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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요한복음 4: 23 ~ 24

김지철 목사

2015.10.04

소망교회가 서른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소망교회 창립 3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서른여덟 살. 사람으로 생각하면 성숙하되 아직 중년으로 넘어가지는 않은, 열정과 헌신을 마음껏 쏟아부을 수 있는 청년의 나이입니다. 기념주일을 맞아 우리 교회는 여전히 이 청년성을 지니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제가 소망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한 첫 번째 설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는 제목들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마음입니다. ‘소망교회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흡족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저는 이것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말씀하셨던 것처럼, 소망교회와 성도님들에게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말씀해 주시기를 열망하면서 지금 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우리 교회의 비전과 사역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주보 안에 있는 파란 카드를 보시기 바랍니다. 맨 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고 쓰여 있고, 맨 아래에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데 그 중심에 바로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왼쪽에는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가, 오른쪽에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지만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아래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세상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첫 번째 본분은 무엇보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말씀과 훈련을 통해 배움의 교재를 나눕니다. 이웃을 향해서는 전도와 선교의 목표를 갖고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한 구원의 열정으로 섬김과 봉사로써 사랑과 긍휼을 베풉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삶의 현장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로 이 중심에 ‘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들을 전체적으로 역동성 있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말씀을 가르칠 때도, 전도를 할 때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때도, 교회를 생명의 유기체로 만드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서, 예배는 잘 드렸는데 말씀 공부는 잘 못했다던지, 전도나 선교 활동은 잘한 것 같은데 직장에서 일은 잘 못한 것 같다던지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작은 그리스도’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교회의 과제이자 성도의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망교회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앞으로 다섯 번에 걸쳐서 이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 첫 시간인 오늘의 주제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소망교회는 주일 예배, 찬양 예배, 삼일 기도, 그리고 매일 아침 드리는 새벽 기도뿐만 아니라 각 공동체와 부서도 모이기만 하면 예배를 드립니다. 이처럼 소망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예배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절제된 경건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 중간 중간에 ‘아멘’ 하면 안 됩니까? 설교 중에 아멘 소리가 없어서 섭섭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기도나 설교 마지막에만 ‘아멘’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참회의 기도를 드릴 때에도, 옆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는 반대로 찬양을 부를 때는 매우 크고 힘찬 목소리로 불러 놀라웠다는 이야기를 예배에 처음 참여하는 외부 분들을 통해 듣습니다. 찬양을 할 때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 이것이 또한 우리 교회의 특징입니다.
제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는 장미꽃을 좋아합니다. 장미꽃 중에서도 진홍색의 검붉은 장미꽃은 단연 일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꽃봉오리가 맺혔다가 완전히 개화되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절제된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그렇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움직일 때, 마치 영혼에 꽃이 피듯 우리의 영혼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입니다. 매우 절제된 경건의 예배를 통해서 말입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고, 예수님은 그에 대해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깨달음을 얻은 사마리아 여인은 “그러면 어떻게,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될까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될까요?” 하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한복음 4:21)

