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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2003년 10월 첫 주일에 제가 소망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벌써 12년째가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것을 생각해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이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섬겼던 것도 제게는 축복이었지만, 무엇보다 소망교회의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이 제게는 큰 축복이었고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로 가슴 아프고 슬펐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으로 잘 견뎌 나갈 수 있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참 많은 분들께 사랑의 빚, 기도의 빚, 그리고 섬김의 빚을 졌습니다.
제 마음은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담임목사로서 이 일에 충성할 따름입니다.
옛날에 쓴 글을 읽어보다 보니,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2003년 01월 13일 오전 6시라는 것을 보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쓴 글인 것 같습니다. 제가 동사 목사로 있을 때 소망교회를 생각하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첫째, 소망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흔쾌하게 해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신 자유와 해방을 마음껏 선포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셋째,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히려 가진 것으로 한국교회와 이웃을 바르게 섬기게 하옵소서.
이 중에서도 계속 기억되고 마음에 새겨졌던 것은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기도는 첫 번째 기도가 바르게 응답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교회가 될 것인가?’ 이것이 제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제 첫 부임 설교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제목을 꺼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그러는 중에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8장 29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한복음 8:2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가끔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셨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참으로 멋진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고 기뻐하시는가? 또 예수님은 어쩌면 하나님을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고 기뻐할까? 두 분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참 놀랍다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정말로 서로를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아마 아들이 어렸을 때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청소년기를 지나고, 청년과 장년이 되어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분명 복 받은 가정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왜 그렇게 좋아하셨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이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아들이라고 다 기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아버지로서 내가 자녀들이 어떠할 때 기뻐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들, 딸이 어렸을 때는 재롱을 피우는 것이 예뻤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사춘기를 잘 견뎌 낸 것이 고마웠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는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한 것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제 딸은 의사로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뿌듯하고, 아들은 저의 뒤를 따라 목사의 길을 가는 것이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다일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와 제 아내의 생일, 그리고 저의 결혼기념일에 아이들이 꼭 편지를 써 줍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결국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고 딸이어서 고맙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버지, 어머니 때문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해지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때로 섭섭하게도 했고, 때로 말을 잘 안 들었어도, 30대 중반을 넘긴 아들이 쓴 ‘아빠 사랑해요.’ 그 한 마디면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고마워하는 것이 그저 기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늘 인정했습니다.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 어디로 가야 될지에 대해서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당시 유대 사람들은 감히 불러댈 수 없었던 호칭,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출처입니다. 정체성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께 근거한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 (요한복음 8:14)
예수님에게는 그런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의식,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곳도 하나님’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요한복음 8:23)
예수님은 당신의 근거가 하늘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끊임없이 스스로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처럼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향해 외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주신 굉장한 축복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받으면서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나의 나 됨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했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근거해서 나의 정체성을 규정해야 되는지, 나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 존재인지 실존적인 고민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무엇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우울함과 슬픔의 경험을 갖고 있던 제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은 억압되었던 모든 것들로부터 저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이런 부름의 축복을 받은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 근거합니까? 누구의 아내,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 이런 것들도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내 말과 행동을 기뻐하실까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행했던 많은 업적들을 좋아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것들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나’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언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실 때,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즉 파송의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만큼 파송의식이 강한 분이 없습니다. 일종의 사명의식입니다. 하나님이 대사처럼 파송하셔서 “그곳에 가서 일하라.” 하신 그 마음의 확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짧은 구절임에도 몇 번이나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요한복음 8:18)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이 뒤에서 후견자 노릇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요한복음 8:26)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하나님께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해야 할 말과 행동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 (요한복음 8:29)
하나님께서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신다는 확인입니다. 이러한 확인들이 있었을 때, 예수님은 자유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놀라운 축복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파송의식’이라는 것은 곧 사명입니다. 내가 왜 사는지, 이 가정을 하나님께서 왜 내게 주셨는지, 왜 이 직장을 내게 허락하셨는지, 내가 왜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하는지 등을 깨닫는 것이 사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 땅, 이 시대, 이 장소에 보내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확신을 예수님에게 부어 주셨고,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참 주인을 잃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곧 성령의 탄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머무시며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성령님께서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는 말씀처럼 성령의 역사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부활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며 가르쳐 주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다시 기억하고 생각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것,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한 두 가지의 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의 원출처입니다. 교회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말씀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표지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이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이 말씀 속에 교회의 기초와 출처, 시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교회도 목사의 교회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다만 주님의 종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집사, 권사, 장로, 목사의 직분은 교회에 충성을 다하라고 잠시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두 번째 표지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성령께서 함께하시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하면서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때부터 용기와 담대함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신다!” 증거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의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러한 모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교황이 하나님을 대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모토를 가지고, 하나님만이 우리가 영광 돌려야 할 분임을 선포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주인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간혹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위기입니다.
한국교회가 부딪히고 있는 결정적인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물량주의에 빠지는 것도 위기입니다. 명예와 권력에 빠진 지도자가 많이 생기는 것도 위기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부모님의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들은 다만 현상일 뿐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위기가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인 되지 않으니 교회의 거룩성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설렘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만이 교회의 공동체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가 교회입니다. 바로 그 고백 속에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드리십시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시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아버지이십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누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내가 사랑합니다. 성령님이시여, 나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내가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는 나, 바로 그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고백과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 하려는 일 안에서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서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내 욕심이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이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 딸인 것을 이제 기뻐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복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평생 주님 안에서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8: 26 ~ 30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소망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2003년 10월 첫 주일에 제가 소망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벌써 12년째가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것을 생각해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이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로 섬겼던 것도 제게는 축복이었지만, 무엇보다 소망교회의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이 제게는 큰 축복이었고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로 가슴 아프고 슬펐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으로 잘 견뎌 나갈 수 있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참 많은 분들께 사랑의 빚, 기도의 빚, 그리고 섬김의 빚을 졌습니다.
