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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과 절제의 경계선에서 – 7대 죄악 6 ‘탐식’ –

누가복음 7: 33 ~ 35

김지철 목사

2014.03.30

먹는 것을 부추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들에게 각자 좋아하는 음식과 먹지 않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의외로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교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다양했는데, 그 중에는 어릴 적에 본 개를 잡는 모습이 너무 잔인해서 보신탕이 혐오 음식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보신탕 이야기를 하니 제 아들과 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삼십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보신탕을 먹고 집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무얼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보신탕을 먹었다고 말하자 보신탕이 무어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개고기라고 말해 주었더니 개를 좋아하던 아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개고기를 먹을 수가 있느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개를 좋아하는 아내까지 합세해서 저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보신탕을 먹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신탕을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교역자는,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못 먹는 게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없어서 못 먹는 경우이고 둘째는 안 줘서 못 먹는 경우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경계선 시리즈 여섯 번째 시간으로, ‘탐식과 절제의 경계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살면서 감사한 것 중 하나는, 식욕이 동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봤을 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건강하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본성이 바로 이 먹고 마시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 욕망을 부추기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방송국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먹거리 방송을 내보냅니다. 새로운 맛집이 어디에 생겼고, 또 먹는 사람을 비추면서 이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먹성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 방송을 내보낸 방송국이 조금 후엔 “여러분, 이제 다이어트를 할 때가 됐습니다.”라며 여러 다이어트 방법과 운동 모습을 보여주고 몸무게를 어떻게 줄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요리책과 먹거리 방송을 보면서는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하다가, 또 다이어트 방법과 체조를 보면서는 ‘어떻게 하면 날씬한 몸매를 가질 수 있을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그냥 먹고 싶고, 그러나 멋있는 몸매를 생각하면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먹는 것으로 유혹받기 쉽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처럼 중요한 태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땀 흘리며 수고했는데, 그 대가가 먹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하루의 즐거움을 먹는 것으로 삼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면서도 풍성한 음식 앞에서 ‘이걸 다 먹으면 안 되지. 절제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먹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즐거운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먹는 것에 심취해서 거기에만 몰입하는 것은 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맛있게 먹으면서도 거기에 몰입하지 않고, 때로는 절제할 줄 아는 마음의 태도를 갖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인간이 제일 먼저 타락하는 것이 먹거리 문제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첫 번째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무엇으로부터 시작됩니까?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가장 쉬운 것이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다가와서 말을 겁니다. “저것 봐라. 먹음직하지 않니? 보암직하지 않니?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지 않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 그냥 먹어라.” 사탄은 그렇게 인간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도 먹거리 문제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금식으로 굶주려 있으실 때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미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지금 먹고 싶은 게 뭐냐? 빵 아니냐?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돌덩이들을 빵이 되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와 영웅이 나왔구나! 구세주가 나왔구나!’ 하면서 너에게 달려들 텐데 그렇게 해봐라.”
그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혔던 것 역시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먹는 것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노예의 삶이었는데도 그곳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으면 가끔 고기도 먹고, 향료를 친 음식도 먹을 수 있는데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앞을 향해 가기보다 뒤돌아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쁠 때, 감사할 때, 무엇보다 하나님을 높일 때 먹고 마시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먹고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십계명을 받은 후 모세와 아론, 그리고 70명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산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으로 먹고 마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애굽기 24:11)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충동에 대한 것들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신 장소는 혼인잔치였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더 넘치고 풍족하게 베풀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인 비유들도 잔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태복음 22:2)

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아, 다 와라. 여기서 먹고 마셔라. 내가 주는 풍요를 누려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탕자의 비유를 보면, 멀리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면서 아버지는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성경은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23∼24)

“먹자. 마시고 즐거워하자. 함께 기뻐하자” 하는 것이 바로 천국 잔치가 벌어지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땅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도들을 초청하시면서 벌이시는 것도 잔치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9:9)

