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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건을 일으키는 순종

열왕기하 5: 8 ~ 14

김지철 목사

2010.10.10

사람은 외모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어느 한 방송매체가 심리학자와 더불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 실험을 했습니다. 30대 초반의 남자 청년을 명동의 화려한 쇼윈도에 마네킹처럼 서있게 했습니다. 옷은 보통 청년들이 입는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이 청년을 10초 동안 바라본 후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연봉은 얼마쯤 될 것 같은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청년의 연봉이 대략 1,000만원~3,000만원 정도 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막노동하는 사람일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청년이 남성으로서의 매력지수가 얼마나 됩니까? 점수는 3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보통 1~2점을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0점까지 나왔습니다. 또 질문을 했습니다. 이 청년이 다가와서 데이트를 신청한다면 응해주겠습니까?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니오. 싫습니다. 저런 남성이 데이트를 신청을 하면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날 똑같은 청년이 이번에는 멋진 신사복을 차려입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단장한 채로 서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 청년의 연봉과 직업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사람 직업은 변호사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의사일 것 같네요.” “저 사람은 아주 지성적으로 생겼는데요?” “연봉은 한 1억이 넘지 않을까요?” “부유한 집안의 아들같이 보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청년의 남성으로서의 매력지수가 10점 만점에 몇 점이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7점, 8점, 9점, 만점까지 나왔습니다. 이 청년이 당신에게 데이트신청을 한다면 받아주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여성들이 저런 남성 같으면 데이트 신청에 응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여성에게 심리테스트를 따로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성을 보는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외모는 잘 안봅니다. 외모는 어떻게 생겨도 괜찮습니다. 저는 성격이 중요하고 성품만 좋으면 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여자들은 알게 모르게 남성의 외모를 깊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를 경험할 때 선입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대화 한번 해보지 않고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평가하게 합니다. 또한 선입견은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입관을 통해 고통과 상처를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선입관이 외모에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선입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조차도 선입관으로 이해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나를 맞추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게 맞추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맞춤하나님’을 강요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진짜 하나님인 것입니다. 때로는 가끔 필요할 때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기를 요청합니다. 때로는 돈을 벌고 출세하는 요술방망이로 하나님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충격을 받아야만 깨집니다. 내 편견 속에 갇힌 하나님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 앞에 무릎을 끊고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선입관과 편견을 가지기 시작하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 바뀌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 잘난 것들, 내가 뽐냈던 모든 것들이 땅바닥까지 바닥을 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은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고통을 주시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때로 인간관계 속에서 처절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가족으로부터, 어떤 때는 직장으로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제야 우리는 앞만 보다가 하늘을 향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나아만은 위기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소망교회에는 한국사회 각 분야의 최고 지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아마도 이 분들은 이미 그들의 삶속에서 수많은 고난의 과정을 어떤 형태로든지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나아만이라는 아람왕의 군대 장관이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자였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에 가장 강력한 적대국 중에 하나였으며, 당시에는 이스라엘보다 더 큰 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람 왕에게 크고 존귀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던 사람이 나아만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큰 용사, 용감한 전사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드시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의 명령으로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만들 수 있었던 권력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그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권력도, 재물도, 힘도, 명예도 있었으나 육체적인 질병이 그것도 나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치욕적이고 부끄럽고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마음이 열리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가 갖고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선입관,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선입관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도 아킬레스건 같은 취약점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호인이고 베푸는 사람이고 넉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약점을 딱 건드리면 깜짝 놀라고 분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킬레스건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성격과 성품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킬레스건을 경험하면서 ‘아!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구나.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시구나. 내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가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깨닫는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아만도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질병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사람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반성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는 나아만이 그의 아내의 몸종인 이스라엘 소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아만이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노획물로 데려왔던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자기 아내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열왕기하 5:3)

그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나아만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어린 소녀는 부모를 잃고 이곳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몸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말 한마디가 나아만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 완벽한 간증과 전도를 못하더라도 주위의 아는 사람들에게 함께 교회가자고 말씀해보십시오. 함께 예배를 드려보자고, 함께 봉사 한번 해보자고, 선교여행을 가보자고 말씀해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누군가로부터 들을 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들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는 것도 들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가 사랑의 역사를 일으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나아만 장군은 어린소녀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는 큰 병거와 말들을 타고서 엘리사의 집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십시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열왕기하 5:9)

나아만은 아주 화려하게 치장하고 가서 권세 있게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어떻게 맞이했을까요? 엘리사는 나아만을 냉대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처럼 대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왜 엘리사가 나아만을 냉대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열왕기하 5:10)

엘리사는 직접 나가서 나아만을 영접하지 않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냥 명령만 하고 그대로 따르라고 요청했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여기에는 엘리사의 중요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오래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그것이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면 즉각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 생각이 비윤리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버려야겠지만, 그 생각이 비윤리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가까이 다가온다고 느껴지면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도 즉각적으로 말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일곱 번 강물에 들어가서 몸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똑같은 것을 일곱 번 반복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참고 인내하면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는 나아만이 가진 문제점을 부수기 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나아만이 가지고 있던 교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줄 알고 나를 이렇게 대접하는가? 내가 오면 선지자라 하더라도 내 앞에 와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야지!’ 엘리사는 나아만이 가지고 있던 교만을 물리치기 원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나와 주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이런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인데 교회에서 날 알아주지 않는가? 세상에 나가면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데, 나를 이렇게 보통사람처럼 대우하는가?’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세상에서 갖고 있는 재물, 명예, 권력을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내가 연약한 사람입니다.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면서 나아오는 것이 믿음이요 예배요 신앙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5:11)

