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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먼저 무장 해제하셨습니다.
‘교회, 예배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세 번째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주일,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영적인 무장 해제에서 시작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적인 무장 해제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방어하는 모든 무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무기는 나 자신을 그럴싸하게 보이려 했던 총과 칼들입니다. 학벌, 가문, 재물, 명예, 인간관계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궁극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붙잡게 만드는 나의 자존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예배가 시작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해 “이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항복합니다.”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표지가 우리의 영적 무장 해제인 것입니다.
항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조건 순종하려는 사람도 드뭅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하면 내가 패배자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무능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항복하면 그동안 잘나갔던 내가 무너질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마저 항복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내가 먼저 무장 해제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무장 해제를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장 해제란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의 영광스러운 계급장을 떼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급장을 떼고 죄인 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번쩍이는 계급장도 떼셨습니다. 대신 약하고 약한 갓난아기가 되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무한대 계급장도 떼셨습니다. 그리곤 시간과 공간 속에 한계를 지닌 존재로 들어오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그러셨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기 위해서 그 위대한 영광과 존귀를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시작됩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주도권이 없으면, 우리의 예배는 예배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말씀 시작 부분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우리가 예배드려야 할 이유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1장부터 11장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전했습니다. 그런 후, 본 장 첫 구절에서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어떤 사랑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하늘의 계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짓 된 우상 숭배 말입니다. 자연 신을 섬기든지, 귀신이나 잡신을 섬기든지, 자기 신념을 이데올로기화해서 신처럼 섬기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히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먼저 무장 해제하시고 유한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나의 내어드림 이전에 하나님의 내어주심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 앞에 무장 해제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예배에 나왔느냐? 잘했구나. 네가 나를 예배할 줄 아는구나. 네가 스스로 무장 해제를 하고 나를 만나러 왔구나. 고맙구나.”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도 더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드리는 이 예배를 삶의 현장에서도 이어가거라. 예배란 내 앞에서만 드리는 것으로 멈춰서는 안 된다. 신앙은 이분법이나 이원론이 아니란다. 나의 사랑이 너에게 닿으면, 그 사랑을 네 삶의 현장에서 체화시켜라. 네 몸과 삶으로 녹여 내거라.”
우리의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이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죄악을 짓기 전에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보듬었기 때문에 무장 해제하며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상대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예배드리며 무장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우리 삶에 체화시키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삶으로, 몸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삶과 몸으로 예배드리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하반부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중)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몸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자리가 우리의 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삶의 주체가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광물’을 물질적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식물’은 물질과 생명을 지닌 존재라고 말합니다. ‘동물’은 물질과 생명, 일시적인 정신 감각을 지닌 존재로 봅니다. 그리고 ‘인간’은 물질과 생명, 정신,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혼을 지닌 존재로 파악합니다. 인간의 몸 안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이 이 몸 안에 계시다는 사실, 이게 신앙인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 말씀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우리 몸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살아 있는 동물을 죽였습니다. 피와 함께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함께 우리의 살아 있는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일까요? 산 제물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예배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생활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이 예배입니다. 친구를 만나 사귀는 것이 예배입니다. 직장에 나가서는 직장 일을 감당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세상에 나가 장 보고 외식하고 자녀와 함께 하루를 즐기는 것도 예배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도 예배입니다. 내 삶이, 내 몸이 머무는 곳이 바로 예배의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하며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기업인은 정직하게 기업 활동을 하며 예배드립니다. 교수는 학생을 잘 가르치고 인도하며 예배드립니다. 자신의 전문성을 갖고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자비와 사랑을 품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삶의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로마서 12장 3절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중)
각 사람마다 받은 분량이 다르다고 합니다. 각자마다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그 분량대로 사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인 예배라는 뜻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학교 선생이나 교수면 가르치는 일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학문과 인격을 후배와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존경 받고 인정받는 선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저 시간만 때우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본이 되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나 나라의 지도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와 총명으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세워 나가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하게 백성을 돌보며 선한 길로 백성을 인도해야 할 사명이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맡겨진 일,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성경은 이분법과 이원론을 거절합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순간 다른 사람이 되면,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무장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품고 예배드리는 삶을 삽시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서도 무장 해제를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치열하지 않습니까? 또, 너무 공격적이지 않습니까? 이대로 세상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무장 해제까지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무기를 들고 나가지 말라 합니다. 엄청난 방어 갑옷도 입지 말라 합니다. 대신 우리가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무기가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범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죄인 된 몸으로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사탄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품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의 참 무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간직하며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며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람이 가진 재물, 지식, 권력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어떤 평가의 잣대로도 우리를 가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시는 위대한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예배드리면서 우리는, 낮고 천한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나의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무장 해제하며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나를 붙들며 ‘이것만은 건들지 마세요.’ 하던 그 자존심마저 깨뜨리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가거라. 내 마음을 품고 나가라. 내가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었으니, 너도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을 품고 나가라.”
