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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름은 명예를 지켜주는 소중한 것입니다.
젊은 부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갑자기 분주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가졌을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한자사전인 옥편을 붙잡고 어떤 글자를 선택할 것인지 찾으면서 밤잠을 자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이름을 짓기 어려워 부모님께 손자손녀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놓은 전화번호부 책을 찾아보면서 이 글자, 저 글자를 조합해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름 한자를 뽑아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그 이름을 가지고 일생을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름 짓는 것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또한 이런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이름이 소중합니다. 이름은 곧 나 자신의 인격이고 전체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것이 명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명예라는 것은 세상에서 내 이름이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이 자랑스러워서 상표나 상호에 붙이기도 합니다. 가게 간판, 학원이름, 병원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습니다. 이것은 내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다는 의미입니다. 기업 현장에서도 이름의 명예를 걸고 지키고 책임지겠다는 열정으로 일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이름이 손상당하면 가슴이 벌렁거립니다. 우리의 이름이 도용을 당하거나 훼손을 당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합니다. 우리는 이름의 명예가 손상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명예훼손을 당하는 사람은 마음에 깊은 상처와 충격을 받기 때문에 때로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인생을 끝마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이름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인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형법 제 307조에도 명예훼손에 대한 일반규정을 이렇게 두고 있습니다.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사실을 적시(摘示)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이것은 이만큼 사람의 이름 속에 인격이 들어있고 이것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도 이렇게 소중한데 하나님의 이름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할 때 하나님은 아파하십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부모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당신 스스로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인간이 탐구해서 깨달은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내 이름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런 인격과 품성을 가진 존재라고 이름을 계시해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쉽게 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부르시는 당신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신이 누구시기에 나를 부릅니까?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가서 그들을 이끌어간다고 할 때 누가 나를 보내서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주십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앞으로 될 것을 되게 하는 자다. 역사 속에서 나를 지켜봐라.”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기에 이 세상 어떤 피조물과도 견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거절하시면서 인간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나의 이름을 알려주겠으니 우상을 섬기지 말고 내 이름을 존중히 여겨라. 내 이름을 높여라. 내 이름에 영광을 돌려라. 바로 그 속에 내 전체를 집어넣겠다. 내 이름으로 나오면 응답해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나타나 네 가지 특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인식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태어난 아들 이삭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달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마음속으로 깨달았습니다. 모리아 산상에서 그 귀한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아무런 불평 없이 모리아 산에 올라가 바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손에 칼을 들고 팔을 높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수풀 속에 어린 양을 감추어두셨습니다. 그때 깨달은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창세기 22:14)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동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기뻐 받으시고 그에게 준비된 인생의 내용을 채우셨음을 깨닫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순간순간의 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들어갔을 때 물이 없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먹어보았더니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왜 여기까지 와서 죽게 하냐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끌고 온 지도자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모세에게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고쳐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애굽기 15:26)
‘여호와 라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쓴물과 같은 고난과 견디기 어려운 낙심될 만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께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강건하게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신이 가진 연약함과 부끄러움, 쓰디쓴 뿌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쳐주옵소서. 하나님 치유하여주옵소서. 내 인생의 쓴 물을 벗겨주시고 하나님의 단 물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모습은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아말렉 족속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아말렉 족속은 강력한 백성이었습니다. 모세는 언덕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양손을 들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세가 두 손을 들고 기도를 하면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울 때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힘들고 피곤해서 기도하는 두 손이 점점 내려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족속에게 졌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동역자 아론과 훌이 모세를 큰 바위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오른팔을, 훌은 왼팔을 들고 모세가 편안히 팔을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아말렉 족속을 이겨 승리하는 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출애굽기 17:15)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전쟁과 같이 치열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두 손 들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내 인생의 모든 것들 맡기십시오. 혼자서 기도가 안 될 때는 사랑하는 중보 기도자들을 만나 기도하십시오. 옆에서 기도하는 손을 들어주었던 아론과 훌처럼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중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다는 믿음으로 승리의 깃발을 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모습은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이라는 젊은 청년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안심하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의 샬롬을 청년 기드온에게 선물하고 사명을 부여합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문의 우상 숭배하는 바알신과 아세라 우상들이 가득한 것을 다 때려 부수라고 말씀합니다. 기드온이 용감하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없앨 결단을 하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미디안 족속과의 전쟁에서 기드온을 사용하십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 족속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먼저 기드온에게 주신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역사를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 (사사기 6: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서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셨습니까?