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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시는 성령

사도행전 15: 6 ~ 11

김지철 목사

2016.05.15

대한민국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 앞에 명예롭고 좋은 칭호가 많이 있지만, 불명예스러운 칭호도 붙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갈등공화국’입니다.
OECD 회원국 중에 사회갈등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터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습니다. 2009년에 우리나라는 4위를 차지했고, 2010년에는 터키를 바로 잇는 2위까지 올라갔다가 2011년에는 세 계단 내려온 5위를 기록했습니다. 터키, 그리스, 칠레, 이탈리아 등과 함께 사회갈등지수가 높은 나라로 대한민국이 지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높은 순위임에도 불구하고 조사 대상국 34개 나라 중 사회 갈등을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27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사회 속에 지역갈등, 이념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 정치적·경제적 갈등 등이 자꾸만 증폭되고 있는 이유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갈등은 여야의 정치 갈등뿐만 아니라 이념적인 갈등으로도 확대됩니다. 소득 불평등에 의한 금수저, 흙수저 논란과 노사갈등, 전관예우에 대한 논란 등에는 사람들의 분노도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사회·문화적인 갈등 안에는 다문화가정, 지역갈등, 남녀갈등이 여전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갈등은 갈등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용도 지불하게 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 연간 무려 300조에 가까운 비용이 갈등 때문에 소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남북의 군사 대결과 정치 대결로 특별한 갈등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핵 실험을 하면서 세계를 향해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남북 대화는 단절되었고, 정부와 민간 NGO, 교회 차원에서도 북한에 접촉할 모든 통로가 막힌 현실입니다.
이러한 갈등 사회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바로 소통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밑바닥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분노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인간은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이 금방 변화되는 줄 알았습니다. 비겁한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 되고, 성격이 못된 사람이 착해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던 사람이 남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쉽게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잠깐 동안은 변화된 것 같다가도, 금세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사람이 얼마나 잘 안 바뀌는지 말입니다.
갈등이 있는 자리를 보면,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더 갈등을 조장하고 더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더욱 속상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신앙으로 싸움을 하기 때문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사랑과 화해로 나아가기가 어려운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이 곧 하나님의 주장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반항아로 몰았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지적하면 이단으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중세 시대에 발생한 역사의 비극이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인간의 역사는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는 달리 갈등과 다툼의 연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친히 대면했던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번째 부부였지만, 하나님을 떠나 인생의 탐욕을 추구한 순간부터 하나 되는 축복을 상실했습니다. 첫 번째 형제였던 가인과 아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이는 첫 살인을 저지릅니다. 이것이 동족 간의 살상과 다른 민족 간의 살상으로 확대된 것을 성경은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사건을 생각해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천년 전의 역사를 보면, 평화의 왕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큰 갈등과 다툼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헤롯 왕은 메시야를 갈등의 주범으로 몰아갔습니다. 당시 베들레헴 근처에서 어린 예수님을 찾지 못한 헤롯 왕은 두 살 미만의 어린 아이를 모두 학살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그 탄생의 소식에 권력을 뺏길까 두려웠던 헤롯은 죄 없는 아이들을 마구 죽인 것입니다. 얼마나 비극적이고 또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이러한 아이러니는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입니다. 그 속에 인간의 미움, 인간의 분노, 인간의 죄악,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야망과 탐욕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란 하나님과 인간의 갈등을 증폭시킨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속에 인간의 모든 죄악과 갈등과 미움, 분노를 수렴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갈등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갈등이 나쁜 것일까요? 갈등 없는 삶이 존재할까요? 갈등 자체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갈등이 없는 인간관계나 공동체는 없습니다. 문제는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갈등 자체를 싫어하고 무서워해서 갈등이 생기면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갈등이 있는 자리는 피합니다. 하지만 갈등이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갈등을 경험하면서도 갈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문제가 많은데 화평한 척하며 방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문제 해결을 지연시킬 뿐입니다. 모른 척한 갈등은 어느 순간에 강력한 폭발력으로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갈등이 생기면 공격적으로 대응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려드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소중함보다는 ‘무조건 내가 이겨야 된다’는 자기과시가 큰 경우에 그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별것 아닌 것을 확대해석하여 상대방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폭언을 일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느 곳에 문제가 있는지 곳곳을 뒤지듯 살피면서 갈등을 싸움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갈등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갈등의 이유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논쟁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갈등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은 초대교회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사도들의 회의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 만났습니다. 두 교회는 모두 성령 충만한 교회였고, 지도자들 또한 영적으로 위대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교회에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핍박받던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도망가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의 중심인물은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그들은 이방 선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안디옥 교회를 세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이 교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을 가지고 온 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히브리파 정통 유대인이지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중심인물로는 베드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맞아.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해야 하고, 유대 율법을 지켜야 해.’ 믿음에 행위를 추가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결국 두 교회는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비판하고,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두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논의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가? 어떻게 하면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가?”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 (사도행전 15:2)

