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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뒤집기 -야곱 이야기 2-

창세기 25: 21 ~ 26

김지철 목사

2012.07.01

둘째에게는 서러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1등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1등을 하면 누구나 다 신이 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1등은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1등만 당선되고, 2등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2등은 늘 서럽습니다. 때로는 패배감에 휩싸이고, ‘나는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다’는 자조적인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1등이 되려고 안간힘을 써봅니다. 하지만, 1등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둘째의 서러움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 자매 중에 둘째로 태어난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너무 화가 나서 부모님께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합니다. 언니랑 싸우면 “너는 조그마한 것이 왜 까불고 대드냐?”고 야단맞고, 동생과 싸우면 “아니, 넌 언니가 돼서 동생을 그렇게 함부로 야단치고 때리냐?”고 또 꾸중을 받는 것이 섭섭했다는 것입니다.
두 아이를 키운 어머니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녀는 첫째와 둘째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너무나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첫째아이 임신 중에는 카페인 음료를 결코 마시지 않았고, 클래식 음악을 애청했습니다. 그런데 둘째아이 임신 중에는 카페인 음료를 쉽게 마셨고 좋아하는 가요를 즐겨 들었습니다. 첫째아이 때는 매일 한 번 정성껏 목욕탕에 들어가서 체온에 맞게 물 온도를 재어가며 목욕을 시켰는데, 둘째아이 때는 3일에 한 번 목욕을 시켜도 괜찮았습니다. 첫째아이 옷을 살 때는 무조건 새것을 샀지만, 둘째아이 때는 중고를 입혀도 괜찮으려니 생각했습니다. 또 첫째아이 때는 낳자마자부터 10일, 50일, 100일, 200일, 300일, 첫 돌, 이렇게 수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둘째아이 때는 돌이 가까워서야 모처럼 사진을 찍었습니다. 첫째아이는 작은 기침만 해도 병원에 달려갔지만, 둘째아이는 고열이 날 때나 겨우 병원을 찾았습니다. 둘째로 태어난 자의 설움을 실감케 하는 이야기입니다.

형과 동생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합니다.

형과 동생은 친구이자 영원한 경쟁자입니다. 때로는 마치 원수와도 같은 대적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생은 결국 투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러합니다. 부부도 1년, 2년이 지나면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고, 부모와 자녀도 힘겨루기를 합니다. 형제지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형과 동생과의 치열한 투쟁이야기를 곳곳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재물이 받아드려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아무 죄 없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첫 번째 살인자가 됐습니다. 아브라함의 서자였던 이스마엘은 어느 날 동생 이삭을 조롱하다가 이삭의 어머니 사라의 꾸중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형제간의 다툼이 어떠한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형제는 태어나기도 전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다투었습니다. 서로 치고 받고, 발길질을 했습니다. 한 배에서 쌍둥이 형제가 자꾸만 싸우는 것을 어머니 리브가는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투정하듯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세기 25:22)

에서와 야곱의 숙명적인 투쟁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세기 25:23)