바로 이런 마음과 자세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주부면 살림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학생이면 공부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면 땀 흘리고 수고하며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기업가라면 기업을 바르게 운영하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정치인이면 나라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 애쓰고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 갈등과 분노로 점철 된 오늘의 세상도 바꿔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이 나라, 이 민족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노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한 배에 탄 민족 공동체인 것을 확인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먼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인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닫힌 마음이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활짝 열며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이 시대의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이 백성에게 다시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이 쓰실 만한 그릇으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먼저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립니다. 모이는 예배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달았으니, 세상을 향해 흩어지는 교회, 흩어지는 예배로 이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삶에는 축복이며, 이웃과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로마서 12: 1 ~ 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이 먼저 무장 해제하셨습니다.
‘교회, 예배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세 번째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주일,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영적인 무장 해제에서 시작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적인 무장 해제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방어하는 모든 무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무기는 나 자신을 그럴싸하게 보이려 했던 총과 칼들입니다. 학벌, 가문, 재물, 명예, 인간관계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궁극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붙잡게 만드는 나의 자존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예배가 시작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해 “이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항복합니다.”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표지가 우리의 영적 무장 해제인 것입니다.
항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조건 순종하려는 사람도 드뭅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하면 내가 패배자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무능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항복하면 그동안 잘나갔던 내가 무너질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마저 항복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내가 먼저 무장 해제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무장 해제를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장 해제란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의 영광스러운 계급장을 떼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급장을 떼고 죄인 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번쩍이는 계급장도 떼셨습니다. 대신 약하고 약한 갓난아기가 되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무한대 계급장도 떼셨습니다. 그리곤 시간과 공간 속에 한계를 지닌 존재로 들어오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그러셨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기 위해서 그 위대한 영광과 존귀를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시작됩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주도권이 없으면, 우리의 예배는 예배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말씀 시작 부분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우리가 예배드려야 할 이유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1장부터 11장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전했습니다. 그런 후, 본 장 첫 구절에서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어떤 사랑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하늘의 계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짓 된 우상 숭배 말입니다. 자연 신을 섬기든지, 귀신이나 잡신을 섬기든지, 자기 신념을 이데올로기화해서 신처럼 섬기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히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먼저 무장 해제하시고 유한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나의 내어드림 이전에 하나님의 내어주심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 앞에 무장 해제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예배에 나왔느냐? 잘했구나. 네가 나를 예배할 줄 아는구나. 네가 스스로 무장 해제를 하고 나를 만나러 왔구나. 고맙구나.”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도 더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드리는 이 예배를 삶의 현장에서도 이어가거라. 예배란 내 앞에서만 드리는 것으로 멈춰서는 안 된다. 신앙은 이분법이나 이원론이 아니란다. 나의 사랑이 너에게 닿으면, 그 사랑을 네 삶의 현장에서 체화시켜라. 네 몸과 삶으로 녹여 내거라.”
