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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보의 영, 성숙의 영? – 성령과 악령 25 –

에베소서 4: 13 ~ 16

김지철 목사

2017.12.10

신앙은 성숙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퇴보의 영, 성숙의 영?’입니다. 신앙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가 ‘자라남’ 곧 ‘성숙’입니다. 신앙이란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라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은 사람은 알게 모르게 다음과 같은 자의식을 가집니다.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 했으니 이제 꽤 괜찮은 신앙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자세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10년, 30년, 설령 50년이라 할지라도 신앙의 성장이 없다면 그 기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이 주는 최고의 축복이 성장에 있는 까닭입니다.
신체적 성장은 20세면 거의 끝납니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성장도 40세 정도가 되면 종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그 나이가 되면 정신적인 변화와 성숙의 가능성이 멈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흔이 되었는데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더 많은 생을 살아도 큰 변화나 성숙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다릅니다. 영혼은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영혼의 성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자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라남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대로 확장되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신앙인의 즐거움은 배움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구나. 예수님을 더 깊이 배우고 깨닫게 되는구나. 내 육체는 비록 쇠약해 가지만 영혼은 주님을 향해 더 높이 나아갈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목표를 상실하면 금방 주저앉게 됩니다. 또한 ‘나만큼 많이 배운 사람이 있는가?’라고 생각하면 금방 교만해 집니다. 오히려 ‘나는 아직도 배울 수 있다. 내 앞에 여전히 성숙의 길이 열려 있다.’라고 생각하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겸손한 동시에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배움의 여정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경험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배웁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바로 이런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중 14절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14)

이제 그만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면 삶이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미숙한 자를 상징합니다. 성장하지 못한 자, 곧 성숙하지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순전하고 순수합니까?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미숙하고 어리숙합니까? 왜 미숙합니까?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지성과 이성이 함께 움직일 때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 분별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이 멈춰 있다는 뜻입니다. 내 삶을 분별하면서 되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자녀가 성인이 됐는데도 ‘마마보이’ 혹은 ‘마마걸’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어머니들의 잘못된 교육 방법을 비판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런 비판적인 용어 중에 ‘컬링 부모 (Curling Parent)’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포츠의 한 종목인 컬링을 아실 것입니다. 약 30cm 크기에 20kg 정도 되는 원형의 물체를 빙판 위에 미끄러뜨리면, 그 물체 앞에서 여러 명의 선수들이 빙판을 닦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경기입니다. 그 모습이 오늘날 부모와 자녀 사이 같다는 것입니다. 자녀 앞길을 닦아주고 혹여 장애물이라도 생기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 앞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 중에 ‘헬리콥터 부모(Helicopter Parent)’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녀 주변을 빙빙 돌면서 혹시라도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금방 착륙해 도와주거나 장애물을 없애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사건건 참견하고 조종하는 부모를 헬리콥터 부모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모, 자녀 사이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자녀가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는 것을 방해합니다. 또한 자녀를 폐쇄적인 인간형으로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 외에는 신뢰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엄마가 다 해결해 주었고 장애물마저 없애 주었으니, 엄마 외에는 누구도 의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를 어린아이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자녀가 잘 되길 바라는 건 부모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게 해 주고 싶고, 멋진 청소년과 청년기를 제공해 주고 싶어 하는 게 부모 심정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다 하게 해 줍니다.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다 얻게 해 주고, 앞길이 막히지 않도록 모든 일을 처리해 줍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녀의 앞길에 놓인 장애물을 부모가 다 제거해 주면,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혼자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년이 되었으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의존적으로 살아갑니다. 자녀의 몸은 분명히 성인이 되었는데, 정신세계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속임수에 쉽게 빠집니다. 간사한 유혹에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기에 관심을 쏟고, 저 사람이 저렇게 이야기하면 거기에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놓이면, 쉽게 이단 사설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흔들립니다. 심지어 위기가 닥치면 점을 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전형적인 어린아이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물론 삶은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흔들려도 뿌리까지 뽑혀서는 안 됩니다. 뿌리까지 뽑히게 되면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는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단력을 상실하고 분별력을 잃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거짓된 속임수와 유혹에 삶이 조종되지 않도록 항상 생각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믿음과 앎이 조화될 때 신앙이 성숙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지 말고 신앙인으로서 성숙의 과정에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 비결에 대해서도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3)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 믿음은 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앎이란 깨달음과 믿음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에서 앎과 깨달음으로 나아갈 때 신앙의 기쁨이 찾아옵니다. 신앙이란 무조건 믿는 게 아닙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알고 믿고, 믿으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나의 역동적인 교제가 일어납니다.
철학적인 틀에서 본다면, 믿음과 앎이 하나가 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헬라 철학 전통은 언제나 신앙과 이성을 충돌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믿음과 앎이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는 전제입니다. ‘믿고 아는가? 아니면 알고 믿는가?’ 이에 관한 헬라 철학의 딜레마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야 혹은 신을 전제하지 않아야 참된 지성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문학계에서 예찬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있는데, 바로 니체입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철학서를 저술하면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거기서 강력한 초인, 곧 힘 있는 위대한 인간상을 향한 노력이 인문학적인 결과라고 소리쳤습니다. 즉 하나님 없는 인간의 위대함을 설파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일까요? 거기에 무엇이 없습니까? 인간 실존의 위기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문제,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가능한 한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인생이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의 문제를 망각의 세월 속에 파묻으려고 했습니다. 초인을 만들어 보려 하지만, 실제로 초인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헬라 철학 사상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사상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전통의 뿌리인 히브리 신앙입니다. 히브리 신앙의 인식론은 헬라 철학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먼저 ‘믿으면 알게 된다’는 전제입니다. 또한 ‘더 알게 되면 더 믿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믿음과 앎, 신앙과 이성이 충돌하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깊은 앎을 얻게 되면 그분을 더 신뢰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인식론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진정한 초인이라 할 수 있는 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묶어 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계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분이 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는지, 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이 우리 신앙이 성숙하는 첩경입니다.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2)

