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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인간

시편 8: 1 ~ 9

김지철 목사

2013.06.09

북한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뢰는 분들을 보면 담임목사로서 참으로 대견하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대부분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시는데, 새벽기도 때 빠지지 않는 기도 중 하나가 북한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민족이 평화로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백성을 억압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그만 그치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들의 배고픔과 가난의 역사가 극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들이 인간답게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시대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일 것입니다.
저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숨이 막혀서 못 살 것 같은데 저들은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긴긴 세월을 견디며 살 수 있는지 그저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지구촌 어디에 있든 북한 사람들은 말끝마다 ‘장군님, 원수님의 공덕’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어떻게 이천만 되는 북한 동포들이 똑같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획일화된 집단이 가능한 일일까? 한 사람을 우상화시키기 위해서 모든 백성을 그렇게 억압해도 괜찮은 것일까? 수없이 질문하게 됩니다.
북한의 공산주의 독재체제에서 가장 위험하고 위협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위해 개인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위협을 가함으로 백성을 세뇌시킵니다. 그 결과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쟁이들이 나타나게 되고, 비굴한 인간들이 양산됩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저항해도, 그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순종해도, 그 자유가 복된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는 것이 인간됨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는 인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인권이 보장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따라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곧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는 못된 행위입니다.
1948년 12월10일 유엔에서는 세계인권선언문을 채택합니다. 세계인권선언문은 말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삶을 살 수 있는 신념의 자유를 선언합니다. 또한 위협과 공갈에 의해서 삶이 조정되지 않을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문의 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첫 번째가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존귀하게 되고, 평등적 삶을 나눌 때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2조에서 더 구체적이 확장됩니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1조와 2조에서 반복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자유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인간이 받은 수많은 축복 중 최고의 것은 바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로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 즉 자기 뜻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자유’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역사 속에 가장 격렬한 투쟁이 바로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 자유입니다. 소극적 자유란, 억압되고 구속받았던 것에서부터 해방되는 자유(from what)입니다. 그리고 적극적 자유란 어떤 목표와 방향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for what)입니다. 이 적극적 자유는 기쁨으로 자원하여 섬길 수 있게 하고, 삶 전체를 드릴 수도 있게 사명이 있는 자유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무척 좋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자유자’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끊임없이 자유자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병 걸린 자를 치유하셨고, 귀신에 얽매인 자는 자기 정체성을 찾게 하셨고,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근심과 염려를 내게 맡기라”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쉼과 자유를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성령을 추구하는 이유도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지를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투쟁하여 쟁취하지 않아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과 함께할 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고통을 받을 때 모세라는 인물을 택하셔서 그가 자유를 선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선언에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무엇을 향한 자유가 함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를 보내시는 ‘바로’는 어디입니까? 노예현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억압받던 현장입니다. 핍박받고 있던 곳, 남에게 강제된 곳,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곳입니다. 그곳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럼 그곳에 가서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즉, 억압으로부터 탈출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Let my people go so that they may worship me.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이것이 자유가 되는 이유는, 자유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인격 속에 참여하는 것이 곧 자유를 누리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러 나온 이유는 이 자유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시옵소서. 나를 얽어매던 죄와 질병으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시옵소서. 내게 있는 근심과 걱정 모두 주께 맡기오니 내게 자유를 주시고, 탐욕으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자유를 향해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는 이 예배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선물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든, 경제적인 맘모니즘이든, 사회적 지위나 명예, 명성, 문화예술의 인기와 매혹이든 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때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하여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구별하셨습니까? 유일하게 인간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위임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네가 나대신 이 모든 것들을 다스려라. 네가 내 뜻대로 이것들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책임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아버지, 어머니가 “내게 있는 것 모두 네게 맡길 테니 네가 한 번 이것을 운영해 보아라.” 하고 맡기시는 것이 곧 자유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첫 인간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여기에서의 ‘반드시 죽으리라’는 무슨 뜻일까요? ‘자유’라는 시각에서 이 구절을 보면, ‘네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한테 미리 유산을 물려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자유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죄악에 빠지는 길이었고, 탐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둘째,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자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선택입니다.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귀속이 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자와 함께 있을 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제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간의 선택에 맡기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절하는 자유까지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자유까지 주신 것입니다. 이 자유에 대한 허용이 바로 선악과에 대한 요청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이 자유를 언제 끊으실지 걱정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도 개를 끌고 가듯 인간을 끌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네가 스스로 결정해라. 네가 기쁨으로 결정해라. 네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게 나와서 나를 믿고 내게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어느 순간에도 우리의 자유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를 깨뜨립니다.

