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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과 갈등은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해방 70주년이자 남북분단 70주년입니다. 이제 북녘땅에도 자유와 해방의 축복이 주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지금도 북쪽에는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과 북이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복된 날을 기다립니다. 평화통일, 자유통일, 민주통일의 역사를 기다리면서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영 상 –
한반도는 지구촌에 남아있는 마지막 분단국가입니다. 하나 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두세 사람도 뜻을 합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우리는 매일 실감하며 살지 않습니까?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성경의 기록들도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하나 되지 못해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와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부였던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어야 할 관계였지만 문제가 생기자 서로에게 핑계를 돌리기 바빴습니다. 친밀해야 할 형제간은 어땠습니까? 가인과 아벨은 살인의 자리까지, 에서와 야곱은 미움과 갈등의 자리까지 나갑니다. 부모와 자녀는 어땠습니까? 부모의 편애가, 또 자녀의 속임수가 얼마나 서로를 아프게 하는지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수많은 기록들은 미움과 갈등의 이야기들입니다. 한마음을 품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가슴 아픈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게다가 이것이 지역갈등, 민족차별로 확대되면 다툼과 전쟁의 역사로 이어진다는 것까지 우리는 이미 역사적 사실을 통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단절과 분열 뒤에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단절로부터 이 모든 것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기에는 인간의 죄악이, 인간의 불의가, 인간의 불순종이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아들을 보며 북한을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갈등과 분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다른 하나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재산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따로 있다는 주장입니다. 즉 이것은 더 이상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아버지 없이 내 인생을 마음껏 펼쳐 보겠다!”는 주장인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아버지를 향한 아주 무례하고 당돌한 요구였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자주적이다, 주도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는 요구였습니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둘째 아들이 언제 아버지를 떠났습니까? 자기 몫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면 언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까? 자기 몫이 다 떨어졌을 때였습니다. 이것과 비슷한 모습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까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몫이 있다고 여길 때입니다. 자신의 몫을 찾아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합니다. 그랬다가 ‘인생이 별것 아니구나. 내 것이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을 때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에 별다른 응답 없이 유산을 물려줍니다. 결국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 머물게 되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둘째 아들의 모습에서 북한의 모습이, 맏아들의 모습에서는 우리 남한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입니다.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는 하나님 없는 ‘이상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극대화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대단하다고 칭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는 잘못된 것이라 선언했고, 그 모든 것들을 가차 없이 때려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지고(至高)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는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 시도는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무려 70년 동안 북한의 지도자들은 250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을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처럼 살게 했습니다. 헐벗고 가난한 삶을 만들어내는 사회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이 겪은 고통을 북한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비유에 의하면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먼 나라로 갑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는 세 가지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위기일까요? 첫째,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해 버립니다. 돈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누가복음 15:13)
허랑방탕한 생활로 돈이 바닥났습니다. 이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칩니다. 바로 큰 흉년이라는 환경적인 재앙입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누가복음 15:14)
돈도 떨어졌는데 흉년까지 들었으니 먹을 것이 다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일할 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당장 먹고 마실 음식도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궁핍에 환경의 척박함이 합해져 사회적·구조적 고통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 사라진 것입니다.
돈이 떨어지고, 환경의 어려움이 닥쳐도 부모님이든, 친구든 누군가 옆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에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누가복음 15:16)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택한 일은 돼지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돼지는 불결한 짐승, 혐오스러운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돼지를 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인격도 무너지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도 무너진 삶입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그 쥐엄 열매조차 주는 자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이 떨어졌습니다. 환경이 척박해졌습니다. 곁에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둘째 아들의 모습에서 오늘 북한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공산주의 주체사상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를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비참하고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평등사회를 꿈꾸었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북한과 같은 계급사회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들이 꿈꾸었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자연재해에도 아주 취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르며 북한과 중국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산들은 나무가 무성한데 북녘의 산들은 민둥산입니다. 땔감이 부족하여 나무를 다 베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비가 많이 내리면 금방 홍수가 납니다. 반대로 가뭄이 들면 논과 밭이 금세 말라 터져 수확물을 건질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굶주리게 되고, 심지어 굶어 죽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이 북한을 도울 친구는 누구일까요? 중국입니까? 러시아입니까? 일본입니까? 미국입니까? 아닙니다. 북한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사실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들에게 도우려는 마음만 있다면,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사실상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에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인간이 생존권을 위협받는다면 누군가는 도와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는 돼지처럼 되었다고 해서 그냥 내팽개쳐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저들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변 국가들이 끊임없이 손을 내밀지만 저들은 그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나 우리 교회가, 또 국민들이 저들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지만 그들은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 때문에 한반도 문제를 의논하려는 6자 회담조차 참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유일한 안전판은 핵무기입니다. 핵무기를 인정해 주어야 체제가 안정이 되고 지도자가 평안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열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다 본질적인 요소인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측면과 같이 갑니다. 둘째 아들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탄식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누가 있었습니까? 집에서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남루한 모습의 그를 멀리서도 알아보고 달려올 만큼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매일 기다리며 기다렸을 겁니다. 아버지의 기다림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실을 맺기 위해선 먼저 일어나야 할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둘째 아들의 깨달음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니 인생이 이렇게 엉망이 되는구나!’ 이 사실을 깨달아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정권을 붙잡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만과 욕심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누가복음 15:17)
실존의 한계를 고백해야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것이 안 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교회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저들을 기다리는 하늘 아버지가 계심을 저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마지막은 이런 모습이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진정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남한과 북한의 통일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기초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 기초는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영적인 기초가 단단하지 않으면 진정한 민족통일, 평화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남북의 통일을 정치가나 경제인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통일은 단순히 정치와 체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는 북한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할과 사명을 알았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첫째 아들처럼 되어서는 둘째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생보다는 돈이 아까웠습니다. 동생보다는 자기 체면이 더 중요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누가복음 15:30)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을 비난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조롱하며 영적인 교만함을 보였습니다. 솔직히 그가 돌아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부나 국민들이 북한 땅과 그 백성들을 보면서 이러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정치적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경제적인 풍요를 뽐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순전함을 지녀야 합니다. 영적인 겸손함으로 그들을 감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큰 비전과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곧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거룩한 마음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북쪽의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 대신 첫째 아들이 가진 오만과 북녘 땅을 향한 조롱이 있으면, 우리는 통일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 된 한반도를 꿈꿉시다.
