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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보다 사랑이 더 큰 가치입니다.
재능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지식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산입니까? 성도님들은 어린 시절 재능이 많다, 총명하다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났습니까? 나에게 어떤 달란트가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옛말에 ‘재승덕박(才勝德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능은 많은데 덕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일수록 성품과 인품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품고 있는 말입니다. 또 ‘부재승덕(不才勝德)’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닐 부를 써서 재능과 지식이 덕을 넘어가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여덟 글자의 말로는 ‘비인부전 부재승덕(非人不傳, 不才勝德)’이 있습니다. ‘인격과 성품에 문제가 있는 자에게 높은 벼슬을 주지 말라. 비장의 기술도 전수하지 말라.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덕이 없는 재능은 때때로 위험합니다. 그 재능은 남을 해칠 수 있고, 자기 자랑인 교만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덕이 무엇입니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할 때, 우리가 ‘덕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천 년 전에 우리에게 비슷한 말을 가르쳐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에 빠진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향한 말입니다.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1)
자신에게 지식이 조금 있다고 해서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자랑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어떻습니까? 사랑은 용납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기에 공동체의 덕을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재능이나 지식을 무가치하다고 말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가 거절하는 지식은 사랑 없는 지식, 자기 자랑만 하는 지식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위험하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없는 지식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동반된 지식이 있어야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이나 재능이 사랑으로 승화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부심이 욕심에 그치면 문제가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머리가 좋다, 재물을 모으는 일에 탁월하다, 문화·예술에도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 등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 중에 유대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통계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민족적인 자부심이 아주 강합니다. 자신들의 신앙 전승과 민족 전승을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고 매우 노력합니다. 교육열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적인 유대감이 다른 어느 민족보다 강력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의 소리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만 안다, 집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이다’라는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반유대주의적인 감정을 부추기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이 있습니다. 17절과 18절에 걸쳐 다섯 가지 특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유대인이 아니더냐? 너희가 율법을 받지 않았더냐?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지 않더냐?” 그리고 19절에서 20절은 “너희가 그런 직책을 가졌으니 사회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곧 남을 인도하는 자이고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더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특권과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자랑스러운 것들입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것이 주어지면 누구나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자부심이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자부심에는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부심이 이기적인 욕심, 이기적인 욕망과 만나면 자만심이 되고 오만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을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로마서 2:24)
‘너희에게 특권이 있고, 해야 할 역할이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저 모양이야? 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때로 습관이 핵심을 잃게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향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신앙과 당신의 삶이 너무 습관화된 것이 아닌가?”
습관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기까지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막아주는 것이 습관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일수록 습관화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이 되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사실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삶에 체득이 되자 주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지’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습관이 습관 자체로 멈추어 서는 순간 무엇을 잃어버릴까요? 생동력을 잃어버립니다. 핵심 내용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습관 속에 들어오지만 늘 습관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했던 처음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습관화 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사라집니까? 처음 사랑의 두려움과 떨림, 처음 사랑의 설렘과 기대가 서서히 사라져 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습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매우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습관화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자마자 꾸중하셨습니다. 아주 질타하셨습니다.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화 있을 진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의 신앙이 뜨거움이 없는 신앙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멈춰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렇게 예배드리면 괜찮겠지’ 하는 종교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대하는 마음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설렘도 사라져버린 그러한 신앙의 양태를 예수님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신앙은 형식화된 종교다. 화석처럼 죽어버린 그러한 신앙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것인데 그러한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종교성은 참된 신앙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첫째 아들을 닮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오늘 본문을 잘 표현해 줍니다. 로마서 1장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산 둘째 아들의 모습을 비유한다면, 로마서 2장은 첫째 아들의 모습입니다. 집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아버지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동생이 돌아오자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이 첫째 아들의 모습이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맏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만한 자의식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었지? 그런데 집을 떠나서 재산을 다 낭비해버린 저 동생과 나를 비교하다니. 나는 우월한 존재인데! 저런 못된 동생에게 아버지가 잘 해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네 속에 사랑이 없구나. 네게 용납하는 마음이 없구나. 네게 동생을 향한 배려가 없구나. 이는 내 아들이고 너의 동생이 아니더냐?”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함께 있었지만, 마음으로부터는 아버지를 멀리 떠난 둘째 아들처럼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깊이 연구하는 학자들은 ‘둘째 아들은 집 나간 탕자이고 첫째 아들은 집 안에 있는 탕자’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첫째 아들도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떠났던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이런 모습이 우리 속에는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외적인 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세례를 받아야 한다기에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직분도 맡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습관적인 종교성에 만족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없고,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예배를 향한 두려움과 떨림, 설렘과 기대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성전 뜰만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적을 가슴에 껴안고 다니면서 ‘나는 괜찮을 거야’ 하는 미신에 불구한 것이 아닌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늘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늘 현재적인 것입니다. 