사이비 집단들의 행동에는 이러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을 끌어들일 때는 모든 감언이설로 끌어들이지만, 들어온 사람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나가려고 하면 협박을 합니다. 공갈을 칩니다. 떠나려고 할 때 내게 해를 끼치는 집단은 모두 가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율성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떠나갈 때까지도 안타까운 모습으로 지켜보십니다. 저는 탕자 이야기를 보면서 ‘아들이 떠나가려고 할 때 아버지는 왜 막지 않았을까?’하는 질문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유 때문에 막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왜 자유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인간의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감격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자기 맘대로, 탐욕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기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죄의식과 자책감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온 환자는 괴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최근에 젊은 여자들을 희롱하며 놀고 싶은 충동을 못 이겨서 끝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의사가 위로의 말을 던집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런 몹쓸 충동을 없애는 데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런 문제의 전문가입니다.” 그러자 환자는 불만스러운 말투로 의사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언제 그런 충동을 없애달라고 했습니까? 내가 없애고 싶은 것은 죄책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을까요? 아무도 보지 않으면, 죄책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의 육체적 욕망을 막 쏟아버리고 싶은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우리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가 아니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탐욕과 죄책감 없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유란 마치 하늘을 나는 연과도 같습니다. 연을 하늘에 띄우면 춤을 추면서 납니다. 그런데 만약 연이 마음대로 날겠다고 스스로 줄을 잘라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요란하게 뒤뚱거리다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물 속에 있는 물고기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물에서 건져 놓으면, 물고기가 얻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자유란 책임을 면제받는 허가증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통제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자유란 엄청난 자기 훈련과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자유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유란 형벌이다.” 그만큼 자유를 지킨다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높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시편 8편에는 인간이 처해 있는 이런 위험한 자리 속에서도 인간을 높이 예찬하고,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 만물을 보며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는 피조물인데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시고, 내게 관심을 가지시고,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는데, 영화와 존귀로 머리에 관을 씌우셨습니다.” 인간이 최고의 존재임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6절을 보면,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이어집니다. 인간은 이런 대단한 힘과 축복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지 피조물에게 예속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요새 tv방송을 보면 얼마나 많은 신(神)들이 등장하는지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공부의 신, 직장의 신, 마술의 신, 연애의 신, 음악의 신, 그리고 여자스타를 보며 여신이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언제 인간들이 신으로 상승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인기인, 전문인, 최고로 높여도 달인이라고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말들이 사라지고 모두 다 신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언어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몇 방송과 신문사가 이런 말들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모르고 하는 인간의 신 타령은, 더 큰 공허와 허무로 인간을 몰아갈 뿐입니다.
인간은 별것 아닙니다. 정강이가 부딪치기라도 하면 웅크리고 앉아 울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몸살감기로 며칠만 앓아보면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이 무슨 신입니까? 별 볼일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세우십니다.