여기 보면, 장소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배드릴 때 장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시간은 또 얼마나 중요합니까? 교회에 오지 않고, ‘오늘은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려야지’ 생각하고 컴퓨터 앞에 앉게 되면, 교회에 앉아 있는 것처럼 정자세로 시작했어도 5분이 못 돼서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밖에서 누가 부르기라도 하면,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가 중단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의 장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부릅니다. 이름 그대로 ‘예배드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전 11시 반 예배에 나오려면, 그 훨씬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간도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도 중요하고 장소도 중요하지만, 예배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예배를 드릴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드리는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누구를 향해서 예배를 드리는지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23)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 일입니다. 그냥 예배하는 자가 아닙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자,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주 적극적인 움직임입니다.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고 그것을 고백하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은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나는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오늘, 예배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배에 대한 정의는 수없이 많고, 또 예배에 대해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었지만, 이 세 가지는 우리가 꼭 확인해야 할 것이기에 다시 한 번 전하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예배는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예배하는 자와 예배를 받는 분의 차이를 구별하기 시작해야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하는 나는 어떤 존재인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예배하는 나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다른 존재라는 것을 확인해야 우리는 예배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교양 강좌를 듣는 것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예배하는 대상은 나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입니다. 나는 땅에 있고 그분은 하늘에 계십니다. 나는 죄인이고 그분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거룩한 분입니다. 나는 아침 안개처럼 꺼져 갈 존재이고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나를 만드신 창조주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구분이 있어야 예배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유명한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전적은 타자”라고 선언하면서 나와 하나님이 다르다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이러한 구분이 가능해야, 내 인생의 중심에 누가 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우리와 다를 뿐 아니라 우리와 감히 비교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한 확인이 있은 후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그분께 압도당할 뿐만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감동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신앙의 선배들은 그분 앞에 섰을 때마다 두려움과 떨림을 경험했습니다. 동시에 그분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에 깊은 감동과 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인생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만나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내 인생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가르치시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실존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사죄의 은총을 받게 합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렸던 인생의 꿈을 되찾게 합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 무엇인지,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는 예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드리라고 합니까? 떨림과 즐거움으로 하라고 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처음 읽었을 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떨기도 하고 동시에 즐거워하기도 할까?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혼란스럽게 하시는 존재인가?’
그러다가 구별의 능력을 가질 때에 예배가 비로소 예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맞다! 하나님이 나와 다른 분임을 알 때,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서게 되는구나. 그러나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로 다가오시고 사랑과 은혜와 용서로 나를 붙드시는 분임을 알 때, 죄 사함의 은혜와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영혼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입니다.

