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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 모세 – 기다림의 사람들 3 –

출애굽기 14: 10 ~ 14

김지철 목사

2015.12.13

모든 삶의 자리에는 위기가 있습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을 맞아 ‘기다림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출애굽을 강행한 모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뜻입니다. 비전과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을 가슴에 품고 삽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기다림을 품는 것이 괴롭고 힘듦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면하는 현실과 가슴에 품은 꿈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괴로움의 순간에,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기다림을 더욱 꽉 붙잡습니다. ‘이것이 변화와 성숙의 기회가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끈을 놓아버리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기다림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과 기다림을 상실한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자유와 해방이라는 거대한 꿈,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께만 예배드릴 수 있다는 궁극적인 가치를 붙들고 출애굽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갈 길이 너무 멉니다. 약속의 땅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광야에 내동댕이쳐진 것만 같습니다. 아니 본격적인 광야에 들어서기도 전에 홍해라는 바다가 그들의 걸음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뒤에는 애굽의 왕이 군대를 이끌고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살면서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애굽이라는 옛 삶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성취되고 온전하게 완성된 그 날을 우리는 아직 다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홍해를 건너야 하고 광야를 통과해야 됩니다. 때로는 홀로 허허벌판에 서 있는 것 같은 거칠고 황량한 삶의 자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결단의 자리에 들어섭니다. ‘옛 자리로 되돌아갈 것인가? 힘들어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모세는 과거로 돌아갈 것을 거부했습니다.

위기 상황을 만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웠습니다. 모세는 어땠을까요? 모세도 똑같이 두려웠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도 동일하게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애굽기 14: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 (출애굽기 14:15)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도 모두 부르짖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부르짖었다’를 ‘cried out’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다 쏟아 낸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오늘 그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위기를 만났을 때의 반응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옛날 일이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때가 좋았다!” 그러나 모세는 그 반대였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앞을 향해 나가자!”

…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애굽기 14:12)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가 지금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 애굽 사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가치관의 차이였습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유와 해방,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남겠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의 관심은 처음부터 자유와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신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안전판’이었습니다. 먹고살 만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종이 되든 자유인이 되든, 그것은 처음부터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든, 바로의 노예가 되든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인생의 결정적인 가치관이 그 속에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찬란하든, 부끄럽든 간에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제’는 추억의 대상일 뿐 희망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연연한다는 것은 현재 돌파구가 없다는 뜻입니다. 미래가 닫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일을 자랑하는 것은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는 의미입니다. 과거를 자꾸 끄집어내는 것은 오늘의 현실이 초라하다는 자기 증거일 수 있습니다. 때때로 과거를 추억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늘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기다림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세에게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만났을 때의 태도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붙잡혀서 꼼짝달싹 못 하느냐 아니면 두려움을 넘어가려고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의 대상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애굽기 14:10)

출애굽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따라오는 바로의 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어떠한 용기도 갖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본래 과거는 항상 안전합니다. 과거에 어떤 죽을 고비를 넘겼거나 어떤 위험한 자리에 처해 있었거나,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큼 안전한 것이 없습니다. 이미 다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래는 어떻습니까? 늘 불확실합니다. 어제는 익숙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어제를 생각하면 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의 삶에는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모세도 눈앞에 보이는 바로의 강력한 군대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두렵지만, 바로 왕보다도, 눈에 보이는 군대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가 더 두려워해야 되겠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작정하면서 현상 속에서 생긴 두려움을 이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란,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은 두렵지만 더 큰 가치, 더 큰 인격을 향해서 나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위기가 다가옵니다. 우리에게도 두려운 사건들이 생깁니다.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세상의 두려움을 이겨 나가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를 누리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가치관이 되었을 때, 어떠한 어려움도 물리치고 최고 가치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는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차이점은 불평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위기가 다가오고 두려움이 생기게 되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 위기는 어디서부터 발생했을까? 누가 책임져야 할까?’ 스스로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죄를 뒤집어씌울 속죄양을 찾습니다. 누구에겐가 책임을 물어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지도자 모세가 자신들을 잘못 인도했기 때문에 위기를 만난 것이라며 모세를 향해서 불평을 쏟아내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비난하는 것은 두려웠기 때문에 앞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를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출애굽기 14:11)