이런 인간이 예수님을 믿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나는 피조물이고, 죄인인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을 내게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자유를 내게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내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신적인 존재로 우리를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때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신적인 모습으로 되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충만한 삶입니다. 불안과 걱정이 아니라 강한 담대함과 용기입니다. 부자유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의 헌신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멋진 존재로 만드셨음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높이 세우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 여러분, 우리를 억누르고, 부자유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날마다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에게 맡겨진 삶을 한걸음 한걸음 담대하게 걸어 나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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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 1 ~ 9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북한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뢰는 분들을 보면 담임목사로서 참으로 대견하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대부분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시는데, 새벽기도 때 빠지지 않는 기도 중 하나가 북한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민족이 평화로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백성을 억압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그만 그치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들의 배고픔과 가난의 역사가 극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들이 인간답게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시대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일 것입니다.
저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숨이 막혀서 못 살 것 같은데 저들은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긴긴 세월을 견디며 살 수 있는지 그저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지구촌 어디에 있든 북한 사람들은 말끝마다 ‘장군님, 원수님의 공덕’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어떻게 이천만 되는 북한 동포들이 똑같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획일화된 집단이 가능한 일일까? 한 사람을 우상화시키기 위해서 모든 백성을 그렇게 억압해도 괜찮은 것일까? 수없이 질문하게 됩니다.
북한의 공산주의 독재체제에서 가장 위험하고 위협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위해 개인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위협을 가함으로 백성을 세뇌시킵니다. 그 결과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쟁이들이 나타나게 되고, 비굴한 인간들이 양산됩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저항해도, 그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순종해도, 그 자유가 복된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는 것이 인간됨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는 인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인권이 보장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따라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곧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는 못된 행위입니다.
1948년 12월10일 유엔에서는 세계인권선언문을 채택합니다. 세계인권선언문은 말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삶을 살 수 있는 신념의 자유를 선언합니다. 또한 위협과 공갈에 의해서 삶이 조정되지 않을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문의 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첫 번째가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존귀하게 되고, 평등적 삶을 나눌 때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2조에서 더 구체적이 확장됩니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1조와 2조에서 반복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자유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인간이 받은 수많은 축복 중 최고의 것은 바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로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 즉 자기 뜻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자유’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역사 속에 가장 격렬한 투쟁이 바로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 자유입니다. 소극적 자유란, 억압되고 구속받았던 것에서부터 해방되는 자유(from what)입니다. 그리고 적극적 자유란 어떤 목표와 방향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for what)입니다. 이 적극적 자유는 기쁨으로 자원하여 섬길 수 있게 하고, 삶 전체를 드릴 수도 있게 사명이 있는 자유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무척 좋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자유자’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끊임없이 자유자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병 걸린 자를 치유하셨고, 귀신에 얽매인 자는 자기 정체성을 찾게 하셨고,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근심과 염려를 내게 맡기라”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쉼과 자유를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성령을 추구하는 이유도 성령은 자유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지를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투쟁하여 쟁취하지 않아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과 함께할 때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고통을 받을 때 모세라는 인물을 택하셔서 그가 자유를 선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선언에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무엇을 향한 자유가 함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를 보내시는 ‘바로’는 어디입니까? 노예현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억압받던 현장입니다. 핍박받고 있던 곳, 남에게 강제된 곳,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곳입니다. 그곳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럼 그곳에 가서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즉, 억압으로부터 탈출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Let my people go so that they may worship me.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이것이 자유가 되는 이유는, 자유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인격 속에 참여하는 것이 곧 자유를 누리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러 나온 이유는 이 자유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시옵소서. 나를 얽어매던 죄와 질병으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시옵소서. 내게 있는 근심과 걱정 모두 주께 맡기오니 내게 자유를 주시고, 탐욕으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자유를 향해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는 이 예배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선물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든, 경제적인 맘모니즘이든, 사회적 지위나 명예, 명성, 문화예술의 인기와 매혹이든 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때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하여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구별하셨습니까? 유일하게 인간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위임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네가 나대신 이 모든 것들을 다스려라. 네가 내 뜻대로 이것들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특권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책임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아버지, 어머니가 “내게 있는 것 모두 네게 맡길 테니 네가 한 번 이것을 운영해 보아라.” 하고 맡기시는 것이 곧 자유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첫 인간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여기에서의 ‘반드시 죽으리라’는 무슨 뜻일까요? ‘자유’라는 시각에서 이 구절을 보면, ‘네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한테 미리 유산을 물려달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자유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죄악에 빠지는 길이었고, 탐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둘째,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자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선택입니다.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귀속이 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자와 함께 있을 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제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간의 선택에 맡기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절하는 자유까지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자유까지 주신 것입니다. 이 자유에 대한 허용이 바로 선악과에 대한 요청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이 자유를 언제 끊으실지 걱정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도 개를 끌고 가듯 인간을 끌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네가 스스로 결정해라. 네가 기쁨으로 결정해라. 네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게 나와서 나를 믿고 내게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어느 순간에도 우리의 자유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를 깨뜨립니다.

