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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분의 눈물

요한복음 11: 32

김지철 목사

2009.11.01

죽으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겪는 현실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숨을 쉬는 것과 쉬지 않는 것, 심장이 뛰는 것과 멈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촉각적으로 표현한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몸은 부드럽지만, 죽은 자의 몸은 딱딱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산자의 몸은 만지면 따뜻하나, 죽은 자의 몸은 섬뜩할 정도로 차갑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과는 곁에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죽은 사람과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으면 곁에 둘 수 없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잡았던 따뜻했던 손을 이제는 놓아야 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나고 맙니다. 이것이 죽음의 아픔입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죽음이란 아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성경은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된 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은 기후가 덥기 때문에 죽으면 곧장 장사를 지내야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보통 사흘 동안은 영혼이 함께 있어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나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망성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는 해방의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곳에 도착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가서 그들의 슬픔을 토로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한복음 11:32)

그들은 울고 있습니다. 슬픔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눈물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겨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절망이기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회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비통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눈물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눈물과 이타적인 눈물입니다. 이기적인 눈물은 자기 자신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내가 병들어서 흘리는 눈물, 외롭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 실패했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분노로 흘리는 눈물도 이기적인 눈물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눈물은 참 신기합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눈물임에도 눈물은 치유와 회복의 자리에 들어서게 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실컷 울었던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보십시오. 내 속에 응어리 맺혔던 것들이 풀어집니다. 치유가 되기 시작합니다.
요즘 웃음치료라는 것도 있지만 울음치료라는 것도 있습니다. 울면 치료가 됩니다. 우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눈물은 육체의 면역력을 강화시킵니다. 우리가 받은 스트레스와 억울함의 정서적인 감정을 떨쳐버리는 것이 눈물의 방어기제적인 특성입니다.
사람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웃는다는 것은 막혔던 내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는 것도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억눌렸던 모든 것을 떨쳐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웃음과 울음 모두 자신을 열어 억눌려있던 감정을 해방시켜줍니다.
그런데 웃음이 바다의 파도와 같다고 한다면, 울음이란 더욱 큰 해일과 같습니다. 사람이 웃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인사를 하면서도 웃지 않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마음의 문이 닫혀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웃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울지 않는 것입니다.
울어야할 때 울음이 나오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문을 꽉 닫아놓은 사람입니다. 울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의 암세포가 정상세포를 다 먹어가는 것처럼 내 육체의 억눌림이 영혼의 세계를 억압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눈물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속에 있는 맺힌 것들을 풀어놓는 해방의 능력, 생명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는 해방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이기적인 눈물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이타적인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타적인 눈물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이타적인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공감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참회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아파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고통스러워하는 눈물이었습니다.

남이 아플 때 내가 아프던가요? 남이 외로울 때 내가 외롭던가요? 남이 신음할 때 내가 신음하던가요? 그것은 함께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어렵습니다. 내 문제도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의 문제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고통당할 때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면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한복음 11: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보자마자 당신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는 마음이었고, 또 하나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감의 문제를 뛰어넘는 특별한 모습입니다. 심령에 비통함을 여겼다는 말은 옛날 번역에 심령에 통분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38절에도 이 말씀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한복음 11:38)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눈에서 눈물을 나게 하는 것에 대한 비통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권세입니다. ‘죽음의 세력아! 어둠의 세력아! 사탄의 세력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 자녀의 눈에서 피눈물을 나게 하느냐!’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비통함이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위해서 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방향으로 나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살리기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셨습니다. 죽음이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하나님과 맞서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극복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며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의 삶을 아낌없이 사셨습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들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은 비통해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볼 때마다 비통해하셨습니다. 죄와 어둠속에 사는 자들을 볼 때마다 비통해하셨습니다.

먼저 나를 향해 비통히 여기십시오.

우리의 심령이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 흘려야할 때 예수님에게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변하려고 하면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죄악에 대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를 향해 비통히 여겨야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비난할 줄 아는 것이 회개이고, 자기가 자기를 향해서 꾸중할 줄 아는 것이 인생의 큰 용기입니다. 내 안의 게으름을 향해서 외치십시오. ‘내 안에 게으름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느냐!’ 우리가 내 안의 게으름과 직면하여 그것을 때려 부술 때 내 안에서 게으름이 도망갑니다. 나를 지배하는 미움과 분노를 보면서 스스로를 꾸짖으십시오. ‘내 속에 어찌하여 이런 분노가 있는가!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인생이 짧은데 어찌하여 남을 미워하고 조롱하면서 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가!’
우리가 나 자신을 향해서 분노할 줄 알아야 그 때부터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왜 이렇게 이기적이고 편협한 인간인가! 나는 왜 이렇게 불평과 원망이 많은 사람인가!’ 우리가 이렇게 나 자신을 향해서 비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자기 갱신과 자기 혁신이 일어납니다. 자기 성숙의 과정이 일어납니다.

