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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심!

이사야 9: 6 ~ 7

김지철 목사

2014.11.30

신앙에도 ‘열심’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평가할 때, ‘열심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열심이 부족한 사람인가’ 묻는다면 ‘예’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열심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좋습니까? 그저 여유 시간에 갖는 취미 모임도 열심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일을 할 때는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열심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든든합니다. 열심이 있다는 것은, 복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심이 있습니다. 부지런합니다. 목표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집중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일을 할 때만 열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에도 열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이 때로는 뜨뜻미지근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기에는 열심 없는 모습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없다고 하기는 또 그렇습니다. 교회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려고 하고, 헌금도 정성스럽게 내려고 하고, 가끔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신앙의 유보, 답보 상태가 한두 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 년, 이십 년 지속되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 스스로도 화가 납니다. 무언가 결단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입니다.
세상일도 그렇지만, 선택과 집중이 없으면 신앙조차도 위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열심 없는 교회, 열심 없는 성도를 향해 비판하시는 구절들이 종종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등장하는데 그중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를 무척 꾸중하십니다. 왜입니까? 어느 순간 열심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낼 것이다.” 라고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열심 없는 신앙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하는 죄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19)

사랑하는 자를 향해 책망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 그 열심을 되찾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열심이 있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뜨뜻미지근한 삶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결정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용기 없이 비겁함 속에 도피하는 것입니다. 즉 책임지기를 싫어하면 열심, 열정, 열망을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까요? 쉽게 판단할 수도 없고, 때로는 기준이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만, 가만히 성경을 음미하며 읽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 열망을 가진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열심이 있다’는 것은 가슴에 뜨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투자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 아비의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현장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을 향해 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어떤 인물입니까? 성경을 볼 때 야곱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못된 것 같기도 하고, 속이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형 에서를 택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늘 궁금합니다. 왜 그러셨을까? 그런데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성격이 못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역사의 현장으로 부르시고, 하나하나 고쳐 나가십니다.
모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젊었을 때는 자기 백성을 위해 열정을 지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내쫓깁니다. 그렇게 그의 열정이 사그라지고 있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의 열정을 다시 회복시키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들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그때에도,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열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땅으로 가게 됩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입니까? 순수한 열정을 지녔습니다. 소년과도 같은 시기에 거대한 골리앗 앞에 설 수 있는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또 엘리야 선지자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 앞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도전하여 그들을 이겼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가슴에 뜨거운 열심, 열정,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을 살펴보십시오. 모두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인물을 제자로 택하셨습니까? 그들은 직업도 달랐습니다. 삶의 배경도 달랐습니다. 성품도 갖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심지어 가룟 유다까지 택하실 때를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 열심이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열심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 열심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할까요?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열망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열심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열심의 방향이 잘못되면 이 열심은 위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열정만큼 열심이 있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열심을 갖고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했습니다. 열심에 대해서는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사건건 예수님과 부딪힙니다. 열심과 또 다른 열심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열심에는 하나님의 열심, 즉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망이 들어 있었습니다. 소외된 자를 해방시키는 열망,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키려는 열망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열심은 조금 달랐습니다. 아마 처음은 선한 동기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반성이 사라졌습니다. 자기 회개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그 열심은 자기를 자랑하는 열심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열심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열심에 가담되었을 때, 예수님은 정면으로 바리새인들과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너희에게 복음에 대한 열망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도 있다. 그런데 이제 세상에 나가면 그 열심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