하나님은 예정하신 야곱과 에서의 미래를 보여 주십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두 형제의 삶을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우리를 당혹스럽게도 합니다. 이것을 듣고 있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이미 예정된 것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숙명론과 운명론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기독교는 운명론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예정을 말하기에 운명론을 지지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운명론과 숙명론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숙명이라고 여기며 낙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것에 반기를 듭니다. 오히려 신앙은 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고정된 틀 속에 갇혀 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뛰어 넘기를 바라십니다. 참된 신앙이란, 그래서 늘 도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고, 옛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일상성을 뛰어넘고, 억압받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계급사회를 거절합니다. 성별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돈이나 지위가 없는 사람이 멸시당하는 사회를 거부하고 혐오합니다. 하나님은 변화 없는 고정된 사회를 싫어하십니다. 약한 자는 높아지게 하시고, 높은 자는 낮은 자를 감싸 앉고 보호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높은 산은 낮아지고, 깊은 골짜기는 돋우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23절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예정에 대한 교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지입니다. 운명론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불공평의 표지가 아니라 이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다시 묵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말하는 예정이 도대체 뭘까? 하나님께서 왜 여기서 야곱을 이렇게 이야기하셨을까? 왜 에서를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만약 이 말씀이 거꾸로 되었다면 어떨까요? ‘작은 자는 큰 자를 섬길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자들은 가득히 가진 자들을 섬길 것이다. 작은 자는 결코 큰 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평 중에 불공평인 것입니다. 이것은 약육강식하는 세상의 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있는 자들은 더 떵떵거리며 큰 소리를 치고, 없는 자는 머리 둘 곳이 없어서 도망을 치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법칙을 깨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의 논리를 뒤집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 하늘의 영광과 하늘의 존귀를 누리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고 연약한 자리, 가장 비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우리같이 낮고 천한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정된 삶의 자리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틀들을 깨뜨려버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도이고,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예정은 세상을 역전시키기 위한 은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세상의 원리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역전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역전의 사건들을 신문이나 TV에서 크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인생역전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기득권자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입니다. 부자는 더 부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 지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입었습니까?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맺힘이 있었습니까?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왜 이런 분일까 질문해 보신 적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나의 생각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선천적인 것들, 바로 삶의 환경과 조건이 그러합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내가 택하려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가 부자여서 나도 부자가 되고, 내 아버지가 가난해서 나도 가난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 삶에 이미 주어진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기생각과 상관없이 운명처럼 다가온 이러한 것들에 저항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진 것에 그냥 만족하지 않고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나가서 투쟁도 해보지 않았습니까? 왜입니까? 바로 내 마음속에도 야곱과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방법은 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남이 잘나가는 것, 남이 높아지는 것을 끌어내리는 방법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움켜잡았던 야곱의 이름이 ‘움켜잡다’는 뜻인 것도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형이 배고파하는 것을 알고, 그 기회를 타서 팥죽을 만들어주고 대신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로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냥 꽝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첫째가 되기를 원해서 형의 발꿈치를 잡았지만, 그는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장자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 속 그는 계속 차자였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를 장자로 여기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신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까지 받았지만, 오히려 그 순간부터 야곱의 인생에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한 형의 눈을 피해서 집에서 쫓겨나가게 됩니다. 장자권을 받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의 연속이 된 것입니다.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고난의 역사를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내가 그토록 움켜잡으려고 했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을 다 차지하리라 생각했지만 인생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인생에 기회를 주십니다. 무너진 현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막막한 광야에서 외톨이가 된 그에게, ‘네 가정과 네 삶에 축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뒤집기를 열어놓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이고, 긍휼의 표지였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예정을 보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세 전부터 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예정 선택의 핵심가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다시 말해 인생에 역전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같습니까? 에서와 비슷합니까, 아니면 야곱과 비슷합니까? 만약 야곱처럼 별 볼일 없는 자라고 여겨진다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별 볼일 없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자라고 세워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성도인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련한 자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비천한 자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자를 택하셨다. 그래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아무것도 없는 자를 택하심으로 은혜의 사건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하셨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의 특권을 주셨기 때문에, 나 같이 못난 사람을 예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은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가지고 있는 감사고,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이 뒤집기를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야곱이 아니라 에서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가진 자와 누리는 자에게 이 예정은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고 감사함으로 누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시겠다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가질수록 더 겸손한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 축복을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까 겸손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그 축복을 지속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야곱처럼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어질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안달복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지금 하는 일을 즐거워하면 하나님의 뒤집기가 일어날 것입니다.