아버지 사랑의 모습은 첫째 아들의 것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첫째, 아버지 사랑은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날 때부터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통일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습니다. 분단국가가 된 그때부터 이 백성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둘째,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저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셋째, 낭비하는 사랑, 즉 넉넉한 사랑입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무엇을 했습니까?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헌금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내고, 정성을 내고, 사랑을 나눠야 됩니다.
만약 지금 통일이 된다면, 좋기만 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많은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준비해야 됩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준비하고, 사랑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정치인, 경제인, 기업인, 교육자, 사회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지혜를 모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아버지의 사랑만이 진정한 통일을 이루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일서 4:20)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특별히 분단된 조국에 대한 아픔으로, 북녘의 백성들을 위한 기도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이 땅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사랑을 베풀 때에 하나님이 통일의 시간을 앞당겨 주실 것입니다. 북쪽과 남쪽이 하나가 되어 한라산에서부터 백두산까지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복된 날을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 나라와 저 북녘땅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5: 25 ~ 32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미움과 갈등은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해방 70주년이자 남북분단 70주년입니다. 이제 북녘땅에도 자유와 해방의 축복이 주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지금도 북쪽에는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과 북이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복된 날을 기다립니다. 평화통일, 자유통일, 민주통일의 역사를 기다리면서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영 상 –
한반도는 지구촌에 남아있는 마지막 분단국가입니다. 하나 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두세 사람도 뜻을 합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우리는 매일 실감하며 살지 않습니까?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성경의 기록들도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하나 되지 못해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와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부였던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어야 할 관계였지만 문제가 생기자 서로에게 핑계를 돌리기 바빴습니다. 친밀해야 할 형제간은 어땠습니까? 가인과 아벨은 살인의 자리까지, 에서와 야곱은 미움과 갈등의 자리까지 나갑니다. 부모와 자녀는 어땠습니까? 부모의 편애가, 또 자녀의 속임수가 얼마나 서로를 아프게 하는지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수많은 기록들은 미움과 갈등의 이야기들입니다. 한마음을 품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가슴 아픈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게다가 이것이 지역갈등, 민족차별로 확대되면 다툼과 전쟁의 역사로 이어진다는 것까지 우리는 이미 역사적 사실을 통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단절과 분열 뒤에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단절로부터 이 모든 것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기에는 인간의 죄악이, 인간의 불의가, 인간의 불순종이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아들을 보며 북한을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갈등과 분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다른 하나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재산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따로 있다는 주장입니다. 즉 이것은 더 이상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아버지 없이 내 인생을 마음껏 펼쳐 보겠다!”는 주장인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아버지를 향한 아주 무례하고 당돌한 요구였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자주적이다, 주도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는 요구였습니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둘째 아들이 언제 아버지를 떠났습니까? 자기 몫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면 언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까? 자기 몫이 다 떨어졌을 때였습니다. 이것과 비슷한 모습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까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몫이 있다고 여길 때입니다. 자신의 몫을 찾아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합니다. 그랬다가 ‘인생이 별것 아니구나. 내 것이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을 때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에 별다른 응답 없이 유산을 물려줍니다. 결국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 머물게 되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둘째 아들의 모습에서 북한의 모습이, 맏아들의 모습에서는 우리 남한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입니다.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는 하나님 없는 ‘이상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극대화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대단하다고 칭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는 잘못된 것이라 선언했고, 그 모든 것들을 가차 없이 때려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지고(至高)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는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 시도는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무려 70년 동안 북한의 지도자들은 2500만 명이 넘는 백성들을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처럼 살게 했습니다. 헐벗고 가난한 삶을 만들어내는 사회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이 겪은 고통을 북한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비유에 의하면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먼 나라로 갑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는 세 가지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어떤 위기일까요? 첫째,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해 버립니다. 돈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누가복음 15:13)
허랑방탕한 생활로 돈이 바닥났습니다. 이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칩니다. 바로 큰 흉년이라는 환경적인 재앙입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누가복음 15:14)
돈도 떨어졌는데 흉년까지 들었으니 먹을 것이 다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일할 자리를 구하기도 어렵고, 당장 먹고 마실 음식도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궁핍에 환경의 척박함이 합해져 사회적·구조적 고통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 사라진 것입니다.