열정을 가지되, 뱀 같은 지혜와 총명, 그리고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비둘기같이 순전하고 순결한 마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열심이 있었고, 가룟 유다도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결과는 아주 달라졌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뱀 같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 같은 순전함과 순결함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적으로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판 자’라는, 잘못된 열심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도 잘못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순전함이 있었기에 반성할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는 회개의 자리에 들어오면서, 그는 주님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심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순전함과 순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 열망, 지혜, 순전함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무슨 일도 해도 괜찮습니다.
순전하지 않은 열심은 어떻게 될까요? 이기적이 됩니다. 아주 독선적이고 공격적이 됩니다. 열심이 있는데 순결을 놓치면, 그것은 자기 욕망에 붙잡힌 열심으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열심은 어떻게 될까요? 너무 고지식하게 됩니다. 하나만 보고 전체를 보는 안목이 사라집니다. 고집쟁이가 됩니다. 집착하는 사람이 됩니다. 편협한 독선주의자로 멈추게 됩니다. 또한 분별력을 잃어버린 열정은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매우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지혜와 순결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옳은 열심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왜곡된 열심 속에 머물러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옳은 열심과 왜곡된 열심을 판단하는 기준,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중심적인지 묻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열심인지, 즉 이웃을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아는 열심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 말씀과 뜻에 의해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열심, 이것이 성숙한 열심입니다. 이런 열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또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열심이 사람을 살리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는 열심인가, 사랑이 결여된 열심인가에 따라서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도 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그 열심은 지속되었습니다. 그의 열심의 크기나 뜨거움은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이후나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모습은 매우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엄청난 열심은 있었지만 거기에 뭐가 없었습니까? 사랑이 없었습니다. 법 조항처럼 사람을 끊임없이 판단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역사를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자 그에게 사랑과 긍휼이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던 독선적인 인물이, 사랑의 인물로, 남을 배려하며 포용하는 넉넉한 인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열정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공격적인 흉기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이라는 것을 말할 때 늘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는 속도입니다. 열심은 속도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뭐든지 해보려고 하고, 뭐든지 앞서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속도뿐만 아니라 또 무엇이 중요할까요? 바로 방향입니다. 속도가 나면 날수록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잡지 못하면 어디로 튈는지 모릅니다.
열심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지? 내가 열심을 내는 목표가 뭐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지?’ 주님 앞에서 회개하는 심정이 되어야 그 열정이 살아 움직이는 열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운전을 할 때, 30km 아니 60km 미만으로 추행할 때는 앞에 장애물이 갑자기 등장해도 쉽게 멈출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핸들을 옆으로 조금 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높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100km 이상 속도로 달려보셨지요? 그때는 장애물이 나타나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차선을 넘어서서 어디로 박히게 될지 조심스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방향,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향, 열정을 쏟아 놓는 그 방향은 무척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 옛날의 열심에 사랑이라는 목표가 들어가자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열정이 있는 자리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사람이 살아나고, 또 힘든 자들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지금도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열정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나에게 뜨거운 열정을 끊임없이 부어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우리를 기다리셨는지, 하나님의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우리가 죄악에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그 사건을 통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아기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평강의 왕, 능력과 지혜가 많은 왕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의 열정이 이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7)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충만한 나라, 평강과 정의와 공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 나가시리라는 약속을 하시며 이것을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목사의 길을 가면서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의문이 들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열심을 지닌 하나님께서 역사의 운행을 너무 더디게 하시는 게 아닐까.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을, 악한 세력을 왜 이렇게 오랫동안 놔두고 계실까?’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 때가 문득문득 있습니다. ‘하나님, 저 악한 정권을 왜 저렇게 오래 두십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질고 속에서 생명을 잃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상실하고 있는데, 하나님 뭐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그러다가도 인간을 생각하면 또 이런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은 매우 위대하시고 강하셔서,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셔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인간은 바스러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을 약하게 대하시면, 인간은 또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이 지금 침묵하시는가봐!’ 오만방자하게 악행을 행하며 탐욕스럽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틀에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품으십시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는 아주 천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이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놔두시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믿음의 사람들을 보내시고,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가장 약한 존재, 아기처럼 온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겸손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전쟁과 재난이 다가오면 인간은 얼마나 두려워했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경제적인 번영과 풍요가 다가오면 인간은 또 얼마나 스스로 오만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타락했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하실 예수 그리스도. 구약 시대에 미리 그 뜻을 전하시며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구원하기를 열망하셨던 그 마음을, 바로 믿음의 성도들에게서 찾고 계십니다. “너도 나의 열심을 가져봐라. 너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라. 이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나, 하나님이 열망하듯 열망해 보아라.”
우리가 주님 말씀 앞에 섰을 때에, “주님 제가 주님의 마음을 조금 압니다. 주님의 크신 열심, 그것을 제가 조금이라도 갖고 제 삶에서 기뻐하면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참여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고백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삶을 축복으로 알고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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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 6 ~ 7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신앙에도 ‘열심’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평가할 때, ‘열심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열심이 부족한 사람인가’ 묻는다면 ‘예’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열심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좋습니까? 그저 여유 시간에 갖는 취미 모임도 열심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일을 할 때는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열심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든든합니다. 열심이 있다는 것은, 복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심이 있습니다. 부지런합니다. 목표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집중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일을 할 때만 열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에도 열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이 때로는 뜨뜻미지근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기에는 열심 없는 모습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없다고 하기는 또 그렇습니다. 교회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려고 하고, 헌금도 정성스럽게 내려고 하고, 가끔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신앙의 유보, 답보 상태가 한두 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 년, 이십 년 지속되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 스스로도 화가 납니다. 무언가 결단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입니다.
세상일도 그렇지만, 선택과 집중이 없으면 신앙조차도 위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열심 없는 교회, 열심 없는 성도를 향해 비판하시는 구절들이 종종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등장하는데 그중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를 무척 꾸중하십니다. 왜입니까? 어느 순간 열심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낼 것이다.” 라고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열심 없는 신앙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하는 죄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19)

