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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대답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어머니와 내가 동일한 인격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눈앞에 계시면 안심이 되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하면서 어머니 품을 떠날 시기가 다가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고, 나는 나구나.’라는 독립된 자의식을 갖게 되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생기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일까? 지금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등의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평생 동안 하고 삽니다. 어떤 때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또 어떤 때는 그저 스쳐지나가듯이 이 질문을 하고 살아갑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철학과 인문학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을 중도에 끝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똑같은 질문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 답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돼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철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무 빨리 대답을 찾는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철학적 시기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대답은 일차적으로 자기 한계성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자존심을 내려놓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설령 나를 낳아주신 부모라 할지라도 우리의 실존적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부모 역시 우리와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가르쳐 준 철학과 인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고 그 안에서 고뇌하는 태도는 참으로 귀합니다. 또 인생을 살면서 꼭 필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 역시 실존적인 질문에 모든 대답을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대답은 오직 나를 지으신 분, 창조주 하나님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를 만드셨기에, 그분이 나를 왜 만드셨는지,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말씀하시기까지 우리는 묻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 전까지 내게는 참된 평안이 없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불안한 물음만이 자신을 지배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인간은 한낱 미물인 동시에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창세기를 읽다 보면,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 하나님은 공개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곤지암에 있는 소망수양관의 소망동산에 오르면, 큰 돌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이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너’ 곧 우리 ‘인간’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떠나보내면서 우리 가슴이 얼마나 아팠습니까? 울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 나 역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구나.’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그 사실을 잊곤 합니다. 마치 내가 다이아몬드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생의 종착역이 흙인데, 마지막을 모르는 사람처럼 우쭐대며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사람이 흙에서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생무상’을 선언한 불교의 사상은 허무성이란 인생의 뒷면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생로병사 역시 인생의 허무를 증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무의미성과 허무성에만 집중한다면 우울증에 걸려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자포자기하며 비관하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자신을 비하시키는 삶을 살아도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흙’이지만 단순한 흙이 아니라는 데,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너는 흙이지만, 고귀한 존재다.”라는 하나님의 선포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사라져 갈 존재면서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묘사할까요?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존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명품 중의 명품, 아니 유일무이한 진품이 인간이라고 증언합니다. 그 내용이 어디에 기록돼 있을까요? 우리가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걸작품인지,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작품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먼저 창조의 순서를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시작으로 마지막 날 인간을 창조하신 후 창조 행위를 마감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다른 모든 피조물을 준비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섯째 날 최종 목표 즉 창조의 궁극적 목적으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보기에 너무 좋구나.”라고 말씀하셨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심히’, ‘너무’, ‘매우’라는 부사어를 보통 때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보기에 좋다’ 정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다 인간의 창조를 마치시고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중)
인간을 만드시고 창조를 마감하면서 하나님이 그토록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에 대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보고 평가를 받을 때, good과 very good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나아가 excellent란 평가는 ‘단연 뛰어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며 하신 표현이 이런 것입니다. 온전히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보시며 너무 기뻐하셨고, 크게 만족스러워 하셨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중)
이 짧은 구절에 ‘기뻐한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사랑한다’, ‘즐거이 부른다’는 말씀이 반복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인기를 얻고 싶어 합니까?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사랑받기를 원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그런데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최고의 존재로 인정하시며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데 우리의 반응이 왜 이렇게 썰렁합니까?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어진 존재인 건 틀림없으나,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도 분명합니다. 시편 8편을 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8편 4절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여기서 ‘인자’라는 건 사람의 아들을 낮춰서 부른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 흙으로 만든 인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인간, 즉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왜 이토록 생각해 주시냐는 감탄입니다. 그 사랑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며, 한낱 꺼져 갈 인생을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다윗의 시에 이러한 고백이 얼마나 많이 등장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에서도 하나님을 ‘선한 목자’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시편 8편 5절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인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5)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보다 조금 못하게, 조금 낮춰서 우리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최고의 왕관을 씌워 주셨는데, 영화와 존귀의 왕관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흙으로 대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역자로 대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현실과 주위 환경에 매몰돼, 삶의 여건이 힘들다고 탄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 너는 나의 존귀한 자녀, 하나뿐인 보배로운 존재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책임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전반부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 중)