사이비 집단들의 행동에는 이러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을 끌어들일 때는 모든 감언이설로 끌어들이지만, 들어온 사람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나가려고 하면 협박을 합니다. 공갈을 칩니다. 떠나려고 할 때 내게 해를 끼치는 집단은 모두 가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율성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떠나갈 때까지도 안타까운 모습으로 지켜보십니다. 저는 탕자 이야기를 보면서 ‘아들이 떠나가려고 할 때 아버지는 왜 막지 않았을까?’하는 질문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유 때문에 막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왜 자유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인간의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감격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자기 맘대로, 탐욕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기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죄의식과 자책감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온 환자는 괴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최근에 젊은 여자들을 희롱하며 놀고 싶은 충동을 못 이겨서 끝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의사가 위로의 말을 던집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런 몹쓸 충동을 없애는 데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런 문제의 전문가입니다.” 그러자 환자는 불만스러운 말투로 의사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언제 그런 충동을 없애달라고 했습니까? 내가 없애고 싶은 것은 죄책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을까요? 아무도 보지 않으면, 죄책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의 육체적 욕망을 막 쏟아버리고 싶은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우리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가 아니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탐욕과 죄책감 없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유란 마치 하늘을 나는 연과도 같습니다. 연을 하늘에 띄우면 춤을 추면서 납니다. 그런데 만약 연이 마음대로 날겠다고 스스로 줄을 잘라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요란하게 뒤뚱거리다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물 속에 있는 물고기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물에서 건져 놓으면, 물고기가 얻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자유란 책임을 면제받는 허가증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통제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자유란 엄청난 자기 훈련과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자유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유란 형벌이다.” 그만큼 자유를 지킨다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높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시편 8편에는 인간이 처해 있는 이런 위험한 자리 속에서도 인간을 높이 예찬하고,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5)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 만물을 보며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는 피조물인데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시고, 내게 관심을 가지시고,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는데, 영화와 존귀로 머리에 관을 씌우셨습니다.” 인간이 최고의 존재임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6절을 보면,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이어집니다. 인간은 이런 대단한 힘과 축복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지 피조물에게 예속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요새 tv방송을 보면 얼마나 많은 신(神)들이 등장하는지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공부의 신, 직장의 신, 마술의 신, 연애의 신, 음악의 신, 그리고 여자스타를 보며 여신이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언제 인간들이 신으로 상승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인기인, 전문인, 최고로 높여도 달인이라고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말들이 사라지고 모두 다 신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언어의 엄청난 인플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몇 방송과 신문사가 이런 말들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모르고 하는 인간의 신 타령은, 더 큰 공허와 허무로 인간을 몰아갈 뿐입니다.
인간은 별것 아닙니다. 정강이가 부딪치기라도 하면 웅크리고 앉아 울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몸살감기로 며칠만 앓아보면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이 무슨 신입니까? 별 볼일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세우십니다.

이런 인간이 예수님을 믿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나는 피조물이고, 죄인인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을 내게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자유를 내게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내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신적인 존재로 우리를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때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신적인 모습으로 되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충만한 삶입니다. 불안과 걱정이 아니라 강한 담대함과 용기입니다. 부자유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의 헌신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멋진 존재로 만드셨음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높이 세우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 여러분, 우리를 억누르고, 부자유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날마다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에게 맡겨진 삶을 한걸음 한걸음 담대하게 걸어 나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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