“우리가 애굽에 있었으면 그럭저럭 살다가 죽었을 텐데, 당신 때문에 우리가 이곳까지 와서 죽임을 당하게 되지 않았느냐!” 단순한 비판이 아닌 비난이었습니다.
마치 불평하지 않을 때가 없는 것처럼, 불평은 우리 속에 늘 쌓여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상대방이 강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흔들린다고 여겨질 때는 가차 없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불평은 기회주의적인 사고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입에서 불평의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내가 얼마나 기회주의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비판(批判)과 비난(非難)입니다. 두 단어 모두 우리말로는 동일한 ‘비’지만, 한자어로는 다른 글자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혼용해서 쓰지만, 비판의 ‘비’는 ‘비평하다’의 의미이고, ‘판’은 ‘판단하다’입니다. 즉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밝히는 것이 ‘비판’입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옳은 것을 제시하여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이란 긍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난의 ‘비’는 ‘아니다’, ‘거짓’, ‘불의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난’은 ‘힐난하다’는 뜻입니다. 즉 남의 잘못이나 약점을 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이 비난입니다. 게다가 나쁜 감정까지 집어넣어서 비난하기 시작하면,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도 같이 선동적인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됩니다. 아주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하신 말씀, “비판하지 말라”의 근본적인 의미는 “비난하지 말라”입니다. 자신의 모습은 비판하지 않으면서, 남은 조롱하며 비판하는 것을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비판하셨습니다. 그 시대가 말하는 옳고 그름에 대해서 비판하셨습니다. 단순히 비난하고, 감정을 섞어 조롱하려 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 앞에서 불평을 터뜨리며 지도자 모세를 비난했지만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왜 위대한 지도자였을까요? 이런 위기 상황에서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는 “너희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지도자로서 자신이 그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위기 앞에서 우리는 잠잠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왜 이토록 많은 위기를 경험합니까? 이것은 국민들의 위기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위기입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한 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자들의 문제가 시대적인 아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모든 지도자들, 영적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탁월성은 위기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백성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택한 일은 백성을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출애굽기 14:13)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면서 지켜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에 나타난 ‘가만히 서다’는 영어 성경에서 ‘Stand firm’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든든히, 견고하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넋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기다림의 태도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 출발하는 가장 강력한 태도입니다. 마치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깊고 어두운 밤을 깨뜨리는 깊은 침묵인 것입니다. 미래로의 도약을 위해 한껏 웅크린 자세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런 답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출애굽기 14:15)

뒤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앞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가 해야 할 또 다른 일들을 가르치십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출애굽기 14:16)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너는 나의 약속을 바라라. 내가 네게 준 지팡이가 있지 않느냐? 지팡이를 들어라. 그리고 바다 위를 향해서 손을 내밀라. 그러면 바다가 갈라져서 백성들이 마른 땅처럼 지나게 될 것이다.” 모세가 기다리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앞을 향해서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앞을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누구에겐가 책임을 돌리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되돌아가고 싶습니까?
그런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향하고 있는 목표가 바른가? 내가 자유와 생명을 향해서 가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고 앞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위기가 없을 때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질 때가 없습니다. 항상 우리에게는 위기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앞을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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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4: 10 ~ 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든 삶의 자리에는 위기가 있습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을 맞아 ‘기다림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출애굽을 강행한 모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뜻입니다. 비전과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을 가슴에 품고 삽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기다림을 품는 것이 괴롭고 힘듦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면하는 현실과 가슴에 품은 꿈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괴로움의 순간에,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기다림을 더욱 꽉 붙잡습니다. ‘이것이 변화와 성숙의 기회가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끈을 놓아버리고 맙니다. 왜 그럴까요? 기다림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과 기다림을 상실한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자유와 해방이라는 거대한 꿈,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께만 예배드릴 수 있다는 궁극적인 가치를 붙들고 출애굽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갈 길이 너무 멉니다. 약속의 땅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광야에 내동댕이쳐진 것만 같습니다. 아니 본격적인 광야에 들어서기도 전에 홍해라는 바다가 그들의 걸음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뒤에는 애굽의 왕이 군대를 이끌고 뒤따라오고 있습니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살면서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애굽이라는 옛 삶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성취되고 온전하게 완성된 그 날을 우리는 아직 다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홍해를 건너야 하고 광야를 통과해야 됩니다. 때로는 홀로 허허벌판에 서 있는 것 같은 거칠고 황량한 삶의 자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결단의 자리에 들어섭니다. ‘옛 자리로 되돌아갈 것인가? 힘들어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모세는 과거로 돌아갈 것을 거부했습니다.

위기 상황을 만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웠습니다. 모세는 어땠을까요? 모세도 똑같이 두려웠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도 동일하게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애굽기 14: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 (출애굽기 14:15)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도 모두 부르짖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부르짖었다’를 ‘cried out’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다 쏟아 낸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나타납니다. 오늘 그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위기를 만났을 때의 반응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옛날 일이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때가 좋았다!” 그러나 모세는 그 반대였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앞을 향해 나가자!”

