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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요(못된)나

요나 1: 1 ~ 3

김지철 목사

2016.05.29

신앙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어제 오후 소망교회 대학부를 방문했습니다. 약 300명 정도의 학생들이 함께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에게 토요일은 무척 바쁜 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에 나와서 찬양하고 말씀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젊을 때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말씀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대학부의 임원단 20여 명이 직접 쓴 편지를 선물로 줬습니다. 집에 와서 하나하나 읽어 보니 얼마나 뿌듯하고 설레던지요. 그중에 일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서 새벽 예배에 같이 가자 하면 더 자고 싶어서 무척 가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서 사역 후에 아무리 졸려도 꼭 예배에 참여한답니다. 많이 컸죠?”, “주일 말씀을 들어야 한 주일 버틸 힘이 생기더라고요. 청년 때에 궁금한 점이 참 많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청년 때에 어떻게 사셨습니까? 어떻게 믿음 생활하셨는지 시간 나면 꼭 들려주세요.” 또 한 친구는 자신을 아우성 팀장으로 소개하면서 짧지만 편지를 쓸 수 있어서 무척 좋다고도 했습니다. ‘아우성’이란, ‘아이들과 우리들의 성장이야기’의 줄임말로, 홍제역에 위치한 송죽원 아이들에게 월요일마다 영어를 가르치는 팀이라고 합니다. 예배만 드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면서 기뻐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이란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다가도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에 예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이야기가 신앙입니다.

성경에는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보십니까? 누군가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었다는 것으로는 드라마나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거기에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어야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첫째, 사랑과 미움, 차가움과 따뜻함, 분노와 용서, 선인과 악인, 고난과 극복이 교차하며 생동감 있게 나타나야 사람들은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이나 충돌이 없는 인생에는 이야기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충돌을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갈 때 비로소 인생에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둘째, 추적자와 도망자가 등장해야 합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자베르라는 형사가 얼마나 집요하게 장발장을 찾아냅니까? 장발장이 아무리 변장을 해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립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셋째, 현실을 뛰어넘는 지고지순한 사랑, 초월적 세계의 강력한 간섭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상향을 충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슈퍼맨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영웅이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환호하고, 중년들은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과 헌신을 보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그런 사랑을 다시 꿈꿉니다.
성경은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인간의 갈등과 분노, 투쟁이 정점에 도달한 자리입니다. 산 사람을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못을 박고, 창으로 찔러 죽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건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안에 인생의 모든 다툼이 집약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추적자와 도망자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추적자, 나는 도망자였다가 끊임없이 따라오시는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을 때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반대로 ‘내 인생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십니까? 살아계신다면 내게 보여주세요!’ 하고 내가 추적자처럼 하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고지순한 하나님의 사랑,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가 오늘도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 그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쓰신 이야기, 요셉과 함께 쓰신 이야기, 베드로와 함께 쓰신 이야기를 나와도 함께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싫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요나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제목을 ‘하나님께 반항하는 요나’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요나가 아닙니다. ‘요(못된)나’입니다. 요나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요나가 있습니다.
요나의 이야기에는 갈등과 다툼이 있고, 도망자와 추적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사랑입니다.
요나서를 읽으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왜 도망을 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왜 도망자가 되었을까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 1:2)

하나님의 한마디에 요나는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니느웨 성에 악독이 가득해서 이제 하나님이 심판하려 하신다’는 것을 전하라는 명령이 왜 그를 도망하게 만들었을까요?
요나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위협했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아니,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악하고 못된 나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망하는 것이 마땅하고, 하나님이 주신 특권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만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더 크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이 그 악한 민족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사랑하시려고 하니 그 뜻에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예수 믿고 복 받으면 못 견딜 것 같은 마음 말입니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었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가다가 넘어졌으면 좋겠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다 망했으면 좋겠다.’ 요나와 같은 마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요나는 격렬할 만큼 열정적이고, 때로는 완고하고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꺾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에게 화가 났습니다.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하나님께 대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시게 꼭꼭 숨어야지.’ 결국 불순종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라는 나름대로의 높은 자존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유대인의 예언자지 이방인의 예언자가 아니잖아요. 하나님, 만약 이방인을 위한 예언자가 필요하시다면, 다른 사람을 쓰세요. 저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자로 있을 거예요!’ 하나님에게 대들고 싶은 마음이 그를 도망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3)

