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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할까요?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소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소망이 우리 인생에 관여할 자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곁에 있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아픕니다. 그 때 우리가 슬퍼하며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은 볼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따뜻했던 손목 한 번 더 잡아볼 수 없는 것이 죽음의 아픔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영원한 생명과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하는가?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시편 146편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3~4)
귀인들이란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란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 입에 호흡이 그치면 세상에서 그토록 인기를 누리던 사람도, 부유하게 살던 사람도 다 똑같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그 생각이 유효하지 않고, 그 육체가 별 것이 아닌 존재로 바뀌어 진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저녁 때가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말을 합니다.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 그때 하루살이가 묻습니다. “내일이 뭔데?” 그러자 메뚜기가 대답을 합니다. “이제 곧 캄캄한 밤이 다가올 거야. 그것이 지나면 저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밝은 날이 오는데 그때가 내일이란다.” 하루살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메뚜기와 개구리가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개구리가 말합니다.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메뚜기는 묻습니다. “내년이 뭔데?” 개구리가 대답을 합니다. “추운겨울이 지나고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 게 내년이란다.” 메뚜기는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는 하루의 꿈만 꿀 수 있습니다. 메뚜기는 일 년의 꿈만 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보이는 세계에 한정된 제가 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만질 수 있는 것만 알고 있었던 저에게 하늘의 세계를 가르쳐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최근에 개봉한 ‘블랙(BLACK)’이라는 인도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캄캄함’이라는 제목 그대로 어둠속에 갇혀있던 미쉘이라는 8살 난 소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소녀에게 세상이란 온통 어둠의 세계뿐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캄캄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손과 발의 감각뿐이었습니다. 어둠의 세계 속에서 소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짐승처럼 울어대는 것과 마구 먹어대는 것뿐이었습니다. 소녀에게는 규칙이나 질서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소녀에게 세상과 소통하도록 다가온 인물이 사하이라는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은 이 소녀를 향해서 기대와 신뢰를 품고 다가갑니다. 그리고 소녀에게 엄청난 끈기와 노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소녀에게 빛의 세계를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두 살이면 알고 경험할 것을 그녀는 10년이 되어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하이 선생님이 소녀에게 세운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철저한 통제와 절제였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가르칩니다. “얘야, 너는 짐승이 아니야. 인간이야. 너는 배울 수 있어. 깨달을 수 있어!” 사하이 선생님은 소녀가 더 이상 짐승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으로서의 예절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사하이 선생님은 소녀가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얘야, 너는 변화될 수 있어. 너는 성숙할 수 있어. 너는 깨달을 수 있어!” 선생님은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교육을 실시합니다. 사물을 만지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반복적인 훈련을 지속합니다. 그래서 그 물건이 어떤 개념인가를 연결시키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갔다가 그것이 선생님이 가르쳐준 물이라는 개념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어둠이 아닌 빛이 소녀에게 다가갑니다. 부모조차도 믿지 않았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이 영화는 감동스럽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줌의 흙에 불과한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보고 만지는 것에 우리의 한계가 있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의 내용입니다.
믿으면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십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 2:14)
보이는 세계에 머무르는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풍성한 것들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야만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내 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분을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영혼 전체가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식이 열린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치 미쉘이 사하이 선생님을 신뢰하면서 서로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인식의 길이 열려진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만져지고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인격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만지시고 고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속에 있는 고통의 문제, 탄식의 문제, 절망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인식론에는 핵심이 있는데 믿어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면 어떤 것도 받아드릴 수가 없고 사랑해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에는 신뢰와 사랑이 우리에게 전부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다가오셔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내 눈을 열어주시고 하늘의 신비한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의 역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허황된 환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허황된 환상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진정한 힘이고 꿈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신비한 종교성을 가진 미신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다가와서 무서움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유령과 악마의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최근 두 여인의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 명은 당시 하늘의 신탁을 위임받아 종교성을 붙잡고 있는 미실이라는 여인입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종교성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려보려는 덕만공주로 후에 선덕여왕이 되는 인물입니다.