사랑하는 자를 향해 책망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 그 열심을 되찾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열심이 있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뜨뜻미지근한 삶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결정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용기 없이 비겁함 속에 도피하는 것입니다. 즉 책임지기를 싫어하면 열심, 열정, 열망을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까요? 쉽게 판단할 수도 없고, 때로는 기준이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만, 가만히 성경을 음미하며 읽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 열망을 가진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열심이 있다’는 것은 가슴에 뜨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투자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 아비의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현장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을 향해 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어떤 인물입니까? 성경을 볼 때 야곱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못된 것 같기도 하고, 속이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형 에서를 택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늘 궁금합니다. 왜 그러셨을까? 그런데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성격이 못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역사의 현장으로 부르시고, 하나하나 고쳐 나가십니다.
모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젊었을 때는 자기 백성을 위해 열정을 지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내쫓깁니다. 그렇게 그의 열정이 사그라지고 있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의 열정을 다시 회복시키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들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그때에도,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열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땅으로 가게 됩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입니까? 순수한 열정을 지녔습니다. 소년과도 같은 시기에 거대한 골리앗 앞에 설 수 있는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또 엘리야 선지자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 앞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도전하여 그들을 이겼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가슴에 뜨거운 열심, 열정, 열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을 살펴보십시오. 모두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인물을 제자로 택하셨습니까? 그들은 직업도 달랐습니다. 삶의 배경도 달랐습니다. 성품도 갖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심지어 가룟 유다까지 택하실 때를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 열심이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열심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 열심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할까요?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열망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열심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열심의 방향이 잘못되면 이 열심은 위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열정만큼 열심이 있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열심을 갖고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했습니다. 열심에 대해서는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사건건 예수님과 부딪힙니다. 열심과 또 다른 열심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열심에는 하나님의 열심, 즉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망이 들어 있었습니다. 소외된 자를 해방시키는 열망,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키려는 열망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열심은 조금 달랐습니다. 아마 처음은 선한 동기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반성이 사라졌습니다. 자기 회개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그 열심은 자기를 자랑하는 열심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열심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열심에 가담되었을 때, 예수님은 정면으로 바리새인들과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너희에게 복음에 대한 열망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도 있다. 그런데 이제 세상에 나가면 그 열심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

