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하나님에 버금가는 어머니의 사랑

이사야 49: 14 ~ 15

김지철 목사

2016.05.08

부모님을 칭찬해 본 적 있습니까?

언젠가 EBS에서 방영한 내용입니다. 어느 중학교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과제를 냈습니다. 부모님을 칭찬하는 내용의 일기를 부모님 모르게 서른 번 정도 써서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자 중학생 한 명이 모처럼 용기를 내서 일찍 돌아온 아버지께 다가갔습니다. 아버지는 소파에 누워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큰맘 먹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그 자체가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미친놈.” 그 학생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젠장, 오늘 칭찬하고 욕먹었다.”
이번에는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학원을 가는 자신을 배웅해 준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엄마가 나를 학원에 보내줘서 이렇게 공부를 잘하게 됐어. 엄마, 고마워.”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야, 이 지지배야, 네가 공부를 뭘 잘해. 반에서 ○○등 하는 게 잘하는 거야? 어?”
유치함, 어색함,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냈는데, 돌아오는 말은 “얘가 왜이래”, “너 뭐 잘못 먹었냐?”, “너나 잘해” 등의 무안하고 서운한 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슬픈 것은 “더 힘든 건 눈 씻고 찾아봐도 부모님에 관한 칭찬거리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는 자녀들의 말입니다.
중학교 학생들은 숙제였던 서른 번의 칭찬일기를 마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부모님을 칭찬한 나에게.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잘 몰라서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이게 돌았나? 갑자기 왜 이래? 돈 달라는 건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내가 살았습니다.

어버이날이자 어버이 주일을 맞아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보통 ‘엄마’라고 부를 때 무엇이 떠오릅니까? 곧 대답하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람, 그 이름이 우리에게는 ‘엄마’입니다. ‘엄마’라는 이름 속에는 생명의 힘, 평안의 힘, 때로는 막연한 그리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라는 틀에서 여성을 규정하고 구속하는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름은 사라지고 ‘누구의 엄마’로 불리며 자녀에 의해서 모든 것이 판단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엄마’에는 많은 뜻과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엄마’라는 이름을 예찬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용기이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의지가 ‘엄마’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엄마’라는 이름은 세대별로 그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특히 50∼60대 이상인 분들에게 엄마는, ‘가난을 이겨낸 분, 삶의 소중함을 깨우쳐 준 분, 모든 것을 희생한 분’입니다. 일본의 억압 속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지내야 했던 슬픔이 있었습니다.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내야 했던 고통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은 분들은 어린 시절이 기억날 것입니다. 요새는 겨울이 그리 춥지 않은데 그때는 어찌나 추웠는지, 겨울에는 추위에 떨었던 기억, 아랫목만 조금 따뜻할 뿐 아침에 일어나면 방 안에 둔 걸레가 꽁꽁 얼었던 일, 밤이면 전기가 넉넉하지 못해서 호롱불을 켰던 일 등. 시골에서는 대부분 검정 고무신을 신었는데, 부모님이 운동화를 사 주시면 요샛말로 ‘대박’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고, 참 힘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일거리를 찾아 나섰던 사람들, 때로는 가족과 수만 리 떨어진 낯선 곳으로 가서 땀 흘렸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가정을 지킨 분들이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사치를 부릴 줄도 모르고, 자녀를 키우느라 젊은 시절의 꿈은 가슴 속에 깊이 숨겨 놓고 평생을 산 분들이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서 당신의 배는 동여매고,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어 본 적도, 멋진 옷을 때에 맞춰 입어 본 적도 없습니다. 주어진 것은 희생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의 대리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사랑의 대리자가 바로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감히 비견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어머니뿐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긍휼함을 어머니에 빗대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없어 매 순간 떠올리고, 낳은 자녀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모두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유대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어서 이 땅에 어머니를 보내셨다.” 즉, 어머니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가 일하는 곳에 하나님이 일하시고, 어머니의 사랑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를 기억해도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무조건 헌신하셨습니다. 예전에 삼일 기도회 때 읊었던 시를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시인 심순덕이 서른한 살에 어머니를 여의면서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서 쓴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살아온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가정이 이만큼 세워진 것입니다.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은 ‘용서’입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자녀들의 못된 짓을 보며 꾸짖다가도 가까이 다가서면서 용서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가슴으로 안고, 다독이며 눈물을 흘리시던 분이셨습니다.
또 다른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박목월의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시입니다.