우리의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이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죄악을 짓기 전에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보듬었기 때문에 무장 해제하며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상대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예배드리며 무장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우리 삶에 체화시키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삶으로, 몸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삶과 몸으로 예배드리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하반부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중)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몸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자리가 우리의 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삶의 주체가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광물’을 물질적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식물’은 물질과 생명을 지닌 존재라고 말합니다. ‘동물’은 물질과 생명, 일시적인 정신 감각을 지닌 존재로 봅니다. 그리고 ‘인간’은 물질과 생명, 정신,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혼을 지닌 존재로 파악합니다. 인간의 몸 안에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이 이 몸 안에 계시다는 사실, 이게 신앙인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 말씀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우리 몸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살아 있는 동물을 죽였습니다. 피와 함께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함께 우리의 살아 있는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일까요? 산 제물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예배입니다. 가정에서 부부 생활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이 예배입니다. 친구를 만나 사귀는 것이 예배입니다. 직장에 나가서는 직장 일을 감당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세상에 나가 장 보고 외식하고 자녀와 함께 하루를 즐기는 것도 예배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도 예배입니다. 내 삶이, 내 몸이 머무는 곳이 바로 예배의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하며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기업인은 정직하게 기업 활동을 하며 예배드립니다. 교수는 학생을 잘 가르치고 인도하며 예배드립니다. 자신의 전문성을 갖고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자비와 사랑을 품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삶의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로마서 12장 3절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중)
각 사람마다 받은 분량이 다르다고 합니다. 각자마다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그 분량대로 사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인 예배라는 뜻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학교 선생이나 교수면 가르치는 일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학문과 인격을 후배와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존경 받고 인정받는 선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저 시간만 때우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본이 되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나 나라의 지도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와 총명으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세워 나가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하게 백성을 돌보며 선한 길로 백성을 인도해야 할 사명이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맡겨진 일,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성경은 이분법과 이원론을 거절합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순간 다른 사람이 되면,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무장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품고 예배드리는 삶을 삽시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서도 무장 해제를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치열하지 않습니까? 또, 너무 공격적이지 않습니까? 이대로 세상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무장 해제까지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무기를 들고 나가지 말라 합니다. 엄청난 방어 갑옷도 입지 말라 합니다. 대신 우리가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무기가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범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죄인 된 몸으로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사탄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품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우리의 참 무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간직하며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며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람이 가진 재물, 지식, 권력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어떤 평가의 잣대로도 우리를 가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시는 위대한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예배드리면서 우리는, 낮고 천한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나의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무장 해제하며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나를 붙들며 ‘이것만은 건들지 마세요.’ 하던 그 자존심마저 깨뜨리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제 세상을 향해 나가거라. 내 마음을 품고 나가라. 내가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었으니, 너도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을 품고 나가라.”
바로 이런 마음과 자세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주부면 살림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학생이면 공부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면 땀 흘리고 수고하며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기업가라면 기업을 바르게 운영하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정치인이면 나라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 애쓰고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 갈등과 분노로 점철 된 오늘의 세상도 바꿔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이 나라, 이 민족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노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한 배에 탄 민족 공동체인 것을 확인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먼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인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닫힌 마음이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활짝 열며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이 시대의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이 백성에게 다시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이 쓰실 만한 그릇으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먼저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립니다. 모이는 예배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달았으니, 세상을 향해 흩어지는 교회, 흩어지는 예배로 이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삶에는 축복이며, 이웃과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3월 1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하나님의 내어주심, 인간의 내어드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40, 54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롬 12:1-2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예배란 우리의 무장해제로부터 시작됩니다. 나의 학벌, 가문, 명예, 재물, 인간관계, 가족 등 나의 나 됨을 그럴 듯하게 지켜준다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붙잡고 있는 마지막 나의 자존심마저 내려놓습니다. 그 때에 진정한 예배가 시작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항복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표지입니다.
설교의 요약
항복을 좋아하거나, 순종을 기꺼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내 자신이 패배자, 무능한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도 항복하기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무장해제를 하시고 다녀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셨습니다. 거룩하다는 계급장을 떼시고 죄인 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심을 떼시고 약하고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영원하시다는 무한대의 계급장도 때시고 시간 속에 한계 된 존재로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가시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해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주도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롬12:1)는 예배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긍휼을 베푸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을 보여주시고, 무장해제를 하신채로 죄인 된 우리를 찾아오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어드림 이전에 하나님께서 내어주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장해제를 알고 나도 그 분 앞에서 무장해제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로 나온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삶의 현장에서 펼쳐져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삶으로,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자기 정체성이 곧 자기 몸입니다. 몸으로 드리는 살아있는 제물은 우리의 먹고 마시는 것이 곧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 등의 세상에서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분량대로 사물과 사람을 대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라 말씀합니다.(롬 12:3) 성경은 이분법과 이원론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향해 담을 쌓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나갈 때도 무장해제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무장해제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 삶의 자리에서 바르게 땀 흘리고 수고하며 헌신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모이는 예배는 세상을 향해 흩어지는 예배로 나아갑니다. 몸으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나에게는 축복이요, 주변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워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자신이 생각하는 예배의 정의, 예배자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무장해제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 무엇일지 생각해봅시다.
3. 몸으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먼저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예배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불러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삶의 자리에서 몸으로 예배하며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