뒤집기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여러분, 이 땅에는 영원한 약자도 영원한 강자도 없습니다. 영원히 가난한 사람도, 영원히 부자인 사람도 없습니다. 영원히 비천한 자도, 영원히 고귀한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이고, 풍요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버려진 연약하고 소외됐던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복음19: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자입니까? 잃어버린 자입니까? 늘 둘째라는 서러움 속에서 고통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삶을 빨리 포기하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우리 인생에 뒤집기의 은혜를 주시는 것을 기다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그러다보면, 어느 날 내 속에 있었던 설움과 열등감이 사라질 것입니다. 족쇄처럼 메어 ‘너는 둘째다’라고 짓누르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기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 세상에서 받은 모든 차별과 슬픔, 탄식을 뛰어넘는 기쁨과 감사의 노래가 우리의 영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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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 21 ~ 26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둘째에게는 서러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1등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1등을 하면 누구나 다 신이 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1등은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1등만 당선되고, 2등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2등은 늘 서럽습니다. 때로는 패배감에 휩싸이고, ‘나는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다’는 자조적인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1등이 되려고 안간힘을 써봅니다. 하지만, 1등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둘째의 서러움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 자매 중에 둘째로 태어난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너무 화가 나서 부모님께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합니다. 언니랑 싸우면 “너는 조그마한 것이 왜 까불고 대드냐?”고 야단맞고, 동생과 싸우면 “아니, 넌 언니가 돼서 동생을 그렇게 함부로 야단치고 때리냐?”고 또 꾸중을 받는 것이 섭섭했다는 것입니다.
두 아이를 키운 어머니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녀는 첫째와 둘째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너무나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첫째아이 임신 중에는 카페인 음료를 결코 마시지 않았고, 클래식 음악을 애청했습니다. 그런데 둘째아이 임신 중에는 카페인 음료를 쉽게 마셨고 좋아하는 가요를 즐겨 들었습니다. 첫째아이 때는 매일 한 번 정성껏 목욕탕에 들어가서 체온에 맞게 물 온도를 재어가며 목욕을 시켰는데, 둘째아이 때는 3일에 한 번 목욕을 시켜도 괜찮았습니다. 첫째아이 옷을 살 때는 무조건 새것을 샀지만, 둘째아이 때는 중고를 입혀도 괜찮으려니 생각했습니다. 또 첫째아이 때는 낳자마자부터 10일, 50일, 100일, 200일, 300일, 첫 돌, 이렇게 수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둘째아이 때는 돌이 가까워서야 모처럼 사진을 찍었습니다. 첫째아이는 작은 기침만 해도 병원에 달려갔지만, 둘째아이는 고열이 날 때나 겨우 병원을 찾았습니다. 둘째로 태어난 자의 설움을 실감케 하는 이야기입니다.

형과 동생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합니다.

형과 동생은 친구이자 영원한 경쟁자입니다. 때로는 마치 원수와도 같은 대적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생은 결국 투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러합니다. 부부도 1년, 2년이 지나면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고, 부모와 자녀도 힘겨루기를 합니다. 형제지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형과 동생과의 치열한 투쟁이야기를 곳곳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재물이 받아드려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아무 죄 없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첫 번째 살인자가 됐습니다. 아브라함의 서자였던 이스마엘은 어느 날 동생 이삭을 조롱하다가 이삭의 어머니 사라의 꾸중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형제간의 다툼이 어떠한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형제는 태어나기도 전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다투었습니다. 서로 치고 받고, 발길질을 했습니다. 한 배에서 쌍둥이 형제가 자꾸만 싸우는 것을 어머니 리브가는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투정하듯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세기 25:22)

에서와 야곱의 숙명적인 투쟁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세기 25:23)