회초리를 들긴 하셨지만
차마 종아리를 때리시진 못하고
노려 보시는
당신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
와락 울며 어머니께 용서를 빌면
꼭 껴안으시던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너무나 힘찬 당신의 포옹
바른길
곧게 걸어가리라
울며 뉘우치며 다짐했지만
또다시 당신을 울리게 하는
어머니 눈에
채찍보다 두려운 눈물
두 줄기 볼에 아롱지는
흔들리는 불빛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우리는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그래서 때로는 못난 놈이라고 스스로 탄식해도, 어머니는 “내 아들,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며 껴안아 주십니다.
어머니들에게는 자녀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생의 그늘과 상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홀로 눈물을 흘렸고, 그런 눈물이 우리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시인 정호승이 쓴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우리의 그늘과 상처를 어머니가 껴안으시고, 당신의 그늘과 눈물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엄마’하고 부르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는 부모님을 향한 어떤 말이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은 ‘엄마’를 뭐라고 정의하시겠습니까? 수많은 표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엄마를 네 글자로 표현하면 ‘미안해요’, 엄마를 열두 글자로 표현하면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우리 마음을 흔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고맙다고 말하기에는 미안하고,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기에는 고마운 분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불효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이 불효는, 이제 어머니 아버지가 나이 들었다고, 거동이 불편하다고, 자녀인 내 힘과 능력이 더 세졌다고 큰소리치는 더 큰 불효로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시인 유순은 ‘못된 불효’라는 시를 썼습니다.

나도 같이 가자.
– 노인네는 집에서 애들이나 보세요.
나도 용돈 좀 다우.
– 노인네가 어디 쓸 데가 있어요.
나도 이런 옷 입고 싶다.
– 노인네가 아무거나 입으세요.
힘들어 못 가겠으니 오너라.
– 노인네가 택시타고 오세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 노인네가 가만히 방에나 들어가 계세요.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이 늙었다고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듯, 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천 년 전 모세를 통해서도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이야기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모님이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위엄 있는 분임을 우리가 알고 깨닫게 된 것은 부모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3)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뭡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어머니, 아버지를 경외하고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보이는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고 공경할 줄 알아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섬길 줄 아는 것으로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누리는 최대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주신, 부모님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예배 후에 전화나 문제로 안부를 물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찾아가셔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용돈도 드리십시오. 수십 번 들었을 부모님의 옛날이야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경청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의 기쁨이 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예배를 마치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내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이 좋은 날,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셔서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하십시오. 이 사랑의 나눔이 가정 안에서 풍성이 이루어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이사야 49: 14 ~ 15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부모님을 칭찬해 본 적 있습니까?

언젠가 EBS에서 방영한 내용입니다. 어느 중학교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과제를 냈습니다. 부모님을 칭찬하는 내용의 일기를 부모님 모르게 서른 번 정도 써서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자 중학생 한 명이 모처럼 용기를 내서 일찍 돌아온 아버지께 다가갔습니다. 아버지는 소파에 누워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큰맘 먹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그 자체가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미친놈.” 그 학생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젠장, 오늘 칭찬하고 욕먹었다.”
이번에는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학원을 가는 자신을 배웅해 준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엄마가 나를 학원에 보내줘서 이렇게 공부를 잘하게 됐어. 엄마, 고마워.”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야, 이 지지배야, 네가 공부를 뭘 잘해. 반에서 ○○등 하는 게 잘하는 거야? 어?”
유치함, 어색함,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냈는데, 돌아오는 말은 “얘가 왜이래”, “너 뭐 잘못 먹었냐?”, “너나 잘해” 등의 무안하고 서운한 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슬픈 것은 “더 힘든 건 눈 씻고 찾아봐도 부모님에 관한 칭찬거리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는 자녀들의 말입니다.
중학교 학생들은 숙제였던 서른 번의 칭찬일기를 마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부모님을 칭찬한 나에게.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잘 몰라서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이게 돌았나? 갑자기 왜 이래? 돈 달라는 건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내가 살았습니다.