나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두 번째, 그래서 예배란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구약시대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법이 번제입니다. 번제란, 살아있는 짐승을 죽여 태워서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제사로, 우리가 매일 드리는 신앙의 고백과 예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옛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 교만을 죽이는 것이고, 내 거짓과 불의함을 죽이는 것이고, 내 어리석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를 예배 되게 하기 위한 중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드려야 하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갖고 있는 이 못된 마음과 행동을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새것으로 채우십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떨 때 나에게 담대한 믿음을 주시고, 세상 가운데 근심하면서 좌절할 때 나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들은 모두 내게 있는 것들을 내려놓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하나님은 우리가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런 우리를 결코 멸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총을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회개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교만과 탐욕, 내 자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절망, 부끄러움, 좌절, 탄식조차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므로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높여 주십니다. 바로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잠언서 15장 8절에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으로 악한 마음을 품은 자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입술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욕심과 탐욕으로 세상을 바라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처음 예배를 드린 인물 중에 하나가 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 이유가 정확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개가 곧 예배’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가인의 예배에는 회개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셔서 가인이 화난 채로 항의했을 때, 하나님이 가인을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그때 그는 “잘못했습니다”라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대항했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회개 없는 예배는 곧 가짜 예배라는 것입니다.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예배였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내 속에 교만이 있습니까? 그것을 때려 부술 용기를 갖고 있습니까? 내 속에 탐욕이 있습니까? 그것을 제단 앞에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내 속에 슬픔과 탄식, 좌절과 부끄러움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하나하나 토해낼 자신이 있습니까?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 번째,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인자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목회자도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다만 예배를 주관할 뿐입니다. 예배위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대원, 헌금위원, 차량위원, 권사회 등 예배를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오해를 합니다. 목사는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은 예배를 구경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예배를 지켜보고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인지 거짓된 예배인지를 분별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예배의 내용을 비판합니다. 설교는 제대로 되었는지, 찬양대는 음악적으로 수준이 높은지, 기도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 예배의 형식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예배당은 경건을 드러내기 알맞게 아름답고 엄숙하게 꾸며져 있는지 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그 비판 받음의 대상에 나도 들어가 있다는 것과 마지막 비판자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배의 진정한 청중과 관객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될까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됩시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하늘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분인데, 그 크신 분이 작아지고 작아지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나오고 있습니까? 내가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까?
소망교회는 예배공동체의 모습을 계속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이 시간 저를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배란, 구별하는 능력이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드리는 나를 구별할 줄 알아야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란, 회개이다.” 나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기 시작해야 예배가 됩니다. “예배란, 오직 하나님께.” 하나님만이 우리가 예배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를 잘 기억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예배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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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 23 ~ 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소망교회가 서른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소망교회 창립 3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서른여덟 살. 사람으로 생각하면 성숙하되 아직 중년으로 넘어가지는 않은, 열정과 헌신을 마음껏 쏟아부을 수 있는 청년의 나이입니다. 기념주일을 맞아 우리 교회는 여전히 이 청년성을 지니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제가 소망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한 첫 번째 설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는 제목들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마음입니다. ‘소망교회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흡족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저는 이것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말씀하셨던 것처럼, 소망교회와 성도님들에게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말씀해 주시기를 열망하면서 지금 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우리 교회의 비전과 사역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주보 안에 있는 파란 카드를 보시기 바랍니다. 맨 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고 쓰여 있고, 맨 아래에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데 그 중심에 바로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왼쪽에는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가, 오른쪽에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지만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아래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세상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첫 번째 본분은 무엇보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말씀과 훈련을 통해 배움의 교재를 나눕니다. 이웃을 향해서는 전도와 선교의 목표를 갖고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한 구원의 열정으로 섬김과 봉사로써 사랑과 긍휼을 베풉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삶의 현장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로 이 중심에 ‘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들을 전체적으로 역동성 있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말씀을 가르칠 때도, 전도를 할 때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때도, 교회를 생명의 유기체로 만드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서, 예배는 잘 드렸는데 말씀 공부는 잘 못했다던지, 전도나 선교 활동은 잘한 것 같은데 직장에서 일은 잘 못한 것 같다던지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작은 그리스도’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교회의 과제이자 성도의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망교회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앞으로 다섯 번에 걸쳐서 이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 첫 시간인 오늘의 주제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소망교회는 주일 예배, 찬양 예배, 삼일 기도, 그리고 매일 아침 드리는 새벽 기도뿐만 아니라 각 공동체와 부서도 모이기만 하면 예배를 드립니다. 이처럼 소망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예배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절제된 경건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 중간 중간에 ‘아멘’ 하면 안 됩니까? 설교 중에 아멘 소리가 없어서 섭섭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기도나 설교 마지막에만 ‘아멘’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참회의 기도를 드릴 때에도, 옆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는 반대로 찬양을 부를 때는 매우 크고 힘찬 목소리로 불러 놀라웠다는 이야기를 예배에 처음 참여하는 외부 분들을 통해 듣습니다. 찬양을 할 때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 이것이 또한 우리 교회의 특징입니다.
제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는 장미꽃을 좋아합니다. 장미꽃 중에서도 진홍색의 검붉은 장미꽃은 단연 일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꽃봉오리가 맺혔다가 완전히 개화되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절제된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그렇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움직일 때, 마치 영혼에 꽃이 피듯 우리의 영혼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입니다. 매우 절제된 경건의 예배를 통해서 말입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고, 예수님은 그에 대해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깨달음을 얻은 사마리아 여인은 “그러면 어떻게,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될까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될까요?” 하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한복음 4:21)

