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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요한복음 8: 28 ~ 30

김지철 목사

2017.02.19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로 내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교회, 말씀의 공동체!’라는 주제 아래 마지막 네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목사인 저도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때론 불확실성 속에서 결단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던 적도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제가 원한 대로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도 여러 번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기본적인 마음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건강한 ‘상식’을 갖길 원했습니다. 건전한 ‘양심’을 소원하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습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건강한 상식 아래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성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뜻과 지성과 지혜로 만들어졌고, 그 뜻과 지성 아래 세계가 여전히 존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지성을 하나님께서 인간인 우리에게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건전한 양심을 소원하면서, 이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면 건전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내면에서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도전하고 모험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고 여겼습니다.
내 ‘성품’과 ‘달란트’에 적합한가도 물었습니다.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혹시 내 욕심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닌가?’라며 질문했고,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늘 이러한 질문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하게 교제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시시각각 문제에 부딪히곤 합니다. 작은 문제부터 큰 문제, 때론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닥쳐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이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여기에 큰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구처럼 만나고 대화하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 인간을 만드시고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보기에 정말 좋구나!”라고 찬탄하셨습니다. 이는 창조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닮은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위치에 인간이 서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친구로, 하나님의 대화적 상대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친밀감을 가지고 인간과 사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셨고, 우리의 인생 이야기, 스토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이자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증거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는 성령을 보내어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소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간절한 기대이자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임마누엘 신앙은 우리의 신앙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소원과 희망을 품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일하길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 마음속에 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소망을 품은 사람들은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란 마음의 소원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건 마음의 소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우리의 소원을 일치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이 분별력을 키웁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는 크게 두 유형일 것입니다. 첫째는 ‘either or’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즉,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결정해야 할 문제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두 번째는 ‘both and’입니다. 이는 ‘이것도 저것도’ 즉,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까요? 이때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인데, 바로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이 분별력으로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실과 거짓, 옮음과 그름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분별력은 무엇보다 가진 것이 많을 때, 더 철저하게 발휘되어야 합니다. 권력이 많을 때, 남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될 때 더 유념해야 합니다. 구약의 다윗 왕에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보다 더 큰 권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가 백성을 통치하지만, 나까지 통치하시는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왕위에 오르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입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3:9)

주의 백성을 재판할 때,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분별의 능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본문의 중간 부분에 보면, 솔로몬이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듣는 마음이란 ‘listening heart’입니다. “내가 듣겠습니다. 내 내면의 소리를 듣겠습니다. 백성과 국민의 소리를 듣겠습니다.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이것이 백성의 지도자로서 겸손히 기도했던 솔로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솔로몬을 축복하십니다. “네가 듣는 마음을 원했구나. 내 마음에 꼭 들구나. 복되도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해 위기와 고통이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시와 명령만 좋아하는 지도자였다면 이제 경청할 줄 아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가 될 때도 그렇습니다. 어머니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의 장이 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listening heart입니다. 듣는 마음이 있어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건전한 상식과 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상식과 양심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인지, 여기서 멈출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주일인 오늘, 여러분도 일어나면서 결단했을 것입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몸에 체득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 가서 하나님께 먼저 예배를 드릴까, 아니면 오늘 그냥 야외로 놀러 나갈까?’ 고민하다가 결정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겠다고 결심하고, 이렇게 믿음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선을 택하고 악을 버려야 합니다.

다윗 왕은 권력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궁궐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다 목욕하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아름다운 그 여인을 보고 마음속에 음욕을 품으며 “저 여인이 누구냐?” 하고 부하에게 알아오게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이때 그는 멈춰 서야 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더 나아가면 안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탐욕과 정욕에 못 이겨 범죄를 저지릅니다. 연속해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의 삶에 충격적인 파멸과 고통이 이어집니다. 아마 그의 인생 위기 속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위기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때로 그 유혹이 선의 모습을 하고 다가오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위장해 우리를 현혹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수많은 유혹의 생각, 불의한 생각, 거짓과 허위의 생각, 정욕의 생각들이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새들이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과감히 내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결단이며, 책임입니다.
여러분, 선과 악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결단하기가 쉽습니까?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우리에게는 엄청난 결단이 요구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지혜로웠던 다윗 아닙니까? 총명했던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았고,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된 다윗입니다. 그런데 은밀한 유혹의 손길이 다가올 때, 그 역시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제든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선과 악을 분별하고, 이를 토대로 결단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21~22)

