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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 로마서 강해 10 –

로마서 3: 9 ~ 18

김지철 목사

2015.08.16

두려움의 힘은 큽니다.

한두 달 전만 해도 메르스, 중동호흡기 증후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심초사했습니까? 아니 노심초사를 넘어 사람을 대하기조차 두려워했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사회적 심리상태가 우리 모두를 위협했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불리던 강남 삼성병원이 질병의 발원지였으며 가장 많은 메르스 환자를 발생시킨 곳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두렵게 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잘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저는 사실 담임 목사로서 주일 낮 예배, 저녁 예배, 또 삼일 기도회와 새벽기도회 때마다 걱정이 많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도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러 오시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메르스가 종식된 지금,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현장에 여러 의료진들과 방역 당국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로는 두려움을, 때로는 만성피로를 사명감 하나로 버텨내고 이겨낸 그들을 기억하며 고마워해야 합니다.
메르스를 통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지난 지금이야 ‘별것 아니었는데’ 싶지만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더 긴장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결단과 헌신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몸도 마음도 가꾸게 되고, 위험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니 말입니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바로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신경세포가 뜨거우면 뜨겁다고, 차면 차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경고를 발해야 몸을 보호하는 일종의 방어체제가 잘 갖추어질 수 있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두려움 자체가 아니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가?’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아니면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별력이 생겼을 때, 두려워해야 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두려움을 놓치게 된다면 오히려 인간은 위험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죄 아래 있습니다.

‘암’으로 불리는 악성종양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기에는 암이 생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반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몸이 암을 느끼기 시작할 때는 이미 그것을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전체에 퍼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암과 같은 위험이 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한 것과 같은 이러한 위험을 초래한 무지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로마서 3:18)

정신적인 암과도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우리 안에 생기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오늘 바울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독특한 구조를 지닙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10절에서 18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전도서, 시편, 이사야서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인용의 시작과 마지막에 놓여 있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선언하고 18절에서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반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지 못하면 마치 영적인 암처럼 우리 삶이 뒤엉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인간의 모습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로마서 3:9)

종교를 자랑하는 유대인들도, 철학을 자랑하는 헬라인들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인 된 인간 속에 있는 구정물과도 같은 것들이 하나님 앞에 서면 그대로 토해져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인간을 이렇게 형편없는 존재로 매도해도 괜찮은 걸까? 바울의 이야기처럼 인간이 정말 그렇게 못된 존재일까? 이 말을 수긍해야 할까? 그래도 가끔은 선한 일도 하는 괜찮은 존재인데…’ 자의식에 의해 이 본문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에 인생을 걸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실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당대 헬라 문명권의 최고 대학도시였던 ‘다소’에서 헬라 철학을 공부했던 철학자, 지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깨달은 것은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내 종교, 내 율법, 내 철학, 내 지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서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는 길이 없구나.’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보이는 종교인도,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다는 철학자도 똑같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철학자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같이 여겼는데 그것은 다 모양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율법을 지킨 것 같았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다 허상이었다는 고백입니다.

두려움을 잃은 이들은 죄를 짓게 됩니다.

바울은 더욱 심각한 어조로 말합니다. 인간이 범하는 죄악을 입으로 범하는 범죄와 손과 발로 행하는 범죄로 크게 나누어 하나하나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로마서 3:13∼14)

먼저 목구멍, 혀, 입술, 입에 해당하는 죄악들입니다. 말을 통해서 인간의 악이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말이란 마음의 창입니다. 말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을 통해서 나오고, 마음에 품은 뜻에서 나오고, 인격 속에서 나오는 것이 언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무덤은 악취가 나는 시체가 있는 곳 아닙니까? 게다가 무덤이 열렸다고 하니 무슨 뜻입니까? 무덤 속에 있는 악취가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겁할 노릇입니다. 못되고 추한 것들, 들어서는 안 될 것들, 보아서도 안 될 것들이 열린 무덤처럼 이 세상을 향해서 자꾸만 토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혀로는 속임을 일삼는다’고까지 합니다. 거짓말이 입에 달라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댄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말에는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습니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반대로 말 한 마디가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언어폭력’이라는 말이 알려주듯이 말을 잘못 하는 것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들은 부모님의 말 한마디 때문에, 선생님의 한마디 때문에, 친구의 그 한마디 때문에 속이 시퍼렇게 멍들다 못해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경험을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대로 부모님의 칭찬과 인정의 말 한마디 때문에,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 때문에 용기를 가지게 된 적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바울은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다’는 말로 그 영향력을 표현합니다. 남의 독설에 진저리를 치면서 자살을 택한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냥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치명적인 말 한마디를 한 것입니다.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살아서 뭐해? 네가 한 일이 뭐야?” 그 말들에 쓰러진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입니다. 남을 축복한 경험이 없고, 남을 인정하고 칭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내가 한 말 중 남을 축복한 말이 많습니까? 아니면 남을 비난하고 조롱한 말들이 더 많습니까? 남이 나에게 한 말은 주로 비난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을 향한 것은 축복만 더 기억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축복의 인사를 건네십니까? 옆에서 달리는 차를 보며 그 안에 탄 사람들을 축복하십니까?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까? 아니면, 저 사람 가다가 넘어졌으면 좋겠다는 식의 생각으로 우리 삶이 일그러져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있는 부끄러운 모습을 계속 지적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들입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로마서 3:15∼17)

