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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간 바꾸기

디모데전서 1: 12 ~ 17

김지철 목사

2010.09.12

과학으로 신의 영역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30년 동안 루게릭병을 앓아오면서도 이를 잘 이겨내고 있는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이 시대의 영웅적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한 번은 미국 ABC방송에 출현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이 입증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이 신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는 무신론적 입장을 가지고 관찰과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이 결국에는 권위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를 이기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호킹 교수는 지난 9일 출간된 “거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라는 책에서 우주가 대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빅뱅이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이 신성한 존재의 개입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중력의 법칙과 같은 물리학 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주는 무(無)로부터 스스로 창조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의 말입니다. “자발적 창조로 우주와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빅뱅이 일어나고 우주가 팽창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그의 과학이론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과학자들의 몫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을 하는 목사로서 저는 그에게 영적인 무지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신과 신앙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왜소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자로써 수십억, 수백억 광년으로 펼쳐진 거대한 우주를 빅뱅이론과 중력법칙으로 설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신의 영역까지 확대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얼마나 유한하고 왜소하며 나약한 존재인지를 매일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물리학이나 수학법칙을 통해 물질로 대체시키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폄하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물질세계의 언어로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세계,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의 소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에로스적인 열정과 아가페적인 열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를 대우주(macro cosmos)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주와 비교해서 인간을 소우주(micro cosmos)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빅뱅, 중력과 같은 우주의 법칙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법칙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을 끊임없이 인간되게 했던, 그래서 때로는 카오스 속에 들어가기도 했고, 때로는 다시 질서와 평화 속에 이르게 했던 두 가지의 거대한 힘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열정이 있다면 하나는 에로스적인 열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페적인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로스적인 것은 인간을 붙잡고 있는 이기적인 열정입니다. 마치 빅뱅이론처럼 인간의 욕구를 분출하는 열정입니다. 중력의 법칙처럼 모든 것들을 내 소유물로 끌어들이려는 법칙입니다. 자기를 확대하고자 하는 진화론적인 인간의 욕망, 끊임없이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려는 욕망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갈망, 동경, 그리움의 모든 것들을 집합시킨 열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추구하는 대상을 내 것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에로스가 갖고 있는 열정은 내가 더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물을 가지면, 지식을 쌓으면, 아름다움을 더 많이 소유하면, 명예와 권력을 더 많이 갖고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열정, 그것이 바로 인간이 내세우는 빅뱅이론과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열정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열정이 있는데 그것은 아가페적인 열정입니다. 이것은 은혜와 긍휼이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자기를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남의 연약함, 나의 부족함에 참여하고 돌보려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이 열정을 아가페적인 열정, 또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위대한 하강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열정입니다. 이것은 대상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와 위치에 상관없이 사랑하려는 열정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에로스적인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가페적인 열정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가 율법을 알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말했지만, 실제로 그가 산 삶의 태도는 결코 아가페적인 열정으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로스적인 열정으로 그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미완성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을 수치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에 얼마나 투철한지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전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반대한 자들을 겁주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던 마음은 미움과 분노였습니다. 누구든지 정죄하고 때려 부수려는 살기가 솟아났고 힘이 넘쳤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파괴하는 무질서의 힘이었습니다. 능력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점점 더 내가 부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내속에 블랙홀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채워도 공허하고 허무했습니다. 그는 에로스적인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그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의와 공로를 과시하고 싶었던 오만한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삶의 목표와 수단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아주 부끄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못된 인간인가를 고백하면서 그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디모데전서 1:13)

그는 믿음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신이 무지한 상태로 모든 것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은 신앙을 빙자한 신앙적 교만이었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자기 오기와 과시와 집착과 고집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바울은 마치 빅뱅이론과 같았습니다. 자기 확장, 자기 확대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중력의 법칙과도 같았습니다.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듯 자기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에로스적인 열정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과 달란트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멋있고 활력 있게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올바르게 모든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랬던 자신의 모습이 한때는 자랑스러웠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나 뽐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교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자기 속에 만족과 평안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 혼돈과 어둠으로 가득 차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바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고 추악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믿음은 불신앙이었고, 과거의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니라 무지의 함정 속에서 허덕이던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사도바울은 인생의 역전을 경험합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자기 팽창적인 빅뱅, 자신의 블랙홀 속에 모든 것을 끌어들이려했던 소유의식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바닥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새로운 인생을 경험합니다. 자신과 비교해봤더니 나와는 전혀 다르게 살아온 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삶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살았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모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6)

