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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자족의 경계선에서 – 7대 죄악 5 ‘탐욕’ 

누가복음 12: 16 ~ 21

김지철 목사

2014.03.23

큰돈을 가진 한 부자가 있습니다.

그림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인 램브란트가 1627년에 그린 것으로 오늘 본문 내용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배경으로 한 그림입니다. 놀랍게도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때, 그의 나이는 21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상상력으로 이 같은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그의 그림은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강조점을 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 부자가 돈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염두에 두시면서 이 그림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밤은 아주 깊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이 부자의 인생도 마치 밤처럼 끝자락에 놓여 있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주름진 이마와 얼굴은 황혼기에 든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책상 위에는 금화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땅문서, 집문서 등 그동안 거래했던 문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그림을 더 확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경을 낀 부자는 동전을 쥐고 있습니다. 부자의 눈은 오로지 이 금화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촛불이 금화를 살피는 그의 얼굴을 비춥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의 관심과 애정은 금화입니다. 그리고 돈을 세는 재미에 부자는 깊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많은 소출을 낸 한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곡식 쌓아 둘 곳을 생각하다가, 지금의 곳간을 헐고 더 큰 것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곡식과 재물 등을 모아 두겠다고 계획을 세웁니다. ‘이 많은 것들을 쌓아두고 쉼을 누려야지. 먹고 마시고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지.’
그런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2:20)

“많은 돈을 열심히 세어도 보고, 인생에 돈 모으는 재미가 있어도, 네 목숨을 오늘 끊어 가면 네가 그렇게 모은 많은 소유들이 도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나누고 있는 경계선 시리즈 중 오늘은 ‘탐욕과 자족의 경계선’이라는 제목으로 탐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본문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가 정말 못된 사람, 나쁜 사람인가 하고 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니 괜찮은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의 CEO들이 갖고 있는 특성을 2천 년 전 이 비유 속 부자가 갖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째로 이 부자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16절 말씀에는 간단하게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풍성한 소출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공동체나 집단이 복을 받는 것은 그 집단의 주인이 열심과 열정이 있느냐, 수고하고 땀을 흘리느냐에 따릅니다. 주인이 열심을 내지 않는데 어떻게 하인들이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그것은 이 부자 주인이 자기도 힘써 애썼다는 것을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부자는 생각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대비하였습니다. ‘지금은 무엇이 부족한가’를 묻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누가복음 12:17)

곡식이 많은데 곡식을 모아 둘 창고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의 문제점을 알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풍요로운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할 뿐만 아니라 실천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누가복음 12:18)

그는 계획성이 있고, 실천력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괜찮은 CEO라고 할 수 있습니까?
네 번째, 그는 미래를 준비한 다음 오늘을 누릴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누가복음 12:19)

그는 인간적으로 완벽한 인물이었습니다. 2천 년 전의 부자였지만, 오늘날 기업인들이 갖고 있는 덕목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했습니다. 미래를 대비하여 오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계획했습니다.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현재를 즐기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부자의 삶에 심각한 브레이크를 거십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그에게는 ‘나’와 ‘돈’만 있었습니다.