범사에 모든 것을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즉,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 있으면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진리의 세계, 생명의 세계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사랑에 기초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선이냐 악이냐’ 하는 판단은 그래도 쉬운 편에 속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both and’입니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다 괜찮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심플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번잡해져서 일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우선권을 놓칠 때입니다. 우선순위에 있는 일은 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일에만 몰두하면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이 모든 것’이란 인생에서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구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구해야 마땅하지만, 그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넘치게 부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돈이 왜 나쁘겠습니까? 재물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맘몬, 이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양자택일해야 할 때, 우선권을 가지고 택일하라는 뜻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맘몬은 우상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즉, 순서가 뒤바뀌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되면, 그 돈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돈이 나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돈을 관리하고 돈을 바르게 사용하면서 돈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근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자녀 된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판단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모든 것을 종합해 결론을 내리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아는 만큼 사물이 보이지 않습니까? 농부가 보는 세상과 물리학자가 보는 세상은 다릅니다.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 또한 다릅니다. 내가 아는 만큼 삶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면 눈앞에 있더라도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나아가 내가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보려면 알아야 되고, 알려면 사랑해야 되고, 이렇게 사랑하는 만큼 보이기 시작하는 뜻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동안 감추어졌던 세계가 하나하나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인생을 해석하고, 인생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삶의 해석학입니다.
조선 정조 때 문장가였던 유한준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 말을 각색했는데, 다음과 같은 표현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늘 보던 것인데, 사랑하면서 보니까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감추어졌던 것들이 보이면서 그 앎이 더 커진다는 뜻입니다. 이 감추어졌던 것을 보게 되는 앎, 또 그 앎을 확장하는 사랑, 이 사랑이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연인이 사랑을 시작할 때,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지 않습니까? 갑자기 노래와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하늘에 늘 떠있던 태양이, 밤하늘의 달과 별들이 아름답고 새롭게 보입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사랑의 시를 짓게 됩니다. 이처럼 내 영혼이 사랑하게 되면, 이 사랑을 통해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안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저는 종종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사도 바울은 어떻게 생각하고 결단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삶을 내놓으셨던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셨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8절입니다.

…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8:28 중)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랑을 끊임없이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사도 요한 역시 요한일서에서 다음과 같이 사랑을 예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7~8)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타락했으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어거스틴도 사랑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고백록 13권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어떤 사물들이 질서를 벗어나면 불안하여 질서에 되돌아와 안정을 회복하듯이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요, 어떤 장소에 내가 놓여 있든 간에 나는 사랑에 의해 지탱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에 의해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권면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인도하시니, 무엇이든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함께 가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무언가를 해 보는데,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혹시 내 욕심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내 마음에 있습니까? 내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집니까? 그러면 그 일을 하면 됩니다. 과감하게 진행해도 좋습니다.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찾기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깨닫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부딪쳐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또 기쁜 마음으로 즐거워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누리면서 삶을 열어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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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28 ~ 30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로 내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교회, 말씀의 공동체!’라는 주제 아래 마지막 네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목사인 저도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때론 불확실성 속에서 결단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던 적도 있습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 왜 그러셨습니까? 제가 원한 대로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도 여러 번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기본적인 마음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건강한 ‘상식’을 갖길 원했습니다. 건전한 ‘양심’을 소원하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습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건강한 상식 아래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성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뜻과 지성과 지혜로 만들어졌고, 그 뜻과 지성 아래 세계가 여전히 존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지성을 하나님께서 인간인 우리에게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건전한 양심을 소원하면서, 이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면 건전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내면에서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도전하고 모험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고 여겼습니다.
내 ‘성품’과 ‘달란트’에 적합한가도 물었습니다. 마음에 ‘기쁨’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혹시 내 욕심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닌가?’라며 질문했고,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늘 이러한 질문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하게 교제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시시각각 문제에 부딪히곤 합니다. 작은 문제부터 큰 문제, 때론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닥쳐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이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여기에 큰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구처럼 만나고 대화하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 인간을 만드시고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보기에 정말 좋구나!”라고 찬탄하셨습니다. 이는 창조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닮은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위치에 인간이 서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친구로, 하나님의 대화적 상대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친밀감을 가지고 인간과 사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셨고, 우리의 인생 이야기, 스토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이자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증거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는 성령을 보내어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소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간절한 기대이자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임마누엘 신앙은 우리의 신앙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소원과 희망을 품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일하길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 마음속에 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소망을 품은 사람들은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란 마음의 소원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건 마음의 소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우리의 소원을 일치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이 분별력을 키웁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는 크게 두 유형일 것입니다. 첫째는 ‘either or’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즉,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결정해야 할 문제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두 번째는 ‘both and’입니다. 이는 ‘이것도 저것도’ 즉,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까요? 이때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인데, 바로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이 분별력으로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실과 거짓, 옮음과 그름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분별력은 무엇보다 가진 것이 많을 때, 더 철저하게 발휘되어야 합니다. 권력이 많을 때, 남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될 때 더 유념해야 합니다. 구약의 다윗 왕에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보다 더 큰 권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가 백성을 통치하지만, 나까지 통치하시는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왕위에 오르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입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3:9)