제 마음은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담임목사로서 이 일에 충성할 따름입니다.
옛날에 쓴 글을 읽어보다 보니,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2003년 01월 13일 오전 6시라는 것을 보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쓴 글인 것 같습니다. 제가 동사 목사로 있을 때 소망교회를 생각하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첫째, 소망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흔쾌하게 해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신 자유와 해방을 마음껏 선포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셋째,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히려 가진 것으로 한국교회와 이웃을 바르게 섬기게 하옵소서.
이 중에서도 계속 기억되고 마음에 새겨졌던 것은 첫 번째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기도는 첫 번째 기도가 바르게 응답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교회가 될 것인가?’ 이것이 제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제 첫 부임 설교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제목을 꺼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그러는 중에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8장 29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한복음 8:2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가끔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셨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참으로 멋진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고 기뻐하시는가? 또 예수님은 어쩌면 하나님을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고 기뻐할까? 두 분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참 놀랍다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정말로 서로를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아마 아들이 어렸을 때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청소년기를 지나고, 청년과 장년이 되어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분명 복 받은 가정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왜 그렇게 좋아하셨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이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아들이라고 다 기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아버지로서 내가 자녀들이 어떠할 때 기뻐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들, 딸이 어렸을 때는 재롱을 피우는 것이 예뻤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사춘기를 잘 견뎌 낸 것이 고마웠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는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한 것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제 딸은 의사로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뿌듯하고, 아들은 저의 뒤를 따라 목사의 길을 가는 것이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다일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와 제 아내의 생일, 그리고 저의 결혼기념일에 아이들이 꼭 편지를 써 줍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결국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고 딸이어서 고맙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버지, 어머니 때문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해지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때로 섭섭하게도 했고, 때로 말을 잘 안 들었어도, 30대 중반을 넘긴 아들이 쓴 ‘아빠 사랑해요.’ 그 한 마디면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고마워하는 것이 그저 기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늘 인정했습니다.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 어디로 가야 될지에 대해서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당시 유대 사람들은 감히 불러댈 수 없었던 호칭,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출처입니다. 정체성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께 근거한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 (요한복음 8:14)
예수님에게는 그런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의식,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곳도 하나님’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요한복음 8:23)
예수님은 당신의 근거가 하늘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끊임없이 스스로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처럼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향해 외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주신 굉장한 축복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받으면서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나의 나 됨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했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근거해서 나의 정체성을 규정해야 되는지, 나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 존재인지 실존적인 고민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무엇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우울함과 슬픔의 경험을 갖고 있던 제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은 억압되었던 모든 것들로부터 저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이런 부름의 축복을 받은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 근거합니까? 누구의 아내,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 이런 것들도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내 말과 행동을 기뻐하실까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행했던 많은 업적들을 좋아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것들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나’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언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실 때,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즉 파송의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만큼 파송의식이 강한 분이 없습니다. 일종의 사명의식입니다. 하나님이 대사처럼 파송하셔서 “그곳에 가서 일하라.” 하신 그 마음의 확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짧은 구절임에도 몇 번이나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요한복음 8:18)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이 뒤에서 후견자 노릇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요한복음 8:26)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하나님께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해야 할 말과 행동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 (요한복음 8:29)
하나님께서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신다는 확인입니다. 이러한 확인들이 있었을 때, 예수님은 자유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놀라운 축복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파송의식’이라는 것은 곧 사명입니다. 내가 왜 사는지, 이 가정을 하나님께서 왜 내게 주셨는지, 왜 이 직장을 내게 허락하셨는지, 내가 왜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하는지 등을 깨닫는 것이 사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 땅, 이 시대, 이 장소에 보내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확신을 예수님에게 부어 주셨고,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참 주인을 잃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곧 성령의 탄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께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머무시며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성령님께서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는 말씀처럼 성령의 역사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부활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며 가르쳐 주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다시 기억하고 생각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것,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한 두 가지의 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의 원출처입니다. 교회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말씀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표지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이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이 말씀 속에 교회의 기초와 출처, 시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교회도 목사의 교회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다만 주님의 종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집사, 권사, 장로, 목사의 직분은 교회에 충성을 다하라고 잠시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두 번째 표지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성령께서 함께하시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초대교회의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하면서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때부터 용기와 담대함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신다!” 증거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의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러한 모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교황이 하나님을 대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모토를 가지고, 하나님만이 우리가 영광 돌려야 할 분임을 선포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주인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간혹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위기입니다.
한국교회가 부딪히고 있는 결정적인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물량주의에 빠지는 것도 위기입니다. 명예와 권력에 빠진 지도자가 많이 생기는 것도 위기입니다. 다음 세대들이 부모님의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들은 다만 현상일 뿐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위기가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인 되지 않으니 교회의 거룩성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설렘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만이 교회의 공동체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가 교회입니다. 바로 그 고백 속에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드리십시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시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아버지이십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누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내가 사랑합니다. 성령님이시여, 나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내가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는 나, 바로 그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고백과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 하려는 일 안에서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서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내 욕심이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이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 딸인 것을 이제 기뻐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복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평생 주님 안에서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