이 두 여인이 마주 앉아 어떻게 백성을 이끌어나갈지 정치 철학을 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때 덕만공주는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정치를 펼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미실은 희망이 아니라 환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백성들에게 공포를 심어줘야 안정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덕만은 상천관을 폐지하고 모든 천문 기상관측의 정보를 백성들에게 공개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빙자해서 백성들에게 공포감으로 위협하고 이기적인 권력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그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미실은 덕만을 조롱합니다. 그것은 곧 신권을 통한 통치를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백성들에게 신비가 사라지면 그때부터 통치능력은 사라지고 지배자는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비아냥거립니다. 미실은 우민정책을 펼쳐야 나라가 안정된다고 말하지만 그에 반해 덕만은 공개된 민주 정치를 해야 진정으로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아마 작가의 정치철학과 함께 이 시대를 풍자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하늘을 빙자해서 세속적인 권력과 야합하고 권력자로서 힘을 휘두른 적이 있었습니다. 암흑시대인 그 때 기독교는 백성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헬라어로 드리고, 설교도 라틴어로 했습니다. 그래서 참여한 성도들은 무슨 설교를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환상의 존재였고 신비한 존재였습니다. 그 때 교회는 부패했고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참된 모습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 그분을 믿고 따르면 어떤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는지를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허황된 환상 속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살아갈 힘이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허락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할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시편 146:5). 야곱은 사기꾼에 욕심쟁이요 이기심이 많은 존재였습니다. 문제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합니다(시편 146:7-9).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 힘든 사람들, 모든 것이 무너진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앞을 못 보는 사람들, 낮고 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셔서 그들을 세우시고 새 생명의 역사를 허락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둠속에 갇힌 자에게 빛의 축복을 주시고, 낮고 천한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허락해주시며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살아갈 희망과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새 소망과 새 꿈과 새 비전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소망하고 기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호흡이 끝나면 흙으로 돌아갈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늘의 세계가 이 땅위에 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는 두 가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를 감추어진 계시와 신비주의로 숨긴 채 사람들을 공포로 몰고 가는 악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열려진 계시를 통해 누구나 초청하는 참된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짓된 신뢰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허황된 꿈을 꾸게 하는 분도 아닙니다. 세상의 가진 자에게 아첨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를 멸시하게 하는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유와 생명과 치유를 허락하시고 모든 억눌린 것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과 재물은 필요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 또한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치유하실 하나님, 하늘의 감추어진 놀라운 비밀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진실과 성실함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진리의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억눌림을 당하고 질병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절망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만 소망을 품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나의 소유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늘의 세계,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깨닫는데 등한시했던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걸고 살아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편 146: 1 ~ 10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10
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할까요?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소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소망이 우리 인생에 관여할 자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곁에 있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아픕니다. 그 때 우리가 슬퍼하며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은 볼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따뜻했던 손목 한 번 더 잡아볼 수 없는 것이 죽음의 아픔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영원한 생명과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왜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하는가?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시편 146편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3~4)
귀인들이란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란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 입에 호흡이 그치면 세상에서 그토록 인기를 누리던 사람도, 부유하게 살던 사람도 다 똑같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그 생각이 유효하지 않고, 그 육체가 별 것이 아닌 존재로 바뀌어 진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저녁 때가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말을 합니다.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 그때 하루살이가 묻습니다. “내일이 뭔데?” 그러자 메뚜기가 대답을 합니다. “이제 곧 캄캄한 밤이 다가올 거야. 그것이 지나면 저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밝은 날이 오는데 그때가 내일이란다.” 하루살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메뚜기와 개구리가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개구리가 말합니다.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 메뚜기는 묻습니다. “내년이 뭔데?” 개구리가 대답을 합니다. “추운겨울이 지나고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 게 내년이란다.” 메뚜기는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는 하루의 꿈만 꿀 수 있습니다. 메뚜기는 일 년의 꿈만 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보이는 세계에 한정된 제가 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만질 수 있는 것만 알고 있었던 저에게 하늘의 세계를 가르쳐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최근에 개봉한 ‘블랙(BLACK)’이라는 인도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캄캄함’이라는 제목 그대로 어둠속에 갇혀있던 미쉘이라는 8살 난 소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소녀에게 세상이란 온통 어둠의 세계뿐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캄캄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손과 발의 감각뿐이었습니다. 어둠의 세계 속에서 소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짐승처럼 울어대는 것과 마구 먹어대는 것뿐이었습니다. 소녀에게는 규칙이나 질서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소녀에게 세상과 소통하도록 다가온 인물이 사하이라는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은 이 소녀를 향해서 기대와 신뢰를 품고 다가갑니다. 그리고 소녀에게 엄청난 끈기와 노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소녀에게 빛의 세계를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두 살이면 알고 경험할 것을 그녀는 10년이 되어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하이 선생님이 소녀에게 세운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철저한 통제와 절제였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가르칩니다. “얘야, 너는 짐승이 아니야. 인간이야. 너는 배울 수 있어. 깨달을 수 있어!” 사하이 선생님은 소녀가 더 이상 짐승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으로서의 예절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사하이 선생님은 소녀가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얘야, 너는 변화될 수 있어. 너는 성숙할 수 있어. 너는 깨달을 수 있어!” 선생님은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교육을 실시합니다. 사물을 만지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반복적인 훈련을 지속합니다. 그래서 그 물건이 어떤 개념인가를 연결시키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갔다가 그것이 선생님이 가르쳐준 물이라는 개념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어둠이 아닌 빛이 소녀에게 다가갑니다. 부모조차도 믿지 않았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이 영화는 감동스럽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줌의 흙에 불과한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보고 만지는 것에 우리의 한계가 있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의 내용입니다.