남이 고난당하고 망가지는 것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탐욕을 채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는 길에는 파멸과 고생과 비참함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남을 축복하면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사는데, 남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하면 남도 저주를 받고 나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피 흘리는 데 빠른 발이라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해 갈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실상 얼마나 겁쟁이인지 모릅니다.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사실 비겁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먼저 남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뻔뻔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탐욕과 이기적인 욕망이 우선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두려움에 대한 문제를 극복해야 할까요? 먼저 인생이란 두려움을 느끼고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두려움을 인정해야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구나. 보이지 않는 세계가 명백히 있구나.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있구나’라고 느끼는 감정이 곧 두려움의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에 매몰되어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두려움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이 우리 삶을 억누르게 되고 우리는 거기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느끼고 인정하되 이것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가장 큰 두려움, 진정한 두려움으로 다른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일종의 이열치열인 셈입니다. 해가 뜨면 작은 촛불과 등불은 꺼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두려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해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라. 그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요, 지식의 근본이다.” 반복해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세상의 다른 두려움들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찾아오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감사하고 좋은 이유가 하나님이 인생을 사는 비밀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큰 두려움을 알아라. 그러면 세상의 작은 두려움은 물리칠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네가 교만해지고, 그때부터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네게 두려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두려움인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웬만한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겨나가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서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9)

미지의 세계, 불확실성의 미래. 이것이 두려움의 핵심 아닙니까? 그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로 나아가라.” 미지의 세계, 미지의 미래까지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 23편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사망의 골짜기로 다니게 되더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큰 두려움을 통해서 작은 두려움을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서 51장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이사야 51:12)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인데 왜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고 도망가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면서 세상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태복음 8:26)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곧 무서움이 하나님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회복합시다.

사탄은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억누릅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종으로 만듭니다. 그것을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입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왜냐하면 두려움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신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을 다른 거짓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신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 그분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를 억누르는 가짜 두려움은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하나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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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 9 ~ 18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두려움의 힘은 큽니다.

한두 달 전만 해도 메르스, 중동호흡기 증후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심초사했습니까? 아니 노심초사를 넘어 사람을 대하기조차 두려워했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사회적 심리상태가 우리 모두를 위협했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불리던 강남 삼성병원이 질병의 발원지였으며 가장 많은 메르스 환자를 발생시킨 곳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두렵게 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잘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저는 사실 담임 목사로서 주일 낮 예배, 저녁 예배, 또 삼일 기도회와 새벽기도회 때마다 걱정이 많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도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러 오시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메르스가 종식된 지금,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현장에 여러 의료진들과 방역 당국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로는 두려움을, 때로는 만성피로를 사명감 하나로 버텨내고 이겨낸 그들을 기억하며 고마워해야 합니다.
메르스를 통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지난 지금이야 ‘별것 아니었는데’ 싶지만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더 긴장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결단과 헌신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몸도 마음도 가꾸게 되고, 위험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니 말입니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바로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신경세포가 뜨거우면 뜨겁다고, 차면 차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경고를 발해야 몸을 보호하는 일종의 방어체제가 잘 갖추어질 수 있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두려움 자체가 아니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가?’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아니면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별력이 생겼을 때, 두려워해야 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두려움을 놓치게 된다면 오히려 인간은 위험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죄 아래 있습니다.

‘암’으로 불리는 악성종양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기에는 암이 생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반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몸이 암을 느끼기 시작할 때는 이미 그것을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전체에 퍼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암과 같은 위험이 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한 것과 같은 이러한 위험을 초래한 무지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로마서 3:18)

정신적인 암과도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우리 안에 생기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오늘 바울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독특한 구조를 지닙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10절에서 18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전도서, 시편, 이사야서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인용의 시작과 마지막에 놓여 있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선언하고 18절에서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반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지 못하면 마치 영적인 암처럼 우리 삶이 뒤엉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인간의 모습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로마서 3:9)

종교를 자랑하는 유대인들도, 철학을 자랑하는 헬라인들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인 된 인간 속에 있는 구정물과도 같은 것들이 하나님 앞에 서면 그대로 토해져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인간을 이렇게 형편없는 존재로 매도해도 괜찮은 걸까? 바울의 이야기처럼 인간이 정말 그렇게 못된 존재일까? 이 말을 수긍해야 할까? 그래도 가끔은 선한 일도 하는 괜찮은 존재인데…’ 자의식에 의해 이 본문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에 인생을 걸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실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당대 헬라 문명권의 최고 대학도시였던 ‘다소’에서 헬라 철학을 공부했던 철학자, 지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깨달은 것은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내 종교, 내 율법, 내 철학, 내 지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서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는 길이 없구나.’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보이는 종교인도,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다는 철학자도 똑같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철학자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같이 여겼는데 그것은 다 모양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율법을 지킨 것 같았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다 허상이었다는 고백입니다.

