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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중심에는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계명을 다 기억하십니까? 제1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제2계명은 ‘너를 위해 세긴 우상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어떤 형상이로든지 만들지 말라.’ 제3계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1계명-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는 계명입니다.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 제8계명은 ‘도둑질 하지 말라.’ 제9계명은 ‘네 이웃의 대하여 거짓증언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웃을 존귀하게 만들었으니 우리도 이웃을 존귀하게 생각하며 해를 끼치지 말고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계명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탐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먼저 말씀하시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내면세계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는 탐욕의 세계를 멈추라고 하십니다. 내면세계란 인간의 삶의 뿌리와 같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세워질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탐욕이 인간의 삶을 가장 해롭게 하는 해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탐욕이 지닌 멘탈리티, 일종의 정신구조에는 잘 되면 내 탓, 내 공로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 남의 탓이라는 사고방식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런 모습이 자주 발견되면 그것은 내 속에 탐욕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자녀가 부주의해서 우유가 담긴 컵을 넘어뜨려 쏟으면 우리 마음에 곧 꾸중할 말이 생각납니다. “아니 눈을 뜨고도 그것을 보지 못하느냐?” 그런데 정작 자기가 컵을 쏟으면 이렇게 말이 바뀝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컵을 여기 갖다놨어?” 이처럼 인간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므로 다투고 갈등합니다.
탐욕은 타락한 욕망이며 탈선한 욕구입니다.
게르트루트 휠러라는 사람은 「탐욕」이라는 책에서 탐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탐욕이란 탈선한 요구이자 타락한 욕망이다.” 즉 탐욕이라는 것은 욕망은 욕망인데 타락한 욕망이고, 욕구는 욕구인데 탈선한 욕구라는 것입니다. 탐욕은 마치 정상궤도를 벗어난 기차와도 같습니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래서 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뾰족한 것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탐욕이 가진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탐욕은 근본적으로 인간됨을 깨트리는 악입니다. 탐욕이 있으면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과 권력, 인간의 쾌락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사랑해도 이기적으로 집착하면서 사랑하려고 합니다. 정치권력을 탐하는 것과 돈과 재물이 찰떡처럼 맞아떨어지면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 돈을 흘려놓고 언젠가는 권력과 함께 움직이는 세상의 모습들을 신문지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탐욕이 있습니다. 탐욕의 마음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하수인처럼 생각합니다.
두 번째, 탐욕에는 만족감이 없습니다. 탐욕은 불만족한 욕구를 끊임없이 양산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탐욕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 더 강한 것, 더 높은 것을 향하여 몸부림치며 추구하는 것이 바로 탐욕의 정신입니다. 멈출 줄을 모릅니다. 끝없이 상승하는 욕망 때문에 무엇이 성취되고 이루어져도 마음에 만족감이 없습니다. 기쁨은 잠깐이며 또 욕구가 생겨 감사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불평스럽고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것이 철저하게 무너질 때에야 인생을 허비하고 거짓된 것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 번째, 탐욕은 중독 증세를 심화시킵니다. 고상한 만족감을 얻게 하지 못합니다. 중독에 빠져서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탐욕을 가진 사람은 사냥꾼과도 같이 호시탐탐 노립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사냥감이 됩니다. 자기는 탐욕으로 남의 것을 빼앗지만 자기 자신이 사냥감으로 전락하여 희생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손안에 들어올 때까지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머리에서 떠나지도 않고 잠도 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질 때까지 추구하는 자신이 이미 사냥감이 되어 올바른 판단력이 마비됩니다.
우리의 가치는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해야 하지만 자녀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야 하지만 아내와 남편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집착하면 삶이 즐겁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고 나도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은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넉넉해지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면서 비전과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품을 좋아합니다. 명품이 필요하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품에 중독되는 것은 볼품이 없습니다. 중독증은 자기 열등감의 증거입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 외모 지상주의의 상황에서 명품을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치장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지면 가질수록 명품 중독에 빠집니다. 필요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과시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명품이 자신을 가치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명품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새로운 피조물이라’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명품이고 진품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탐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편 119:36)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전도서 7:7)
탐욕이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생각을 무디게 하며 가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탐욕이 들어오면 총명한 사람이 무너집니다. 판단력이 똑똑한 사람이 잘못 판단하고, 넉넉한 사람이 자기 것만 챙깁니다.