나사렛 예수는 이 땅에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연약한 자와 죄책으로 가득한 자,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조롱받는 이 세상의 소외된 자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바울은 위로부터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의 역사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본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스스로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것이 예수님의 죄가 아닌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통해 그의 에로스적인 열정과 사랑이 아가페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지식을 뛰어넘는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무지한 것이었는지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오히려 연약한 자들과 아파하는 자들, 신음하는 자들과 애통하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키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조차 인간은 탁월해서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이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생각하면 이룰 수 있고 얻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것이 틀렸음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셨기에 예수님의 이름과 십자가의 보혈로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깨달았던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참고 또 참고 인내하면서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미움으로 가득 차있던 그의 마음속에 이제는 사랑이 가득 차 있습니다. 과거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제는 평화가 그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둠과 혼돈과 무질서 속에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인생의 바닥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는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적대하고, 예수님을 미워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못된 사람, 나보다 악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못된 나조차도 택하시고 기다려주시며 사랑해주셨다면 이 세상 어느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자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의 본으로 세워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16절까지 은혜와 긍휼을 입었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었을까요?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인생의 바닥을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만약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예수를 알기 전 바울처럼 아직도 여전히 에로스적인 열정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속에는 교만이 가득하고 미움과 오만과 집착들이 나를 붙들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가장 낮은 자리, 인생의 바닥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바닥을 경험합니까? 어떤 사람은 육체의 질병 때문에, 어떤 사람은 돈과 재물을 잃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가지고 있던 명예가 상실되어서, 어떤 사람은 인생의 실존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어떤 사람은 내 죄악과 무지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바닥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다가옵니다. 십자가의 은총이 다가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고백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열정이 하나님께로 향하길 소망하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디모데전서 1:12)

이제는 새 힘과 새 능력입니다. 우리가 에로스적인 열정만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기 이전의 바울을 붙들고 있던 것들이 우리를 붙잡게 됩니다. 열심히 일해도 내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잠깐의 자랑은 있지만 끊임없이 나를 얽매는 것들이 나를 잡아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아가페적인 사랑의 극치를 깨달으면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나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열정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의 빅뱅이론과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분출하고 자기 속으로 끌어들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보고 남을 위해 기도하며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알고 남이 아파할 때 나도 아파하는 아가페적인 사랑과 열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내게 주신 힘과 능력의 방향을 바꿔야합니다. 우리의 열정이 에로스적인 것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향해 바뀔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 역사는 미움과 분노의 역사가 아니라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과 평화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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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 12 ~ 17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과학으로 신의 영역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30년 동안 루게릭병을 앓아오면서도 이를 잘 이겨내고 있는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이 시대의 영웅적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한 번은 미국 ABC방송에 출현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이 입증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이 신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는 무신론적 입장을 가지고 관찰과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이 결국에는 권위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를 이기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호킹 교수는 지난 9일 출간된 “거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라는 책에서 우주가 대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빅뱅이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이 신성한 존재의 개입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중력의 법칙과 같은 물리학 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주는 무(無)로부터 스스로 창조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의 말입니다. “자발적 창조로 우주와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빅뱅이 일어나고 우주가 팽창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그의 과학이론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비판하는 것은 물론 과학자들의 몫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을 하는 목사로서 저는 그에게 영적인 무지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신과 신앙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왜소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자로써 수십억, 수백억 광년으로 펼쳐진 거대한 우주를 빅뱅이론과 중력법칙으로 설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신의 영역까지 확대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얼마나 유한하고 왜소하며 나약한 존재인지를 매일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물리학이나 수학법칙을 통해 물질로 대체시키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폄하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물질세계의 언어로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세계,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의 소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에로스적인 열정과 아가페적인 열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를 대우주(macro cosmos)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주와 비교해서 인간을 소우주(micro cosmos)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빅뱅, 중력과 같은 우주의 법칙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의 법칙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을 끊임없이 인간되게 했던, 그래서 때로는 카오스 속에 들어가기도 했고, 때로는 다시 질서와 평화 속에 이르게 했던 두 가지의 거대한 힘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열정이 있다면 하나는 에로스적인 열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페적인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로스적인 것은 인간을 붙잡고 있는 이기적인 열정입니다. 마치 빅뱅이론처럼 인간의 욕구를 분출하는 열정입니다. 중력의 법칙처럼 모든 것들을 내 소유물로 끌어들이려는 법칙입니다. 자기를 확대하고자 하는 진화론적인 인간의 욕망, 끊임없이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려는 욕망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갈망, 동경, 그리움의 모든 것들을 집합시킨 열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추구하는 대상을 내 것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에로스가 갖고 있는 열정은 내가 더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물을 가지면, 지식을 쌓으면, 아름다움을 더 많이 소유하면, 명예와 권력을 더 많이 갖고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열정, 그것이 바로 인간이 내세우는 빅뱅이론과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열정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열정이 있는데 그것은 아가페적인 열정입니다. 이것은 은혜와 긍휼이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자기를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남의 연약함, 나의 부족함에 참여하고 돌보려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이 열정을 아가페적인 열정, 또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위대한 하강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열정입니다. 이것은 대상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와 위치에 상관없이 사랑하려는 열정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에로스적인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가페적인 열정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가 율법을 알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말했지만, 실제로 그가 산 삶의 태도는 결코 아가페적인 열정으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로스적인 열정으로 그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미완성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을 수치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에 얼마나 투철한지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전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반대한 자들을 겁주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던 마음은 미움과 분노였습니다. 누구든지 정죄하고 때려 부수려는 살기가 솟아났고 힘이 넘쳤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파괴하는 무질서의 힘이었습니다. 능력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점점 더 내가 부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내속에 블랙홀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채워도 공허하고 허무했습니다. 그는 에로스적인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그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의와 공로를 과시하고 싶었던 오만한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삶의 목표와 수단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아주 부끄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못된 인간인가를 고백하면서 그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디모데전서 1:13)