어제 기도를 많이 했다고 오늘 기도를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제 찬양을 많이 불렀다고 오늘 찬양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말씀을 많이 읽었다고 오늘은 쉬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인격적인 만남이며 사랑의 대화입니다. 바울의 지적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것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아,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나는 선민이니까, 나는 율법을 받았으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니까, 하나님과 우리와는 특별한 관계가 있으니까, 나는 이방인들을 인도하는 이방의 선생이니까, 나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빛이니까’라는 자부심은 가졌지만 그것을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기독교가 종교화되고 썩어 빠지게 되었을 때는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교회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문제에는 질문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서는 질문을 쉬지 않을 때 교회는 무너졌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신약의 바울도,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입니다. 네 자신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가해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머리도 쉴 겸 해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지금은 예순 살이 넘은, ‘바둑의 황제’라고 불렸던 조훈현이 쓴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챕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바둑의 프로들’입니다. 바둑의 고수들이 대국을 한 후에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복기입니다. ‘내가 이렇게 두었으면 이기지 않았을까? 이쪽으로 하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경기가 끝난 후 이긴 자와 진 자가 마주 앉아서 다시 복기를 하는 것입니다. 복기에 대해 그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복기를 잘해두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좋은 수를 더 깊이 연구하여 다음 대국에 활용할 수 있다. 이처럼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 준다.”
바둑의 고수가 되어도 복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마추어는 복기를 안 합니다. 아니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합니다. 어디에, 그리고 왜 그곳에 바둑알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로는 복기를 할 줄 압니다. 내가 여기에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기를 하며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새롭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회개입니다. 반성입니다.
주일날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이번 주에 제게 이런 부끄러운 일이, 실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되었는데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토해내는 것이 곧 복기입니다. 내 인생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받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을 가지고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성도님들은 자신을 향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남을 향해서는 얼마나 많은 물음을 갖고 비판하고 비난했습니까?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을 향해서는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내가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묻지를 않습니다.
자기를 향한 비판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면 성숙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대충은 알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하려고 하니 어리석고 누추한 내 모습이, 내 문제가 노출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향한 비판적 질문은 성장과 성숙의 비결입니다. 질문을 멈추면 성숙도 멈춥니다. 질문을 멈추면 자신이 가진 기득권 속에 매몰되고 맙니다. 질문을 멈추는 것은 변화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인간은 매우 엄청난 수의 질문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나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남을 향한 것들입니다. 조금이라도 문제를 발견하면 잔인하게 짓밟으려는 것이 우리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의 세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특권을 가졌다.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서 그것들을 너희에게 준 것이냐?”
많이 있는 자에게 많이 요청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네가 특별한 선택을 받았느냐? 그러면 유대인답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너희가 선생이냐?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많이 깨달았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남을 인도하는 사람답게 모범을 보여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거꾸로 가지 않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로마서 2:23)
특권의식과 자부심은 교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축복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그것을 제대로 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많이 가진 자가 하나님 앞에서 요구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직분이나 돈, 지위나 명예, 달란트를 많이 가졌느냐? 그러면 그것들을 어떻게 쓸 것이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시는 것들을 유대인들은 바르게 감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이유라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 이 시대의 한국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한국 교회 전체가 비판과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왜 그럴까요?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있을까요? 곳곳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바르게 믿지 않는 것, 이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일까요? 목사입니다. 두 번째는 장로이고, 세 번째는 권사, 네 번째가 집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 우상을 섬길 뿐만 아니라, 변화하고 개혁하고 성숙해야 할 교회가 세상의 맨 앞이 아닌 맨 마지막에 서서 다른 곳은 다 변하는데 가장 변하기 싫어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세속 사회와 똑같이 돈과 권력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찾아다니고 부정적인 문제가 발생한 곳에 기독교인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장(長)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치열한 다툼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교회 원로들에게서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개 운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문에 광고하는 것을 보며 저는 참 슬펐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런 퍼포먼스에 진정성을 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것들을 회개하고, 다시 이 한국 교회에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와 성령의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남을 향한 서슬 퍼런 비난을 나 자신에게도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가 참으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라고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거짓 회개, 거짓 반성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나부터 변화되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 우리의 공동체가 변화됩니다.
소망교회는 받은 것이 참 많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사명도 많이 받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감사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한국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 귀한 역사를 바르게 감당하는 우리 교회 또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2: 17 ~ 24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재능보다 사랑이 더 큰 가치입니다.
