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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나라를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산상설교에 나오는 팔복 말씀을 패러디하여 역설적으로 뒤집는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민족 시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입니다. 그는 억압받고 있는 민족에 대한 애통함을 1940년에 발표된 팔복이라는 시를 통해 표출합니다. 그는 민족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 절망하면서 어찌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방관하시는 것 같아 보이는 하나님에 대해서 한편으로 저항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통해하는 것 같은 시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팔복이라는 시는 똑같은 말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읽으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그 결론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결론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가슴에 얼마나 슬픔이 가득 찼으면 이렇게 시를 썼을까요?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일본 제국의 억압을 견딜 수 없었던 젊은 청년이 민족의 고통을 보면서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당시는 창시개명이 시행되고 있어서 우리의 이름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민족지였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폐간을 당했던 해가 이 시를 쓴 1940년이었습니다. 민족 해방의 서광이 잘 보이지 않았을 그 때 그는 절망하면서 슬퍼하는 자의 복을 그대로 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1941년에 그는 서시를 쓰게 됩니다. 우리가 늘 들어왔던 그 시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을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친다.
그는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슴으로부터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운명을 한번 헤쳐 나가보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입니다. 하늘의 세계를 지상에 이룩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과 사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쓴 시이기도 합니다. 윤동주에게 가장 큰 슬픔은 일본제국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종살이하는 백성들의 슬픔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로 저항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리고 조국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에 29살의 젊은 나이로 차디찬 일본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그의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나라를 사랑했던 분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덕을 입고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북녘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7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한편의 이야기를 또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선일보 기자인 이학준이 「천국의 국경을 넘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2007년 3월부터 2011년 5월까지 생사를 걸고 취재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가 전하는 탈북자의 모습은 너무나 끔찍하고 안타깝습니다. 중국의 한족 남편에게 얻어맞고 살았던 40대 탈북자 여성의 넋두리가 지금의 탈북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에 있을 때는 아침에 깨면 아침 밥거리가 없어서 아침 밥거리 죽을 겨우 끊여 먹이면 점심거리가 없고, 그저 이틀에 한 번 씩 먹을 때가 있고, 삼일에 한번 먹을 때가 있고, 애들은 구들에 누워서 먹인 게 없어서 일어나 앉을 기운도 없지. 조선의 가난한 나라 사람, 먹지 못해서 입지 못해서 결국은 구걸하러 온 거나 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중국 사람한테 멸시를 당하고 산단 말입니다. 한국가다 잡힌 사람 몰골을 보니까 무덤에서 나온 몰골 그대로란 말입니다. 뼈에 가죽만 씌어놓은 몰골, 보기 무서울 지경으로 목 뒤의 등뼈가 다 올라가고, 얼굴뼈가 다 두드러지고… (중략) 내 소원은 조국이 어떻게든 빨리 통일이 되든가 대책이 있어서 우리 북한 사람들이 이 중국에서 제일 못사는 나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우리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배고프고 얼마나 고생합니까? 지금 중국 땅에서 제일 가난하고 곤란하게 사는 내 생활 절반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탈북자가 되어 북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기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통곡의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탈북자들이 중국 땅을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중국의 공안과 북한의 체포조의 눈을 피해가면서 여기저기 헤매고 있습니다. 어느덧 대한민국에 들어온 탈북자들의 숫자가 벌써 2만 명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고난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북녘 땅에서 고통 받고 있는 저들을 위해 지금보다 더욱 기도하면서 무언가를 도울 사명의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렸습니다
광복 66주년을 맞이하지만 우리 한반도의 모습은 두 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국가 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북한과 비교하면 수십 배의 차이가 나는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주거이전의 자유, 직업의 자유, 언론의 자유,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먹고 마실 것이 이만하면 단군 이래 최고의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는데 최근 들어 부쩍 불평과 불만이 국민들 마음속에 자꾸만 쌓여가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울화통으로 가득차서 이것을 누군가에게 터뜨리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현재의 모습 속에 어려운 여건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과거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배고팠던 시절, 가난했던 시절, 억압당했던 시절, 자랑할 만한 것이 없어서 부끄러웠던 시절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오늘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네가 잘 나갈 때, 네게 복이 주어질 때, 네가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걱정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종되었던 땅, 가난한 땅, 광야 같은 지역을, 불뱀과 전갈이 가득 찬 곳을 건너왔던 것을 다시금 기억하라.” 그러면서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14下~16)
지난 세기를 되돌아보면 우리에게도 광야가 있었습니다. 불뱀이 가득하고 전갈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었습니다. 국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치적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름도 잃어버렸습니다. 언어도 잃어버렸습니다. 글자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학까지도 상실했던 광야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해방되고 독립되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의 역사를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민족에게 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 20세기를 다시 되돌아봅시다. 대한민국이 받은 축복에는 수많은 산업근로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습니다. 기업가들의 도전과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모험정신이 들어있습니다. 자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젊은 청년들의 피맺힌 외침도 들어있습니다. 이를 뒤에서 성원한 국민들의 뒷받침도 얼마나 소중한 기억으로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까?