자신의 삶이 과정의 삶, 배움의 삶, 앞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예수께 붙잡힌 바 된 삶을 위해, 나아가 그 삶을 다시 붙잡으려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신앙의 성숙을 향한 바울의 갈망입니다. 예수께 붙잡힌 바 된 삶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는 바울의 신앙적 결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힘을 받았으므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 미래의 목표가 되시기 때문에 오늘도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겸손하면서도 용기를 가진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앎이 융합된 신앙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자가 되어 주님 앞에 예배드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거룩한 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배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고, 내 삶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삶을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렇게 믿음과 앎의 경험이 풍성해 지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 신앙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뒤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15)

‘사랑’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인격과 인격 간에 일어나는 신비로운 체험이 사랑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도 신비롭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속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신비를 깨닫습니다. 그분의 계시의 역사에 감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고, 사랑하면서 성숙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기쁨입니다. 나아가 이 사랑은 하나님과 나의 사랑을 넘어 공동체적으로 확대됩니다. 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6)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공동체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요 믿음의 공동체며, 예수님을 아는 공동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여정을 지속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다시 생각해 보고 돌아봅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그저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세례의 감격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역동성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다시 믿음의 자리에서 앎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시며 사랑으로 돌보셨는지, 그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알아가며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아, 예수님 속에 하나님이 계셨구나!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예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아침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다시 “주님,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총을 기억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바로 이 축복의 역사에 동참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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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 13 ~ 16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신앙은 성숙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퇴보의 영, 성숙의 영?’입니다. 신앙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가 ‘자라남’ 곧 ‘성숙’입니다. 신앙이란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라나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은 사람은 알게 모르게 다음과 같은 자의식을 가집니다.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 했으니 이제 꽤 괜찮은 신앙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자세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10년, 30년, 설령 50년이라 할지라도 신앙의 성장이 없다면 그 기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이 주는 최고의 축복이 성장에 있는 까닭입니다.
신체적 성장은 20세면 거의 끝납니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성장도 40세 정도가 되면 종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그 나이가 되면 정신적인 변화와 성숙의 가능성이 멈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흔이 되었는데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면, 더 많은 생을 살아도 큰 변화나 성숙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다릅니다. 영혼은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영혼의 성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자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라남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대로 확장되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신앙인의 즐거움은 배움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구나. 예수님을 더 깊이 배우고 깨닫게 되는구나. 내 육체는 비록 쇠약해 가지만 영혼은 주님을 향해 더 높이 나아갈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목표를 상실하면 금방 주저앉게 됩니다. 또한 ‘나만큼 많이 배운 사람이 있는가?’라고 생각하면 금방 교만해 집니다. 오히려 ‘나는 아직도 배울 수 있다. 내 앞에 여전히 성숙의 길이 열려 있다.’라고 생각하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겸손한 동시에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배움의 여정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경험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배웁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바로 이런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중 14절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14)

