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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서 – 부활을 산 사람들 3 –

사도행전 9: 26 ~ 31

김지철 목사

2013.04.21

좋은 사람이 곁에 있음을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우리 삶의 복입니다. 특히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우리는 ‘인복(人福)’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나는 인복이 참 없다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 아파하며 탄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내 아버지는 내가 얼굴도 익히기 전인 갓난아기 때 돌아가셨을까? 왜 내 동생은 태어나자마나 며칠을 못 살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왜 내 주위에는 마음을 둘 만한 친구가 많지 않을까?’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투정도 섞인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열등감처럼 저를 억누르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게 되면서부터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동지들도 만났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특히 소망교회에 오게 되면서는 늘 하나님 앞에서, 아니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나만큼 인복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나? 있으면 한 번 나와 봐라!”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좋은 성도님들, 집사님들, 권사님들 그리고 장로님들을 만나게 된 것이 제게는 참으로 소중한 일이며, 제 신앙과 삶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면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분들의 얼굴을 한 번씩 떠올리면서 감사의 고백을 드리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를 지나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두 종류의 사람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나는 내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내게 깊은 상처를 주어 나를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커지게 됩니다. 그 대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에게 감동을 준 사람들입니다. 내가 피곤할 때 손을 잡아주고, 내가 낙심했을 때 가까이 다가와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 준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용기를 얻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축복입니다.

바나바는 성경이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심이 있고, 남을 격려할 줄 아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 자체가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사도행전에 네 번씩이나 등장하지만, 바울 같은 사람에게 가려져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에서 37절을 보면, 바나바는 예수님을 굉장히 이른 시기에 믿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역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칩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2절 이하를 보면, 안디옥 교회가 장성해지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합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그런 그를 ‘착한 사람(a good man)’이라고 표현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성령의 역사에 열린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여러 가지 사역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한 인물을 알아보고 그 사람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로 불리게 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귀히 여긴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사울의 삶은 전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이 그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법이었습니다.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법을 잘 지키는 자신은 의인이라고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한 자기 같은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감격한 것입니다.
그의 삶은 율법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율법이 아니라, 그렇게 정죄당한 죄인조차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사랑의 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그는 복음에 앞장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계시적인 체험을 한 사울이라고 할지라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의 접촉이 없었다면 그의 복음 선포와 헌신은 아무런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나바의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한 사람이 바나바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한 중요한 일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울에 대한 편견을 깨어준 것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도행전 9:26)

사울은 예수님을 믿게 되자, 자신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갈 때마다 제자들은 그와 만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는 그 이유를 두 가지 동사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웠고, 둘째는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행동은 하지 않고, 위축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이러했습니다.
사람은 잘 안 변하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돌아볼 때, 자신이 잘 변하던가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까지 우리 신앙의 이력서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도전하고, 더 이상 하나님 안 믿겠다고 도망가기도 했다가 결국 삶의 수많은 고비 속에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달으면서 지금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순식간에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변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제자들은 사울의 회심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지금껏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겠다고 날뛰다가 이제는 예수를 증거한다고 하니,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다가와서는 뒤통수를 치는 것이 아닐지, 우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신뢰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사람을 사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나도 상대를 신뢰할 수 있고 그도 나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 내가 부족해도 나를 격려해 주고, 내 약점을 듣고도 동네방네 떠들지 않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것이 한 사람을 자기들의 공동체로 받아들이기 꺼려했던 예루살렘 교회 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에 대한 편견, 변화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래된 편견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릴 때부터 사회관습적으로 어른들에게 들어온 수많은 말들이 편견처럼, 고정관념처럼 내 삶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쉽게 극복이 되었습니까?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합니다. 하얀 옷 입기를 좋아해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 말이 생기게 된 이유와 상관없이 어느샌가 그 말 속에 어떤 가치와 개념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얀 것은 더 좋은 것이고, 까만 것은 나쁜 것이구나!
지조를 지켰던 정몽주의 어머니가 쓴 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흰빛을 시샘하나니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것 또한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로 변질됩니다.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며 미개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인간을 얼굴 색깔에 의해서 규정하고 차별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아닙니까?
우리가 가진 잘못된 생각 중에 가부장적인 사고의 어른들께서 가르쳐 주신 것도 있습니다. ‘여자가 어떻게 감히 남자와 견줄 수 있는가? 여자는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존재다. 여자는 감성적인 존재라서 비이성적이야.’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감성이 더욱 인정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감성에서 영성으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감성과 영성을 통해서 이성적인 가치를 더 돋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여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없고, 운명적으로 가난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경제사적으로 보면 가난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올 수 없도록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많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는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며 어떻게 하면 작은 자, 연약한 자를 도우면서 하나의 공동체로 잘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역적인 감정의 편견도 있었습니다. “지역이 다르면 결코 신뢰하지 말라.” 어려서부터 종종 들어온 이야기일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해소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반성하고 고쳐야할 요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장애인의 인권, 가난한 자의 인권, 여자의 인권, 다문화 가정의 인권, 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의 인권 등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인권을 소중함을 외치는 사람들 중에 북한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남한의 인권이 소중하면 북한의 인권도 소중한 것입니다. 미국인의 인권이 소중하면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권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얼굴 색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차별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남자나 여자나 많이 가진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인격적 존재입니다.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실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엄청난 편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보는 입장, 아들이 보는 입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점이나 입장이 다른 것은 조금만 서로 양보하면, 아니 배우면 수정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알지 못하면서 편견을 가지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편견이란, 무지함 때문에 생기는 사생아와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의도적으로 자기 생각을 고착화시킬 때 편견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은, 나쁜 감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조롱하려 할 때 더욱 악화됩니다. 그 편견은 개인에게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위기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과거 독재 정치인들이 그랬습니다. 편견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입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개인적,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도행전 9:27)

