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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시간이 있으면 다가오는 시간이 있습니다.
2015년도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니, 세월이 유수 같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실감납니다. 중국 동진(東晋)의 시인이었던 도연명(陶淵明)이라는 사람도 자신이 쓴 시에서 흐르는 세월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盛年不重來 성년부중래 젊음 청춘은 다시 오지 않으며
一日難再晨 일일난재신 하루에 아침을 두 번 맞지 못한다.
及時當勉勵 급시당면려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라.
歲月不待人 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어느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세월 앞에는 장수/장사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세월’이라는 시간의 심판입니다. 젊음도 지나갑니다. 건강도 지나갑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시간도 지나갈 뿐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을, 어제의 꿈을 오늘 되새기면서 살아갑니다. 지나가는 시간은 늘 아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생각할 때,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개념 말고 또 다른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시간은 기대되고 설렙니다.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 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시간에 대한 이 두 가지 개념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 첫 번째는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12)
지혜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계산할 줄 아는 것이란 뜻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생각하며 때로는 절제하고 때로는 누리고 때로는 감사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 이것이 시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혜입니다.
두 번째는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로마서 13:11)
하나님의 사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구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 기대하며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옛것에 연연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새것을 향한 기대감으로 오늘을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지난 대림절 기간 동안 ‘기다림의 사람들’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요셉, 모세, 동방박사의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렸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만이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변하고 성숙할 것을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도 기다리지 못하겠다!’ 하시며 기다림을 포기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의 ‘포기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내버려 두겠다는 것과 한 번 더 기다려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난 성탄절에 탕자의 이야기를 잠깐 전했었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불손한 말을 하는 아들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꾸짖지 않았습니다.
자녀가 “아버지, 빨리 좀 돌아가세요. 내가 그 유산을 받아야겠단 말이에요” 한다면, “오냐 그렇게 하자!”고 말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이 못된 놈!” 하며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왜 야단을 치지 않았을까요? 야단을 쳐 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변화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경험하고 깨닫기 전에는 변화되지 않기에 그냥 내버려 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두셨다는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로마서 1:28)
“하나님을 마음에 두라.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 사랑해라.” 아무리 이야기해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기로 작정을 하면 하나님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네 마음대로 해 봐라. 갈 데까지 가 봐라. 나 없이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 경험해 봐라’ 하고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도록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내버려둔 인간들의 인생은 그것이 마지막일까요? 더 이상의 이야기는 전개되지 않는 인생의 종결일까요? 놀랍게도 성경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내버려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우리 인간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시면서도 동시에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기다림 속에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다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아무리 못됐고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그래서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봐!”라고 말했어도 부모들은 생각합니다. ‘얘야, 그래도 돌아와야지. 돌아오면 내가 받아줄 거야.’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탕자가 꾀죄죄한 누더기 옷을 입고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거리가 멀어서 아들의 모습이 가물가물한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벌떡 일어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마 그는 아들과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냐?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조금 더 빨리 오지 그랬냐. 아니다. 지금 온 것만도 고맙구나” 하면서 아들을 껴안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측은히 여겼다’고 기록합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포기는 기다림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기다림을 갖고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기다림 속에는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고, 의지와 결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의지와 결단이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기다림에 지치신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계속 기다려왔지만 이제는 더 못 기다리겠다. 너희들 도대체 뭐하는 거냐?” 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의 소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역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2)
“내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망대를 높이 올려 아무도 함부로 들어와서 이것들을 상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너희는 왜 좋은 포도를 안 맺고 쓰디쓴 엉터리 포도를 맺었느냐?”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비슷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와서 보고, 이 년 후, 삼 년 후 반복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에 도무지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렇게 돌봤는데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으니 땅만 버리는구나. 다 잘라 버리자. 모두 찍어 버리자. 그리고 새로운 나무를 심든지 하자.”