‘형상’과 ‘모양’은 사실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란 누구일까요? 히브리어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위엄의 복수, 장엄의 복수라고도 합니다. 위대하시고 장엄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복수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교제하면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품성을 닮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지성과 정서, 의지가 담겨진 인간, 하나님처럼 정의를 사랑하는 인간, 하나님처럼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하나님처럼 도덕적인 인간, 하나님처럼 자유의지가 허락된 인간, 또한 사회적 공동체를 이루며 인격적 실존으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 말씀은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창세기 1장 26절 후반부를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중)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당신의 역할을 위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조화와 질서 가운데 만드신 이 세계를 인간에게 위탁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이 책임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보존하고, 지키며, 관리하는 책임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 세상이 너를 규정하게 만들지 말고, 네가 세상을 규정하며 관리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환경과 여건에만 집중하면, 우리는 자주 흔들리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개척하고 도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꾸셨던 것처럼 우리도 혼돈을 질서와 조화로 바꿔가 보라고 부탁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에는 중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시되 다음과 같이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남자도 하나님의 형상,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은 인간 차별을 반대합니다. 성 차별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남녀 모두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지지합니다. 그러므로 성별에 따른 것이든, 얼굴색에 따른 것이든, 소유에 따른 것이든, 무엇에 의해서도 인간을 차별할 수 없고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겸손하되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며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흙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겸손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내 이름을 불러주길, 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길 바라며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알아주시며 칭찬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자녀 됨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세 번째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누구도 우리를 조롱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복음을 우리에게 선포하셨다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대답이시라고, 그분 안에서 인생의 참 기쁨과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낳았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보았습니까? 건강한지, 눈과 코와 입이 잘 붙어 있고 손과 발은 제대로 움직이는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또한 아이의 눈, 코, 입을 보면서 누구와 닮았는지 비교해 보고, 내 모습을 닮았다고 하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나와 닮은 존재가 나타났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빵만으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보이는 것만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안에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인생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우리 인생의 참 된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며 인정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확인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주님과 함께 이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1: 26 ~ 31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대답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어머니와 내가 동일한 인격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눈앞에 계시면 안심이 되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하면서 어머니 품을 떠날 시기가 다가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고, 나는 나구나.’라는 독립된 자의식을 갖게 되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생기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일까? 지금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등의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평생 동안 하고 삽니다. 어떤 때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또 어떤 때는 그저 스쳐지나가듯이 이 질문을 하고 살아갑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철학과 인문학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을 중도에 끝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똑같은 질문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 질문에 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 답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돼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철학자와 인문학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무 빨리 대답을 찾는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철학적 시기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대답은 일차적으로 자기 한계성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자존심을 내려놓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설령 나를 낳아주신 부모라 할지라도 우리의 실존적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부모 역시 우리와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가르쳐 준 철학과 인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고 그 안에서 고뇌하는 태도는 참으로 귀합니다. 또 인생을 살면서 꼭 필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 역시 실존적인 질문에 모든 대답을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대답은 오직 나를 지으신 분, 창조주 하나님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를 만드셨기에, 그분이 나를 왜 만드셨는지,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말씀하시기까지 우리는 묻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 전까지 내게는 참된 평안이 없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불안한 물음만이 자신을 지배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인간은 한낱 미물인 동시에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창세기를 읽다 보면,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 하나님은 공개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곤지암에 있는 소망수양관의 소망동산에 오르면, 큰 돌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이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너’ 곧 우리 ‘인간’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떠나보내면서 우리 가슴이 얼마나 아팠습니까? 울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 나 역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구나.’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그 사실을 잊곤 합니다. 마치 내가 다이아몬드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생의 종착역이 흙인데, 마지막을 모르는 사람처럼 우쭐대며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사람이 흙에서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생무상’을 선언한 불교의 사상은 허무성이란 인생의 뒷면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생로병사 역시 인생의 허무를 증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무의미성과 허무성에만 집중한다면 우울증에 걸려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자포자기하며 비관하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자신을 비하시키는 삶을 살아도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흙’이지만 단순한 흙이 아니라는 데,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너는 흙이지만, 고귀한 존재다.”라는 하나님의 선포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사라져 갈 존재면서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묘사할까요?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존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명품 중의 명품, 아니 유일무이한 진품이 인간이라고 증언합니다. 그 내용이 어디에 기록돼 있을까요? 우리가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걸작품인지,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작품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먼저 창조의 순서를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시작으로 마지막 날 인간을 창조하신 후 창조 행위를 마감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다른 모든 피조물을 준비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섯째 날 최종 목표 즉 창조의 궁극적 목적으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보기에 너무 좋구나.”라고 말씀하셨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심히’, ‘너무’, ‘매우’라는 부사어를 보통 때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보기에 좋다’ 정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다 인간의 창조를 마치시고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중)
인간을 만드시고 창조를 마감하면서 하나님이 그토록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에 대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보고 평가를 받을 때, good과 very good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나아가 excellent란 평가는 ‘단연 뛰어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며 하신 표현이 이런 것입니다. 온전히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보시며 너무 기뻐하셨고, 크게 만족스러워 하셨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중)