‘다시스’는 지중해 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서 먼 곳, 니느웨의 반대방향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말씀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입니다. ‘하나님, 저는 도저히 하나님의 그 말씀을 못 받아들이겠어요.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는 요나의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요나의 고정관념, 편협한 생각, 이데올로기화된 생각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나는 충돌 앞에서 도망갑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 안에도 이러한 일은 매일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압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에 순종하기를 거부합니다. “주일날 반드시 예배드릴게요. 기도도 하고 찬양도 열심히 부를게요.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릴게요. 가끔 제가 필요한 자리가 있으면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봉사도 할게요. 대신 세상에 있을 땐 제 뜻대로 살게요. ‘거룩하게 살라, 남을 위해서 살라’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한마디로 “no touch!”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안에는 요나와 같은 이중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요나는 사실 개인적인 탐욕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애국자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민족은 사랑했지만 이방인에게는 미움과 분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도망간 이유에는 하나님의 사랑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헤퍼요. 그렇게 마구 주시면 버릇이 나빠져요. 하나님, 회초리를 드세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 두시면 안 돼요.” 그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 내 민족에게만 하나님이 자비로우시기를 바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기준으로 야단치시는 하나님이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요나가 가지고 있던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요나서 4장을 보면, 요나가 왜 하나님의 손길에서 도망가려고 애썼는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 4:2)

“하나님은 착하고 자비로우셔서 회개하는 사람을 모두 용서하시잖아요? 그걸 알기 때문에 제가 도망갔던 거라고요.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게 싫었어요.” 요나는 하나님께 저항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더 앞서야 되지 않나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간이 고쳐지던가요? 안 고쳐지잖아요. 하나님이 악한 사람을 심판하셔야 인간이 정신을 차려요. 그러니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만 붙들고 계세요. 우리는 괜찮은 사람들이니까요.’
요나의 ‘요 못된 나’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한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쁩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저항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복음이 축복이고,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늘의 기쁨과 축복을 경험하는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좋아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저 사람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종종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심보가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도 김정은을 위해서는 기도가 안 됩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비교적 많이 극복되었는데, 60이 넘고 70이 넘은 분들은 일본을 생각하면 분노가 일어서 일본을 위한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더 큰 자아를 향해 가치관을 넓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밴댕이소갈딱지’ 같은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십시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 미움이 생기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나만 괜찮은 존재이고 우리 가문만 소중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사랑하되 지역감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 나라를 사랑하되 국수주의자나 민족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정치성향과 다르다고 해서 진보를, 혹은 보수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꿈꿔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고, 갈등을 해결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의 가치관과 우선권을 확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더 큰 자아를 가져야 합니다. 즉, ‘나’에서 ‘가정’으로, ‘지역공동체’와 ‘민족공동체’로, ‘교회’와 ‘하나님’으로 나의 가치관과 판단 능력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사랑하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 일기를 쓰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제가 제 가정과 직장에서의 삶 속에서 주님과 더불어 인생 스토리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 스토리가 ‘히스토리’(history)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차를 운전할 때나 시장에 갈 때나 직장에서 일할 때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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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 1 ~ 3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신앙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어제 오후 소망교회 대학부를 방문했습니다. 약 300명 정도의 학생들이 함께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에게 토요일은 무척 바쁜 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에 나와서 찬양하고 말씀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젊을 때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말씀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대학부의 임원단 20여 명이 직접 쓴 편지를 선물로 줬습니다. 집에 와서 하나하나 읽어 보니 얼마나 뿌듯하고 설레던지요. 그중에 일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서 새벽 예배에 같이 가자 하면 더 자고 싶어서 무척 가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서 사역 후에 아무리 졸려도 꼭 예배에 참여한답니다. 많이 컸죠?”, “주일 말씀을 들어야 한 주일 버틸 힘이 생기더라고요. 청년 때에 궁금한 점이 참 많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청년 때에 어떻게 사셨습니까? 어떻게 믿음 생활하셨는지 시간 나면 꼭 들려주세요.” 또 한 친구는 자신을 아우성 팀장으로 소개하면서 짧지만 편지를 쓸 수 있어서 무척 좋다고도 했습니다. ‘아우성’이란, ‘아이들과 우리들의 성장이야기’의 줄임말로, 홍제역에 위치한 송죽원 아이들에게 월요일마다 영어를 가르치는 팀이라고 합니다. 예배만 드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자신들이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면서 기뻐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이란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다가도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에 예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이야기가 신앙입니다.

성경에는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보십니까? 누군가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었다는 것으로는 드라마나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거기에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어야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첫째, 사랑과 미움, 차가움과 따뜻함, 분노와 용서, 선인과 악인, 고난과 극복이 교차하며 생동감 있게 나타나야 사람들은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이나 충돌이 없는 인생에는 이야기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충돌을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갈 때 비로소 인생에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둘째, 추적자와 도망자가 등장해야 합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자베르라는 형사가 얼마나 집요하게 장발장을 찾아냅니까? 장발장이 아무리 변장을 해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립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셋째, 현실을 뛰어넘는 지고지순한 사랑, 초월적 세계의 강력한 간섭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상향을 충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슈퍼맨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영웅이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환호하고, 중년들은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과 헌신을 보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그런 사랑을 다시 꿈꿉니다.
성경은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인간의 갈등과 분노, 투쟁이 정점에 도달한 자리입니다. 산 사람을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못을 박고, 창으로 찔러 죽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건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안에 인생의 모든 다툼이 집약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추적자와 도망자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추적자, 나는 도망자였다가 끊임없이 따라오시는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을 때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반대로 ‘내 인생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십니까? 살아계신다면 내게 보여주세요!’ 하고 내가 추적자처럼 하나님을 따라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고지순한 하나님의 사랑,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가 오늘도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 그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쓰신 이야기, 요셉과 함께 쓰신 이야기, 베드로와 함께 쓰신 이야기를 나와도 함께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싫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요나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제목을 ‘하나님께 반항하는 요나’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요나가 아닙니다. ‘요(못된)나’입니다. 요나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요나가 있습니다.
요나의 이야기에는 갈등과 다툼이 있고, 도망자와 추적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한 사랑입니다.
요나서를 읽으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왜 도망을 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왜 도망자가 되었을까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 1:2)