포도원지기는 포도원 주인의 말에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마땅히 찍어버려야 합니다. 더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열매 없는 나무에 대한 포도원 주인의 깊은 관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를 찍어 버리겠다는 것은 나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나무에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는 포도원 주인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포도원지기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 못된 나무, 찍어 버려야지요. 그런데 한 번만 더 참으시면 안 됩니까? 한 번 더 기다리시면 안 돼요? 한 번 더 기대하시면 안돼요? 이 나무를 좀 더 바라봐 주시면 안 돼요?”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누가복음 13:8)
‘금년에도’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작년에도 주인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때도 포도원지기는 일 년을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주인이 또 왔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지기는 또 한 번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기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포도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제도 기다리셨고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마을 입구만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기다림의 마음을 알고 포도원지기는 한 번 더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또 한 번 그 둘레의 땅을 파고 거름을 주어 이 나무가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셔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셨습니다. 마치 거름처럼 땅에 묻어지고 썩어져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금년에 한 번의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다’고 말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창조 이후에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회복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지 이사야 49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어머니들께 묻습니다. 낳은 자녀를 잊으신 적이 있습니까? 없으시잖아요. 자녀가 어릴 때는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혹 여인이 자기의 태에서 난 아들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 이것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잊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되돌아올 때까지 바라보고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을, 하나님이 무능함이나 부재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5)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을 변하게 합니다. 회개는 인간이 옛 모습을 탈출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기대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회개는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개입니까? 첫 번째, 시간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회개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첫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메시지 앞에 한 마디가 더 있습니다. “때가 찼다”입니다. 지금이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지난 모습들을 훌훌 벗어버릴 때라는 것입니다. 즉 회개할 때라는 말입니다.
때를 알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어떠했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곧 ‘때’를 아는 것입니다. 때를 아는 지혜, 시간의 흐름을 아는 지혜, 시간의 목표를 아는 지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의 핵심 내용입니다.
두 번째, 힘을 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에 힘 좀 빼라. 어깨에 힘 좀 빼라. 네가 너의 것이라 생각하며 붙잡았던 것들을 내려놓아라.” 신앙이란, 내 힘을 빼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잡고 있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만을 바라보겠다는 선언이 곧 회개입니다.
돈과 재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돈, 돈, 돈 하며 살았던 우리의 인생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란 얼마나 소중합니까? 부모의 시간과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 자식, 내 자식 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쏟았다면 그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됩니까? 그러나 사랑도 우정도 잃은 채 명예와 권력만을 향해서 달려갔던 우리의 지난날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 확인하고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또 한 번의 기회임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기다림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이제 제 삶에 열매가 맺히기를 원합니다. 먼저 마음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옵소서.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걸고 주를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입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제 언어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가 되게 하옵소서. 행위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 해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고백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더욱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고백과 결단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3: 6 ~ 9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지나가는 시간이 있으면 다가오는 시간이 있습니다.
2015년도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니, 세월이 유수 같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실감납니다. 중국 동진(東晋)의 시인이었던 도연명(陶淵明)이라는 사람도 자신이 쓴 시에서 흐르는 세월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盛年不重來 성년부중래 젊음 청춘은 다시 오지 않으며
一日難再晨 일일난재신 하루에 아침을 두 번 맞지 못한다.
及時當勉勵 급시당면려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라.
歲月不待人 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어느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세월 앞에는 장수/장사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세월’이라는 시간의 심판입니다. 젊음도 지나갑니다. 건강도 지나갑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시간도 지나갈 뿐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을, 어제의 꿈을 오늘 되새기면서 살아갑니다. 지나가는 시간은 늘 아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생각할 때,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개념 말고 또 다른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시간은 기대되고 설렙니다.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 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시간에 대한 이 두 가지 개념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 첫 번째는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12)
지혜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계산할 줄 아는 것이란 뜻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생각하며 때로는 절제하고 때로는 누리고 때로는 감사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 이것이 시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혜입니다.
두 번째는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로마서 13:11)
하나님의 사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구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 기대하며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옛것에 연연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새것을 향한 기대감으로 오늘을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지난 대림절 기간 동안 ‘기다림의 사람들’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요셉, 모세, 동방박사의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렸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만이 하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변하고 성숙할 것을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도 기다리지 못하겠다!’ 하시며 기다림을 포기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의 ‘포기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내버려 두겠다는 것과 한 번 더 기다려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난 성탄절에 탕자의 이야기를 잠깐 전했었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불손한 말을 하는 아들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꾸짖지 않았습니다.