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우리의 삶을 준비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치료해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승리하게 해주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 때문에 세상의 파도가 거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을 향해 나가는 용기를 갖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때로 험난하고 세상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을 가지고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과 함께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대접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헛되이 하고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쓸데없게 만들고 무익하게 남용하고 오용하며 악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정적인 표현 속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며 교회에 나오면서도 마당만 밟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을 너무나 아파하십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11)
여기에서 “나를 위하여”가 두 번 나옵니다. 이것은 곧 “내 이름, 내 명예를 걸고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다.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내가 가진 꿈을 꾸고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만 갖다 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내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편, 내 소유, 내 수단으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듣기 원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과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기도 합니다. 불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맹세하고 다른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짓행위의 증인으로 삼는 것을 하나님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7)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 죄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심판하고 징계할 것이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예레미야 7:10-11)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예를 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세상에 나가서는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세상과 성전에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참을 수가 없어 비통해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도 인용하셔서 예수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돈 바꾸는 자들과 양과 소를 파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1:13)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셨습니다. 사탄의 일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면 가슴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조롱받고 비난받으면 화가 나고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모독을 당하면, 아니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서 모욕과 조롱을 받아도 우리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통분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고통 받을 때 같이 아파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나를 통해서 높임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고 모욕받을 때 내 가슴이 슬퍼하며 탄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고 망령되이 일컫지 않도록 성령의 역사 앞에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받기를 열망합니다. 그러나 내 이름을 모독을 받을 때는 흥분하고 분노하다가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할 때는 심상하게 지냈던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와 교회를 통해서 높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애굽기 20: 7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이름은 명예를 지켜주는 소중한 것입니다.
젊은 부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 갑자기 분주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가졌을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한자사전인 옥편을 붙잡고 어떤 글자를 선택할 것인지 찾으면서 밤잠을 자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이름을 짓기 어려워 부모님께 손자손녀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놓은 전화번호부 책을 찾아보면서 이 글자, 저 글자를 조합해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름 한자를 뽑아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그 이름을 가지고 일생을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름 짓는 것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또한 이런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이름이 소중합니다. 이름은 곧 나 자신의 인격이고 전체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것이 명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명예라는 것은 세상에서 내 이름이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이 자랑스러워서 상표나 상호에 붙이기도 합니다. 가게 간판, 학원이름, 병원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습니다. 이것은 내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다는 의미입니다. 기업 현장에서도 이름의 명예를 걸고 지키고 책임지겠다는 열정으로 일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이름이 손상당하면 가슴이 벌렁거립니다. 우리의 이름이 도용을 당하거나 훼손을 당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합니다. 우리는 이름의 명예가 손상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명예훼손을 당하는 사람은 마음에 깊은 상처와 충격을 받기 때문에 때로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인생을 끝마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이름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인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형법 제 307조에도 명예훼손에 대한 일반규정을 이렇게 두고 있습니다.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사실을 적시(摘示)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이것은 이만큼 사람의 이름 속에 인격이 들어있고 이것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도 이렇게 소중한데 하나님의 이름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할 때 하나님은 아파하십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부모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당신 스스로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인간이 탐구해서 깨달은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내 이름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런 인격과 품성을 가진 존재라고 이름을 계시해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쉽게 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부르시는 당신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신이 누구시기에 나를 부릅니까?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가서 그들을 이끌어간다고 할 때 누가 나를 보내서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주십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앞으로 될 것을 되게 하는 자다. 역사 속에서 나를 지켜봐라.”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기에 이 세상 어떤 피조물과도 견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거절하시면서 인간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나의 이름을 알려주겠으니 우상을 섬기지 말고 내 이름을 존중히 여겨라. 내 이름을 높여라. 내 이름에 영광을 돌려라. 바로 그 속에 내 전체를 집어넣겠다. 내 이름으로 나오면 응답해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나타나 네 가지 특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인식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태어난 아들 이삭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달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마음속으로 깨달았습니다. 모리아 산상에서 그 귀한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아무런 불평 없이 모리아 산에 올라가 바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손에 칼을 들고 팔을 높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수풀 속에 어린 양을 감추어두셨습니다. 그때 깨달은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창세기 22:14)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동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기뻐 받으시고 그에게 준비된 인생의 내용을 채우셨음을 깨닫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순간순간의 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들어갔을 때 물이 없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먹어보았더니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왜 여기까지 와서 죽게 하냐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끌고 온 지도자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모세에게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고쳐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애굽기 15:26)