이제는 우리나라가 G20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경제적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이미 하계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2018년에는 평창에서 동계 올림픽까지 개최하는 세계속의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20~21세기 초에 이렇게 변화된 나라가 지구촌에 어디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유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고 기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염려하십니다
그런데 이 자랑이 지나치면 교만이 되기 시작합니다. 교만이 넘쳐서 방자함이 됩니다. 우리 안에 감사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내 능력으로 내 지혜로 내 머리로 내 아이디어로 내 노력으로 이만큼 된 것같이 착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속에 감사의 영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17~18上)
스스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서 스스로 자랑하고 교만해지면 그것이 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잊고 교만해질까봐 하나님의 마음이 염려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모든 보이는 세계를 만드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축복까지 주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근심과 염려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복을 넘치도록 받고, 하나님 앞에 축복받기를 원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넘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었을 때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셨나요? 아니면 배부르고 편안한 채로 따뜻한 잠자리에 들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찾으셨나요? 우리들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주시기를 원하시면서 걱정하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선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릴까봐 그렇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신명기 8:12~14上)
하나님은 축복하시면서도 걱정하십니다. 보이는 것만 좋아하고 이 모든 것을 내게 주신 분이 얼마나 귀한 분임을 잊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아니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만 바랍니다. 그런데 돈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제치고 돈이 내 인생에 우상이 되고 맙니다. 명예가 내 인생에 우상이 됩니다. 세상의 권력이 하나님보다 더 앞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의 때를 기억하십시오
대한민국에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중국이 있습니다. 또 러시아가 있습니다. 남쪽 바로 옆에는 일본이 있습니다. 모두 세계열강들입니다. 이런 나라들 중심에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4천년의 역사를 그대로 지니고 언어와 문화와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이런 축복을 받은 나라가 되었다는 것, 세계 10대 교육국의 하나이자 한강의 경제적인 기적을 만들어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기억을 우리가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나라, 열악한 나라,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는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받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축복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움을 경험하니까 계속 거기에 취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금방 불평합니다. 감사의 찬양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사나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광야에서 생활했던 기억을 다시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왜 어려웠던 것을 자꾸 기억하라고 하십니까? 왜 힘들고 배고팠던 옛날 일들을 자꾸 기억하라 하십니까?” 그것이 내게 미움과 분노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훌훌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을 통해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나를 단련시키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면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누릴수록,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의 자리에 더 들어갈수록,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될 때 수많은 것을 간직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모든 지위를 가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첫 번째 우선순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역사를 인도하시는 분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오기를 열망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마음속에 확정하는 것입니다.