믿으면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십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 2:14)
보이는 세계에 머무르는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풍성한 것들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야만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내 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분을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영혼 전체가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식이 열린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치 미쉘이 사하이 선생님을 신뢰하면서 서로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인식의 길이 열려진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만져지고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인격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만지시고 고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속에 있는 고통의 문제, 탄식의 문제, 절망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인식론에는 핵심이 있는데 믿어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면 어떤 것도 받아드릴 수가 없고 사랑해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에는 신뢰와 사랑이 우리에게 전부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다가오셔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내 눈을 열어주시고 하늘의 신비한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의 역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허황된 환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허황된 환상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진정한 힘이고 꿈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신비한 종교성을 가진 미신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다가와서 무서움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유령과 악마의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최근 두 여인의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 명은 당시 하늘의 신탁을 위임받아 종교성을 붙잡고 있는 미실이라는 여인입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종교성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려보려는 덕만공주로 후에 선덕여왕이 되는 인물입니다.
이 두 여인이 마주 앉아 어떻게 백성을 이끌어나갈지 정치 철학을 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때 덕만공주는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정치를 펼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미실은 희망이 아니라 환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백성들에게 공포를 심어줘야 안정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덕만은 상천관을 폐지하고 모든 천문 기상관측의 정보를 백성들에게 공개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빙자해서 백성들에게 공포감으로 위협하고 이기적인 권력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그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미실은 덕만을 조롱합니다. 그것은 곧 신권을 통한 통치를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백성들에게 신비가 사라지면 그때부터 통치능력은 사라지고 지배자는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비아냥거립니다. 미실은 우민정책을 펼쳐야 나라가 안정된다고 말하지만 그에 반해 덕만은 공개된 민주 정치를 해야 진정으로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아마 작가의 정치철학과 함께 이 시대를 풍자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하늘을 빙자해서 세속적인 권력과 야합하고 권력자로서 힘을 휘두른 적이 있었습니다. 암흑시대인 그 때 기독교는 백성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헬라어로 드리고, 설교도 라틴어로 했습니다. 그래서 참여한 성도들은 무슨 설교를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환상의 존재였고 신비한 존재였습니다. 그 때 교회는 부패했고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참된 모습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 그분을 믿고 따르면 어떤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는지를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허황된 환상 속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살아갈 힘이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허락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할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시편 146:5). 야곱은 사기꾼에 욕심쟁이요 이기심이 많은 존재였습니다. 문제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합니다(시편 146:7-9).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 힘든 사람들, 모든 것이 무너진 사람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앞을 못 보는 사람들, 낮고 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셔서 그들을 세우시고 새 생명의 역사를 허락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둠속에 갇힌 자에게 빛의 축복을 주시고, 낮고 천한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허락해주시며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살아갈 희망과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새 소망과 새 꿈과 새 비전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소망하고 기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호흡이 끝나면 흙으로 돌아갈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늘의 세계가 이 땅위에 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는 두 가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를 감추어진 계시와 신비주의로 숨긴 채 사람들을 공포로 몰고 가는 악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열려진 계시를 통해 누구나 초청하는 참된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짓된 신뢰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허황된 꿈을 꾸게 하는 분도 아닙니다. 세상의 가진 자에게 아첨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를 멸시하게 하는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유와 생명과 치유를 허락하시고 모든 억눌린 것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돈과 재물은 필요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 또한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치유하실 하나님, 하늘의 감추어진 놀라운 비밀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진실과 성실함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진리의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억눌림을 당하고 질병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절망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만 소망을 품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나의 소유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늘의 세계,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깨닫는데 등한시했던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걸고 살아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