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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신문, TV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가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총리 후보가 된 사람이 언젠가 교회에서 강연한 말이 많은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일별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눈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일반 역사 서술에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 특별히 일본제국의 침략과 통치, 6.25 전쟁, 민족 분단 등 민족사의 비극적인 경험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사적 인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빗발쳤습니다. 패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든 역사관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부정직과 게으름 등을 백성의 체혈에 담긴 DNA로 표현한 것도 역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비판을 넘은 비난의 언어들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두 개의 단어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특별히 야당 정치인들과 각 언론 매체들에 의해서 그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몇 가지 금기시 되는 언어가 있습니다.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할 때 사용하는 수구꼴통과 종북좌파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등장한 언어는 이것보다 더 모욕적인 의미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분노하는 말, 바로 ‘반민족적’이라는 것과 ‘친일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대한민국 땅에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글로벌을 외치며 세계적인 삶의 모습을 이야기하면서도 이 땅에 숨 쉴 공간조차 마련해 주지 않는 단어가 바로 저 두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을 비난할 때 반민족적이다, 친일적이다라고 쉽게 매도할 수 있는 것인가.’ 저는 TV를 통해 그 두 단어를 들으면서 도대체 그가 무슨 강연을 했기에 그런가 싶어 강연의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강연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몇 단어를 아주 확대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적인 여론재판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분명히 보수적인 우파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과 미국을 정치·경제의 전형으로 과도하게 예찬하고 있는 것,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측면을 DN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결정론적으로 민족성으로 본 것 등은 비판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한 사람에 대한 정치적인 호불호를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총리가 될 만한 인물인가 아닌가는 앞으로 국회 청문회나 정치적인 현장에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는 요즘이기에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말에 대해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져 나누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몇 가지 각도에서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개인적인 차원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나의 하루에 일어난 사건들을 되돌아보면서, 그리고 내 꿈과 비전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와 민족 단위의 집단, 아니 나아가서 세계 역사를 풀어 쓸 때에도 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일반 역사를 서술하는 세상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는 신앙적인 자기고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증거와 서술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대성인 중 한 분으로 생각하는 세상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여기에서 한 번 더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똑같은 고백 안에 한마디를 더 집어넣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발뺌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라고? 너를 위하여 죽었을지는 모르지만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이것은 역사적 판단을 넘어선 신앙적 체험입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뛰어넘는 고백입니다. 정신적 판단이고 영적세계에 대한 판단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바꿔 표현하면 계시적인 판단,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에 개입하고 침입했다는 판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경륜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비극들, 일본제국의 침략, 6.25전쟁의 참화, 그리고 최근 경험한 비극적인 사건들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두 달 전에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쓰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것을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언어를 정제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심판과 구원이 공존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자유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하나님의 뜻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애통함, 탄식, 고통과 아픔을 함께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곳에 인간들의 죄악이 있습니다. 불의가 있습니다. 거짓과 탐욕, 게으름과 무책임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민족적인 죄악도 함께 있습니다. 지도자의 악, 백성들의 불순종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것이 심판의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특별히 열왕기와 역대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떠난 인간들의 죄악에 대한 지적입니다. 악은 악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우리 마음을 무겁고 아프게 합니다. 거기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어른들의 죄악이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죄악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한 우리의 죄악이 그 안에 있습니다. 힘 있는 자들, 가진 자들의 죄악도 있습니다. 종교를 빙자한 종교인들의 탐욕도 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지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로 그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통과 아픔들 속에 담겨진 악들을 바르게 보지 않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그 자리에 참여하고 계신지를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끊임없는 외침 다음에 구원과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이 있습니다. 역사가 몰락할 때, 비참함 속에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들이 깨질 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역사의 반전을 일으키십니다. 여기에는 지도자의 헌신과 충성이 있고, 백성들의 협력과 순종이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할지를 몰라 신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과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과 해방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모세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세우시고, 백성들을 위해 전심전력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함께 협력하고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성과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신약에서 이런 예를 살펴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란 굴욕적인 사건입니다. 비참함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최악의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너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지 못해서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너희의 죄악이다. 너희의 무지다. 너희의 부끄러움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능력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이고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역사인식에 대한 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죄악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이 친히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인간의 죄악이 면제되었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빌라도,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의 죄가 면죄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만드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코 악 자체가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사를 되돌아보아도, 일본의 침략은 일본의 야욕이 일으킨 죄악인 것이 분명합니다. 6.25전쟁 안에도 공산주의자들의 만행과 잔인함이라는 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이 백성을 사랑하셨고,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섭리, 하나님의 경륜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세 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짓 선지자와 진정한 선지자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고 다투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시드기야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권력 앞에 아부하고, 권력에 밀착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아합 왕에게 아부하면서 “당신이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지자였던 미가야는 “당신이 전쟁터에 나가면 싸움에도 지고 목숨도 잃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때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꾸짖습니다. “야, 너는 왜 왕의 마음을 편안하게 못 하느냐? 왜 왕에게 긍정적인 예언을 하지 못하느냐?”
