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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 16 ~ 18

김지철 목사

2015.11.08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성경을 읽으십니까?

어제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쇼팽의 24개의 전주곡과 소나타, 폴로네이즈를 들었습니다. 다양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들 중에서 조성진의 연주곡을 들었습니다. 조성진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지난 10월 폴란드의 제17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한국의 피아니스트입니다. 국내의 음악계뿐만 아니라 해외의 여러 언론들이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 신문의 제호는 ‘쇼팽에 미친 21세 쇼팽’이었습니다. 이런 찬사를 받고 있는 조성진의 말입니다.
“쇼팽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파리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던 곳을 방문해보고 친구들과의 편지나 기록을 읽어 보면서 음표가 아니라 작곡가의 마음 그 자체를 이해해 보고 싶었습니다.”
조성진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쇼팽의 삶에도, 그의 음악에도 스펀지처럼 깊이 흡수했기에 조성진의 연주는 기술적인 완벽함을 넘어선 감동과 깊이가 담겨 있었다. 작곡가 쇼팽의 마음을 읽었다.’
그에 관한 기사를 읽고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악보인 성경을 매일 읽으면서, 어떤 태도로 읽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심정, 예수님의 심정으로 우리가 그 말씀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늘 겉도는 이유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을 쓴 이들의 마음에, 가장 근본적인 저자인 성령의 마음에 우리가 참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얼마나 소중한 제자였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심정을 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늘 자기 욕심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어땠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지거나 만나 본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가장 열망한 사람이 그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위대한 존재가 되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내가 예수님 닮기를 얼마나 소원했는지 아는가?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 11:1)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도 예수님의 흔적들, 즉 고난의 흔적들이 나타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라디아서 6:17)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닮아야 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심정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누구를 본받기를 소원하셨을까요? 그 답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던 사건 후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안식일법의 위반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왜 잔잔한 물에 돌을 던져 거친 물결을 일으키는가?” 비난을 넘어 핍박을 가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한복음 5:17)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이 땅에서 일하고 있다. 너희가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일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느냐?” 이런 질문을 품은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 ‘지금도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이해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은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새끼를 많이 낳아 이 땅을 채워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동물의 세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는 말씀 뒤에 두 가지를 추가하셨습니다.

…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하나는 ‘땅을 정복하라’입니다. 이 말은 땅을 착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경을 넓혀가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세계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에게만 이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이 땅에서 지속시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놀고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지으신 세계를 존속시키고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창조주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삶의 지경을 넓히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를 다스리고 보호하고 이끌어 가라는 부탁입니다.
이 사명의 완수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하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어 개발이었고, 둘째는 행동 발달입니다. 하나님이 참 멋지고 좋은 분이신 이유는 나를, 인간을, 하나님의 동반자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자 큰 자부심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생태학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존할 것인지 연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시키시면서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앞서 말했듯 첫 번째가 언어 개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 먼저 빛을 만드시고 “이것은 낮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을 만드시고 “이것을 밤이라고 하자”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작명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짐승을 만드신 후에는 짐승들의 이름을 직접 짓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짐승들과 인간이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에게 “네가 이름을 지어라” 부탁하셨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인간에게 하나님의 지성과 판단력을 품고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의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우리가 자녀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어 아닙니까? “엄마라고 해 봐. 아빠라고 해 봐” “이것은 밥이고, 이것은 숟가락이란다.” 사물을 가리키며 말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 땅의 모든 소통은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언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가 성경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금껏 끊임없이 번역되어 온 것입니다. 이 시대에 성경만큼 많이 번역된 책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뜻과 이 시대의 모든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언어의 표현과 문화 등을 만들어 내기를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언어는 지성적인 언어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언어도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아담의 반려자,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고 가셔서 아담과 하와가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아담은 감성적인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창세기 2:23)