그는 믿음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신이 무지한 상태로 모든 것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은 신앙을 빙자한 신앙적 교만이었습니다. 신앙이 아니라 자기 오기와 과시와 집착과 고집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바울은 마치 빅뱅이론과 같았습니다. 자기 확장, 자기 확대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중력의 법칙과도 같았습니다.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듯 자기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에로스적인 열정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과 달란트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멋있고 활력 있게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올바르게 모든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랬던 자신의 모습이 한때는 자랑스러웠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나 뽐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교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자기 속에 만족과 평안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 혼돈과 어둠으로 가득 차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바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고 추악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믿음은 불신앙이었고, 과거의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니라 무지의 함정 속에서 허덕이던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사도바울은 인생의 역전을 경험합니다. 주님을 만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자기 팽창적인 빅뱅, 자신의 블랙홀 속에 모든 것을 끌어들이려했던 소유의식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바닥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새로운 인생을 경험합니다. 자신과 비교해봤더니 나와는 전혀 다르게 살아온 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삶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살았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모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6)

나사렛 예수는 이 땅에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연약한 자와 죄책으로 가득한 자,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조롱받는 이 세상의 소외된 자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바울은 위로부터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의 역사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본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스스로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것이 예수님의 죄가 아닌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통해 그의 에로스적인 열정과 사랑이 아가페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지식을 뛰어넘는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무지한 것이었는지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오히려 연약한 자들과 아파하는 자들, 신음하는 자들과 애통하는 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키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조차 인간은 탁월해서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이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생각하면 이룰 수 있고 얻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것이 틀렸음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셨기에 예수님의 이름과 십자가의 보혈로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깨달았던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참고 또 참고 인내하면서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미움으로 가득 차있던 그의 마음속에 이제는 사랑이 가득 차 있습니다. 과거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제는 평화가 그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둠과 혼돈과 무질서 속에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인생의 바닥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는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적대하고, 예수님을 미워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못된 사람, 나보다 악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못된 나조차도 택하시고 기다려주시며 사랑해주셨다면 이 세상 어느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자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의 본으로 세워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16절까지 은혜와 긍휼을 입었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었을까요?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인생의 바닥을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만약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것이라면 예수를 알기 전 바울처럼 아직도 여전히 에로스적인 열정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속에는 교만이 가득하고 미움과 오만과 집착들이 나를 붙들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가장 낮은 자리, 인생의 바닥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바닥을 경험합니까? 어떤 사람은 육체의 질병 때문에, 어떤 사람은 돈과 재물을 잃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가지고 있던 명예가 상실되어서, 어떤 사람은 인생의 실존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어떤 사람은 내 죄악과 무지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바닥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다가옵니다. 십자가의 은총이 다가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고백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열정이 하나님께로 향하길 소망하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디모데전서 1:12)

이제는 새 힘과 새 능력입니다. 우리가 에로스적인 열정만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기 이전의 바울을 붙들고 있던 것들이 우리를 붙잡게 됩니다. 열심히 일해도 내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잠깐의 자랑은 있지만 끊임없이 나를 얽매는 것들이 나를 잡아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아가페적인 사랑의 극치를 깨달으면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나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열정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의 빅뱅이론과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분출하고 자기 속으로 끌어들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보고 남을 위해 기도하며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알고 남이 아파할 때 나도 아파하는 아가페적인 사랑과 열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내게 주신 힘과 능력의 방향을 바꿔야합니다. 우리의 열정이 에로스적인 것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향해 바뀔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 역사는 미움과 분노의 역사가 아니라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과 평화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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