주의 백성을 재판할 때,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분별의 능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본문의 중간 부분에 보면, 솔로몬이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듣는 마음이란 ‘listening heart’입니다. “내가 듣겠습니다. 내 내면의 소리를 듣겠습니다. 백성과 국민의 소리를 듣겠습니다.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이것이 백성의 지도자로서 겸손히 기도했던 솔로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솔로몬을 축복하십니다. “네가 듣는 마음을 원했구나. 내 마음에 꼭 들구나. 복되도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해 위기와 고통이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시와 명령만 좋아하는 지도자였다면 이제 경청할 줄 아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가 될 때도 그렇습니다. 어머니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의 장이 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listening heart입니다. 듣는 마음이 있어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건전한 상식과 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상식과 양심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인지, 여기서 멈출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주일인 오늘, 여러분도 일어나면서 결단했을 것입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몸에 체득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 가서 하나님께 먼저 예배를 드릴까, 아니면 오늘 그냥 야외로 놀러 나갈까?’ 고민하다가 결정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겠다고 결심하고, 이렇게 믿음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선을 택하고 악을 버려야 합니다.

다윗 왕은 권력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궁궐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다 목욕하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아름다운 그 여인을 보고 마음속에 음욕을 품으며 “저 여인이 누구냐?” 하고 부하에게 알아오게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이때 그는 멈춰 서야 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더 나아가면 안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탐욕과 정욕에 못 이겨 범죄를 저지릅니다. 연속해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의 삶에 충격적인 파멸과 고통이 이어집니다. 아마 그의 인생 위기 속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위기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때로 그 유혹이 선의 모습을 하고 다가오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위장해 우리를 현혹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수많은 유혹의 생각, 불의한 생각, 거짓과 허위의 생각, 정욕의 생각들이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새들이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과감히 내쳐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결단이며, 책임입니다.
여러분, 선과 악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결단하기가 쉽습니까?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우리에게는 엄청난 결단이 요구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지혜로웠던 다윗 아닙니까? 총명했던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았고,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까지 표현된 다윗입니다. 그런데 은밀한 유혹의 손길이 다가올 때, 그 역시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제든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선과 악을 분별하고, 이를 토대로 결단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21~22)

범사에 모든 것을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즉,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 있으면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진리의 세계, 생명의 세계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사랑에 기초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선이냐 악이냐’ 하는 판단은 그래도 쉬운 편에 속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both and’입니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다 괜찮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심플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번잡해져서 일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우선권을 놓칠 때입니다. 우선순위에 있는 일은 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일에만 몰두하면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이 모든 것’이란 인생에서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구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구해야 마땅하지만, 그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넘치게 부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돈이 왜 나쁘겠습니까? 재물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맘몬, 이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양자택일해야 할 때, 우선권을 가지고 택일하라는 뜻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맘몬은 우상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즉, 순서가 뒤바뀌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우선순위가 되면, 그 돈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돈이 나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돈을 관리하고 돈을 바르게 사용하면서 돈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근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자녀 된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판단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모든 것을 종합해 결론을 내리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아는 만큼 사물이 보이지 않습니까? 농부가 보는 세상과 물리학자가 보는 세상은 다릅니다.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 또한 다릅니다. 내가 아는 만큼 삶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면 눈앞에 있더라도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나아가 내가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보려면 알아야 되고, 알려면 사랑해야 되고, 이렇게 사랑하는 만큼 보이기 시작하는 뜻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동안 감추어졌던 세계가 하나하나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인생을 해석하고, 인생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삶의 해석학입니다.
조선 정조 때 문장가였던 유한준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 말을 각색했는데, 다음과 같은 표현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늘 보던 것인데, 사랑하면서 보니까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감추어졌던 것들이 보이면서 그 앎이 더 커진다는 뜻입니다. 이 감추어졌던 것을 보게 되는 앎, 또 그 앎을 확장하는 사랑, 이 사랑이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연인이 사랑을 시작할 때,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지 않습니까? 갑자기 노래와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하늘에 늘 떠있던 태양이, 밤하늘의 달과 별들이 아름답고 새롭게 보입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사랑의 시를 짓게 됩니다. 이처럼 내 영혼이 사랑하게 되면, 이 사랑을 통해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안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저는 종종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던 사도 바울은 어떻게 생각하고 결단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삶을 내놓으셨던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셨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8절입니다.

…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8:28 중)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랑을 끊임없이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사도 요한 역시 요한일서에서 다음과 같이 사랑을 예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7~8)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타락했으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어거스틴도 사랑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고백록 13권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어떤 사물들이 질서를 벗어나면 불안하여 질서에 되돌아와 안정을 회복하듯이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요, 어떤 장소에 내가 놓여 있든 간에 나는 사랑에 의해 지탱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에 의해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권면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인도하시니, 무엇이든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함께 가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무언가를 해 보는데,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혹시 내 욕심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내 마음에 있습니까? 내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집니까? 그러면 그 일을 하면 됩니다. 과감하게 진행해도 좋습니다.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찾기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깨닫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부딪쳐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또 기쁜 마음으로 즐거워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누리면서 삶을 열어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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