성경에는 수많은 시적인 언어, 감성적인 언어들이 있습니다.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잠언과 아가서, 예언서를 읽어 보십시오. 인간의 감정과 하나님의 감정이 끊임없이 만나면서 하나님의 감성적인 언어와 인간의 감성적인 언어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어를 배우고, 말의 문화를 계발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비전의 하나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 땅에 만들어 내는 작업’의 역할이 성도님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어, 사람을 살리는 언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언어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행동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죄악을 지었기 때문에 일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노력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일은 에덴동산을 가꾸고 잘 지켜나가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주인이 정원지기에게 부탁하듯이 땅을 갈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 같습니다. “인간아, 네가 땅을 갈아 보아라. 농부처럼 농사도 지어라.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고 줄기가 솟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 창조의 역사에 네가 직접 참여해 보아라.”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노동의 종교’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하나님이 일하셨고, 또 그 일을 아담과 하와, 모든 인간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일하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게으름은 악 중에 악입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종에게 징계를 내리며 “너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말씀하시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어문화와 노동문화를 창조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위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에도 언어적인 소통을 끊임없이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가르쳐야 됩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임을 가르쳐야 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 부모일지라도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자녀가 인생을 공짜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여기면, 그의 삶은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과 행동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너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느냐? 네 말이 나의 말을 닮아가고 있느냐? 너는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 나를 따르고 있느냐?”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언어와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을 당신의 것으로 삼고 살아가셨습니다. 그중에서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손으로,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편 8:3)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이렇게 다시 사용됩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귀신의 역사를 멸망시키시는 일 속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다른 성경 구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말씀과 행동은 결국 무엇이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첫 번째는 구원사역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창조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왜 병든 자들을 고치셨을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시키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오병이어 기적을 보이셨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태양빛을 선인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비추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인간 전체가 바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창세기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참 좋다고 하신 창조의 질서, 창조의 아름다움에 동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혼란 속에서 코스모스라는 질서를 만드시고, 어둠과 죽음의 문화 속에서 빛과 생명의 문화를 만드신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그렇게 살도록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내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맡기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언어, 나의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너의 언어와 행동이 내가 준 그 땅을 아름답게 하느냐? 사람을 살리고 사람에게 용기를 부어 주는 그런 것이냐? 아니면 너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는 삶이 됩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입니다. 목회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부의 가정살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정치인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육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문화, 예술 활동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단, 목표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인간화되고 절망과 억압이 가득한 패배주의, 냉소주의 시대의 언어문화를 나는 선하게 바꾸려고 하고 있는가? 내가 사람을 살리는 언어를 사용하고, 사람을 세우는 행동을 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교를 만들었던 칼뱅이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주어진 세상에 그 어떤 일도 너무 지저분하고 천해서 빛이 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하는 일은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되어야 합니다. 내 언어가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이 땅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고 세상에서 출세해서 명예와 권력을 얻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첫 번째 가치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입니다. 내 은사, 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이웃에게는 덕이 되는 삶이 될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들딸들이 늘 이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삶에서 어떻게 행해 나갈 것인가를 가르쳐야 됩니다.
나의 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소리 내서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복 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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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 16 ~ 18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성경을 읽으십니까?

어제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쇼팽의 24개의 전주곡과 소나타, 폴로네이즈를 들었습니다. 다양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들 중에서 조성진의 연주곡을 들었습니다. 조성진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지난 10월 폴란드의 제17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한국의 피아니스트입니다. 국내의 음악계뿐만 아니라 해외의 여러 언론들이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 신문의 제호는 ‘쇼팽에 미친 21세 쇼팽’이었습니다. 이런 찬사를 받고 있는 조성진의 말입니다.
“쇼팽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파리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던 곳을 방문해보고 친구들과의 편지나 기록을 읽어 보면서 음표가 아니라 작곡가의 마음 그 자체를 이해해 보고 싶었습니다.”
조성진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쇼팽의 삶에도, 그의 음악에도 스펀지처럼 깊이 흡수했기에 조성진의 연주는 기술적인 완벽함을 넘어선 감동과 깊이가 담겨 있었다. 작곡가 쇼팽의 마음을 읽었다.’
그에 관한 기사를 읽고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악보인 성경을 매일 읽으면서, 어떤 태도로 읽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심정, 예수님의 심정으로 우리가 그 말씀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늘 겉도는 이유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을 쓴 이들의 마음에, 가장 근본적인 저자인 성령의 마음에 우리가 참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얼마나 소중한 제자였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심정을 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늘 자기 욕심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어땠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지거나 만나 본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가장 열망한 사람이 그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위대한 존재가 되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에 그것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내가 예수님 닮기를 얼마나 소원했는지 아는가?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 11:1)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도 예수님의 흔적들, 즉 고난의 흔적들이 나타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라디아서 6:17)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닮아야 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심정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누구를 본받기를 소원하셨을까요? 그 답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던 사건 후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안식일법의 위반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왜 잔잔한 물에 돌을 던져 거친 물결을 일으키는가?” 비난을 넘어 핍박을 가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한복음 5:17)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이 땅에서 일하고 있다. 너희가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일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느냐?” 이런 질문을 품은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 ‘지금도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이해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은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새끼를 많이 낳아 이 땅을 채워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동물의 세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는 말씀 뒤에 두 가지를 추가하셨습니다.