시드기야는 왕에게 아부하면서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왕의 권력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습니다. 누구의 예언이 맞았을까요? 아합 왕은 전쟁터에 나가서 죽게 됩니다. 미가야의 예언이 맞은 것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 예언이 진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지자들끼리 다투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먼저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권력에 아첨하거나 아부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항상 세상을 뛰어넘을 준비를 해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앞에 형용사가 세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이 세 가지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까?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이 안에 담겨 있을까?’ 그저 ‘하나님의 뜻이다!’하며 멈춰서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들어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지를 생각하며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현재와 미래를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는 이것들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니 이것이 진실한지,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시니 이것이 자유를 향해 있는지,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분이시니 이 일이 해방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지, 성경에 나타나듯 가난한 과부와 고아의 하나님이 나를 통해 생명과 치유,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시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억압하고 조정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내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를 바르게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나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때 늘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의 역사가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가?’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에는 다시 한 번 검토해야 합니다. 못된 인간이었다가 어느 날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맞아. 내가 그때 못됐었지.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셨구나. 내게 예수님을 믿는 축복을 주셨구나. 그 못된 모습 속에서도 나를 여기까지 지켜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그렇게 깨달으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 못된 짓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되고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할 때, 그 속에 나타난 나 자신과 공동체의 죄악을 깊이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었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주님의 파트너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왜 구원파를 우리가 비판합니까? 한 번 하나님께 구원받으면 그 다음에는 너무 쉽게 죄에 대한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값싼 종교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한국 교회에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값싼 은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못된 짓을 하고서도 하나님 앞에 잠깐 기도하면 다 용서받는다고 착각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면서도 교만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뒤틀리고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동참할 믿음의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파트너가 필요하십니다. 하나님을 대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제가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가정에, 직장에, 이 사회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만지고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이 시대의 악을 제거하고, 이 시대에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곧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고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여야 하나님께서 다시 이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그래야 난파당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한국 교회와 이 기독교를 다시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이 뜻을 바르게 가슴에 되새기면서 ‘주님, 나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옵소서’ 기도하며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22: 24 ~ 28
24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25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26
이스라엘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28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최근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신문, TV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가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총리 후보가 된 사람이 언젠가 교회에서 강연한 말이 많은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일별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눈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일반 역사 서술에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 특별히 일본제국의 침략과 통치, 6.25 전쟁, 민족 분단 등 민족사의 비극적인 경험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사적 인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빗발쳤습니다. 패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든 역사관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부정직과 게으름 등을 백성의 체혈에 담긴 DNA로 표현한 것도 역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비판을 넘은 비난의 언어들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두 개의 단어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특별히 야당 정치인들과 각 언론 매체들에 의해서 그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몇 가지 금기시 되는 언어가 있습니다.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할 때 사용하는 수구꼴통과 종북좌파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등장한 언어는 이것보다 더 모욕적인 의미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분노하는 말, 바로 ‘반민족적’이라는 것과 ‘친일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대한민국 땅에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글로벌을 외치며 세계적인 삶의 모습을 이야기하면서도 이 땅에 숨 쉴 공간조차 마련해 주지 않는 단어가 바로 저 두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을 비난할 때 반민족적이다, 친일적이다라고 쉽게 매도할 수 있는 것인가.’ 저는 TV를 통해 그 두 단어를 들으면서 도대체 그가 무슨 강연을 했기에 그런가 싶어 강연의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강연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몇 단어를 아주 확대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적인 여론재판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분명히 보수적인 우파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과 미국을 정치·경제의 전형으로 과도하게 예찬하고 있는 것,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측면을 DN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결정론적으로 민족성으로 본 것 등은 비판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한 사람에 대한 정치적인 호불호를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총리가 될 만한 인물인가 아닌가는 앞으로 국회 청문회나 정치적인 현장에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는 요즘이기에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말에 대해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져 나누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몇 가지 각도에서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개인적인 차원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나의 하루에 일어난 사건들을 되돌아보면서, 그리고 내 꿈과 비전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와 민족 단위의 집단, 아니 나아가서 세계 역사를 풀어 쓸 때에도 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일반 역사를 서술하는 세상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는 신앙적인 자기고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증거와 서술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대성인 중 한 분으로 생각하는 세상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여기에서 한 번 더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똑같은 고백 안에 한마디를 더 집어넣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발뺌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라고? 너를 위하여 죽었을지는 모르지만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이것은 역사적 판단을 넘어선 신앙적 체험입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뛰어넘는 고백입니다. 