돈이 떨어지고, 환경의 어려움이 닥쳐도 부모님이든, 친구든 누군가 옆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에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누가복음 15:16)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택한 일은 돼지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돼지는 불결한 짐승, 혐오스러운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돼지를 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인격도 무너지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도 무너진 삶입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그 쥐엄 열매조차 주는 자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이 떨어졌습니다. 환경이 척박해졌습니다. 곁에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둘째 아들의 모습에서 오늘 북한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공산주의 주체사상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를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비참하고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평등사회를 꿈꾸었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북한과 같은 계급사회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들이 꿈꾸었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자연재해에도 아주 취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르며 북한과 중국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산들은 나무가 무성한데 북녘의 산들은 민둥산입니다. 땔감이 부족하여 나무를 다 베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비가 많이 내리면 금방 홍수가 납니다. 반대로 가뭄이 들면 논과 밭이 금세 말라 터져 수확물을 건질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굶주리게 되고, 심지어 굶어 죽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이 북한을 도울 친구는 누구일까요? 중국입니까? 러시아입니까? 일본입니까? 미국입니까? 아닙니다. 북한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사실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들에게 도우려는 마음만 있다면,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사실상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에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인간이 생존권을 위협받는다면 누군가는 도와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는 돼지처럼 되었다고 해서 그냥 내팽개쳐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저들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변 국가들이 끊임없이 손을 내밀지만 저들은 그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나 우리 교회가, 또 국민들이 저들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지만 그들은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 때문에 한반도 문제를 의논하려는 6자 회담조차 참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유일한 안전판은 핵무기입니다. 핵무기를 인정해 주어야 체제가 안정이 되고 지도자가 평안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열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다 본질적인 요소인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측면과 같이 갑니다. 둘째 아들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탄식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누가 있었습니까? 집에서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남루한 모습의 그를 멀리서도 알아보고 달려올 만큼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매일 기다리며 기다렸을 겁니다. 아버지의 기다림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실을 맺기 위해선 먼저 일어나야 할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둘째 아들의 깨달음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니 인생이 이렇게 엉망이 되는구나!’ 이 사실을 깨달아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정권을 붙잡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만과 욕심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누가복음 15:17)
실존의 한계를 고백해야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것이 안 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교회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저들을 기다리는 하늘 아버지가 계심을 저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마지막은 이런 모습이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진정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남한과 북한의 통일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기초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 기초는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영적인 기초가 단단하지 않으면 진정한 민족통일, 평화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남북의 통일을 정치가나 경제인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통일은 단순히 정치와 체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는 북한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할과 사명을 알았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첫째 아들처럼 되어서는 둘째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생보다는 돈이 아까웠습니다. 동생보다는 자기 체면이 더 중요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누가복음 15:30)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을 비난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조롱하며 영적인 교만함을 보였습니다. 솔직히 그가 돌아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부나 국민들이 북한 땅과 그 백성들을 보면서 이러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정치적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경제적인 풍요를 뽐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순전함을 지녀야 합니다. 영적인 겸손함으로 그들을 감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큰 비전과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곧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거룩한 마음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북쪽의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 대신 첫째 아들이 가진 오만과 북녘 땅을 향한 조롱이 있으면, 우리는 통일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 된 한반도를 꿈꿉시다.
아버지 사랑의 모습은 첫째 아들의 것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첫째, 아버지 사랑은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날 때부터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통일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습니다. 분단국가가 된 그때부터 이 백성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둘째,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저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셋째, 낭비하는 사랑, 즉 넉넉한 사랑입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무엇을 했습니까?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헌금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내고, 정성을 내고, 사랑을 나눠야 됩니다.
만약 지금 통일이 된다면, 좋기만 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많은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준비해야 됩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준비하고, 사랑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정치인, 경제인, 기업인, 교육자, 사회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지혜를 모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아버지의 사랑만이 진정한 통일을 이루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일서 4:20)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특별히 분단된 조국에 대한 아픔으로, 북녘의 백성들을 위한 기도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이 땅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사랑을 베풀 때에 하나님이 통일의 시간을 앞당겨 주실 것입니다. 북쪽과 남쪽이 하나가 되어 한라산에서부터 백두산까지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복된 날을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 나라와 저 북녘땅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