재능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지식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산입니까? 성도님들은 어린 시절 재능이 많다, 총명하다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났습니까? 나에게 어떤 달란트가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옛말에 ‘재승덕박(才勝德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능은 많은데 덕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일수록 성품과 인품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품고 있는 말입니다. 또 ‘부재승덕(不才勝德)’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닐 부를 써서 재능과 지식이 덕을 넘어가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여덟 글자의 말로는 ‘비인부전 부재승덕(非人不傳, 不才勝德)’이 있습니다. ‘인격과 성품에 문제가 있는 자에게 높은 벼슬을 주지 말라. 비장의 기술도 전수하지 말라.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덕이 없는 재능은 때때로 위험합니다. 그 재능은 남을 해칠 수 있고, 자기 자랑인 교만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덕이 무엇입니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할 때, 우리가 ‘덕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천 년 전에 우리에게 비슷한 말을 가르쳐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에 빠진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향한 말입니다.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1)
자신에게 지식이 조금 있다고 해서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자랑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어떻습니까? 사랑은 용납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기에 공동체의 덕을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재능이나 지식을 무가치하다고 말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가 거절하는 지식은 사랑 없는 지식, 자기 자랑만 하는 지식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위험하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없는 지식은 인간을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동반된 지식이 있어야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이나 재능이 사랑으로 승화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부심이 욕심에 그치면 문제가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머리가 좋다, 재물을 모으는 일에 탁월하다, 문화·예술에도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 등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 중에 유대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통계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민족적인 자부심이 아주 강합니다. 자신들의 신앙 전승과 민족 전승을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고 매우 노력합니다. 교육열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적인 유대감이 다른 어느 민족보다 강력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비판과 비난의 소리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만 안다, 집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이다’라는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반유대주의적인 감정을 부추기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이 있습니다. 17절과 18절에 걸쳐 다섯 가지 특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유대인이 아니더냐? 너희가 율법을 받지 않았더냐?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지 않더냐?” 그리고 19절에서 20절은 “너희가 그런 직책을 가졌으니 사회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곧 남을 인도하는 자이고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더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특권과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자랑스러운 것들입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것이 주어지면 누구나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자부심이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자부심에는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부심이 이기적인 욕심, 이기적인 욕망과 만나면 자만심이 되고 오만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을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로마서 2:24)
‘너희에게 특권이 있고, 해야 할 역할이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저 모양이야? 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때로 습관이 핵심을 잃게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향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신앙과 당신의 삶이 너무 습관화된 것이 아닌가?”
습관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기까지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막아주는 것이 습관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일수록 습관화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이 되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사실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삶에 체득이 되자 주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지’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습관이 습관 자체로 멈추어 서는 순간 무엇을 잃어버릴까요? 생동력을 잃어버립니다. 핵심 내용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습관 속에 들어오지만 늘 습관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했던 처음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습관화 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사라집니까? 처음 사랑의 두려움과 떨림, 처음 사랑의 설렘과 기대가 서서히 사라져 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습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매우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습관화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자마자 꾸중하셨습니다. 아주 질타하셨습니다.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화 있을 진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의 신앙이 뜨거움이 없는 신앙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멈춰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렇게 예배드리면 괜찮겠지’ 하는 종교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대하는 마음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설렘도 사라져버린 그러한 신앙의 양태를 예수님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신앙은 형식화된 종교다. 화석처럼 죽어버린 그러한 신앙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고 대화하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것인데 그러한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종교성은 참된 신앙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첫째 아들을 닮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오늘 본문을 잘 표현해 줍니다. 로마서 1장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산 둘째 아들의 모습을 비유한다면, 로마서 2장은 첫째 아들의 모습입니다. 집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아버지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동생이 돌아오자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이 첫째 아들의 모습이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맏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만한 자의식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었지? 그런데 집을 떠나서 재산을 다 낭비해버린 저 동생과 나를 비교하다니. 나는 우월한 존재인데! 저런 못된 동생에게 아버지가 잘 해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네 속에 사랑이 없구나. 네게 용납하는 마음이 없구나. 네게 동생을 향한 배려가 없구나. 이는 내 아들이고 너의 동생이 아니더냐?”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함께 있었지만, 마음으로부터는 아버지를 멀리 떠난 둘째 아들처럼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깊이 연구하는 학자들은 ‘둘째 아들은 집 나간 탕자이고 첫째 아들은 집 안에 있는 탕자’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첫째 아들도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떠났던 것입니다.