열정을 가지되, 뱀 같은 지혜와 총명, 그리고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비둘기같이 순전하고 순결한 마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열심이 있었고, 가룟 유다도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결과는 아주 달라졌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뱀 같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 같은 순전함과 순결함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적으로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판 자’라는, 잘못된 열심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도 잘못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순전함이 있었기에 반성할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는 회개의 자리에 들어오면서, 그는 주님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심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순전함과 순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 열망, 지혜, 순전함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무슨 일도 해도 괜찮습니다.
순전하지 않은 열심은 어떻게 될까요? 이기적이 됩니다. 아주 독선적이고 공격적이 됩니다. 열심이 있는데 순결을 놓치면, 그것은 자기 욕망에 붙잡힌 열심으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열심은 어떻게 될까요? 너무 고지식하게 됩니다. 하나만 보고 전체를 보는 안목이 사라집니다. 고집쟁이가 됩니다. 집착하는 사람이 됩니다. 편협한 독선주의자로 멈추게 됩니다. 또한 분별력을 잃어버린 열정은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매우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지혜와 순결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옳은 열심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왜곡된 열심 속에 머물러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옳은 열심과 왜곡된 열심을 판단하는 기준,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중심적인지 묻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열심인지, 즉 이웃을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아는 열심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 말씀과 뜻에 의해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열심, 이것이 성숙한 열심입니다. 이런 열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또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열심이 사람을 살리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는 열심인가, 사랑이 결여된 열심인가에 따라서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도 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그 열심은 지속되었습니다. 그의 열심의 크기나 뜨거움은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이후나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모습은 매우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엄청난 열심은 있었지만 거기에 뭐가 없었습니까? 사랑이 없었습니다. 법 조항처럼 사람을 끊임없이 판단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역사를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자 그에게 사랑과 긍휼이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던 독선적인 인물이, 사랑의 인물로, 남을 배려하며 포용하는 넉넉한 인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열정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공격적인 흉기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이라는 것을 말할 때 늘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는 속도입니다. 열심은 속도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뭐든지 해보려고 하고, 뭐든지 앞서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속도뿐만 아니라 또 무엇이 중요할까요? 바로 방향입니다. 속도가 나면 날수록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잡지 못하면 어디로 튈는지 모릅니다.
열심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지? 내가 열심을 내는 목표가 뭐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지?’ 주님 앞에서 회개하는 심정이 되어야 그 열정이 살아 움직이는 열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운전을 할 때, 30km 아니 60km 미만으로 추행할 때는 앞에 장애물이 갑자기 등장해도 쉽게 멈출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핸들을 옆으로 조금 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높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100km 이상 속도로 달려보셨지요? 그때는 장애물이 나타나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차선을 넘어서서 어디로 박히게 될지 조심스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방향,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향, 열정을 쏟아 놓는 그 방향은 무척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 옛날의 열심에 사랑이라는 목표가 들어가자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열정이 있는 자리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사람이 살아나고, 또 힘든 자들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지금도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열정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나에게 뜨거운 열정을 끊임없이 부어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우리를 기다리셨는지, 하나님의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우리가 죄악에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그 사건을 통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아기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평강의 왕, 능력과 지혜가 많은 왕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의 열정이 이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7)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충만한 나라, 평강과 정의와 공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 나가시리라는 약속을 하시며 이것을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목사의 길을 가면서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의문이 들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열심을 지닌 하나님께서 역사의 운행을 너무 더디게 하시는 게 아닐까.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을, 악한 세력을 왜 이렇게 오랫동안 놔두고 계실까?’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 때가 문득문득 있습니다. ‘하나님, 저 악한 정권을 왜 저렇게 오래 두십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질고 속에서 생명을 잃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상실하고 있는데, 하나님 뭐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그러다가도 인간을 생각하면 또 이런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은 매우 위대하시고 강하셔서,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셔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인간은 바스러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을 약하게 대하시면, 인간은 또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이 지금 침묵하시는가봐!’ 오만방자하게 악행을 행하며 탐욕스럽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틀에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품으십시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는 아주 천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이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되,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놔두시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믿음의 사람들을 보내시고,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가장 약한 존재, 아기처럼 온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겸손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전쟁과 재난이 다가오면 인간은 얼마나 두려워했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경제적인 번영과 풍요가 다가오면 인간은 또 얼마나 스스로 오만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타락했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하실 예수 그리스도. 구약 시대에 미리 그 뜻을 전하시며 하나님의 열심을 이루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구원하기를 열망하셨던 그 마음을, 바로 믿음의 성도들에게서 찾고 계십니다. “너도 나의 열심을 가져봐라. 너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라. 이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나, 하나님이 열망하듯 열망해 보아라.”
우리가 주님 말씀 앞에 섰을 때에, “주님 제가 주님의 마음을 조금 압니다. 주님의 크신 열심, 그것을 제가 조금이라도 갖고 제 삶에서 기뻐하면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참여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고백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삶을 축복으로 알고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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