탐욕이란 첫 인간으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탐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보니까 너무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것만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자기 예물을 안 받았을 때 분노가 생겼습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형인데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느냐며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동생에게 쏟아 붓는 첫 번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욕을 극복하려면 탈선한 탐욕을 통해서 주어지는 잠깐의 행복, 곧 돈의 행복, 쾌락의 행복, 권력의 행복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탐욕을 거부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탐욕을 거부하라는 말을 종종 오해하면서 반문하기도 합니다. “아무 욕구 없이 살라는 말입니까? 모든 것을 거절하면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탐욕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인 욕구를 거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꿈을 꾸지 말고 비전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된 것을 거부하고 헛된 것에 목을 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 탐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족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자족하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자족이란 만족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면서 자족하면 자존감이 생깁니다. 가난하면서 자족하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생깁니다. 부유하면서 자족하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족하면 남을 도울 수 있고 넉넉하게 됩니다. 내게 주신 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바울은 자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 4:11-12)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유와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는 배부를 때에도 감사했고 배고플 때에도 감사했습니다. 자존감을 깨트리지 않고 남이 귀하게 되는 것을 칭찬하고 존경하며, 남이 어렵고 슬픈 일에는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바른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탐욕을 가지면 남이 잘되면 무조건 끌어내리고 싶어 하고, 남이 안 되면 조롱하고 멸시합니다. 우리는 거짓된 것과 헛된 것을 버리는 동시에 올바른 것을 위해서 전체를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명을 바칠 각오를 세 가지로 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하고 만족하며 하나님 안에서 주신 삶에 우선권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삶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을 높이는 것,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신 것을 선언하는 것에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두 번째, 결혼한 사람들은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부이신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전체를 드렸습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만큼 사랑하세요. 아내들이여, 남편을 위해서 목숨을 걸만큼 사랑하세요.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가 힘을 얻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이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도전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들에게 말합니다. 여자를 쫓아다니는 일에 목숨을 걸지 마세요. 남자를 쫓아다니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마세요. 청년 때에는 여자와 남자를 쫓아다니는 일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아내와 남편에게 생명전체를 바치며 사랑하세요.
세 번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에 목숨을 걸어야 되고, 직장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이 기업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올바른 정치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만한 정치가가 나와야 합니다. 교육자는 목숨을 걸고 멋진 후배들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전문적인 직업을 위해 투자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를 통해서 전문성이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탐욕은 사라지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길로 나아갑시다.
다른 것에 목숨을 걸고 탐욕을 갖지 마십시오. 우리 영혼에 갈증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마음과 영혼과 육체가 목말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목마름이 해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3-14)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어 다른 수많은 욕망들을 절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자기 통제를 할 수 있습니다. 탐욕이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는 인생으로 달려가는 길입니다.
밤에 네온사인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현란하고 찬란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그렇게 현란하던 네온사인이 별 볼 일이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렇게 탐욕스럽게 생각하며 전체를 쏟고 싶었던 것이 사라지고 자기 자리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탐욕이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나와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서야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며 영혼의 갈증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족하며 탐욕을 통제하고 절제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향해 우리의 전체를 드립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비록 탐욕의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혼의 갈증을 풀고 만족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주님 뜻 안에서 꿈과 비전을 갖게 하시고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애굽기 20: 17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탐욕의 중심에는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계명을 다 기억하십니까? 제1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제2계명은 ‘너를 위해 세긴 우상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어떤 형상이로든지 만들지 말라.’ 제3계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1계명-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는 계명입니다.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제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 제8계명은 ‘도둑질 하지 말라.’ 제9계명은 ‘네 이웃의 대하여 거짓증언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웃을 존귀하게 만들었으니 우리도 이웃을 존귀하게 생각하며 해를 끼치지 말고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계명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탐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먼저 말씀하시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내면세계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는 탐욕의 세계를 멈추라고 하십니다. 내면세계란 인간의 삶의 뿌리와 같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세워질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탐욕이 인간의 삶을 가장 해롭게 하는 해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탐욕이 지닌 멘탈리티, 일종의 정신구조에는 잘 되면 내 탓, 내 공로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 남의 탓이라는 사고방식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런 모습이 자주 발견되면 그것은 내 속에 탐욕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자녀가 부주의해서 우유가 담긴 컵을 넘어뜨려 쏟으면 우리 마음에 곧 꾸중할 말이 생각납니다. “아니 눈을 뜨고도 그것을 보지 못하느냐?” 그런데 정작 자기가 컵을 쏟으면 이렇게 말이 바뀝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컵을 여기 갖다놨어?” 이처럼 인간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므로 다투고 갈등합니다.
탐욕은 타락한 욕망이며 탈선한 욕구입니다.
게르트루트 휠러라는 사람은 「탐욕」이라는 책에서 탐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탐욕이란 탈선한 요구이자 타락한 욕망이다.” 즉 탐욕이라는 것은 욕망은 욕망인데 타락한 욕망이고, 욕구는 욕구인데 탈선한 욕구라는 것입니다. 탐욕은 마치 정상궤도를 벗어난 기차와도 같습니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래서 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뾰족한 것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탐욕이 가진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탐욕은 근본적으로 인간됨을 깨트리는 악입니다. 탐욕이 있으면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과 권력, 인간의 쾌락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사랑해도 이기적으로 집착하면서 사랑하려고 합니다. 정치권력을 탐하는 것과 돈과 재물이 찰떡처럼 맞아떨어지면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에 돈을 흘려놓고 언젠가는 권력과 함께 움직이는 세상의 모습들을 신문지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탐욕이 있습니다. 탐욕의 마음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하수인처럼 생각합니다.