정신적 판단이고 영적세계에 대한 판단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바꿔 표현하면 계시적인 판단,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에 개입하고 침입했다는 판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경륜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비극들, 일본제국의 침략, 6.25전쟁의 참화, 그리고 최근 경험한 비극적인 사건들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두 달 전에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쓰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것을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언어를 정제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심판과 구원이 공존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자유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하나님의 뜻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애통함, 탄식, 고통과 아픔을 함께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곳에 인간들의 죄악이 있습니다. 불의가 있습니다. 거짓과 탐욕, 게으름과 무책임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민족적인 죄악도 함께 있습니다. 지도자의 악, 백성들의 불순종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것이 심판의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특별히 열왕기와 역대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떠난 인간들의 죄악에 대한 지적입니다. 악은 악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우리 마음을 무겁고 아프게 합니다. 거기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어른들의 죄악이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죄악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한 우리의 죄악이 그 안에 있습니다. 힘 있는 자들, 가진 자들의 죄악도 있습니다. 종교를 빙자한 종교인들의 탐욕도 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지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로 그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통과 아픔들 속에 담겨진 악들을 바르게 보지 않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그 자리에 참여하고 계신지를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끊임없는 외침 다음에 구원과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이 있습니다. 역사가 몰락할 때, 비참함 속에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들이 깨질 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역사의 반전을 일으키십니다. 여기에는 지도자의 헌신과 충성이 있고, 백성들의 협력과 순종이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할지를 몰라 신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과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과 해방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모세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세우시고, 백성들을 위해 전심전력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함께 협력하고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성과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신약에서 이런 예를 살펴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란 굴욕적인 사건입니다. 비참함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최악의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너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지 못해서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너희의 죄악이다. 너희의 무지다. 너희의 부끄러움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능력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이고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역사인식에 대한 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죄악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이 친히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인간의 죄악이 면제되었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빌라도,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의 죄가 면죄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만드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코 악 자체가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사를 되돌아보아도, 일본의 침략은 일본의 야욕이 일으킨 죄악인 것이 분명합니다. 6.25전쟁 안에도 공산주의자들의 만행과 잔인함이라는 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이 백성을 사랑하셨고,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섭리, 하나님의 경륜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세 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짓 선지자와 진정한 선지자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고 다투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시드기야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권력 앞에 아부하고, 권력에 밀착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아합 왕에게 아부하면서 “당신이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지자였던 미가야는 “당신이 전쟁터에 나가면 싸움에도 지고 목숨도 잃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때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꾸짖습니다. “야, 너는 왜 왕의 마음을 편안하게 못 하느냐? 왜 왕에게 긍정적인 예언을 하지 못하느냐?”
시드기야는 왕에게 아부하면서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왕의 권력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습니다. 누구의 예언이 맞았을까요? 아합 왕은 전쟁터에 나가서 죽게 됩니다. 미가야의 예언이 맞은 것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 예언이 진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지자들끼리 다투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먼저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권력에 아첨하거나 아부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항상 세상을 뛰어넘을 준비를 해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앞에 형용사가 세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이 세 가지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까?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이 안에 담겨 있을까?’ 그저 ‘하나님의 뜻이다!’하며 멈춰서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들어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지를 생각하며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현재와 미래를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는 이것들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니 이것이 진실한지,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시니 이것이 자유를 향해 있는지,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분이시니 이 일이 해방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지, 성경에 나타나듯 가난한 과부와 고아의 하나님이 나를 통해 생명과 치유,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시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억압하고 조정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내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를 바르게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나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때 늘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의 역사가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가?’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에는 다시 한 번 검토해야 합니다. 못된 인간이었다가 어느 날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맞아. 내가 그때 못됐었지.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셨구나. 내게 예수님을 믿는 축복을 주셨구나. 그 못된 모습 속에서도 나를 여기까지 지켜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그렇게 깨달으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 못된 짓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되고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할 때, 그 속에 나타난 나 자신과 공동체의 죄악을 깊이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었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주님의 파트너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왜 구원파를 우리가 비판합니까? 한 번 하나님께 구원받으면 그 다음에는 너무 쉽게 죄에 대한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값싼 종교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한국 교회에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값싼 은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못된 짓을 하고서도 하나님 앞에 잠깐 기도하면 다 용서받는다고 착각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면서도 교만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뒤틀리고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동참할 믿음의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파트너가 필요하십니다. 하나님을 대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제가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가정에, 직장에, 이 사회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만지고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이 시대의 악을 제거하고, 이 시대에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곧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고 하나님의 파트너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여야 하나님께서 다시 이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그래야 난파당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한국 교회와 이 기독교를 다시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이 뜻을 바르게 가슴에 되새기면서 ‘주님, 나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옵소서’ 기도하며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