…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애굽기 14:12)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가 지금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 애굽 사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가치관의 차이였습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유와 해방,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남겠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의 관심은 처음부터 자유와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신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안전판’이었습니다. 먹고살 만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종이 되든 자유인이 되든, 그것은 처음부터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든, 바로의 노예가 되든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인생의 결정적인 가치관이 그 속에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찬란하든, 부끄럽든 간에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제’는 추억의 대상일 뿐 희망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연연한다는 것은 현재 돌파구가 없다는 뜻입니다. 미래가 닫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일을 자랑하는 것은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는 의미입니다. 과거를 자꾸 끄집어내는 것은 오늘의 현실이 초라하다는 자기 증거일 수 있습니다. 때때로 과거를 추억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늘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기다림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세에게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만났을 때의 태도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붙잡혀서 꼼짝달싹 못 하느냐 아니면 두려움을 넘어가려고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두려움의 대상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애굽기 14:10)

출애굽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따라오는 바로의 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어떠한 용기도 갖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본래 과거는 항상 안전합니다. 과거에 어떤 죽을 고비를 넘겼거나 어떤 위험한 자리에 처해 있었거나,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큼 안전한 것이 없습니다. 이미 다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래는 어떻습니까? 늘 불확실합니다. 어제는 익숙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어제를 생각하면 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의 삶에는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모세도 눈앞에 보이는 바로의 강력한 군대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두렵지만, 바로 왕보다도, 눈에 보이는 군대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가 더 두려워해야 되겠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작정하면서 현상 속에서 생긴 두려움을 이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란,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은 두렵지만 더 큰 가치, 더 큰 인격을 향해서 나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위기가 다가옵니다. 우리에게도 두려운 사건들이 생깁니다.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세상의 두려움을 이겨 나가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를 누리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가치관이 되었을 때, 어떠한 어려움도 물리치고 최고 가치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는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차이점은 불평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위기가 다가오고 두려움이 생기게 되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 위기는 어디서부터 발생했을까? 누가 책임져야 할까?’ 스스로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죄를 뒤집어씌울 속죄양을 찾습니다. 누구에겐가 책임을 물어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지도자 모세가 자신들을 잘못 인도했기 때문에 위기를 만난 것이라며 모세를 향해서 불평을 쏟아내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비난하는 것은 두려웠기 때문에 앞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를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출애굽기 14:11)

“우리가 애굽에 있었으면 그럭저럭 살다가 죽었을 텐데, 당신 때문에 우리가 이곳까지 와서 죽임을 당하게 되지 않았느냐!” 단순한 비판이 아닌 비난이었습니다.
마치 불평하지 않을 때가 없는 것처럼, 불평은 우리 속에 늘 쌓여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상대방이 강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흔들린다고 여겨질 때는 가차 없이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불평은 기회주의적인 사고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입에서 불평의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내가 얼마나 기회주의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비판(批判)과 비난(非難)입니다. 두 단어 모두 우리말로는 동일한 ‘비’지만, 한자어로는 다른 글자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혼용해서 쓰지만, 비판의 ‘비’는 ‘비평하다’의 의미이고, ‘판’은 ‘판단하다’입니다. 즉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밝히는 것이 ‘비판’입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옳은 것을 제시하여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이란 긍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난의 ‘비’는 ‘아니다’, ‘거짓’, ‘불의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난’은 ‘힐난하다’는 뜻입니다. 즉 남의 잘못이나 약점을 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이 비난입니다. 게다가 나쁜 감정까지 집어넣어서 비난하기 시작하면, 마치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도 같이 선동적인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됩니다. 아주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하신 말씀, “비판하지 말라”의 근본적인 의미는 “비난하지 말라”입니다. 자신의 모습은 비판하지 않으면서, 남은 조롱하며 비판하는 것을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비판하셨습니다. 그 시대가 말하는 옳고 그름에 대해서 비판하셨습니다. 단순히 비난하고, 감정을 섞어 조롱하려 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 앞에서 불평을 터뜨리며 지도자 모세를 비난했지만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왜 위대한 지도자였을까요? 이런 위기 상황에서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는 “너희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지도자로서 자신이 그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위기 앞에서 우리는 잠잠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왜 이토록 많은 위기를 경험합니까? 이것은 국민들의 위기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위기입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한 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자들의 문제가 시대적인 아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모든 지도자들, 영적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탁월성은 위기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백성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택한 일은 백성을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출애굽기 14:13)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면서 지켜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에 나타난 ‘가만히 서다’는 영어 성경에서 ‘Stand firm’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든든히, 견고하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넋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기다림의 태도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 출발하는 가장 강력한 태도입니다. 마치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깊고 어두운 밤을 깨뜨리는 깊은 침묵인 것입니다. 미래로의 도약을 위해 한껏 웅크린 자세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런 답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출애굽기 14:15)

뒤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앞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가 해야 할 또 다른 일들을 가르치십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출애굽기 14:16)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너는 나의 약속을 바라라. 내가 네게 준 지팡이가 있지 않느냐? 지팡이를 들어라. 그리고 바다 위를 향해서 손을 내밀라. 그러면 바다가 갈라져서 백성들이 마른 땅처럼 지나게 될 것이다.” 모세가 기다리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앞을 향해서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앞을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누구에겐가 책임을 돌리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되돌아가고 싶습니까?
그런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향하고 있는 목표가 바른가? 내가 자유와 생명을 향해서 가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고 앞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위기가 없을 때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질 때가 없습니다. 항상 우리에게는 위기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앞을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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