이 부자를 보면, ‘내가, 내 곡식, 내 곳간, 내 영혼, 내 물건, 내 재물’ 등 ‘나의 것’이라는 말을 일곱 번에서 여덟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있는데 내 가족이 없습니다. ‘나’는 있는데 내 친구와 이웃이 없습니다. ‘나’는 있는데 하나님이 없습니다. 돈과 재물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만 삶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라고 꾸중하시는 것입니다.
소출이 풍성할 때, 넉넉할 때에 부자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자신의 인생은 탄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돈에 대한 만족은 돈에 대한 불만족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만큼 벌면 되겠다’ 하고 목표를 정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돈은 곧 그 다음 목표를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면 잠시는 갈증이 풀리는 듯하다가 또다시 갈증이 생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하게 되면서 결국 모든 생각과 마음이 돈에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작년에 한국 투명성 기구에서 청소년과 성인 2천 명에게 청렴과 도덕성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내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거짓말, 속임수, 위법, 권력남용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청소년, 대학생들이 무려 40%나 되었습니다. 그러면 서른 살이 넘은 성년들은 달랐을까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31%가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고, 법을 어겨서도 부자가 되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40%인 것입니다. 설문을 한 이들은 부자의 1%나 부자의 10%가 아닙니다. 우리의 젊은 자녀들입니다. 40%가 돈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세는 재미로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 부자에게는 또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자기 존재의 이유를 돈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돈이 최고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과 재물을 소유할 것인가…!’ 그는 소유물에 의해 자기 삶을 규정했습니다. 그러자 영적인 것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램브란트의 그림에서 보여지듯 황금 외의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돈 모으는 재미가 인생의 유일한 재미가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혹시 일중독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돈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일중독에 쉽게 빠집니다. 일중독에 빠지면 뭐가 안 보입니까? 가족이 안 보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부모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도 어디 계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돈에 취한 사람들은 의도적인 무신론자가 됩니다. 그래야 일중독을 모면하려고 잠시 빠진 세상의 쾌락에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인간은 하루라도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질이 중요하지만, 물질보다 더 큰 것에 인생의 목적을 두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목표가 있어야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물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자의 세 번째 문제는, 소유가 많으면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는 ‘오늘을 즐겨야겠다’고 선언합니다. 오늘을 즐기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오늘을 즐깁니다. 오늘 쉬고, 오늘 먹고 마시며 오늘 즐거워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인생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면서 오늘을 즐기게 되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따뜻한 손을 만질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있어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축복임을 알고 영혼이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즐기게 되면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현재를 즐기는 것 안에 자신만의 쾌락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도, 이웃도 배제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가진 건강, 생명, 가족, 직업, 신앙, 교회 이 모든 것이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는 돈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재물에 대해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돈을 멀리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돈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도된 신화들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 중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첫째, ‘돈은 그냥 물물교환을 대체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돈이란 가치중립적이다. 무언가를 사고팔 때 교환하는 매개체에 불가하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돈은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한 번 만지면 애착을 갖게 됩니다.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더 있기를 열망합니다. 돈을 잃어버리면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합니다. 자꾸만 미련이 남는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돈은 우리를 그 안에 빠져들게 합니다. 돈은 이 세상에서 무소불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남녀의 사랑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권력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돈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에 애착을 가지고 돈에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탐욕스러운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모든 악의 뿌리가 바로 이 탐욕에서부터 생긴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돈을 그저 물물교환을 대체하는 수단이라고 하는 이 오도된 신화를 우리는 깨뜨려야 합니다.
또 하나, 이것은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신화입니다. ‘우선 돈을 열심히 벌자. 그리고 부자가 된 후에 하나님의 일을 본격적으로 하면 된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 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 실제로 돈을 버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던가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돈을 벌게 되면 하나님을 뒷전에 두고 돈을 더 벌고 싶어집니다. 그러다가 돈을 못 벌게 되면 뒷전에 두었던 하나님을 탓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자녀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대부분의 부모가 특별대우를 합니다. 때로는 자녀들에게 아첨까지 합니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3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3 엄마는 아무도 안 건드린다’는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합니다. ‘고3 엄마는 하나님조차도 건드리시지 않는다.’ 정말 그럴까요? “그래, 너는 오직 학교와 학원에만 가라. 대학교만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 교회생활을 해라.” 그렇게 해서 대학에 간 아이들이 교회 생활을 할까요? 결코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한 짓을 해도 돈을 우선 많이 벌고, 그 후에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며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돈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보면, 예수님도 인간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소중한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돈과 하나님이 동등한 자리까지 올라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돈이 강력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선후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돈이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려면 먼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보이는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알아야 돈을 통제할 수 있고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쫓아가다가 보이는 것도 망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은 돈을 굉장히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돈과 재물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력해서 열심히 벌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사용하라고 합니다.
돈의 바른 사용의 비결로 가르치는 것이 바로 십의 일조 헌금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헌금하시는 분들을 보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십의 일조를 드리는 분들을 보면 눈물겹도록 귀하고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십의 일조 헌금은, 돈과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잠시 맡기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징표가 십의 일조 헌금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하고 배가 고파서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도록 우리에게 십의 일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내가 재물을 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있구나.’ 하는 것을 가늠하도록 하는 것이 십의 일조 헌금입니다.
저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들이 돈을 벌게 되면 십의 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의무다. 그래야 네가 이 돈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 줄 알게 되고, 네게 있는 재물을 다스릴 수 있는 자유자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말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너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다시 십의 일조를 이웃을 위해서 써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써라. 그리고 다시 십의 일조를 부모를 위해서 써라. 부모님을 섬기기 위해서 써라. 그리고 10분의 7을 네가 써라.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고 네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라. 그리고 인생이 끝나게 되면 네게 있는 재물 중에 절반은 자녀에게 물려주고 나머지 절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라.”

우리가 구할 것은 하늘의 보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돈과 재물의 노예입니까, 아니면 돈을 다스리는 자입니까? 본문 21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 부자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21)

재물에 대한 몰입해서 벗어나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하나님께 물을 때 우리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 탐욕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돈을 열심히 벌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다스릴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한 순간에 사라질 이 땅의 재물이 아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늘의 보화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귀한 하나님의 아들들, 딸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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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 16 ~ 21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큰돈을 가진 한 부자가 있습니다.