첫째 아들의 이런 모습이 우리 속에는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외적인 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세례를 받아야 한다기에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직분도 맡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습관적인 종교성에 만족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없고,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예배를 향한 두려움과 떨림, 설렘과 기대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성전 뜰만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적을 가슴에 껴안고 다니면서 ‘나는 괜찮을 거야’ 하는 미신에 불구한 것이 아닌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늘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늘 현재적인 것입니다. 어제 기도를 많이 했다고 오늘 기도를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제 찬양을 많이 불렀다고 오늘 찬양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말씀을 많이 읽었다고 오늘은 쉬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인격적인 만남이며 사랑의 대화입니다. 바울의 지적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것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아,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나는 선민이니까, 나는 율법을 받았으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니까, 하나님과 우리와는 특별한 관계가 있으니까, 나는 이방인들을 인도하는 이방의 선생이니까, 나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빛이니까’라는 자부심은 가졌지만 그것을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기독교가 종교화되고 썩어 빠지게 되었을 때는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교회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문제에는 질문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서는 질문을 쉬지 않을 때 교회는 무너졌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신약의 바울도,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입니다. 네 자신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가해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머리도 쉴 겸 해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지금은 예순 살이 넘은, ‘바둑의 황제’라고 불렸던 조훈현이 쓴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챕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바둑의 프로들’입니다. 바둑의 고수들이 대국을 한 후에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복기입니다. ‘내가 이렇게 두었으면 이기지 않았을까? 이쪽으로 하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경기가 끝난 후 이긴 자와 진 자가 마주 앉아서 다시 복기를 하는 것입니다. 복기에 대해 그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복기를 잘해두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좋은 수를 더 깊이 연구하여 다음 대국에 활용할 수 있다. 이처럼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 준다.”
바둑의 고수가 되어도 복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마추어는 복기를 안 합니다. 아니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합니다. 어디에, 그리고 왜 그곳에 바둑알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로는 복기를 할 줄 압니다. 내가 여기에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기를 하며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새롭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회개입니다. 반성입니다.
주일날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이번 주에 제게 이런 부끄러운 일이, 실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되었는데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토해내는 것이 곧 복기입니다. 내 인생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용서받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을 가지고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성도님들은 자신을 향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남을 향해서는 얼마나 많은 물음을 갖고 비판하고 비난했습니까?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을 향해서는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내가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묻지를 않습니다.
자기를 향한 비판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면 성숙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대충은 알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하려고 하니 어리석고 누추한 내 모습이, 내 문제가 노출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향한 비판적 질문은 성장과 성숙의 비결입니다. 질문을 멈추면 성숙도 멈춥니다. 질문을 멈추면 자신이 가진 기득권 속에 매몰되고 맙니다. 질문을 멈추는 것은 변화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인간은 매우 엄청난 수의 질문을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나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남을 향한 것들입니다. 조금이라도 문제를 발견하면 잔인하게 짓밟으려는 것이 우리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의 세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특권을 가졌다.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서 그것들을 너희에게 준 것이냐?”
많이 있는 자에게 많이 요청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네가 특별한 선택을 받았느냐? 그러면 유대인답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너희가 선생이냐?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많이 깨달았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남을 인도하는 사람답게 모범을 보여야 되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거꾸로 가지 않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로마서 2:23)
특권의식과 자부심은 교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축복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그것을 제대로 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많이 가진 자가 하나님 앞에서 요구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직분이나 돈, 지위나 명예, 달란트를 많이 가졌느냐? 그러면 그것들을 어떻게 쓸 것이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시는 것들을 유대인들은 바르게 감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이유라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 이 시대의 한국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한국 교회 전체가 비판과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왜 그럴까요?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있을까요? 곳곳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바르게 믿지 않는 것, 이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일까요? 목사입니다. 두 번째는 장로이고, 세 번째는 권사, 네 번째가 집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 우상을 섬길 뿐만 아니라, 변화하고 개혁하고 성숙해야 할 교회가 세상의 맨 앞이 아닌 맨 마지막에 서서 다른 곳은 다 변하는데 가장 변하기 싫어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세속 사회와 똑같이 돈과 권력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찾아다니고 부정적인 문제가 발생한 곳에 기독교인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장(長)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치열한 다툼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교회 원로들에게서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는 회개 운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문에 광고하는 것을 보며 저는 참 슬펐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런 퍼포먼스에 진정성을 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것들을 회개하고, 다시 이 한국 교회에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와 성령의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남을 향한 서슬 퍼런 비난을 나 자신에게도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가 참으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라고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거짓 회개, 거짓 반성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나부터 변화되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 우리의 공동체가 변화됩니다.
소망교회는 받은 것이 참 많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사명도 많이 받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감사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한국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 귀한 역사를 바르게 감당하는 우리 교회 또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