기억이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단순히 지나간 과거를 파노라마처럼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나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사건들을 현재의 내 삶에 다시금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 속에서 감사하며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지나가면 기억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기억을 가지고 사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실존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감사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귀히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의 절규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할 줄 아는 것입니다. 뉴스 속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일지라도 함께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따뜻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민족을 다시금 세워주옵소서. 다시금 감사하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불평과 불만을 넘어설 줄 아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으로서 나의 지나온 과거, 이 민족의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혹 어려운 일이 있다면 다시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십시오. 현재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신 사랑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십시오. 이러한 결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명기 8: 11 ~ 20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우리에게는 나라를 잃었던 적이 있습니다
산상설교에 나오는 팔복 말씀을 패러디하여 역설적으로 뒤집는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민족 시인이었던 윤동주 시인입니다. 그는 억압받고 있는 민족에 대한 애통함을 1940년에 발표된 팔복이라는 시를 통해 표출합니다. 그는 민족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 절망하면서 어찌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방관하시는 것 같아 보이는 하나님에 대해서 한편으로 저항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통해하는 것 같은 시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팔복이라는 시는 똑같은 말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읽으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그 결론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결론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가슴에 얼마나 슬픔이 가득 찼으면 이렇게 시를 썼을까요?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일본 제국의 억압을 견딜 수 없었던 젊은 청년이 민족의 고통을 보면서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당시는 창시개명이 시행되고 있어서 우리의 이름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민족지였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폐간을 당했던 해가 이 시를 쓴 1940년이었습니다. 민족 해방의 서광이 잘 보이지 않았을 그 때 그는 절망하면서 슬퍼하는 자의 복을 그대로 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1941년에 그는 서시를 쓰게 됩니다. 우리가 늘 들어왔던 그 시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을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친다.
그는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슴으로부터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운명을 한번 헤쳐 나가보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입니다. 하늘의 세계를 지상에 이룩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과 사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쓴 시이기도 합니다. 윤동주에게 가장 큰 슬픔은 일본제국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종살이하는 백성들의 슬픔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로 저항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리고 조국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에 29살의 젊은 나이로 차디찬 일본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그의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나라를 사랑했던 분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덕을 입고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북녘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7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한편의 이야기를 또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선일보 기자인 이학준이 「천국의 국경을 넘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2007년 3월부터 2011년 5월까지 생사를 걸고 취재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가 전하는 탈북자의 모습은 너무나 끔찍하고 안타깝습니다. 중국의 한족 남편에게 얻어맞고 살았던 40대 탈북자 여성의 넋두리가 지금의 탈북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에 있을 때는 아침에 깨면 아침 밥거리가 없어서 아침 밥거리 죽을 겨우 끊여 먹이면 점심거리가 없고, 그저 이틀에 한 번 씩 먹을 때가 있고, 삼일에 한번 먹을 때가 있고, 애들은 구들에 누워서 먹인 게 없어서 일어나 앉을 기운도 없지. 조선의 가난한 나라 사람, 먹지 못해서 입지 못해서 결국은 구걸하러 온 거나 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중국 사람한테 멸시를 당하고 산단 말입니다. 한국가다 잡힌 사람 몰골을 보니까 무덤에서 나온 몰골 그대로란 말입니다. 뼈에 가죽만 씌어놓은 몰골, 보기 무서울 지경으로 목 뒤의 등뼈가 다 올라가고, 얼굴뼈가 다 두드러지고… (중략) 내 소원은 조국이 어떻게든 빨리 통일이 되든가 대책이 있어서 우리 북한 사람들이 이 중국에서 제일 못사는 나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우리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배고프고 얼마나 고생합니까? 지금 중국 땅에서 제일 가난하고 곤란하게 사는 내 생활 절반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탈북자가 되어 북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기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통곡의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탈북자들이 중국 땅을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중국의 공안과 북한의 체포조의 눈을 피해가면서 여기저기 헤매고 있습니다. 어느덧 대한민국에 들어온 탈북자들의 숫자가 벌써 2만 명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고난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북녘 땅에서 고통 받고 있는 저들을 위해 지금보다 더욱 기도하면서 무언가를 도울 사명의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렸습니다
광복 66주년을 맞이하지만 우리 한반도의 모습은 두 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국가 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북한과 비교하면 수십 배의 차이가 나는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주거이전의 자유, 직업의 자유, 언론의 자유,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먹고 마실 것이 이만하면 단군 이래 최고의 풍족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는데 최근 들어 부쩍 불평과 불만이 국민들 마음속에 자꾸만 쌓여가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울화통으로 가득차서 이것을 누군가에게 터뜨리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현재의 모습 속에 어려운 여건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과거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배고팠던 시절, 가난했던 시절, 억압당했던 시절, 자랑할 만한 것이 없어서 부끄러웠던 시절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오늘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네가 잘 나갈 때, 네게 복이 주어질 때, 네가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걱정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종되었던 땅, 가난한 땅, 광야 같은 지역을, 불뱀과 전갈이 가득 찬 곳을 건너왔던 것을 다시금 기억하라.” 그러면서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14下~16)
지난 세기를 되돌아보면 우리에게도 광야가 있었습니다. 불뱀이 가득하고 전갈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었습니다. 국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치적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름도 잃어버렸습니다. 언어도 잃어버렸습니다. 글자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학까지도 상실했던 광야의 생활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해방되고 독립되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의 역사를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민족에게 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 20세기를 다시 되돌아봅시다. 대한민국이 받은 축복에는 수많은 산업근로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습니다. 기업가들의 도전과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모험정신이 들어있습니다. 자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젊은 청년들의 피맺힌 외침도 들어있습니다. 이를 뒤에서 성원한 국민들의 뒷받침도 얼마나 소중한 기억으로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까?