그림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네덜란드의 화가인 램브란트가 1627년에 그린 것으로 오늘 본문 내용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배경으로 한 그림입니다. 놀랍게도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때, 그의 나이는 21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상상력으로 이 같은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그의 그림은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강조점을 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 부자가 돈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염두에 두시면서 이 그림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밤은 아주 깊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이 부자의 인생도 마치 밤처럼 끝자락에 놓여 있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주름진 이마와 얼굴은 황혼기에 든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책상 위에는 금화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땅문서, 집문서 등 그동안 거래했던 문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그림을 더 확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경을 낀 부자는 동전을 쥐고 있습니다. 부자의 눈은 오로지 이 금화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촛불이 금화를 살피는 그의 얼굴을 비춥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의 관심과 애정은 금화입니다. 그리고 돈을 세는 재미에 부자는 깊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많은 소출을 낸 한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곡식 쌓아 둘 곳을 생각하다가, 지금의 곳간을 헐고 더 큰 것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곡식과 재물 등을 모아 두겠다고 계획을 세웁니다. ‘이 많은 것들을 쌓아두고 쉼을 누려야지. 먹고 마시고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지.’
그런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2:20)

“많은 돈을 열심히 세어도 보고, 인생에 돈 모으는 재미가 있어도, 네 목숨을 오늘 끊어 가면 네가 그렇게 모은 많은 소유들이 도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나누고 있는 경계선 시리즈 중 오늘은 ‘탐욕과 자족의 경계선’이라는 제목으로 탐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본문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가 정말 못된 사람, 나쁜 사람인가 하고 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니 괜찮은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의 CEO들이 갖고 있는 특성을 2천 년 전 이 비유 속 부자가 갖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째로 이 부자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16절 말씀에는 간단하게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풍성한 소출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공동체나 집단이 복을 받는 것은 그 집단의 주인이 열심과 열정이 있느냐, 수고하고 땀을 흘리느냐에 따릅니다. 주인이 열심을 내지 않는데 어떻게 하인들이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그것은 이 부자 주인이 자기도 힘써 애썼다는 것을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부자는 생각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대비하였습니다. ‘지금은 무엇이 부족한가’를 묻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누가복음 12:17)

곡식이 많은데 곡식을 모아 둘 창고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의 문제점을 알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풍요로운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할 뿐만 아니라 실천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누가복음 12:18)

그는 계획성이 있고, 실천력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괜찮은 CEO라고 할 수 있습니까?
네 번째, 그는 미래를 준비한 다음 오늘을 누릴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누가복음 12:19)

그는 인간적으로 완벽한 인물이었습니다. 2천 년 전의 부자였지만, 오늘날 기업인들이 갖고 있는 덕목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했습니다. 미래를 대비하여 오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계획했습니다.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현재를 즐기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부자의 삶에 심각한 브레이크를 거십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그에게는 ‘나’와 ‘돈’만 있었습니다.