나아만은 화가 잔뜩 났습니다. ‘나를 이렇게 대우하다니! 내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데! 당연히 내 앞에 나와야지! 그래서 내 상처를 만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이 질병을 고쳐야지!’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주술적인 방식대로 고쳐주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선입관을 충족시켜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것을 거절하고 오직 일곱 번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따라오기를 요청합니다. 그랬더니 나아만은 다시 불만을 터트립니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열왕기하 5:12)

나아만은 또 다시 분노해서 떠나려고 작정했습니다. “아니, 나보고 이 혼탁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다니! 그렇다면 내 고향에 있는 강이 훨씬 좋고 아름답지! 내가 씻는다면 그곳에 가서 몸을 씻지 기껏해야 이 요단강에서 씻을까!” 라면서 그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말합니다. “너의 방식대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갖고 있는 생각대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자랑하는 장관의 자격으로 네가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읽고 듣는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 말씀대로 한번 시도하고 도전해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위 똑똑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항상 하지 말아야 할 똑똑한 이유들을 갖다 들이댄다. 그러나 그러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안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유만 수없이 머릿속에서 되 뇌이다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놓쳤고, 얼마나 귀한 시간을 놓쳤습니까? 시작과 결단을 미루고 행동을 미룬 채, 온갖 종류의 구실을 찾아내면서 움직이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입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열왕기하 5:13)

나아만은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 옆에는 지혜로운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그 종들이 말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당신에게 더 크고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도 당신은 분명히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간단하다고, 너무 단순하다고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선입관과 편견, 교만을 다 내려놓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나아만이 깨닫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내속에 간직하고 있었구나! 내 뜻대로만 모든 것을 이루려고 했구나! 나의 교만과 선입관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구나!’ 그 순간 나아만은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1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아만은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선입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순종을 방해하는 선입관, 교만, 잘못된 생각들, 편견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게 맞추려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능력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교만입니까? 이기적인 욕심입니까? 지금까지 몇 십 년 동안 해왔던 신앙의 패턴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모든 것들을 부숴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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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5: 8 ~ 14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사람은 외모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어느 한 방송매체가 심리학자와 더불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 실험을 했습니다. 30대 초반의 남자 청년을 명동의 화려한 쇼윈도에 마네킹처럼 서있게 했습니다. 옷은 보통 청년들이 입는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이 청년을 10초 동안 바라본 후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연봉은 얼마쯤 될 것 같은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청년의 연봉이 대략 1,000만원~3,000만원 정도 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막노동하는 사람일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청년이 남성으로서의 매력지수가 얼마나 됩니까? 점수는 3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보통 1~2점을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0점까지 나왔습니다. 또 질문을 했습니다. 이 청년이 다가와서 데이트를 신청한다면 응해주겠습니까?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니오. 싫습니다. 저런 남성이 데이트를 신청을 하면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날 똑같은 청년이 이번에는 멋진 신사복을 차려입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단장한 채로 서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 청년의 연봉과 직업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사람 직업은 변호사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의사일 것 같네요.” “저 사람은 아주 지성적으로 생겼는데요?” “연봉은 한 1억이 넘지 않을까요?” “부유한 집안의 아들같이 보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청년의 남성으로서의 매력지수가 10점 만점에 몇 점이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7점, 8점, 9점, 만점까지 나왔습니다. 이 청년이 당신에게 데이트신청을 한다면 받아주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여성들이 저런 남성 같으면 데이트 신청에 응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여성에게 심리테스트를 따로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성을 보는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외모는 잘 안봅니다. 외모는 어떻게 생겨도 괜찮습니다. 저는 성격이 중요하고 성품만 좋으면 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여자들은 알게 모르게 남성의 외모를 깊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를 경험할 때 선입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대화 한번 해보지 않고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평가하게 합니다. 또한 선입견은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의 문제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입관을 통해 고통과 상처를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선입관이 외모에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선입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조차도 선입관으로 이해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나를 맞추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게 맞추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맞춤하나님’을 강요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진짜 하나님인 것입니다. 때로는 가끔 필요할 때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기를 요청합니다. 때로는 돈을 벌고 출세하는 요술방망이로 하나님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충격을 받아야만 깨집니다. 내 편견 속에 갇힌 하나님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 앞에 무릎을 끊고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선입관과 편견을 가지기 시작하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 바뀌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 잘난 것들, 내가 뽐냈던 모든 것들이 땅바닥까지 바닥을 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은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고통을 주시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때로 인간관계 속에서 처절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가족으로부터, 어떤 때는 직장으로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제야 우리는 앞만 보다가 하늘을 향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나아만은 위기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소망교회에는 한국사회 각 분야의 최고 지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아마도 이 분들은 이미 그들의 삶속에서 수많은 고난의 과정을 어떤 형태로든지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나아만이라는 아람왕의 군대 장관이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자였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에 가장 강력한 적대국 중에 하나였으며, 당시에는 이스라엘보다 더 큰 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람 왕에게 크고 존귀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던 사람이 나아만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큰 용사, 용감한 전사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드시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의 명령으로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만들 수 있었던 권력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그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권력도, 재물도, 힘도, 명예도 있었으나 육체적인 질병이 그것도 나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치욕적이고 부끄럽고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마음이 열리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가 갖고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선입관,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선입관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도 아킬레스건 같은 취약점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호인이고 베푸는 사람이고 넉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약점을 딱 건드리면 깜짝 놀라고 분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킬레스건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성격과 성품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킬레스건을 경험하면서 ‘아!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구나.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시구나. 내 인생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가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깨닫는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아만도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질병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사람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반성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는 나아만이 그의 아내의 몸종인 이스라엘 소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아만이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노획물로 데려왔던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자기 아내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열왕기하 5:3)

