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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 18 ~ 23

김지철 목사

2015.06.28

감사가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아주 복 받은 사람입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반갑고 새로운 하루에 대한 기대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소리가 영혼에서 울려나온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어제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가끔 경춘가도를 달려봅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산하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푸르고 푸른 여름의 풍요로움. 여름에는 마치 어머니 가슴처럼 포근할 것 같은 짙푸름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비가 오더니 어제는 하늘이 가을날처럼 맑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고 이런 풍경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 많은 감사의 내용들을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나를 감사하게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가 삶의 곳곳에서 그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일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6)

범사의 모든 사건, 즉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깰 때, 저녁에 잠들 때, 식사를 할 때, 직장에서 일할 때, 사람들을 만날 때 등 일상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시고 그리고 새로운 자리로 안내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믿음은 지식과 함께 갑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런 감사의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오랫동안 정신적인 방황을 지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계속적인 물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정말로 계십니까? 내가 얼마만큼 주님을 알아야 주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채 그냥 믿는다면 그것은 왜곡된 믿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론에서 물은 것들을 저도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내 인생 전체를 맡겨도 괜찮은 분이십니까? 하나님께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까?’
성도님들께도 묻겠습니다. 누군가 다가와서 “당신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네 가지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고르셔도 됩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나는 하나님을 모르겠습니다. 셋째,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넷째, 나는 하나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갖고 계십니까?
어쩌면 네 가지가 우리 삶에 모두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사라지고 맙니다. 내면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봐!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는 거야?’라고 묻습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 ‘나는 믿음이 있다’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하나님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우리는 또다시 교회를 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도 내가 하루하루 조금씩 더 주님을 알아가고 있구나. 내 안에 믿음이 생기고 있어’ 하는 스스로를 향한 대견함이 생깁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신앙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조금 더 알게 되면, 하나님을 조금 더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더하면, 하나님을 더 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믿음을 우리의 깨달음과 앎에서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더 알게 만들고, 앎은 더 믿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법칙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연구하면서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이 ‘앎’은 인격적인 앎입니다. 인격적인 앎이란 사귐을 통한 것입니다. 대화하면서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펴서 읽고, 그분의 뜻을 깨달으면서 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앎, 그것으로 인한 신뢰, 그리고 점점 커지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은 없다”고 소리칩니다. 왜입니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14:1)

여기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단순한 무신론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실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나태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의도적인 저항과 거부를 합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구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여서 무한한 세계,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인간은 땅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 위의 세계를 소망합니다. 구약의 전도서가 이 같은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 (전도서 3:11)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때를 따라서 조화롭고 아름답게, 멋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시면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영원을 사모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허무를 뛰어넘는 진리가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절망을 뛰어넘는 소망이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한계를 넘는 새로운 세계가 있을까?’ 묻고 꿈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마음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때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없는 대로 살아갈까요?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신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우상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3)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 변화되지 않는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의 모습으로, 피조물의 모습으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축소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자녀일 수 있습니다. 아내이고 남편일 수 있습니다. 또는 아이돌 가수와 같은 인기인일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에게는 이것이 이념이나 사상일 수도 있고, 자신이 가진 달란트일 수도 있습니다. 돈을 추구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것에서 찾으려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며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인간은 왜 우상을 섬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멈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어둠 속에 갇히고 마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피조물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