어버이날이자 어버이 주일을 맞아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보통 ‘엄마’라고 부를 때 무엇이 떠오릅니까? 곧 대답하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람, 그 이름이 우리에게는 ‘엄마’입니다. ‘엄마’라는 이름 속에는 생명의 힘, 평안의 힘, 때로는 막연한 그리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라는 틀에서 여성을 규정하고 구속하는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름은 사라지고 ‘누구의 엄마’로 불리며 자녀에 의해서 모든 것이 판단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엄마’에는 많은 뜻과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엄마’라는 이름을 예찬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용기이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의지가 ‘엄마’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엄마’라는 이름은 세대별로 그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특히 50∼60대 이상인 분들에게 엄마는, ‘가난을 이겨낸 분, 삶의 소중함을 깨우쳐 준 분, 모든 것을 희생한 분’입니다. 일본의 억압 속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지내야 했던 슬픔이 있었습니다.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내야 했던 고통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은 분들은 어린 시절이 기억날 것입니다. 요새는 겨울이 그리 춥지 않은데 그때는 어찌나 추웠는지, 겨울에는 추위에 떨었던 기억, 아랫목만 조금 따뜻할 뿐 아침에 일어나면 방 안에 둔 걸레가 꽁꽁 얼었던 일, 밤이면 전기가 넉넉하지 못해서 호롱불을 켰던 일 등. 시골에서는 대부분 검정 고무신을 신었는데, 부모님이 운동화를 사 주시면 요샛말로 ‘대박’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고, 참 힘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일거리를 찾아 나섰던 사람들, 때로는 가족과 수만 리 떨어진 낯선 곳으로 가서 땀 흘렸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가정을 지킨 분들이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사치를 부릴 줄도 모르고, 자녀를 키우느라 젊은 시절의 꿈은 가슴 속에 깊이 숨겨 놓고 평생을 산 분들이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서 당신의 배는 동여매고,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어 본 적도, 멋진 옷을 때에 맞춰 입어 본 적도 없습니다. 주어진 것은 희생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의 대리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사랑의 대리자가 바로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감히 비견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어머니뿐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긍휼함을 어머니에 빗대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없어 매 순간 떠올리고, 낳은 자녀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모두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유대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어서 이 땅에 어머니를 보내셨다.” 즉, 어머니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가 일하는 곳에 하나님이 일하시고, 어머니의 사랑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를 기억해도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무조건 헌신하셨습니다. 예전에 삼일 기도회 때 읊었던 시를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시인 심순덕이 서른한 살에 어머니를 여의면서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서 쓴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살아온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가정이 이만큼 세워진 것입니다.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은 ‘용서’입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자녀들의 못된 짓을 보며 꾸짖다가도 가까이 다가서면서 용서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가슴으로 안고, 다독이며 눈물을 흘리시던 분이셨습니다.
또 다른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박목월의 ‘어머니의 눈물’이라는 시입니다.

회초리를 들긴 하셨지만
차마 종아리를 때리시진 못하고
노려 보시는
당신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
와락 울며 어머니께 용서를 빌면
꼭 껴안으시던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너무나 힘찬 당신의 포옹
바른길
곧게 걸어가리라
울며 뉘우치며 다짐했지만
또다시 당신을 울리게 하는
어머니 눈에
채찍보다 두려운 눈물
두 줄기 볼에 아롱지는
흔들리는 불빛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우리는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그래서 때로는 못난 놈이라고 스스로 탄식해도, 어머니는 “내 아들,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며 껴안아 주십니다.
어머니들에게는 자녀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생의 그늘과 상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홀로 눈물을 흘렸고, 그런 눈물이 우리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시인 정호승이 쓴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우리의 그늘과 상처를 어머니가 껴안으시고, 당신의 그늘과 눈물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엄마’하고 부르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는 부모님을 향한 어떤 말이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은 ‘엄마’를 뭐라고 정의하시겠습니까? 수많은 표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엄마를 네 글자로 표현하면 ‘미안해요’, 엄마를 열두 글자로 표현하면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우리 마음을 흔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고맙다고 말하기에는 미안하고,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기에는 고마운 분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불효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이 불효는, 이제 어머니 아버지가 나이 들었다고, 거동이 불편하다고, 자녀인 내 힘과 능력이 더 세졌다고 큰소리치는 더 큰 불효로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시인 유순은 ‘못된 불효’라는 시를 썼습니다.

나도 같이 가자.
– 노인네는 집에서 애들이나 보세요.
나도 용돈 좀 다우.
– 노인네가 어디 쓸 데가 있어요.
나도 이런 옷 입고 싶다.
– 노인네가 아무거나 입으세요.
힘들어 못 가겠으니 오너라.
– 노인네가 택시타고 오세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 노인네가 가만히 방에나 들어가 계세요.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이 늙었다고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듯, 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천 년 전 모세를 통해서도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이야기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모님이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위엄 있는 분임을 우리가 알고 깨닫게 된 것은 부모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3)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뭡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어머니, 아버지를 경외하고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보이는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고 공경할 줄 알아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섬길 줄 아는 것으로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누리는 최대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주신, 부모님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예배 후에 전화나 문제로 안부를 물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찾아가셔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용돈도 드리십시오. 수십 번 들었을 부모님의 옛날이야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경청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의 기쁨이 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예배를 마치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내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이 좋은 날,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셔서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하십시오. 이 사랑의 나눔이 가정 안에서 풍성이 이루어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