이웃과 이 시대를 향해서 비통히 여기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비통해하셨던 모습을 똑바로 보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고통을 향해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모른 척 할 수 없었고,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저들을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때 생명의 역사, 부활과 치유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 비통함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마음속에는 민족에 대한 비통함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역사의 변화가 그러했습니다. 개혁의 자리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자리에는 이웃들의 고통과 역사의 신음 속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렸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모든 사건들이 이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서 땀과 눈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액체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친히 만지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땀이 변하여 피처럼 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나님의 도성이 왜 이렇게 망하려고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아! 왜 이 고통을 당하려고 하느냐!”라고 외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못과 창에 찔려 피를 흘리고 통곡하시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5:7)

오늘날 어둠의 역사가 빛의 역사로 바뀌고, 죽음의 역사가 생명의 역사로 바뀌기 위해서는 이 시대를 향해 통분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요청됩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 나사로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 이 시대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통분의 눈물, 비통의 눈물을 흘릴 때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를 품고 통분의 눈물을 흘리면 저주와 다툼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비통의 눈물을 흘릴 때 거기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치유와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그 가운데 일어납니다.

지금은 눈물의 영성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1960년 1월 10일 고(故) 한경직 목사님께서 하신 ‘애통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설교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 때는 대한민국이 아주 척박했을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조용히 귀를 기울여서 우리 사회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울음소리,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울음소리, 남편을 잃은 아내들의 울음소리, 실업자의 울음소리, 고학생들의 울음소리, 악당의 유혹을 받아서 일생을 그르친 가련한 여성들의 울음소리, 이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자가 우리사회에 얼마나 됩니까? 이 애통하는 울음소리가 문자 그대로 삼천리강산에 사무치건만 이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참된 정치가, 참된 실업가, 참된 공무원, 참된 사회사업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사회는 눈물 없는 사회가 아닙니까? 애통할 줄 모르는 사회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남의 눈물을 내 눈물로 알고, 남의 설움을 내 설움으로 알아서 같이 십자가를 질 줄 아는 민족만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 더욱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눈물이 치유합니다. 이 시대의 백성들을 위해서 눈물을 가진 지도자가 있을 때 민족이 변화될 것입니다. 눈물을 가진 기업가, 눈물을 가진 교육자, 눈물을 가진 영적 지도자가 있을 때, 눈물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을 때 역사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어둠과 죽음의 세력, 분노와 미움의 세력들이 아직도 이 시대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갖고 이 시대를 향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사람을 요구하십니다. 그 자가 바로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러한 자들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향하여 비통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기에 우리 사회는 살벌해지고 사랑은 사라진 채 미움과 분노의 소리만 커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으로서, 통분하는 눈물을 갖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생명의 역사를 일구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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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 32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죽으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겪는 현실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숨을 쉬는 것과 쉬지 않는 것, 심장이 뛰는 것과 멈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촉각적으로 표현한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몸은 부드럽지만, 죽은 자의 몸은 딱딱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산자의 몸은 만지면 따뜻하나, 죽은 자의 몸은 섬뜩할 정도로 차갑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과는 곁에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죽은 사람과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으면 곁에 둘 수 없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잡았던 따뜻했던 손을 이제는 놓아야 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나고 맙니다. 이것이 죽음의 아픔입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죽음이란 아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본문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성경은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된 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은 기후가 덥기 때문에 죽으면 곧장 장사를 지내야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보통 사흘 동안은 영혼이 함께 있어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나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망성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는 해방의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곳에 도착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가서 그들의 슬픔을 토로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한복음 11:32)

그들은 울고 있습니다. 슬픔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눈물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겨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절망이기 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회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비통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눈물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눈물과 이타적인 눈물입니다. 이기적인 눈물은 자기 자신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내가 병들어서 흘리는 눈물, 외롭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 실패했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분노로 흘리는 눈물도 이기적인 눈물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눈물은 참 신기합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눈물임에도 눈물은 치유와 회복의 자리에 들어서게 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실컷 울었던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보십시오. 내 속에 응어리 맺혔던 것들이 풀어집니다. 치유가 되기 시작합니다.
요즘 웃음치료라는 것도 있지만 울음치료라는 것도 있습니다. 울면 치료가 됩니다. 우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눈물은 육체의 면역력을 강화시킵니다. 우리가 받은 스트레스와 억울함의 정서적인 감정을 떨쳐버리는 것이 눈물의 방어기제적인 특성입니다.
사람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웃는다는 것은 막혔던 내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는 것도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억눌렸던 모든 것을 떨쳐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웃음과 울음 모두 자신을 열어 억눌려있던 감정을 해방시켜줍니다.
그런데 웃음이 바다의 파도와 같다고 한다면, 울음이란 더욱 큰 해일과 같습니다. 사람이 웃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인사를 하면서도 웃지 않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마음의 문이 닫혀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웃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울지 않는 것입니다.
울어야할 때 울음이 나오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문을 꽉 닫아놓은 사람입니다. 울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의 암세포가 정상세포를 다 먹어가는 것처럼 내 육체의 억눌림이 영혼의 세계를 억압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눈물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속에 있는 맺힌 것들을 풀어놓는 해방의 능력, 생명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는 해방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이기적인 눈물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이타적인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타적인 눈물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이타적인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공감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참회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아파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고통스러워하는 눈물이었습니다.