하나님은 천국에서도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셔서 하나님의 풍요를 경험하고 맛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듯 먹고 마시는 것은 좋고 귀한 것입니다. 그것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먹고 마시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먹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탐식은 감사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탐식하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을 내고, 혼자만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 문제입니다.
6세기 그레고리 1세 교황은 탐식의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중요한 시각입니다. 첫 번째는 너무 빨리 먹는 것을 말합니다. 허겁지겁 급하게 먹는 것입니다. 음식의 맛과 향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그냥 입에 집어넣고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건강을 위해서도 천천히 먹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래 씹으라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렇게 하면 과식을 피하게 되어 몸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거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급하게 먹는 사람 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음식이 먼저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햇볕과 비를 통해 귀한 열매가 자랐다는 것이나 농부의 수고와 요리한 사람의 정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음식 자체에 골몰하여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게걸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입에만 음식을 집어넣는 탐식입니다. 음식이 차려져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수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좋은 음식이나 반찬을 남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뷔페에 갔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그것만 먼저 잔뜩 담아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되돌아 봐야 됩니다. 내가 게걸스럽게 탐식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감사를 사라지게 합니다. 함께 음식을 나눠야 할 존재인 이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먹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입니다. 이미 배가 부른데도 ‘한 번만 더 !’ 하고 수저를 다시 내미는 것입니다. 음식점을 갈 때 무한리필이 되는 데만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음료가 리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을 무한리필 해주는 곳은 위험합니다. 과식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동물들도 배가 차면 아무리 음식을 앞에 갖다 주어도 먹지 않습니다. 개를 키우면서 지켜본 적이 있는데, 뭔가를 잘못 먹었는지 배가 아팠던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맛있는 것을 옆에 갖다 주어도 하루 이상을 먹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만 탐하는 개’가 아니더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떻습니까? 배가 아파도 약을 먹고 또 음식을 먹어댑니다. 사람만 그렇습니다. 동물들도 그렇지 않은데, 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먹는 것을 탐하기 시작하면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 또한 감사를 잃어버린 태도입니다. 먹는 것이 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질 않고, 먹는 것 자체에 내 정체성을 거는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까다롭게 먹는 것입니다. 이는 음식을 음미한다고 하면서, ‘나는 미식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들은 ‘이 음식 너무 싱겁지 않아? 이건 좀 짜지 않아? 여기에 무슨 향을 넣은 거지? 좀 과하지 않아?’ 하며 음식 만드는 사람들을 어렵게 합니다.
남편들이 이렇게 아내를 어렵게 합니까? 아니면 자녀들이 그러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한 번쯤 밥을 해 주지 않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까다롭게 먹는 것, 음식을 앞에 놓고 투정하며 불평하는 것은 제일 나쁜 태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한 마음에는 이미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내가 음식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판단이 먹거리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는 사치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아니면 가지를 않습니다. 비싼 음식이 아니거나 질이 좋은 음식이 아니면 손을 대지 않습니다. 향도 좋아야 하고, 색깔과 모양도 좋아야 하고, 분위기도 좋은 곳에서만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 맛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탐식입니다. 이러한 탐식은 과식과 과음, 폭식과 폭음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성을 망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육신의 정욕에 지배받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바꾸어 버립니다.
이러한 자세에 감사가 있을 리 없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 먹을 것이 없는 사람, 병약해서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는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탐식은, 먹고 마시는 육체적인 문제만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문제이고, 또 영적인 문제입니다. 탐식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자신의 모든 생각을 쏟아붓기 때문에, 그들의 배와 위가 곧 우상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립보서 3:19)

먹는 것에 탐욕을 부리면, 그것이 영적인 문제로 변질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역사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할까요?

탐식의 반대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먹고 마시는 자, 탐식하는 자’라는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뚜기나 들판에 있는 야생꿀만 먹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귀신 들린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향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의 식사 자리는 어떤 자리였을까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축제를 벌이는 자리였습니다. 혼인 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먹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축복임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태도로 음식을 대하셨을까요? 탐식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저번에, ‘게으름의 반대는 근면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사랑을 하면 게으름이 없어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보십시오. 얼마나 정성을 쏟습니까?
탐식의 반대도 같습니다. 절제라기보다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감사할 줄 알게 되면, 절제가 생깁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내가 귀한만큼 남도 귀한 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때로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때로는 부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잔치’라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에서 이야기합니다. ‘감사’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디모데전서 4:3∼4)