두려움을 잃은 이들은 죄를 짓게 됩니다.

바울은 더욱 심각한 어조로 말합니다. 인간이 범하는 죄악을 입으로 범하는 범죄와 손과 발로 행하는 범죄로 크게 나누어 하나하나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로마서 3:13∼14)

먼저 목구멍, 혀, 입술, 입에 해당하는 죄악들입니다. 말을 통해서 인간의 악이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말이란 마음의 창입니다. 말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을 통해서 나오고, 마음에 품은 뜻에서 나오고, 인격 속에서 나오는 것이 언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무덤은 악취가 나는 시체가 있는 곳 아닙니까? 게다가 무덤이 열렸다고 하니 무슨 뜻입니까? 무덤 속에 있는 악취가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겁할 노릇입니다. 못되고 추한 것들, 들어서는 안 될 것들, 보아서도 안 될 것들이 열린 무덤처럼 이 세상을 향해서 자꾸만 토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혀로는 속임을 일삼는다’고까지 합니다. 거짓말이 입에 달라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댄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말에는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습니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반대로 말 한 마디가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언어폭력’이라는 말이 알려주듯이 말을 잘못 하는 것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들은 부모님의 말 한마디 때문에, 선생님의 한마디 때문에, 친구의 그 한마디 때문에 속이 시퍼렇게 멍들다 못해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경험을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대로 부모님의 칭찬과 인정의 말 한마디 때문에,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 때문에 용기를 가지게 된 적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바울은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다’는 말로 그 영향력을 표현합니다. 남의 독설에 진저리를 치면서 자살을 택한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냥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치명적인 말 한마디를 한 것입니다.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살아서 뭐해? 네가 한 일이 뭐야?” 그 말들에 쓰러진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입니다. 남을 축복한 경험이 없고, 남을 인정하고 칭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내가 한 말 중 남을 축복한 말이 많습니까? 아니면 남을 비난하고 조롱한 말들이 더 많습니까? 남이 나에게 한 말은 주로 비난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을 향한 것은 축복만 더 기억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축복의 인사를 건네십니까? 옆에서 달리는 차를 보며 그 안에 탄 사람들을 축복하십니까?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까? 아니면, 저 사람 가다가 넘어졌으면 좋겠다는 식의 생각으로 우리 삶이 일그러져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있는 부끄러운 모습을 계속 지적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행동들입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로마서 3:15∼17)

남이 고난당하고 망가지는 것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탐욕을 채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는 길에는 파멸과 고생과 비참함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남을 축복하면 상대방도 살고 나도 사는데, 남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하면 남도 저주를 받고 나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피 흘리는 데 빠른 발이라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해 갈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실상 얼마나 겁쟁이인지 모릅니다.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사실 비겁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먼저 남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뻔뻔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탐욕과 이기적인 욕망이 우선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 두려움에 대한 문제를 극복해야 할까요? 먼저 인생이란 두려움을 느끼고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두려움을 인정해야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구나. 보이지 않는 세계가 명백히 있구나.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있구나’라고 느끼는 감정이 곧 두려움의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에 매몰되어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두려움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이 우리 삶을 억누르게 되고 우리는 거기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느끼고 인정하되 이것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가장 큰 두려움, 진정한 두려움으로 다른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일종의 이열치열인 셈입니다. 해가 뜨면 작은 촛불과 등불은 꺼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두려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해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라. 그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요, 지식의 근본이다.” 반복해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세상의 다른 두려움들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찾아오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감사하고 좋은 이유가 하나님이 인생을 사는 비밀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큰 두려움을 알아라. 그러면 세상의 작은 두려움은 물리칠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네가 교만해지고, 그때부터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네게 두려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두려움인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웬만한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겨나가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서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9)

미지의 세계, 불확실성의 미래. 이것이 두려움의 핵심 아닙니까? 그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로 나아가라.” 미지의 세계, 미지의 미래까지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 23편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사망의 골짜기로 다니게 되더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큰 두려움을 통해서 작은 두려움을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서 51장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이사야 51:12)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인데 왜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고 도망가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면서 세상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태복음 8:26)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곧 무서움이 하나님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회복합시다.

사탄은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억누릅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종으로 만듭니다. 그것을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입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왜냐하면 두려움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신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을 다른 거짓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신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 그분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를 억누르는 가짜 두려움은 우리를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하나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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