그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나아만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어린 소녀는 부모를 잃고 이곳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몸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말 한마디가 나아만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 완벽한 간증과 전도를 못하더라도 주위의 아는 사람들에게 함께 교회가자고 말씀해보십시오. 함께 예배를 드려보자고, 함께 봉사 한번 해보자고, 선교여행을 가보자고 말씀해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누군가로부터 들을 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들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는 것도 들으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가 사랑의 역사를 일으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나아만 장군은 어린소녀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는 큰 병거와 말들을 타고서 엘리사의 집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십시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열왕기하 5:9)

나아만은 아주 화려하게 치장하고 가서 권세 있게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어떻게 맞이했을까요? 엘리사는 나아만을 냉대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처럼 대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왜 엘리사가 나아만을 냉대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열왕기하 5:10)

엘리사는 직접 나가서 나아만을 영접하지 않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냥 명령만 하고 그대로 따르라고 요청했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여기에는 엘리사의 중요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오래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그것이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면 즉각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 생각이 비윤리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버려야겠지만, 그 생각이 비윤리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가까이 다가온다고 느껴지면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도 즉각적으로 말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일곱 번 강물에 들어가서 몸을 씻으라고 말합니다.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똑같은 것을 일곱 번 반복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참고 인내하면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는 나아만이 가진 문제점을 부수기 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나아만이 가지고 있던 교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줄 알고 나를 이렇게 대접하는가? 내가 오면 선지자라 하더라도 내 앞에 와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야지!’ 엘리사는 나아만이 가지고 있던 교만을 물리치기 원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나와 주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이런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인데 교회에서 날 알아주지 않는가? 세상에 나가면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데, 나를 이렇게 보통사람처럼 대우하는가?’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세상에서 갖고 있는 재물, 명예, 권력을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내가 연약한 사람입니다.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면서 나아오는 것이 믿음이요 예배요 신앙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5:11)

나아만은 화가 잔뜩 났습니다. ‘나를 이렇게 대우하다니! 내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데! 당연히 내 앞에 나와야지! 그래서 내 상처를 만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이 질병을 고쳐야지!’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주술적인 방식대로 고쳐주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선입관을 충족시켜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것을 거절하고 오직 일곱 번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따라오기를 요청합니다. 그랬더니 나아만은 다시 불만을 터트립니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열왕기하 5:12)

나아만은 또 다시 분노해서 떠나려고 작정했습니다. “아니, 나보고 이 혼탁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다니! 그렇다면 내 고향에 있는 강이 훨씬 좋고 아름답지! 내가 씻는다면 그곳에 가서 몸을 씻지 기껏해야 이 요단강에서 씻을까!” 라면서 그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말합니다. “너의 방식대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갖고 있는 생각대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자랑하는 장관의 자격으로 네가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읽고 듣는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 말씀대로 한번 시도하고 도전해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위 똑똑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항상 하지 말아야 할 똑똑한 이유들을 갖다 들이댄다. 그러나 그러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안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유만 수없이 머릿속에서 되 뇌이다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놓쳤고, 얼마나 귀한 시간을 놓쳤습니까? 시작과 결단을 미루고 행동을 미룬 채, 온갖 종류의 구실을 찾아내면서 움직이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입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열왕기하 5:13)

나아만은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 옆에는 지혜로운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그 종들이 말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당신에게 더 크고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도 당신은 분명히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간단하다고, 너무 단순하다고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선입관과 편견, 교만을 다 내려놓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나아만이 깨닫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내속에 간직하고 있었구나! 내 뜻대로만 모든 것을 이루려고 했구나! 나의 교만과 선입관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구나!’ 그 순간 나아만은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열왕기하 5:1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아만은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선입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순종을 방해하는 선입관, 교만, 잘못된 생각들, 편견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게 맞추려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능력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교만입니까? 이기적인 욕심입니까? 지금까지 몇 십 년 동안 해왔던 신앙의 패턴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모든 것들을 부숴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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