먹을 때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농부들이 수고하고 땀 흘려 제가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으면, 먹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먹고 마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줄 알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식욕을 주신 하나님,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 배설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먹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게 되면, 가난하여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 식탁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랑과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 때문에, 혹은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쪽의 백성처럼 먹지 못해서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먹는 것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촌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염려하고 배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말씀의 잔치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제 예배가 끝나면 육신의 양식을 먹게 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실 생각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가 이렇게 귀한 음식을 주시는구나.’ ‘자녀들과 함께 먹으면서 하나님을 기뻐해야겠구나.’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먹는 기쁨이고 마시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감사할 줄 알면서 먹는 것,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이 말씀 잔치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의 인생 가운데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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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 33 ~ 35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먹는 것을 부추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들에게 각자 좋아하는 음식과 먹지 않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의외로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교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다양했는데, 그 중에는 어릴 적에 본 개를 잡는 모습이 너무 잔인해서 보신탕이 혐오 음식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보신탕 이야기를 하니 제 아들과 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삼십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보신탕을 먹고 집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무얼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보신탕을 먹었다고 말하자 보신탕이 무어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래서 개고기라고 말해 주었더니 개를 좋아하던 아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개고기를 먹을 수가 있느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개를 좋아하는 아내까지 합세해서 저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보신탕을 먹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신탕을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교역자는,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못 먹는 게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없어서 못 먹는 경우이고 둘째는 안 줘서 못 먹는 경우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경계선 시리즈 여섯 번째 시간으로, ‘탐식과 절제의 경계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살면서 감사한 것 중 하나는, 식욕이 동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봤을 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건강하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본성이 바로 이 먹고 마시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 욕망을 부추기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방송국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먹거리 방송을 내보냅니다. 새로운 맛집이 어디에 생겼고, 또 먹는 사람을 비추면서 이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먹성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 방송을 내보낸 방송국이 조금 후엔 “여러분, 이제 다이어트를 할 때가 됐습니다.”라며 여러 다이어트 방법과 운동 모습을 보여주고 몸무게를 어떻게 줄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요리책과 먹거리 방송을 보면서는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하다가, 또 다이어트 방법과 체조를 보면서는 ‘어떻게 하면 날씬한 몸매를 가질 수 있을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그냥 먹고 싶고, 그러나 멋있는 몸매를 생각하면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먹는 것으로 유혹받기 쉽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처럼 중요한 태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땀 흘리며 수고했는데, 그 대가가 먹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하루의 즐거움을 먹는 것으로 삼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면서도 풍성한 음식 앞에서 ‘이걸 다 먹으면 안 되지. 절제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먹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즐거운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먹는 것에 심취해서 거기에만 몰입하는 것은 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맛있게 먹으면서도 거기에 몰입하지 않고, 때로는 절제할 줄 아는 마음의 태도를 갖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인간이 제일 먼저 타락하는 것이 먹거리 문제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첫 번째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무엇으로부터 시작됩니까?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가장 쉬운 것이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다가와서 말을 겁니다. “저것 봐라. 먹음직하지 않니? 보암직하지 않니?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지 않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 그냥 먹어라.” 사탄은 그렇게 인간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도 먹거리 문제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금식으로 굶주려 있으실 때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미혹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지금 먹고 싶은 게 뭐냐? 빵 아니냐?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돌덩이들을 빵이 되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와 영웅이 나왔구나! 구세주가 나왔구나!’ 하면서 너에게 달려들 텐데 그렇게 해봐라.”
그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혔던 것 역시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먹는 것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노예의 삶이었는데도 그곳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으면 가끔 고기도 먹고, 향료를 친 음식도 먹을 수 있는데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앞을 향해 가기보다 뒤돌아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쁠 때, 감사할 때, 무엇보다 하나님을 높일 때 먹고 마시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먹고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십계명을 받은 후 모세와 아론, 그리고 70명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산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으로 먹고 마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애굽기 24:11)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충동에 대한 것들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신 장소는 혼인잔치였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더 넘치고 풍족하게 베풀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인 비유들도 잔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태복음 22:2)

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아, 다 와라. 여기서 먹고 마셔라. 내가 주는 풍요를 누려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탕자의 비유를 보면, 멀리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면서 아버지는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성경은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23∼24)

“먹자. 마시고 즐거워하자. 함께 기뻐하자” 하는 것이 바로 천국 잔치가 벌어지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땅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도들을 초청하시면서 벌이시는 것도 잔치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9:9)

