지 않겠어?” 이렇게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에 대한 하와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2~3절입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세기 3:2~3)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며 하나님을 옹졸한 분으로 만듭니다. 이미 사탄의 미끼에 걸려든 모습입니다.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난 안 먹을 거야. 그러나 한 번 만져보곤 싶지. 어떻게 생겼길래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셨을까? 그저 한 번 만져보기만 할까?’ 강력한 호기심을 내비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또 한 번 바꿉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 열매를 먹으면 죽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죽을까 하노라’ 하고 말씀을 왜곡합니다. 어쩌면 죽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입니다. 의심의 해석학, 혹은 그간 마음에 품었던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의심의 미끼를 던진 사탄의 전략에 덥석 걸려들고 만 것입니다.
저는 낚시를 해 본 적이 없지만, 하루 종일 앉아서 낚시하시는 분들을 보면 ‘무슨 재미가 있어서 저런 시간을 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모르셔서 그럽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 낚싯대로 전해 오는 흔들림, 그 섬세한 무게감! 그 짜릿한 전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바로 그 맛 때문에 낚시를 합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탄도 인간에게 미끼를 던진 뒤 인간이 덥석 무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일 걸? 위선과 거짓의 신일 걸? 하나님은 너를 두려워해서 너를 제한하려 했을 걸?” 이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는 게 사탄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때로는 축소시키고, 때로는 과장합니다. 거짓말을 하되 거기에 진리를 조금 섞어놓습니다. 매우 고도의 전략입니다.
여러분,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이렇습니다. 거짓말만 하면 쉽게 들통나기 때문에 거짓 속에 진리를, 진리 속에 거짓을 섞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할 때도 제일 효과 있는 방법이 거짓말입니다. 전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약간 섞은 거짓을 말하며, 사람의 감정을 뒤흔듭니다.

사탄은 인간의 교만을 자극하면서 유혹합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식을 다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아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 이유를 설명할 때는 거짓에 진실을 섞습니다. 거짓이란 미끼를 이용해 사람의 마음을 낚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4)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해도 괜찮을 거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라고, 그로 인해 죽을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거짓을 심어 넣습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선포한 뒤엔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땐 감성적으로 접근해 인간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그는 이렇게 유인합니다. “너는 굉장히 중요한 존재야. 너는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존재야. 이 열매를 먹으면 너의 눈이 밝아질 거야. 그래서 네 모든 판단력이 하나님의 수준처럼 될 거야. 너희가 얼마나 탁월한 존재인지 모르고 있지? 너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억압 받아서는 안 돼.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변해. 그분과 대등한 위치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어서 이 열매를 먹어 봐.” 이렇게 아담과 하와를 부추겼습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팽창시킴으로 그의 교만을 부추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게 제한 받거나 지배될 수 없다며, 인간의 교만을 확장시켰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이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감성을 건드립니다. 그래서 감성이 풍부한 여성, 하와에게 먼저 접근했습니다. 여성이 더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더 상상력과 감성이 풍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다가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물음, ‘왜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말라고 했을까?’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하나님과 비슷하게 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을 자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남자 곧 아담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사탄과 여인이 대화하던 그 당시 아담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딘가 숨어 있는 걸까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가 그녀 바로 곁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탄과 여인의 대화 장면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말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너’라는 2인칭 단수를 사용하지 않고, ‘너희’라는 2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여인 역시 ‘나’라는 1인칭 단수를 사용한 게 아니라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와 바로 옆에 아담이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사탄과 하와가 대화할 때, 아담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건 안 돼.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라고 말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와에게 모든 결정권을 맡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그 길을 침묵하며 동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하와가 주는 열매를 아무 말 없이 함께 먹었습니다.
이런 창세기의 내용을 이해한 신약의 사도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 아담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그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아담 속에 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 속에 아담이 있어서 아담과 같은 죄악을 우리 인간이 범해 왔다는 뜻입니다.