남이 아플 때 내가 아프던가요? 남이 외로울 때 내가 외롭던가요? 남이 신음할 때 내가 신음하던가요? 그것은 함께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어렵습니다. 내 문제도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남의 문제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고통당할 때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면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한복음 11: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보자마자 당신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는 마음이었고, 또 하나는 상대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감의 문제를 뛰어넘는 특별한 모습입니다. 심령에 비통함을 여겼다는 말은 옛날 번역에 심령에 통분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38절에도 이 말씀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한복음 11:38)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눈에서 눈물을 나게 하는 것에 대한 비통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권세입니다. ‘죽음의 세력아! 어둠의 세력아! 사탄의 세력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 자녀의 눈에서 피눈물을 나게 하느냐!’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비통함이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위해서 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방향으로 나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살리기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셨습니다. 죽음이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하나님과 맞서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극복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며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의 삶을 아낌없이 사셨습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들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은 비통해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볼 때마다 비통해하셨습니다. 죄와 어둠속에 사는 자들을 볼 때마다 비통해하셨습니다.

먼저 나를 향해 비통히 여기십시오.

우리의 심령이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 흘려야할 때 예수님에게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변하려고 하면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죄악에 대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를 향해 비통히 여겨야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비난할 줄 아는 것이 회개이고, 자기가 자기를 향해서 꾸중할 줄 아는 것이 인생의 큰 용기입니다. 내 안의 게으름을 향해서 외치십시오. ‘내 안에 게으름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느냐!’ 우리가 내 안의 게으름과 직면하여 그것을 때려 부술 때 내 안에서 게으름이 도망갑니다. 나를 지배하는 미움과 분노를 보면서 스스로를 꾸짖으십시오. ‘내 속에 어찌하여 이런 분노가 있는가!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인생이 짧은데 어찌하여 남을 미워하고 조롱하면서 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가!’
우리가 나 자신을 향해서 분노할 줄 알아야 그 때부터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왜 이렇게 이기적이고 편협한 인간인가! 나는 왜 이렇게 불평과 원망이 많은 사람인가!’ 우리가 이렇게 나 자신을 향해서 비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자기 갱신과 자기 혁신이 일어납니다. 자기 성숙의 과정이 일어납니다.

이웃과 이 시대를 향해서 비통히 여기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비통해하셨던 모습을 똑바로 보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고통을 향해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모른 척 할 수 없었고,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저들을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때 생명의 역사, 부활과 치유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 비통함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마음속에는 민족에 대한 비통함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역사의 변화가 그러했습니다. 개혁의 자리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의 자리에는 이웃들의 고통과 역사의 신음 속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렸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모든 사건들이 이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서 땀과 눈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액체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친히 만지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땀이 변하여 피처럼 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나님의 도성이 왜 이렇게 망하려고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아! 왜 이 고통을 당하려고 하느냐!”라고 외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못과 창에 찔려 피를 흘리고 통곡하시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5:7)

오늘날 어둠의 역사가 빛의 역사로 바뀌고, 죽음의 역사가 생명의 역사로 바뀌기 위해서는 이 시대를 향해 통분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요청됩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 나사로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 이 시대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통분의 눈물, 비통의 눈물을 흘릴 때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를 품고 통분의 눈물을 흘리면 저주와 다툼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비통의 눈물을 흘릴 때 거기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치유와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그 가운데 일어납니다.

지금은 눈물의 영성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1960년 1월 10일 고(故) 한경직 목사님께서 하신 ‘애통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설교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 때는 대한민국이 아주 척박했을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조용히 귀를 기울여서 우리 사회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울음소리,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울음소리, 남편을 잃은 아내들의 울음소리, 실업자의 울음소리, 고학생들의 울음소리, 악당의 유혹을 받아서 일생을 그르친 가련한 여성들의 울음소리, 이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자가 우리사회에 얼마나 됩니까? 이 애통하는 울음소리가 문자 그대로 삼천리강산에 사무치건만 이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참된 정치가, 참된 실업가, 참된 공무원, 참된 사회사업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사회는 눈물 없는 사회가 아닙니까? 애통할 줄 모르는 사회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남의 눈물을 내 눈물로 알고, 남의 설움을 내 설움으로 알아서 같이 십자가를 질 줄 아는 민족만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 더욱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눈물이 치유합니다. 이 시대의 백성들을 위해서 눈물을 가진 지도자가 있을 때 민족이 변화될 것입니다. 눈물을 가진 기업가, 눈물을 가진 교육자, 눈물을 가진 영적 지도자가 있을 때, 눈물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을 때 역사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어둠과 죽음의 세력, 분노와 미움의 세력들이 아직도 이 시대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갖고 이 시대를 향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사람을 요구하십니다. 그 자가 바로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러한 자들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향하여 비통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기에 우리 사회는 살벌해지고 사랑은 사라진 채 미움과 분노의 소리만 커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으로서, 통분하는 눈물을 갖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생명의 역사를 일구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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