자녀가 “아버지, 빨리 좀 돌아가세요. 내가 그 유산을 받아야겠단 말이에요” 한다면, “오냐 그렇게 하자!”고 말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이 못된 놈!” 하며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왜 야단을 치지 않았을까요? 야단을 쳐 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변화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경험하고 깨닫기 전에는 변화되지 않기에 그냥 내버려 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두셨다는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로마서 1:28)
“하나님을 마음에 두라.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 사랑해라.” 아무리 이야기해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기로 작정을 하면 하나님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네 마음대로 해 봐라. 갈 데까지 가 봐라. 나 없이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 경험해 봐라’ 하고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도록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내버려둔 인간들의 인생은 그것이 마지막일까요? 더 이상의 이야기는 전개되지 않는 인생의 종결일까요? 놀랍게도 성경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내버려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우리 인간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시면서도 동시에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기다림 속에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다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아무리 못됐고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그래서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봐!”라고 말했어도 부모들은 생각합니다. ‘얘야, 그래도 돌아와야지. 돌아오면 내가 받아줄 거야.’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탕자가 꾀죄죄한 누더기 옷을 입고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달려갔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거리가 멀어서 아들의 모습이 가물가물한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벌떡 일어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마 그는 아들과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냐?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조금 더 빨리 오지 그랬냐. 아니다. 지금 온 것만도 고맙구나” 하면서 아들을 껴안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측은히 여겼다’고 기록합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포기는 기다림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기다림을 갖고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기다림 속에는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고, 의지와 결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의지와 결단이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기다림에 지치신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계속 기다려왔지만 이제는 더 못 기다리겠다. 너희들 도대체 뭐하는 거냐?” 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의 소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역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2)
“내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망대를 높이 올려 아무도 함부로 들어와서 이것들을 상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너희는 왜 좋은 포도를 안 맺고 쓰디쓴 엉터리 포도를 맺었느냐?”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비슷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와서 보고, 이 년 후, 삼 년 후 반복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에 도무지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렇게 돌봤는데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으니 땅만 버리는구나. 다 잘라 버리자. 모두 찍어 버리자. 그리고 새로운 나무를 심든지 하자.”
포도원지기는 포도원 주인의 말에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마땅히 찍어버려야 합니다. 더 이상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열매 없는 나무에 대한 포도원 주인의 깊은 관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를 찍어 버리겠다는 것은 나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나무에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는 포도원 주인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포도원지기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 못된 나무, 찍어 버려야지요. 그런데 한 번만 더 참으시면 안 됩니까? 한 번 더 기다리시면 안 돼요? 한 번 더 기대하시면 안돼요? 이 나무를 좀 더 바라봐 주시면 안 돼요?”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누가복음 13:8)
‘금년에도’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작년에도 주인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때도 포도원지기는 일 년을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주인이 또 왔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지기는 또 한 번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기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포도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제도 기다리셨고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마을 입구만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기다림의 마음을 알고 포도원지기는 한 번 더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또 한 번 그 둘레의 땅을 파고 거름을 주어 이 나무가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셔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신 지셨습니다. 마치 거름처럼 땅에 묻어지고 썩어져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금년에 한 번의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다’고 말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창조 이후에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회복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지 이사야 49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어머니들께 묻습니다. 낳은 자녀를 잊으신 적이 있습니까? 없으시잖아요. 자녀가 어릴 때는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혹 여인이 자기의 태에서 난 아들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 이것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잊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되돌아올 때까지 바라보고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을, 하나님이 무능함이나 부재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5)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을 변하게 합니다. 회개는 인간이 옛 모습을 탈출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기대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회개는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개입니까? 첫 번째, 시간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회개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첫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메시지 앞에 한 마디가 더 있습니다. “때가 찼다”입니다. 지금이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지난 모습들을 훌훌 벗어버릴 때라는 것입니다. 즉 회개할 때라는 말입니다.
때를 알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어떠했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곧 ‘때’를 아는 것입니다. 때를 아는 지혜, 시간의 흐름을 아는 지혜, 시간의 목표를 아는 지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의 핵심 내용입니다.
두 번째, 힘을 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에 힘 좀 빼라. 어깨에 힘 좀 빼라. 네가 너의 것이라 생각하며 붙잡았던 것들을 내려놓아라.” 신앙이란, 내 힘을 빼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잡고 있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만을 바라보겠다는 선언이 곧 회개입니다.
돈과 재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돈, 돈, 돈 하며 살았던 우리의 인생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란 얼마나 소중합니까? 부모의 시간과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 자식, 내 자식 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쏟았다면 그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됩니까? 그러나 사랑도 우정도 잃은 채 명예와 권력만을 향해서 달려갔던 우리의 지난날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 확인하고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또 한 번의 기회임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기다림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이제 제 삶에 열매가 맺히기를 원합니다. 먼저 마음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옵소서.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걸고 주를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입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제 언어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가 되게 하옵소서. 행위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 해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고백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더욱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랑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고백과 결단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