이 부자를 보면, ‘내가, 내 곡식, 내 곳간, 내 영혼, 내 물건, 내 재물’ 등 ‘나의 것’이라는 말을 일곱 번에서 여덟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는 있는데 내 가족이 없습니다. ‘나’는 있는데 내 친구와 이웃이 없습니다. ‘나’는 있는데 하나님이 없습니다. 돈과 재물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만 삶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라고 꾸중하시는 것입니다.
소출이 풍성할 때, 넉넉할 때에 부자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자신의 인생은 탄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돈에 대한 만족은 돈에 대한 불만족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만큼 벌면 되겠다’ 하고 목표를 정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돈은 곧 그 다음 목표를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면 잠시는 갈증이 풀리는 듯하다가 또다시 갈증이 생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하게 되면서 결국 모든 생각과 마음이 돈에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작년에 한국 투명성 기구에서 청소년과 성인 2천 명에게 청렴과 도덕성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내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거짓말, 속임수, 위법, 권력남용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청소년, 대학생들이 무려 40%나 되었습니다. 그러면 서른 살이 넘은 성년들은 달랐을까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31%가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고, 법을 어겨서도 부자가 되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40%인 것입니다. 설문을 한 이들은 부자의 1%나 부자의 10%가 아닙니다. 우리의 젊은 자녀들입니다. 40%가 돈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세는 재미로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 부자에게는 또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자기 존재의 이유를 돈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돈이 최고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과 재물을 소유할 것인가…!’ 그는 소유물에 의해 자기 삶을 규정했습니다. 그러자 영적인 것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램브란트의 그림에서 보여지듯 황금 외의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돈 모으는 재미가 인생의 유일한 재미가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혹시 일중독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돈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일중독에 쉽게 빠집니다. 일중독에 빠지면 뭐가 안 보입니까? 가족이 안 보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부모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도 어디 계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돈에 취한 사람들은 의도적인 무신론자가 됩니다. 그래야 일중독을 모면하려고 잠시 빠진 세상의 쾌락에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인간은 하루라도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질이 중요하지만, 물질보다 더 큰 것에 인생의 목적을 두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목표가 있어야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물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자의 세 번째 문제는, 소유가 많으면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는 ‘오늘을 즐겨야겠다’고 선언합니다. 오늘을 즐기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오늘을 즐깁니다. 오늘 쉬고, 오늘 먹고 마시며 오늘 즐거워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인생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면서 오늘을 즐기게 되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따뜻한 손을 만질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있어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축복임을 알고 영혼이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즐기게 되면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현재를 즐기는 것 안에 자신만의 쾌락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도, 이웃도 배제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가진 건강, 생명, 가족, 직업, 신앙, 교회 이 모든 것이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는 돈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재물에 대해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돈을 멀리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돈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도된 신화들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 중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첫째, ‘돈은 그냥 물물교환을 대체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돈이란 가치중립적이다. 무언가를 사고팔 때 교환하는 매개체에 불가하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돈은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한 번 만지면 애착을 갖게 됩니다.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더 있기를 열망합니다. 돈을 잃어버리면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합니다. 자꾸만 미련이 남는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돈은 우리를 그 안에 빠져들게 합니다. 돈은 이 세상에서 무소불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남녀의 사랑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권력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돈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에 애착을 가지고 돈에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탐욕스러운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모든 악의 뿌리가 바로 이 탐욕에서부터 생긴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돈을 그저 물물교환을 대체하는 수단이라고 하는 이 오도된 신화를 우리는 깨뜨려야 합니다.
또 하나, 이것은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신화입니다. ‘우선 돈을 열심히 벌자. 그리고 부자가 된 후에 하나님의 일을 본격적으로 하면 된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 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 실제로 돈을 버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던가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돈을 벌게 되면 하나님을 뒷전에 두고 돈을 더 벌고 싶어집니다. 그러다가 돈을 못 벌게 되면 뒷전에 두었던 하나님을 탓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갑니다.
자녀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대부분의 부모가 특별대우를 합니다. 때로는 자녀들에게 아첨까지 합니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3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3 엄마는 아무도 안 건드린다’는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합니다. ‘고3 엄마는 하나님조차도 건드리시지 않는다.’ 정말 그럴까요? “그래, 너는 오직 학교와 학원에만 가라. 대학교만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 교회생활을 해라.” 그렇게 해서 대학에 간 아이들이 교회 생활을 할까요? 결코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한 짓을 해도 돈을 우선 많이 벌고, 그 후에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며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돈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보면, 예수님도 인간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소중한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돈과 하나님이 동등한 자리까지 올라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돈이 강력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선후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돈이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려면 먼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보이는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알아야 돈을 통제할 수 있고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쫓아가다가 보이는 것도 망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은 돈을 굉장히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돈과 재물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력해서 열심히 벌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사용하라고 합니다.
돈의 바른 사용의 비결로 가르치는 것이 바로 십의 일조 헌금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헌금하시는 분들을 보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십의 일조를 드리는 분들을 보면 눈물겹도록 귀하고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십의 일조 헌금은, 돈과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잠시 맡기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징표가 십의 일조 헌금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하고 배가 고파서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도록 우리에게 십의 일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내가 재물을 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있구나.’ 하는 것을 가늠하도록 하는 것이 십의 일조 헌금입니다.
저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들이 돈을 벌게 되면 십의 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의무다. 그래야 네가 이 돈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 줄 알게 되고, 네게 있는 재물을 다스릴 수 있는 자유자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말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너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다시 십의 일조를 이웃을 위해서 써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써라. 그리고 다시 십의 일조를 부모를 위해서 써라. 부모님을 섬기기 위해서 써라. 그리고 10분의 7을 네가 써라. 어떤 일을 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고 네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라. 그리고 인생이 끝나게 되면 네게 있는 재물 중에 절반은 자녀에게 물려주고 나머지 절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라.”

우리가 구할 것은 하늘의 보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돈과 재물의 노예입니까, 아니면 돈을 다스리는 자입니까? 본문 21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 부자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21)

재물에 대한 몰입해서 벗어나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하나님께 물을 때 우리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 탐욕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돈을 열심히 벌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다스릴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한 순간에 사라질 이 땅의 재물이 아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늘의 보화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귀한 하나님의 아들들, 딸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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