이제 그만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면 삶이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미숙한 자를 상징합니다. 성장하지 못한 자, 곧 성숙하지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순전하고 순수합니까?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미숙하고 어리숙합니까? 왜 미숙합니까?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지성과 이성이 함께 움직일 때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 분별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이 멈춰 있다는 뜻입니다. 내 삶을 분별하면서 되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자녀가 성인이 됐는데도 ‘마마보이’ 혹은 ‘마마걸’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어머니들의 잘못된 교육 방법을 비판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런 비판적인 용어 중에 ‘컬링 부모 (Curling Parent)’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포츠의 한 종목인 컬링을 아실 것입니다. 약 30cm 크기에 20kg 정도 되는 원형의 물체를 빙판 위에 미끄러뜨리면, 그 물체 앞에서 여러 명의 선수들이 빙판을 닦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경기입니다. 그 모습이 오늘날 부모와 자녀 사이 같다는 것입니다. 자녀 앞길을 닦아주고 혹여 장애물이라도 생기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 앞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 중에 ‘헬리콥터 부모(Helicopter Parent)’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녀 주변을 빙빙 돌면서 혹시라도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금방 착륙해 도와주거나 장애물을 없애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사건건 참견하고 조종하는 부모를 헬리콥터 부모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부모, 자녀 사이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자녀가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는 것을 방해합니다. 또한 자녀를 폐쇄적인 인간형으로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 외에는 신뢰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엄마가 다 해결해 주었고 장애물마저 없애 주었으니, 엄마 외에는 누구도 의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를 어린아이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자녀가 잘 되길 바라는 건 부모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게 해 주고 싶고, 멋진 청소년과 청년기를 제공해 주고 싶어 하는 게 부모 심정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다 하게 해 줍니다.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다 얻게 해 주고, 앞길이 막히지 않도록 모든 일을 처리해 줍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녀의 앞길에 놓인 장애물을 부모가 다 제거해 주면,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혼자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년이 되었으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의존적으로 살아갑니다. 자녀의 몸은 분명히 성인이 되었는데, 정신세계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속임수에 쉽게 빠집니다. 간사한 유혹에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기에 관심을 쏟고, 저 사람이 저렇게 이야기하면 거기에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놓이면, 쉽게 이단 사설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흔들립니다. 심지어 위기가 닥치면 점을 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전형적인 어린아이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물론 삶은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흔들려도 뿌리까지 뽑혀서는 안 됩니다. 뿌리까지 뽑히게 되면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는 생각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단력을 상실하고 분별력을 잃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거짓된 속임수와 유혹에 삶이 조종되지 않도록 항상 생각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믿음과 앎이 조화될 때 신앙이 성숙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지 말고 신앙인으로서 성숙의 과정에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 비결에 대해서도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3)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 믿음은 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앎이란 깨달음과 믿음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에서 앎과 깨달음으로 나아갈 때 신앙의 기쁨이 찾아옵니다. 신앙이란 무조건 믿는 게 아닙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알고 믿고, 믿으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나의 역동적인 교제가 일어납니다.
철학적인 틀에서 본다면, 믿음과 앎이 하나가 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헬라 철학 전통은 언제나 신앙과 이성을 충돌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믿음과 앎이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는 전제입니다. ‘믿고 아는가? 아니면 알고 믿는가?’ 이에 관한 헬라 철학의 딜레마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야 혹은 신을 전제하지 않아야 참된 지성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문학계에서 예찬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있는데, 바로 니체입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철학서를 저술하면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거기서 강력한 초인, 곧 힘 있는 위대한 인간상을 향한 노력이 인문학적인 결과라고 소리쳤습니다. 즉 하나님 없는 인간의 위대함을 설파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일까요? 거기에 무엇이 없습니까? 인간 실존의 위기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문제,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가능한 한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인생이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의 문제를 망각의 세월 속에 파묻으려고 했습니다. 초인을 만들어 보려 하지만, 실제로 초인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헬라 철학 사상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사상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전통의 뿌리인 히브리 신앙입니다. 히브리 신앙의 인식론은 헬라 철학과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먼저 ‘믿으면 알게 된다’는 전제입니다. 또한 ‘더 알게 되면 더 믿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믿음과 앎, 신앙과 이성이 충돌하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깊은 앎을 얻게 되면 그분을 더 신뢰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인식론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진정한 초인이라 할 수 있는 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묶어 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계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분이 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는지, 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이 우리 신앙이 성숙하는 첩경입니다.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2)