사울을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변할지 아느냐, 원래 나쁜 사람 아니냐 등 예루살렘 사도들에게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앞장선 것입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들으세요. 관심을 가지고 이 사람이 정말 못된 사람인가, 좋은 사람인가 확인해 보세요.”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직접 데리고 갔습니다.
드디어 사도들은 사울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메섹에서 담대하게, 두려움없이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바나바는 신실하며, 사람을 세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을 신임할 수는 없었지만 바나바는 신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울에 대한 의심은 있었지만, 바나바가 말하는 것과 그가 추천하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누군가를 추천해 본 적 있으십니까? 아니면 남에게 추천을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추천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입니다.
저도 교회에서 사람을 쓰려고 할 때 종종 장로님들의 추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또 목사님들에게 추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역시 다시 한 번 들여다봅니다. 왜입니까? 추천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신뢰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런 축복을 가진 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추천은 신뢰할 만하오. 그동안 얼마나 수고했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가 아오. 예수님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드리지 않았소?’ 그래서 바나바를 통해서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스스로 2인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세웠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떨어져 있었을 때 바나바가 안디옥에서부터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동역자로 세우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소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순자가 쓴 권학편을 보면 이런 한자어구가 있습니다. 청출어람 청어람, 빙수위지이한어수(靑出於藍 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룬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는 뜻입니다. 즉 후학이 선학보다 더 크게 되고, 후배가 선배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늘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보다 내 아들과 내 딸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게 해 주시고, 더 지혜롭게 해 주세요. 더 믿음이 큰 사람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복 받은 가정의 모습 아닙니까?
저도 언젠가 은퇴하여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소망교회 목사님으로 초청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과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전생을 드리며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게 해 주세요.”
사람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비결은 좋은 점을 나쁜 점보다 더 크게 보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다 있습니다. 어떻게 100% 좋고, 100% 나쁘겠습니까?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좋은 점을 귀히 여기고 그것을 더 눈여겨 볼 때에 그를 세울 수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바나바가 가지고 있는 축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알아보고, 자신이 속해있던 공동체와 그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를 높이 세웠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을 연결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후에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울과 다툼이 있었을 때도 마가라는 청년을 세우고자 애썼습니다. 한 인간의 연약함에 긍휼을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일관적으로 배려의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가 부활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넉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편견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분별력이 더 커지고, 생각이 더 많아져야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생각들은 하나님 때문에 단순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남을 높일 줄 알게 되고, 내 것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신앙은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어둡게 하는 편견들, 내 안에 있는 편견들을 깨뜨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의 연약한 형제들과 자매들을 함께 세워 나갈 것인가? 우리는 바나바라는 한 사람 때문에 바울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세워진 것을 기억하며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일당백입니다. 아니 일당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바나바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일당백이고, 일당천이라고 으쓱거리지 않는, 바나바의 영적 품성 또한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바나바와 같이 이 땅에 만연되어 있는 편견들을 깨뜨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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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 26 ~ 31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좋은 사람이 곁에 있음을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우리 삶의 복입니다. 특히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우리는 ‘인복(人福)’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나는 인복이 참 없다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 아파하며 탄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내 아버지는 내가 얼굴도 익히기 전인 갓난아기 때 돌아가셨을까? 왜 내 동생은 태어나자마나 며칠을 못 살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왜 내 주위에는 마음을 둘 만한 친구가 많지 않을까?’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투정도 섞인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열등감처럼 저를 억누르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게 되면서부터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동지들도 만났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특히 소망교회에 오게 되면서는 늘 하나님 앞에서, 아니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나만큼 인복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나? 있으면 한 번 나와 봐라!”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좋은 성도님들, 집사님들, 권사님들 그리고 장로님들을 만나게 된 것이 제게는 참으로 소중한 일이며, 제 신앙과 삶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면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분들의 얼굴을 한 번씩 떠올리면서 감사의 고백을 드리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를 지나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두 종류의 사람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나는 내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내게 깊은 상처를 주어 나를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커지게 됩니다. 그 대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에게 감동을 준 사람들입니다. 내가 피곤할 때 손을 잡아주고, 내가 낙심했을 때 가까이 다가와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 준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용기를 얻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축복입니다.