‘여호와 라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쓴물과 같은 고난과 견디기 어려운 낙심될 만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께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강건하게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신이 가진 연약함과 부끄러움, 쓰디쓴 뿌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쳐주옵소서. 하나님 치유하여주옵소서. 내 인생의 쓴 물을 벗겨주시고 하나님의 단 물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모습은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아말렉 족속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아말렉 족속은 강력한 백성이었습니다. 모세는 언덕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양손을 들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세가 두 손을 들고 기도를 하면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울 때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힘들고 피곤해서 기도하는 두 손이 점점 내려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족속에게 졌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동역자 아론과 훌이 모세를 큰 바위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오른팔을, 훌은 왼팔을 들고 모세가 편안히 팔을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아말렉 족속을 이겨 승리하는 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출애굽기 17:15)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전쟁과 같이 치열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두 손 들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내 인생의 모든 것들 맡기십시오. 혼자서 기도가 안 될 때는 사랑하는 중보 기도자들을 만나 기도하십시오. 옆에서 기도하는 손을 들어주었던 아론과 훌처럼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중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다는 믿음으로 승리의 깃발을 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모습은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이라는 젊은 청년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안심하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의 샬롬을 청년 기드온에게 선물하고 사명을 부여합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문의 우상 숭배하는 바알신과 아세라 우상들이 가득한 것을 다 때려 부수라고 말씀합니다. 기드온이 용감하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없앨 결단을 하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미디안 족속과의 전쟁에서 기드온을 사용하십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 족속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먼저 기드온에게 주신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역사를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 (사사기 6: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서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셨습니까?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우리의 삶을 준비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치료해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승리하게 해주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 때문에 세상의 파도가 거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을 향해 나가는 용기를 갖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때로 험난하고 세상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을 가지고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과 함께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대접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헛되이 하고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쓸데없게 만들고 무익하게 남용하고 오용하며 악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정적인 표현 속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며 교회에 나오면서도 마당만 밟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을 너무나 아파하십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8:11)
여기에서 “나를 위하여”가 두 번 나옵니다. 이것은 곧 “내 이름, 내 명예를 걸고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다.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내가 가진 꿈을 꾸고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만 갖다 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내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편, 내 소유, 내 수단으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듣기 원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과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기도 합니다. 불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맹세하고 다른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짓행위의 증인으로 삼는 것을 하나님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7)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 죄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심판하고 징계할 것이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예레미야 7:10-11)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예를 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세상에 나가서는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세상과 성전에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참을 수가 없어 비통해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도 인용하셔서 예수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돈 바꾸는 자들과 양과 소를 파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1:13)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셨습니다. 사탄의 일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면 가슴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조롱받고 비난받으면 화가 나고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모독을 당하면, 아니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서 모욕과 조롱을 받아도 우리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통분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고통 받을 때 같이 아파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나를 통해서 높임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고 모욕받을 때 내 가슴이 슬퍼하며 탄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고 망령되이 일컫지 않도록 성령의 역사 앞에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받기를 열망합니다. 그러나 내 이름을 모독을 받을 때는 흥분하고 분노하다가도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할 때는 심상하게 지냈던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와 교회를 통해서 높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