생각이 허망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인간일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 아닌 것을 경배하는 것은 우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를 포기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두 번째로, 감사가 사라집니다. 나의 신앙이 올바른 신앙인지, 내가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신앙의 척도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입니다. 내 영혼이 기뻐하는가? 내 영혼에 감사가 있는가?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한가?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감사한가? 내가 이만큼 먹고 사는 것이 감사한가?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 감사한가? 앞으로 살아갈 날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게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 감사한가?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자꾸만 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가 언제 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놓칠 때, 그래서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이 우리 속에 자꾸만 쌓일 때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만물에 당신의 흔적을 담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20)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시간과 역사 속에서 당신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비롯한 우리 삶의 모든 곳에서, 또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모르겠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핑계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시편 기자는 하늘과 땅을 보면서 주님의 솜씨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만드셨음을 기억합니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는지 그는 감격해하며,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또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을까요?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저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느니라. 너희는 저 새보다 저 백합화보다 훨씬 귀한 존재 아니냐? 그런데 왜 낙심하면서 사느냐? 왜 믿음 없이 사느냐? 왜 슬픔으로 사느냐? 하나님을 믿고 네 가슴을 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3)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이 창조주가 되어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인식론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은 생각을 멈추거나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생각을 더 깊고 넓고 높게 만듭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우리의 지식에는 지적인 앎이 있고 직관적인 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격적인 앎입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풍성해지는 앎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이성적인 판단을 포함하지만 늘 그것을 넘어섭니다. 직관적인 감수성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앎이 넓어지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가 갖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젊은 청년이 누군가를 사귑니다. 여러 번 데이트를 하다가 어느 날 프로포즈를 하고, 부부가 됩니다. 처음 그들이 사귈 때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일 것입니다. 나이가 몇이고, 직업이 무엇이고, 어떠한 가정에서 자랐고 등등 말입니다. 그러한 지식에 의해 더 만날까 만나지 말까를 생각하다가 데이트를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상대방을 신뢰하게 되고 ‘이 사람과 인생을 함께 갈 수 있겠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만으로 관계가 성숙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함께 살자’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가정을 꾸리게 만듭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겁니다.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를 쓰며 몸으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같이 하면서 사랑하게 될 때 그것이 그를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삶 속에 함께할 때, 비로소 영혼에 기쁨과 감사가 생기고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갑시다.

신앙이란 삶의 해석학입니다. 삶을 볼 줄 아는 능력입니다. 또한 사랑하면서 살겠다는 결정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용기가 없이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해야 됩니다. 신뢰하면서 살 것인지 의심하면서 살 것인지, 사랑하며 살 것인지 무관심 속에서 내팽개치고 살 것인지를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다시 한 번 21절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 (로마서 1:21)

우리는 거꾸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은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그것은 곧 우리의 ‘감사’입니다. 내 영혼에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의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가진 것들을 바라보고, 그래서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오늘도 경험하면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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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 18 ~ 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감사가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아주 복 받은 사람입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반갑고 새로운 하루에 대한 기대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소리가 영혼에서 울려나온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어제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가끔 경춘가도를 달려봅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산하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푸르고 푸른 여름의 풍요로움. 여름에는 마치 어머니 가슴처럼 포근할 것 같은 짙푸름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비가 오더니 어제는 하늘이 가을날처럼 맑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고 이런 풍경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 많은 감사의 내용들을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나를 감사하게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가 삶의 곳곳에서 그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일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6)

범사의 모든 사건, 즉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깰 때, 저녁에 잠들 때, 식사를 할 때, 직장에서 일할 때, 사람들을 만날 때 등 일상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시고 그리고 새로운 자리로 안내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믿음은 지식과 함께 갑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런 감사의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오랫동안 정신적인 방황을 지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제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계속적인 물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정말로 계십니까? 내가 얼마만큼 주님을 알아야 주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채 그냥 믿는다면 그것은 왜곡된 믿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론에서 물은 것들을 저도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내 인생 전체를 맡겨도 괜찮은 분이십니까? 하나님께 내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까?’
성도님들께도 묻겠습니다. 누군가 다가와서 “당신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네 가지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고르셔도 됩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나는 하나님을 모르겠습니다. 셋째,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넷째, 나는 하나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갖고 계십니까?
어쩌면 네 가지가 우리 삶에 모두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사라지고 맙니다. 내면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봐!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는 거야?’라고 묻습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 ‘나는 믿음이 있다’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하나님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우리는 또다시 교회를 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도 내가 하루하루 조금씩 더 주님을 알아가고 있구나. 내 안에 믿음이 생기고 있어’ 하는 스스로를 향한 대견함이 생깁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신앙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조금 더 알게 되면, 하나님을 조금 더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더하면, 하나님을 더 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믿음을 우리의 깨달음과 앎에서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더 알게 만들고, 앎은 더 믿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법칙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연구하면서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이 ‘앎’은 인격적인 앎입니다. 인격적인 앎이란 사귐을 통한 것입니다. 대화하면서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펴서 읽고, 그분의 뜻을 깨달으면서 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앎, 그것으로 인한 신뢰, 그리고 점점 커지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은 없다”고 소리칩니다. 왜입니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14:1)