바나바는 성경이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심이 있고, 남을 격려할 줄 아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 자체가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사도행전에 네 번씩이나 등장하지만, 바울 같은 사람에게 가려져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에서 37절을 보면, 바나바는 예수님을 굉장히 이른 시기에 믿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역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칩니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2절 이하를 보면, 안디옥 교회가 장성해지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합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그런 그를 ‘착한 사람(a good man)’이라고 표현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성령의 역사에 열린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여러 가지 사역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한 인물을 알아보고 그 사람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로 불리게 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귀히 여긴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사울의 삶은 전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이 그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법이었습니다.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법을 잘 지키는 자신은 의인이라고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한 자기 같은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감격한 것입니다.
그의 삶은 율법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율법이 아니라, 그렇게 정죄당한 죄인조차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사랑의 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그는 복음에 앞장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계시적인 체험을 한 사울이라고 할지라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의 접촉이 없었다면 그의 복음 선포와 헌신은 아무런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나바의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한 사람이 바나바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한 중요한 일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울에 대한 편견을 깨어준 것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도행전 9:26)

사울은 예수님을 믿게 되자, 자신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갈 때마다 제자들은 그와 만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는 그 이유를 두 가지 동사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웠고, 둘째는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행동은 하지 않고, 위축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이러했습니다.
사람은 잘 안 변하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돌아볼 때, 자신이 잘 변하던가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까지 우리 신앙의 이력서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도전하고, 더 이상 하나님 안 믿겠다고 도망가기도 했다가 결국 삶의 수많은 고비 속에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달으면서 지금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순식간에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변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제자들은 사울의 회심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지금껏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겠다고 날뛰다가 이제는 예수를 증거한다고 하니,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다가와서는 뒤통수를 치는 것이 아닐지, 우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신뢰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사람을 사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나도 상대를 신뢰할 수 있고 그도 나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 내가 부족해도 나를 격려해 주고, 내 약점을 듣고도 동네방네 떠들지 않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것이 한 사람을 자기들의 공동체로 받아들이기 꺼려했던 예루살렘 교회 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에 대한 편견, 변화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래된 편견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어릴 때부터 사회관습적으로 어른들에게 들어온 수많은 말들이 편견처럼, 고정관념처럼 내 삶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쉽게 극복이 되었습니까?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합니다. 하얀 옷 입기를 좋아해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 말이 생기게 된 이유와 상관없이 어느샌가 그 말 속에 어떤 가치와 개념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얀 것은 더 좋은 것이고, 까만 것은 나쁜 것이구나!
지조를 지켰던 정몽주의 어머니가 쓴 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흰빛을 시샘하나니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이것 또한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로 변질됩니다.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며 미개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인간을 얼굴 색깔에 의해서 규정하고 차별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아닙니까?
우리가 가진 잘못된 생각 중에 가부장적인 사고의 어른들께서 가르쳐 주신 것도 있습니다. ‘여자가 어떻게 감히 남자와 견줄 수 있는가? 여자는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존재다. 여자는 감성적인 존재라서 비이성적이야.’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감성이 더욱 인정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감성에서 영성으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감성과 영성을 통해서 이성적인 가치를 더 돋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여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없고, 운명적으로 가난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경제사적으로 보면 가난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올 수 없도록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많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는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며 어떻게 하면 작은 자, 연약한 자를 도우면서 하나의 공동체로 잘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역적인 감정의 편견도 있었습니다. “지역이 다르면 결코 신뢰하지 말라.” 어려서부터 종종 들어온 이야기일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해소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반성하고 고쳐야할 요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장애인의 인권, 가난한 자의 인권, 여자의 인권, 다문화 가정의 인권, 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의 인권 등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인권을 소중함을 외치는 사람들 중에 북한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남한의 인권이 소중하면 북한의 인권도 소중한 것입니다. 미국인의 인권이 소중하면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권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얼굴 색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차별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남자나 여자나 많이 가진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인격적 존재입니다.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실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엄청난 편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보는 입장, 아들이 보는 입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점이나 입장이 다른 것은 조금만 서로 양보하면, 아니 배우면 수정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알지 못하면서 편견을 가지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편견이란, 무지함 때문에 생기는 사생아와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의도적으로 자기 생각을 고착화시킬 때 편견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은, 나쁜 감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조롱하려 할 때 더욱 악화됩니다. 그 편견은 개인에게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위기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과거 독재 정치인들이 그랬습니다. 편견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입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개인적,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도행전 9:27)