여기 보면, 장소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배드릴 때 장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시간은 또 얼마나 중요합니까? 교회에 오지 않고, ‘오늘은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려야지’ 생각하고 컴퓨터 앞에 앉게 되면, 교회에 앉아 있는 것처럼 정자세로 시작했어도 5분이 못 돼서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밖에서 누가 부르기라도 하면,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가 중단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의 장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부릅니다. 이름 그대로 ‘예배드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전 11시 반 예배에 나오려면, 그 훨씬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간도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도 중요하고 장소도 중요하지만, 예배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예배를 드릴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드리는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누구를 향해서 예배를 드리는지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23)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 일입니다. 그냥 예배하는 자가 아닙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자,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주 적극적인 움직임입니다.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고 그것을 고백하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은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나는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오늘, 예배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배에 대한 정의는 수없이 많고, 또 예배에 대해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었지만, 이 세 가지는 우리가 꼭 확인해야 할 것이기에 다시 한 번 전하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예배는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예배하는 자와 예배를 받는 분의 차이를 구별하기 시작해야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하는 나는 어떤 존재인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예배하는 나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다른 존재라는 것을 확인해야 우리는 예배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교양 강좌를 듣는 것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예배하는 대상은 나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입니다. 나는 땅에 있고 그분은 하늘에 계십니다. 나는 죄인이고 그분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거룩한 분입니다. 나는 아침 안개처럼 꺼져 갈 존재이고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나를 만드신 창조주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구분이 있어야 예배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유명한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전적은 타자”라고 선언하면서 나와 하나님이 다르다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이러한 구분이 가능해야, 내 인생의 중심에 누가 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우리와 다를 뿐 아니라 우리와 감히 비교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한 확인이 있은 후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그분께 압도당할 뿐만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감동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신앙의 선배들은 그분 앞에 섰을 때마다 두려움과 떨림을 경험했습니다. 동시에 그분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에 깊은 감동과 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인생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만나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내 인생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가르치시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실존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사죄의 은총을 받게 합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렸던 인생의 꿈을 되찾게 합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 무엇인지,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는 예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드리라고 합니까? 떨림과 즐거움으로 하라고 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처음 읽었을 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떨기도 하고 동시에 즐거워하기도 할까?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혼란스럽게 하시는 존재인가?’
그러다가 구별의 능력을 가질 때에 예배가 비로소 예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맞다! 하나님이 나와 다른 분임을 알 때,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서게 되는구나. 그러나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로 다가오시고 사랑과 은혜와 용서로 나를 붙드시는 분임을 알 때, 죄 사함의 은혜와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영혼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입니다.

나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두 번째, 그래서 예배란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구약시대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법이 번제입니다. 번제란, 살아있는 짐승을 죽여 태워서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제사로, 우리가 매일 드리는 신앙의 고백과 예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옛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 교만을 죽이는 것이고, 내 거짓과 불의함을 죽이는 것이고, 내 어리석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를 예배 되게 하기 위한 중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드려야 하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갖고 있는 이 못된 마음과 행동을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새것으로 채우십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떨 때 나에게 담대한 믿음을 주시고, 세상 가운데 근심하면서 좌절할 때 나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들은 모두 내게 있는 것들을 내려놓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하나님은 우리가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런 우리를 결코 멸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총을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회개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교만과 탐욕, 내 자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절망, 부끄러움, 좌절, 탄식조차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므로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높여 주십니다. 바로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잠언서 15장 8절에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으로 악한 마음을 품은 자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입술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욕심과 탐욕으로 세상을 바라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처음 예배를 드린 인물 중에 하나가 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 이유가 정확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개가 곧 예배’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가인의 예배에는 회개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셔서 가인이 화난 채로 항의했을 때, 하나님이 가인을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그때 그는 “잘못했습니다”라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대항했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회개 없는 예배는 곧 가짜 예배라는 것입니다.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예배였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내 속에 교만이 있습니까? 그것을 때려 부술 용기를 갖고 있습니까? 내 속에 탐욕이 있습니까? 그것을 제단 앞에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내 속에 슬픔과 탄식, 좌절과 부끄러움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하나하나 토해낼 자신이 있습니까?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 번째,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인자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목회자도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다만 예배를 주관할 뿐입니다. 예배위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대원, 헌금위원, 차량위원, 권사회 등 예배를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오해를 합니다. 목사는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은 예배를 구경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예배를 지켜보고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인지 거짓된 예배인지를 분별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예배의 내용을 비판합니다. 설교는 제대로 되었는지, 찬양대는 음악적으로 수준이 높은지, 기도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 예배의 형식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예배당은 경건을 드러내기 알맞게 아름답고 엄숙하게 꾸며져 있는지 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그 비판 받음의 대상에 나도 들어가 있다는 것과 마지막 비판자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배의 진정한 청중과 관객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될까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됩시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하늘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분인데, 그 크신 분이 작아지고 작아지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나오고 있습니까? 내가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까?
소망교회는 예배공동체의 모습을 계속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이 시간 저를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배란, 구별하는 능력이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드리는 나를 구별할 줄 알아야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란, 회개이다.” 나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기 시작해야 예배가 됩니다. “예배란, 오직 하나님께.” 하나님만이 우리가 예배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를 잘 기억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예배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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