이 짧은 구절에 ‘기뻐한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사랑한다’, ‘즐거이 부른다’는 말씀이 반복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토록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인기를 얻고 싶어 합니까?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사랑받기를 원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그런데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최고의 존재로 인정하시며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데 우리의 반응이 왜 이렇게 썰렁합니까?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어진 존재인 건 틀림없으나,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도 분명합니다. 시편 8편을 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8편 4절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여기서 ‘인자’라는 건 사람의 아들을 낮춰서 부른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 흙으로 만든 인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인간, 즉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왜 이토록 생각해 주시냐는 감탄입니다. 그 사랑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며, 한낱 꺼져 갈 인생을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다윗의 시에 이러한 고백이 얼마나 많이 등장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에서도 하나님을 ‘선한 목자’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시편 8편 5절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인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5)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보다 조금 못하게, 조금 낮춰서 우리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최고의 왕관을 씌워 주셨는데, 영화와 존귀의 왕관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흙으로 대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역자로 대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현실과 주위 환경에 매몰돼, 삶의 여건이 힘들다고 탄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 너는 나의 존귀한 자녀, 하나뿐인 보배로운 존재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책임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전반부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 중)
‘형상’과 ‘모양’은 사실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란 누구일까요? 히브리어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위엄의 복수, 장엄의 복수라고도 합니다. 위대하시고 장엄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복수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교제하면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품성을 닮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지성과 정서, 의지가 담겨진 인간, 하나님처럼 정의를 사랑하는 인간, 하나님처럼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하나님처럼 도덕적인 인간, 하나님처럼 자유의지가 허락된 인간, 또한 사회적 공동체를 이루며 인격적 실존으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 말씀은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창세기 1장 26절 후반부를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중)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당신의 역할을 위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조화와 질서 가운데 만드신 이 세계를 인간에게 위탁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이 책임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보존하고, 지키며, 관리하는 책임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 세상이 너를 규정하게 만들지 말고, 네가 세상을 규정하며 관리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을 환경과 여건에만 집중하면, 우리는 자주 흔들리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개척하고 도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꾸셨던 것처럼 우리도 혼돈을 질서와 조화로 바꿔가 보라고 부탁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에는 중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시되 다음과 같이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남자도 하나님의 형상,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은 인간 차별을 반대합니다. 성 차별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남녀 모두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지지합니다. 그러므로 성별에 따른 것이든, 얼굴색에 따른 것이든, 소유에 따른 것이든, 무엇에 의해서도 인간을 차별할 수 없고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겸손하되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며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흙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겸손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내 이름을 불러주길, 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길 바라며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알아주시며 칭찬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자녀 됨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세 번째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누구도 우리를 조롱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복음을 우리에게 선포하셨다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대답이시라고, 그분 안에서 인생의 참 기쁨과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낳았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보았습니까? 건강한지, 눈과 코와 입이 잘 붙어 있고 손과 발은 제대로 움직이는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또한 아이의 눈, 코, 입을 보면서 누구와 닮았는지 비교해 보고, 내 모습을 닮았다고 하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나와 닮은 존재가 나타났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빵만으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보이는 것만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안에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인생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우리 인생의 참 된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며 인정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확인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주님과 함께 이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8년 2월 1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68장, 32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1:26~31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1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성장하여 부모님 곁을 떠나게 되면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일까? 지금 나는 왜 존재하는 걸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철학과 인문학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설교의 요약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나를 가르쳐 준 철학도 인문학도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하여 나를 지으신 분이 대답해 주십니다. 나를 만드신 창조주께서 왜 나를 만들었는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너는 흙이다, 너는 별거 아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종착역이 흙인데, 마지막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교만하며 살아온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흙이지만 단순한 흑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는 흙이지만 고귀한 존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라질 존재이지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이 너를 만드신 복된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존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명품 중에 명품, 아니 유일무이한 진품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하심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미리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이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기가 너무 좋았다’고 표현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가슴이 뛰면서 칭찬히고 기뻐하셨습니다(31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해서 기뻐하시고 만족하셨습니다(습3:17절).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뻐하시고 좋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빚어 만드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소중하고 위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 영화와 존귀함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인간을 흙으로 대접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료로 인간을 대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세상이 너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세상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존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1:26절 전반부에 하나님이 만드실 때 ‘우리’라고 하는 복수 1인칭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1:26절 후반부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을 인간에게 위탁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보존하고 지키고 관리하는 책임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된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반복하면서 남자도 하나님의 형상,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인간차별을 반대합니다. 기독교 인간론의 핵심은 인간이 결코 차별당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세 번째로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조롱하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 모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발견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소식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확인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성경말씀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묘사하며 설명하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의 형상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오늘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간직하기 위해 나에게 버려야할 모습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좋아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들은 그 기쁨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