하나님은 예정하신 야곱과 에서의 미래를 보여 주십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두 형제의 삶을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우리를 당혹스럽게도 합니다. 이것을 듣고 있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이미 예정된 것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숙명론과 운명론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기독교는 운명론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예정을 말하기에 운명론을 지지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운명론과 숙명론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숙명이라고 여기며 낙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것에 반기를 듭니다. 오히려 신앙은 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고정된 틀 속에 갇혀 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뛰어 넘기를 바라십니다. 참된 신앙이란, 그래서 늘 도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고, 옛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일상성을 뛰어넘고, 억압받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계급사회를 거절합니다. 성별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돈이나 지위가 없는 사람이 멸시당하는 사회를 거부하고 혐오합니다. 하나님은 변화 없는 고정된 사회를 싫어하십니다. 약한 자는 높아지게 하시고, 높은 자는 낮은 자를 감싸 앉고 보호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높은 산은 낮아지고, 깊은 골짜기는 돋우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23절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예정에 대한 교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지입니다. 운명론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불공평의 표지가 아니라 이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다시 묵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말하는 예정이 도대체 뭘까? 하나님께서 왜 여기서 야곱을 이렇게 이야기하셨을까? 왜 에서를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만약 이 말씀이 거꾸로 되었다면 어떨까요? ‘작은 자는 큰 자를 섬길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자들은 가득히 가진 자들을 섬길 것이다. 작은 자는 결코 큰 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평 중에 불공평인 것입니다. 이것은 약육강식하는 세상의 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있는 자들은 더 떵떵거리며 큰 소리를 치고, 없는 자는 머리 둘 곳이 없어서 도망을 치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법칙을 깨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의 논리를 뒤집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 하늘의 영광과 하늘의 존귀를 누리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고 연약한 자리, 가장 비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우리같이 낮고 천한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정된 삶의 자리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틀들을 깨뜨려버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도이고,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예정은 세상을 역전시키기 위한 은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세상의 원리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역전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역전의 사건들을 신문이나 TV에서 크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인생역전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기득권자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입니다. 부자는 더 부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 지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입었습니까?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맺힘이 있었습니까?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왜 이런 분일까 질문해 보신 적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나의 생각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선천적인 것들, 바로 삶의 환경과 조건이 그러합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내가 택하려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가 부자여서 나도 부자가 되고, 내 아버지가 가난해서 나도 가난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 삶에 이미 주어진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기생각과 상관없이 운명처럼 다가온 이러한 것들에 저항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진 것에 그냥 만족하지 않고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나가서 투쟁도 해보지 않았습니까? 왜입니까? 바로 내 마음속에도 야곱과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방법은 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남이 잘나가는 것, 남이 높아지는 것을 끌어내리는 방법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움켜잡았던 야곱의 이름이 ‘움켜잡다’는 뜻인 것도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형이 배고파하는 것을 알고, 그 기회를 타서 팥죽을 만들어주고 대신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로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냥 꽝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첫째가 되기를 원해서 형의 발꿈치를 잡았지만, 그는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장자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 속 그는 계속 차자였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를 장자로 여기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신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까지 받았지만, 오히려 그 순간부터 야곱의 인생에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한 형의 눈을 피해서 집에서 쫓겨나가게 됩니다. 장자권을 받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의 연속이 된 것입니다.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고난의 역사를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내가 그토록 움켜잡으려고 했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을 다 차지하리라 생각했지만 인생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인생에 기회를 주십니다. 무너진 현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막막한 광야에서 외톨이가 된 그에게, ‘네 가정과 네 삶에 축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뒤집기를 열어놓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이고, 긍휼의 표지였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예정을 보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세 전부터 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예정 선택의 핵심가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다시 말해 인생에 역전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같습니까? 에서와 비슷합니까, 아니면 야곱과 비슷합니까? 만약 야곱처럼 별 볼일 없는 자라고 여겨진다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별 볼일 없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자라고 세워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성도인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련한 자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비천한 자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자를 택하셨다. 그래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아무것도 없는 자를 택하심으로 은혜의 사건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하셨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의 특권을 주셨기 때문에, 나 같이 못난 사람을 예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은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가지고 있는 감사고,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이 뒤집기를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야곱이 아니라 에서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가진 자와 누리는 자에게 이 예정은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고 감사함으로 누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시겠다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가질수록 더 겸손한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 축복을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까 겸손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그 축복을 지속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야곱처럼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어질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안달복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지금 하는 일을 즐거워하면 하나님의 뒤집기가 일어날 것입니다.

뒤집기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여러분, 이 땅에는 영원한 약자도 영원한 강자도 없습니다. 영원히 가난한 사람도, 영원히 부자인 사람도 없습니다. 영원히 비천한 자도, 영원히 고귀한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이고, 풍요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버려진 연약하고 소외됐던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복음19: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자입니까? 잃어버린 자입니까? 늘 둘째라는 서러움 속에서 고통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삶을 빨리 포기하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우리 인생에 뒤집기의 은혜를 주시는 것을 기다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그러다보면, 어느 날 내 속에 있었던 설움과 열등감이 사라질 것입니다. 족쇄처럼 메어 ‘너는 둘째다’라고 짓누르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기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 세상에서 받은 모든 차별과 슬픔, 탄식을 뛰어넘는 기쁨과 감사의 노래가 우리의 영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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