여기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단순한 무신론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실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나태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의도적인 저항과 거부를 합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구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여서 무한한 세계,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인간은 땅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 위의 세계를 소망합니다. 구약의 전도서가 이 같은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 (전도서 3:11)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때를 따라서 조화롭고 아름답게, 멋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시면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영원을 사모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허무를 뛰어넘는 진리가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절망을 뛰어넘는 소망이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한계를 넘는 새로운 세계가 있을까?’ 묻고 꿈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마음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때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없는 대로 살아갈까요?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신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우상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로마서 1:23)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 변화되지 않는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의 모습으로, 피조물의 모습으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축소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자녀일 수 있습니다. 아내이고 남편일 수 있습니다. 또는 아이돌 가수와 같은 인기인일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에게는 이것이 이념이나 사상일 수도 있고, 자신이 가진 달란트일 수도 있습니다. 돈을 추구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것에서 찾으려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며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인간은 왜 우상을 섬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멈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어둠 속에 갇히고 마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피조물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

생각이 허망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인간일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 아닌 것을 경배하는 것은 우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를 포기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두 번째로, 감사가 사라집니다. 나의 신앙이 올바른 신앙인지, 내가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신앙의 척도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입니다. 내 영혼이 기뻐하는가? 내 영혼에 감사가 있는가?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한가?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감사한가? 내가 이만큼 먹고 사는 것이 감사한가?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 감사한가? 앞으로 살아갈 날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게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 감사한가?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자꾸만 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가 언제 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놓칠 때, 그래서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이 우리 속에 자꾸만 쌓일 때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만물에 당신의 흔적을 담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20)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시간과 역사 속에서 당신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비롯한 우리 삶의 모든 곳에서, 또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모르겠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핑계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시편 기자는 하늘과 땅을 보면서 주님의 솜씨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만드셨음을 기억합니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는지 그는 감격해하며,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또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을까요?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저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느니라. 너희는 저 새보다 저 백합화보다 훨씬 귀한 존재 아니냐? 그런데 왜 낙심하면서 사느냐? 왜 믿음 없이 사느냐? 왜 슬픔으로 사느냐? 하나님을 믿고 네 가슴을 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3)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이 창조주가 되어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인식론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은 생각을 멈추거나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생각을 더 깊고 넓고 높게 만듭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우리의 지식에는 지적인 앎이 있고 직관적인 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격적인 앎입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풍성해지는 앎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이성적인 판단을 포함하지만 늘 그것을 넘어섭니다. 직관적인 감수성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앎이 넓어지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가 갖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젊은 청년이 누군가를 사귑니다. 여러 번 데이트를 하다가 어느 날 프로포즈를 하고, 부부가 됩니다. 처음 그들이 사귈 때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일 것입니다. 나이가 몇이고, 직업이 무엇이고, 어떠한 가정에서 자랐고 등등 말입니다. 그러한 지식에 의해 더 만날까 만나지 말까를 생각하다가 데이트를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상대방을 신뢰하게 되고 ‘이 사람과 인생을 함께 갈 수 있겠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만으로 관계가 성숙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함께 살자’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가정을 꾸리게 만듭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겁니다.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를 쓰며 몸으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같이 하면서 사랑하게 될 때 그것이 그를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삶 속에 함께할 때, 비로소 영혼에 기쁨과 감사가 생기고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갑시다.

신앙이란 삶의 해석학입니다. 삶을 볼 줄 아는 능력입니다. 또한 사랑하면서 살겠다는 결정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용기가 없이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해야 됩니다. 신뢰하면서 살 것인지 의심하면서 살 것인지, 사랑하며 살 것인지 무관심 속에서 내팽개치고 살 것인지를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다시 한 번 21절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 (로마서 1:21)

우리는 거꾸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은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그것은 곧 우리의 ‘감사’입니다. 내 영혼에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의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가진 것들을 바라보고, 그래서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오늘도 경험하면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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