하나님은 천국에서도 우리를 잔치에 초대하셔서 하나님의 풍요를 경험하고 맛보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듯 먹고 마시는 것은 좋고 귀한 것입니다. 그것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먹고 마시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먹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탐식은 감사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탐식하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을 내고, 혼자만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 문제입니다.
6세기 그레고리 1세 교황은 탐식의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중요한 시각입니다. 첫 번째는 너무 빨리 먹는 것을 말합니다. 허겁지겁 급하게 먹는 것입니다. 음식의 맛과 향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그냥 입에 집어넣고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건강을 위해서도 천천히 먹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래 씹으라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렇게 하면 과식을 피하게 되어 몸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거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급하게 먹는 사람 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음식이 먼저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햇볕과 비를 통해 귀한 열매가 자랐다는 것이나 농부의 수고와 요리한 사람의 정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음식 자체에 골몰하여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게걸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입에만 음식을 집어넣는 탐식입니다. 음식이 차려져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수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좋은 음식이나 반찬을 남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뷔페에 갔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그것만 먼저 잔뜩 담아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되돌아 봐야 됩니다. 내가 게걸스럽게 탐식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감사를 사라지게 합니다. 함께 음식을 나눠야 할 존재인 이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입니다. 함께 먹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입니다. 이미 배가 부른데도 ‘한 번만 더 !’ 하고 수저를 다시 내미는 것입니다. 음식점을 갈 때 무한리필이 되는 데만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음료가 리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을 무한리필 해주는 곳은 위험합니다. 과식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동물들도 배가 차면 아무리 음식을 앞에 갖다 주어도 먹지 않습니다. 개를 키우면서 지켜본 적이 있는데, 뭔가를 잘못 먹었는지 배가 아팠던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맛있는 것을 옆에 갖다 주어도 하루 이상을 먹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만 탐하는 개’가 아니더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떻습니까? 배가 아파도 약을 먹고 또 음식을 먹어댑니다. 사람만 그렇습니다. 동물들도 그렇지 않은데, 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먹는 것을 탐하기 시작하면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 또한 감사를 잃어버린 태도입니다. 먹는 것이 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질 않고, 먹는 것 자체에 내 정체성을 거는 것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까다롭게 먹는 것입니다. 이는 음식을 음미한다고 하면서, ‘나는 미식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들은 ‘이 음식 너무 싱겁지 않아? 이건 좀 짜지 않아? 여기에 무슨 향을 넣은 거지? 좀 과하지 않아?’ 하며 음식 만드는 사람들을 어렵게 합니다.
남편들이 이렇게 아내를 어렵게 합니까? 아니면 자녀들이 그러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한 번쯤 밥을 해 주지 않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까다롭게 먹는 것, 음식을 앞에 놓고 투정하며 불평하는 것은 제일 나쁜 태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한 마음에는 이미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내가 음식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판단이 먹거리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는 사치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아니면 가지를 않습니다. 비싼 음식이 아니거나 질이 좋은 음식이 아니면 손을 대지 않습니다. 향도 좋아야 하고, 색깔과 모양도 좋아야 하고, 분위기도 좋은 곳에서만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 맛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탐식입니다. 이러한 탐식은 과식과 과음, 폭식과 폭음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성을 망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육신의 정욕에 지배받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바꾸어 버립니다.
이러한 자세에 감사가 있을 리 없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 먹을 것이 없는 사람, 병약해서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는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탐식은, 먹고 마시는 육체적인 문제만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문제이고, 또 영적인 문제입니다. 탐식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자신의 모든 생각을 쏟아붓기 때문에, 그들의 배와 위가 곧 우상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립보서 3:19)

먹는 것에 탐욕을 부리면, 그것이 영적인 문제로 변질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역사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할까요?

탐식의 반대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먹고 마시는 자, 탐식하는 자’라는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뚜기나 들판에 있는 야생꿀만 먹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귀신 들린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향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의 식사 자리는 어떤 자리였을까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축제를 벌이는 자리였습니다. 혼인 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먹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축복임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태도로 음식을 대하셨을까요? 탐식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저번에, ‘게으름의 반대는 근면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사랑을 하면 게으름이 없어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보십시오. 얼마나 정성을 쏟습니까?
탐식의 반대도 같습니다. 절제라기보다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감사할 줄 알게 되면, 절제가 생깁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내가 귀한만큼 남도 귀한 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때로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때로는 부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잔치’라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에서 이야기합니다. ‘감사’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디모데전서 4:3∼4)

먹을 때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농부들이 수고하고 땀 흘려 제가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으면, 먹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먹고 마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줄 알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식욕을 주신 하나님,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 배설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먹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게 되면, 가난하여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 식탁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랑과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 때문에, 혹은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쪽의 백성처럼 먹지 못해서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먹는 것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촌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염려하고 배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말씀의 잔치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제 예배가 끝나면 육신의 양식을 먹게 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실 생각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가 이렇게 귀한 음식을 주시는구나.’ ‘자녀들과 함께 먹으면서 하나님을 기뻐해야겠구나.’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먹는 기쁨이고 마시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감사할 줄 알면서 먹는 것,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이 말씀 잔치를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의 인생 가운데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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