타락으로 잃은 창조적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 종종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예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적인 문학가들이 그랬고, 무신론적인 철학자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무너뜨리려 한 시도들입니다. 대체로 이들은 세 가지 주장을 전개합니다. 첫째, 인간은 본래 지혜가 없는 자였으나, 선악과를 먹음으로 지혜자로 승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 억압 받던 상태에서 해방자, 자유자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셋째,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세상을 향해 저항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믿음의 사람들을 호도하는 거짓입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지혜자로 만들어졌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허락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며, 모든 생물과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즉 타락 이후 인간에게 지혜가 생긴 게 아니라 타락 이전 곧 창조의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혜를 허락하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셨습니다. 진정한 자유, 곧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에도 억압 받지 않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위대한 자유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자유를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입니다. 구약 출애굽에서도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시고 구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또한 사탄과 죄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유를 허락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 역시 죽음도 하나님의 사람을 억압할 수 없다는 위대한 승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바로 이 ‘자유’의 선언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세 번째 저항의 능력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것에 도전하고, 관리하고, 다스리는 독보적인 권한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거짓의 세력, 억압의 세력에 저항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진정한 저항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타락이 인간의 저항 정신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받은 유혹을 예수님도 똑같이 받으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럼 이 돌을 떡덩이로 바꾸어 봐라. 저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려 봐라.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자. 그리고 나에게 절해 봐라.”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네 시대는 끝났다. 인간은 오직 ‘말씀’으로 살아야 진정으로 인간다워진다.”
오늘도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악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놀라운 축복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참 지혜자가 되려 한다면,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참된 자유를 얻고 싶다면,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악과 불의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 한다면, 다른 누가 아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자랑하는 이유, 그분을 믿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가 이미 명백합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복,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은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8년 3월 1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타락 : 사랑의 배반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0장, 27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3:1~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1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아담과 하와에게 놀이터(playground)로 허락하셨지만, 싸움터(battlefield)로 변질되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 거짓말이 동반된 유혹으로 인간에게 다가온 사탄 마귀 때문입니다(요8:44). 사탄은 어떻게 이성과 지성을 지닌 인간을 유혹해서 무너뜨렸습니까?

 

설교의 요약
이성에 감성을 더하여 무너뜨렸습니다. 사탄 마귀는 이성이 동반된 감성의 거짓말로 인간을 유혹하였습니다. 이성과 이성이 부딪치면 항상 더 논리적인 이성이 이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이성적인 인간에게 감성이 들어오면 쉽게 무너집니다. 특히 감성의 중심에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이성적인 사고를 상실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자존심의 자리에 의심을 심어 놓습니다. 물론 진리에 대한 의심은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물음은 우리를 타락의 늪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사탄의 전략은 간접적인 방식-하나님을 왜곡하여 전달함으로 의심을 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 것이다’고 단정하였지만, 여인은 ‘죽을까 하노라’하며 의심이라는 미끼에 걸려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사탄은 하나님을 이기적이요, 하나님은 위선과 거짓의 신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축소하거나 과장함으로 매도합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합니다. 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정면도전합니다. ② 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때에 거짓에 진실을 조금 섞어 사용합니다(4절). 인간의 고상한 자존심을 건드리며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존재’라고 금지 명령을 왜곡합니다(5절).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너 자신이 하나님이 될 수 있으며, 너는 네 인생의 결정권자이며, 누구에게 지배를 받거나 제한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유혹합니다.
감성이 풍부한 여성 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여자가 더 영적이며 상상력과 감성이 뛰어난 존재입니다. 바로 그 옆 자리에는 아담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탄과 여인의 대화를 살펴보면 ‘너’가 아니라 ‘너희들’, ‘나’가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옆에 아담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는 가만히 침묵하고 하와에게 모두 맡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대표적인 인간 아담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5:12절).
선악과를 먹은 것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① 지혜 없는 자가 지혜자가 되고 ② 억압을 받던 자가 해방자/자유자가 되며 ③ 세상을 저항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의 사람을 호도하는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지혜자로 만드셨고,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천후적인 자유를 보장하셨으며,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에 도전하고 관리하며 다스리는 독보적인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진정한 저항성을 상실했습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받은 유혹을 예수님도 똑같이 받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문제 해결자이시며, 수많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주님으로 고백하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악한 사탄 마귀가 내 마음에 심어놓은 의심의 씨앗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 악한 사탄 마귀는 감성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나는 어느 때에 자존심이 몹시 상합니까? 어떻게 그러한 순간을 극복하고 있습니까?
3. 악한 사탄 마귀의 시험 앞에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결단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우리 속에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무너짐이 있습니다.

용서하시고 우리 예수님 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삶의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대답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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