두 번째, 탐욕에는 만족감이 없습니다. 탐욕은 불만족한 욕구를 끊임없이 양산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탐욕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 더 강한 것, 더 높은 것을 향하여 몸부림치며 추구하는 것이 바로 탐욕의 정신입니다. 멈출 줄을 모릅니다. 끝없이 상승하는 욕망 때문에 무엇이 성취되고 이루어져도 마음에 만족감이 없습니다. 기쁨은 잠깐이며 또 욕구가 생겨 감사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불평스럽고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것이 철저하게 무너질 때에야 인생을 허비하고 거짓된 것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 번째, 탐욕은 중독 증세를 심화시킵니다. 고상한 만족감을 얻게 하지 못합니다. 중독에 빠져서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탐욕을 가진 사람은 사냥꾼과도 같이 호시탐탐 노립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사냥감이 됩니다. 자기는 탐욕으로 남의 것을 빼앗지만 자기 자신이 사냥감으로 전락하여 희생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손안에 들어올 때까지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머리에서 떠나지도 않고 잠도 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질 때까지 추구하는 자신이 이미 사냥감이 되어 올바른 판단력이 마비됩니다.
우리의 가치는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해야 하지만 자녀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야 하지만 아내와 남편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집착하면 삶이 즐겁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고 나도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은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넉넉해지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면서 비전과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품을 좋아합니다. 명품이 필요하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품에 중독되는 것은 볼품이 없습니다. 중독증은 자기 열등감의 증거입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는 외모 지상주의의 상황에서 명품을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치장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지면 가질수록 명품 중독에 빠집니다. 필요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과시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명품이 자신을 가치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의 가치는 명품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새로운 피조물이라’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명품이고 진품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탐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편 119:36)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전도서 7:7)
탐욕이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생각을 무디게 하며 가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탐욕이 들어오면 총명한 사람이 무너집니다. 판단력이 똑똑한 사람이 잘못 판단하고, 넉넉한 사람이 자기 것만 챙깁니다.
탐욕이란 첫 인간으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탐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보니까 너무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것만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자기 예물을 안 받았을 때 분노가 생겼습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형인데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느냐며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동생에게 쏟아 붓는 첫 번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욕을 극복하려면 탈선한 탐욕을 통해서 주어지는 잠깐의 행복, 곧 돈의 행복, 쾌락의 행복, 권력의 행복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탐욕을 거부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탐욕을 거부하라는 말을 종종 오해하면서 반문하기도 합니다. “아무 욕구 없이 살라는 말입니까? 모든 것을 거절하면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탐욕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인 욕구를 거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꿈을 꾸지 말고 비전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된 것을 거부하고 헛된 것에 목을 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 탐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족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자족하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자족이란 만족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면서 자족하면 자존감이 생깁니다. 가난하면서 자족하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생깁니다. 부유하면서 자족하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족하면 남을 도울 수 있고 넉넉하게 됩니다. 내게 주신 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바울은 자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 4:11-12)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유와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는 배부를 때에도 감사했고 배고플 때에도 감사했습니다. 자존감을 깨트리지 않고 남이 귀하게 되는 것을 칭찬하고 존경하며, 남이 어렵고 슬픈 일에는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바른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탐욕을 가지면 남이 잘되면 무조건 끌어내리고 싶어 하고, 남이 안 되면 조롱하고 멸시합니다. 우리는 거짓된 것과 헛된 것을 버리는 동시에 올바른 것을 위해서 전체를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명을 바칠 각오를 세 가지로 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하고 만족하며 하나님 안에서 주신 삶에 우선권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삶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을 높이는 것,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신 것을 선언하는 것에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두 번째, 결혼한 사람들은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부이신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전체를 드렸습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만큼 사랑하세요. 아내들이여, 남편을 위해서 목숨을 걸만큼 사랑하세요.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가 힘을 얻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이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도전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들에게 말합니다. 여자를 쫓아다니는 일에 목숨을 걸지 마세요. 남자를 쫓아다니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마세요. 청년 때에는 여자와 남자를 쫓아다니는 일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아내와 남편에게 생명전체를 바치며 사랑하세요.
세 번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에 목숨을 걸어야 되고, 직장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이 기업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올바른 정치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만한 정치가가 나와야 합니다. 교육자는 목숨을 걸고 멋진 후배들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전문적인 직업을 위해 투자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를 통해서 전문성이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탐욕은 사라지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길로 나아갑시다.
다른 것에 목숨을 걸고 탐욕을 갖지 마십시오. 우리 영혼에 갈증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마음과 영혼과 육체가 목말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목마름이 해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3-14)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어 다른 수많은 욕망들을 절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자기 통제를 할 수 있습니다. 탐욕이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는 인생으로 달려가는 길입니다.
밤에 네온사인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현란하고 찬란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그렇게 현란하던 네온사인이 별 볼 일이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렇게 탐욕스럽게 생각하며 전체를 쏟고 싶었던 것이 사라지고 자기 자리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탐욕이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나와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서야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며 영혼의 갈증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족하며 탐욕을 통제하고 절제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향해 우리의 전체를 드립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비록 탐욕의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혼의 갈증을 풀고 만족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주님 뜻 안에서 꿈과 비전을 갖게 하시고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