사울을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변할지 아느냐, 원래 나쁜 사람 아니냐 등 예루살렘 사도들에게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앞장선 것입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들으세요. 관심을 가지고 이 사람이 정말 못된 사람인가, 좋은 사람인가 확인해 보세요.” 바나바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직접 데리고 갔습니다.
드디어 사도들은 사울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메섹에서 담대하게, 두려움없이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바나바는 신실하며, 사람을 세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을 신임할 수는 없었지만 바나바는 신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울에 대한 의심은 있었지만, 바나바가 말하는 것과 그가 추천하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누군가를 추천해 본 적 있으십니까? 아니면 남에게 추천을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추천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입니다.
저도 교회에서 사람을 쓰려고 할 때 종종 장로님들의 추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또 목사님들에게 추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역시 다시 한 번 들여다봅니다. 왜입니까? 추천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신뢰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런 축복을 가진 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추천은 신뢰할 만하오. 그동안 얼마나 수고했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가 아오. 예수님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드리지 않았소?’ 그래서 바나바를 통해서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스스로 2인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세웠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떨어져 있었을 때 바나바가 안디옥에서부터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동역자로 세우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소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순자가 쓴 권학편을 보면 이런 한자어구가 있습니다. 청출어람 청어람, 빙수위지이한어수(靑出於藍 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이룬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는 뜻입니다. 즉 후학이 선학보다 더 크게 되고, 후배가 선배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늘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보다 내 아들과 내 딸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게 해 주시고, 더 지혜롭게 해 주세요. 더 믿음이 큰 사람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복 받은 가정의 모습 아닙니까?
저도 언젠가 은퇴하여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소망교회 목사님으로 초청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과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전생을 드리며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게 해 주세요.”
사람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비결은 좋은 점을 나쁜 점보다 더 크게 보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다 있습니다. 어떻게 100% 좋고, 100% 나쁘겠습니까?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좋은 점을 귀히 여기고 그것을 더 눈여겨 볼 때에 그를 세울 수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바나바가 가지고 있는 축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알아보고, 자신이 속해있던 공동체와 그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를 높이 세웠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을 연결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후에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울과 다툼이 있었을 때도 마가라는 청년을 세우고자 애썼습니다. 한 인간의 연약함에 긍휼을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일관적으로 배려의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가 부활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넉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편견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분별력이 더 커지고, 생각이 더 많아져야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생각들은 하나님 때문에 단순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남을 높일 줄 알게 되고, 내 것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신앙은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어둡게 하는 편견들, 내 안에 있는 편견들을 깨뜨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의 연약한 형제들과 자매들을 함께 세워 나갈 것인가? 우리는 바나바라는 한 사람 때문에 바울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세워진 것을 기억하며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일당백입니다. 아니 일당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바나바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일당백이고, 일당천이라고 으쓱거리지 않는, 바나바의 영적 품성 또한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바나바와 같이 이 땅에 만연되어 있는 편견들을 깨뜨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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