하나님의 한마디에 요나는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니느웨 성에 악독이 가득해서 이제 하나님이 심판하려 하신다’는 것을 전하라는 명령이 왜 그를 도망하게 만들었을까요?
요나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위협했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아니,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악하고 못된 나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망하는 것이 마땅하고, 하나님이 주신 특권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만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더 크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이 그 악한 민족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사랑하시려고 하니 그 뜻에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예수 믿고 복 받으면 못 견딜 것 같은 마음 말입니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었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가다가 넘어졌으면 좋겠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다 망했으면 좋겠다.’ 요나와 같은 마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요나는 격렬할 만큼 열정적이고, 때로는 완고하고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꺾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에게 화가 났습니다.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하나님께 대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시게 꼭꼭 숨어야지.’ 결국 불순종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라는 나름대로의 높은 자존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유대인의 예언자지 이방인의 예언자가 아니잖아요. 하나님, 만약 이방인을 위한 예언자가 필요하시다면, 다른 사람을 쓰세요. 저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자로 있을 거예요!’ 하나님에게 대들고 싶은 마음이 그를 도망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3)

‘다시스’는 지중해 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서 먼 곳, 니느웨의 반대방향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말씀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입니다. ‘하나님, 저는 도저히 하나님의 그 말씀을 못 받아들이겠어요.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는 요나의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요나의 고정관념, 편협한 생각, 이데올로기화된 생각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나는 충돌 앞에서 도망갑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 안에도 이러한 일은 매일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압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뜻에 순종하기를 거부합니다. “주일날 반드시 예배드릴게요. 기도도 하고 찬양도 열심히 부를게요.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릴게요. 가끔 제가 필요한 자리가 있으면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봉사도 할게요. 대신 세상에 있을 땐 제 뜻대로 살게요. ‘거룩하게 살라, 남을 위해서 살라’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한마디로 “no touch!”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안에는 요나와 같은 이중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요나는 사실 개인적인 탐욕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애국자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민족은 사랑했지만 이방인에게는 미움과 분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도망간 이유에는 하나님의 사랑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헤퍼요. 그렇게 마구 주시면 버릇이 나빠져요. 하나님, 회초리를 드세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 두시면 안 돼요.” 그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 내 민족에게만 하나님이 자비로우시기를 바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기준으로 야단치시는 하나님이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요나가 가지고 있던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요나서 4장을 보면, 요나가 왜 하나님의 손길에서 도망가려고 애썼는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 4:2)

“하나님은 착하고 자비로우셔서 회개하는 사람을 모두 용서하시잖아요? 그걸 알기 때문에 제가 도망갔던 거라고요.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게 싫었어요.” 요나는 하나님께 저항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더 앞서야 되지 않나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간이 고쳐지던가요? 안 고쳐지잖아요. 하나님이 악한 사람을 심판하셔야 인간이 정신을 차려요. 그러니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만 붙들고 계세요. 우리는 괜찮은 사람들이니까요.’
요나의 ‘요 못된 나’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한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쁩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저항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복음이 축복이고,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늘의 기쁨과 축복을 경험하는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좋아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저 사람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종종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심보가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도 김정은을 위해서는 기도가 안 됩니다. 일본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비교적 많이 극복되었는데, 60이 넘고 70이 넘은 분들은 일본을 생각하면 분노가 일어서 일본을 위한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더 큰 자아를 향해 가치관을 넓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밴댕이소갈딱지’ 같은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십시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 미움이 생기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나만 괜찮은 존재이고 우리 가문만 소중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사랑하되 지역감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 나라를 사랑하되 국수주의자나 민족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정치성향과 다르다고 해서 진보를, 혹은 보수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꿈꿔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고, 갈등을 해결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의 가치관과 우선권을 확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더 큰 자아를 가져야 합니다. 즉, ‘나’에서 ‘가정’으로, ‘지역공동체’와 ‘민족공동체’로, ‘교회’와 ‘하나님’으로 나의 가치관과 판단 능력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사랑하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 일기를 쓰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제가 제 가정과 직장에서의 삶 속에서 주님과 더불어 인생 스토리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 스토리가 ‘히스토리’(history)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차를 운전할 때나 시장에 갈 때나 직장에서 일할 때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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