…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하나는 ‘땅을 정복하라’입니다. 이 말은 땅을 착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경을 넓혀가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세계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에게만 이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이 땅에서 지속시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놀고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지으신 세계를 존속시키고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창조주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삶의 지경을 넓히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를 다스리고 보호하고 이끌어 가라는 부탁입니다.
이 사명의 완수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하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어 개발이었고, 둘째는 행동 발달입니다. 하나님이 참 멋지고 좋은 분이신 이유는 나를, 인간을, 하나님의 동반자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자 큰 자부심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생태학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존할 것인지 연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시키시면서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앞서 말했듯 첫 번째가 언어 개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 먼저 빛을 만드시고 “이것은 낮이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을 만드시고 “이것을 밤이라고 하자”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작명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짐승을 만드신 후에는 짐승들의 이름을 직접 짓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짐승들과 인간이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에게 “네가 이름을 지어라” 부탁하셨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인간에게 하나님의 지성과 판단력을 품고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의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우리가 자녀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어 아닙니까? “엄마라고 해 봐. 아빠라고 해 봐” “이것은 밥이고, 이것은 숟가락이란다.” 사물을 가리키며 말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 땅의 모든 소통은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언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가 성경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금껏 끊임없이 번역되어 온 것입니다. 이 시대에 성경만큼 많이 번역된 책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뜻과 이 시대의 모든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언어의 표현과 문화 등을 만들어 내기를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언어는 지성적인 언어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언어도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아담의 반려자,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고 가셔서 아담과 하와가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아담은 감성적인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창세기 2:23)

성경에는 수많은 시적인 언어, 감성적인 언어들이 있습니다.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잠언과 아가서, 예언서를 읽어 보십시오. 인간의 감정과 하나님의 감정이 끊임없이 만나면서 하나님의 감성적인 언어와 인간의 감성적인 언어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어를 배우고, 말의 문화를 계발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비전의 하나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 땅에 만들어 내는 작업’의 역할이 성도님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어, 사람을 살리는 언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언어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행동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죄악을 지었기 때문에 일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노력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일은 에덴동산을 가꾸고 잘 지켜나가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주인이 정원지기에게 부탁하듯이 땅을 갈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 같습니다. “인간아, 네가 땅을 갈아 보아라. 농부처럼 농사도 지어라.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고 줄기가 솟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 창조의 역사에 네가 직접 참여해 보아라.”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노동의 종교’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하나님이 일하셨고, 또 그 일을 아담과 하와, 모든 인간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일하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게으름은 악 중에 악입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종에게 징계를 내리며 “너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말씀하시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어문화와 노동문화를 창조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위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에도 언어적인 소통을 끊임없이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가르쳐야 됩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임을 가르쳐야 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 부모일지라도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자녀가 인생을 공짜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여기면, 그의 삶은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과 행동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너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느냐? 네 말이 나의 말을 닮아가고 있느냐? 너는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 나를 따르고 있느냐?”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언어와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을 당신의 것으로 삼고 살아가셨습니다. 그중에서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손으로,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편 8:3)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이렇게 다시 사용됩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귀신의 역사를 멸망시키시는 일 속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다른 성경 구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말씀과 행동은 결국 무엇이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첫 번째는 구원사역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창조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왜 병든 자들을 고치셨을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시키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오병이어 기적을 보이셨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태양빛을 선인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비추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인간 전체가 바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창세기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참 좋다고 하신 창조의 질서, 창조의 아름다움에 동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혼란 속에서 코스모스라는 질서를 만드시고, 어둠과 죽음의 문화 속에서 빛과 생명의 문화를 만드신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그렇게 살도록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내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맡기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언어, 나의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너의 언어와 행동이 내가 준 그 땅을 아름답게 하느냐? 사람을 살리고 사람에게 용기를 부어 주는 그런 것이냐? 아니면 너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는 삶이 됩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입니다. 목회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부의 가정살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정치인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육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문화, 예술 활동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단, 목표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인간화되고 절망과 억압이 가득한 패배주의, 냉소주의 시대의 언어문화를 나는 선하게 바꾸려고 하고 있는가? 내가 사람을 살리는 언어를 사용하고, 사람을 세우는 행동을 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교를 만들었던 칼뱅이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주어진 세상에 그 어떤 일도 너무 지저분하고 천해서 빛이 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하는 일은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되어야 합니다. 내 언어가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이 땅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고 세상에서 출세해서 명예와 권력을 얻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첫 번째 가치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입니다. 내 은사, 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이웃에게는 덕이 되는 삶이 될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들딸들이 늘 이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삶에서 어떻게 행해 나갈 것인가를 가르쳐야 됩니다.
나의 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소리 내서 말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복 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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