이제는 우리나라가 G20에 참여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경제적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이미 하계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2018년에는 평창에서 동계 올림픽까지 개최하는 세계속의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20~21세기 초에 이렇게 변화된 나라가 지구촌에 어디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유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고 기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염려하십니다
그런데 이 자랑이 지나치면 교만이 되기 시작합니다. 교만이 넘쳐서 방자함이 됩니다. 우리 안에 감사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내 능력으로 내 지혜로 내 머리로 내 아이디어로 내 노력으로 이만큼 된 것같이 착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속에 감사의 영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17~18上)
스스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서 스스로 자랑하고 교만해지면 그것이 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잊고 교만해질까봐 하나님의 마음이 염려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모든 보이는 세계를 만드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축복까지 주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근심과 염려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복을 넘치도록 받고, 하나님 앞에 축복받기를 원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넘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었을 때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셨나요? 아니면 배부르고 편안한 채로 따뜻한 잠자리에 들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찾으셨나요? 우리들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주시기를 원하시면서 걱정하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선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릴까봐 그렇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신명기 8:12~14上)
하나님은 축복하시면서도 걱정하십니다. 보이는 것만 좋아하고 이 모든 것을 내게 주신 분이 얼마나 귀한 분임을 잊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아니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걱정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만 바랍니다. 그런데 돈이 있으니까 하나님을 제치고 돈이 내 인생에 우상이 되고 맙니다. 명예가 내 인생에 우상이 됩니다. 세상의 권력이 하나님보다 더 앞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의 때를 기억하십시오
대한민국에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중국이 있습니다. 또 러시아가 있습니다. 남쪽 바로 옆에는 일본이 있습니다. 모두 세계열강들입니다. 이런 나라들 중심에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4천년의 역사를 그대로 지니고 언어와 문화와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이런 축복을 받은 나라가 되었다는 것, 세계 10대 교육국의 하나이자 한강의 경제적인 기적을 만들어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기억을 우리가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나라, 열악한 나라,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제는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받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축복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움을 경험하니까 계속 거기에 취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금방 불평합니다. 감사의 찬양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사나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광야에서 생활했던 기억을 다시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왜 어려웠던 것을 자꾸 기억하라고 하십니까? 왜 힘들고 배고팠던 옛날 일들을 자꾸 기억하라 하십니까?” 그것이 내게 미움과 분노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훌훌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을 통해서 내가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나를 단련시키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면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누릴수록,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의 자리에 더 들어갈수록,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될 때 수많은 것을 간직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모든 지위를 가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첫 번째 우선순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역사를 인도하시는 분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오기를 열망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마음속에 확정하는 것입니다.
기억이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단순히 지나간 과거를 파노라마처럼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나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사건들을 현재의 내 삶에 다시금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 속에서 감사하며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지나가면 기억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기억을 가지고 사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실존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감사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귀히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의 절규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할 줄 아는 것입니다. 뉴스 속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일지라도 함께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따뜻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민족을 다시금 세워주옵소서. 다시금 감사하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불평과 불만을 넘어설 줄 아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으로서 나의 지나온 과거, 이 민족의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혹 어려운 일이 있다면 다시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십시오. 현재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신 사랑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십시오. 이러한 결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