자신의 삶이 과정의 삶, 배움의 삶, 앞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예수께 붙잡힌 바 된 삶을 위해, 나아가 그 삶을 다시 붙잡으려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신앙의 성숙을 향한 바울의 갈망입니다. 예수께 붙잡힌 바 된 삶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는 바울의 신앙적 결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힘을 받았으므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 미래의 목표가 되시기 때문에 오늘도 배우고 도전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겸손하면서도 용기를 가진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앎이 융합된 신앙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자가 되어 주님 앞에 예배드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거룩한 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배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고, 내 삶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삶을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렇게 믿음과 앎의 경험이 풍성해 지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 신앙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뒤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15)

‘사랑’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인격과 인격 간에 일어나는 신비로운 체험이 사랑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도 신비롭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속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의 신비를 깨닫습니다. 그분의 계시의 역사에 감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고, 사랑하면서 성숙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기쁨입니다. 나아가 이 사랑은 하나님과 나의 사랑을 넘어 공동체적으로 확대됩니다. 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6)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공동체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요 믿음의 공동체며, 예수님을 아는 공동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여정을 지속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다시 생각해 보고 돌아봅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그저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세례의 감격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역동성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다시 믿음의 자리에서 앎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시며 사랑으로 돌보셨는지, 그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알아가며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아, 예수님 속에 하나님이 계셨구나!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예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아침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다시 “주님,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총을 기억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바로 이 축복의 역사에 동참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12월 1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퇴보의 영, 성숙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28장, 30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엡 4:13-16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신앙의 가장 큰 특성은 바로 ‘성장’, ‘자라남’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육체는 점점 쇠약해지지만 영혼은 주님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기에 기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우리는 목표를 상실하면 금방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배움의 목표를 가지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계속해서 배워 나갈 때 우리는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역동적입니다. 이 배움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어린이아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습니다(14절). 미숙한 자, 성장을 못하는 자,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 어린아이에 머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반성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미숙에서 성숙으로 가야 합니다.

‘마마보이’, ‘마마걸’이라는 신조어는 잘못된 교육방법의 부모들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모든 어려움을 다 치워 주는 ‘컬링부모’, 모든 것을 다 참견하고 조종하는 ‘헬리콥터부모’ 등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삶을 위해 그 앞길에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기를 원합니다.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갖추어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녀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몸은 분명히 성인이 되었는데 정신이 아직 어린아이인 우리의 자녀들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고난을 견딜힘이 약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치열하고 “요동(14절)”치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인생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 속에서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력, 나의 분별력이 없는 아이들은 속임수와 유혹에 따라 삶이 조종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성숙하기 위해 우리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삶으로 나가야 합니다(13절). 신앙의 즐거움임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에서 앎으로, 깨달음으로 나갈 때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알고 믿어야 하고, 믿으면서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다이내믹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위대함을 설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죽음과 요동치는 인생을 무시하였습니다. 초인을 만들려 하지만 초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신앙 안에서 인식론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믿으면 더 알게 되고, 알면 더 믿게 됩니다. 상호 보완적입니다. 진정한 초인이라 부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믿음은 앎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13절)”에 이르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앎의 단계를 넘어 사랑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지체는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깨닫게 하십니다. 믿고 알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교회를 세상을 향해 증언하는 공동체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소망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까?

2. 이 놀라운 예수님을 나는 알아가고 있습니까? 그분을 알기 위한 나의 노력이 있습니까?

3.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의 믿음과 나의 앎이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는데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교만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까?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또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앎으로, 사랑으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주님의 자녀들과 동행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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