‘바울과 및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고, ‘그들’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사이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은, ‘into sharp dispute and debate with them’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집에서 산다고 해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문제, 아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서로가 내놓고 대화할 수 있어야 건강한 부부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자신의 걱정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안을 수 있어야 복된 가정입니다.
갈등이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갈등을 숨기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갈등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깨닫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두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로 선언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모두 기도와 말씀이 있는 교회였고,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입장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입장이 차이는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나와 똑같은 사람만 존재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나와 얼굴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가운데 서로 간에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을 존중할 수 있는 관계가 건전하고 복된 관계입니다.
6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사도행전 15:6∼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보수적인 입장을, 안디옥 교회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서로의 입장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다는 것에는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강조점이 다른 것은 서로 용납하자고 뜻을 모읍니다.
소망교회는 통합 측 장로교회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이름 지어진 교회는 많습니다. 거기에는 소망교회와 같은 통합이 있고, 합동이 있고, 개혁, 합심, 정통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교단에 속해 있었는지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는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믿는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아는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에 관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장벽과 차별성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교회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차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5:9)

입장은 다르지만 믿음이 같기 때문에 차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다를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믿음이 다른 것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이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본래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단에는 주인 행세를 하는 교주가 있습니다. 교주는 성도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고,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치 재림주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모두 죄악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성도이고, 그분에게 예배드리는 공동체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는 서로에게 믿음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을 확인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고, 외모에 대한 차별이 없고,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많이 공부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소중하다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 두 교회가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부분으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선언하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우주적 종교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시니 (사도행전 15:11)

구원은 ‘주 예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내 능력, 내 실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역사를 받는 것입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사도행전 15:8)

그들은 자신들에게 성령을 주신 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거룩한 영을 주셔서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역사를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함부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과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믿음의 형제자매이니 서로 사랑하며 세상의 갈등과 다툼을 멈추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문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부터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화해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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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 6 ~ 11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대한민국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 앞에 명예롭고 좋은 칭호가 많이 있지만, 불명예스러운 칭호도 붙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갈등공화국’입니다.
OECD 회원국 중에 사회갈등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터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습니다. 2009년에 우리나라는 4위를 차지했고, 2010년에는 터키를 바로 잇는 2위까지 올라갔다가 2011년에는 세 계단 내려온 5위를 기록했습니다. 터키, 그리스, 칠레, 이탈리아 등과 함께 사회갈등지수가 높은 나라로 대한민국이 지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높은 순위임에도 불구하고 조사 대상국 34개 나라 중 사회 갈등을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27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사회 속에 지역갈등, 이념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 정치적·경제적 갈등 등이 자꾸만 증폭되고 있는 이유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갈등은 여야의 정치 갈등뿐만 아니라 이념적인 갈등으로도 확대됩니다. 소득 불평등에 의한 금수저, 흙수저 논란과 노사갈등, 전관예우에 대한 논란 등에는 사람들의 분노도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사회·문화적인 갈등 안에는 다문화가정, 지역갈등, 남녀갈등이 여전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갈등은 갈등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용도 지불하게 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 연간 무려 300조에 가까운 비용이 갈등 때문에 소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남북의 군사 대결과 정치 대결로 특별한 갈등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핵 실험을 하면서 세계를 향해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남북 대화는 단절되었고, 정부와 민간 NGO, 교회 차원에서도 북한에 접촉할 모든 통로가 막힌 현실입니다.
이러한 갈등 사회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바로 소통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밑바닥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분노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인간은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이 금방 변화되는 줄 알았습니다. 비겁한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 되고, 성격이 못된 사람이 착해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던 사람이 남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쉽게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잠깐 동안은 변화된 것 같다가도, 금세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사람이 얼마나 잘 안 바뀌는지 말입니다.
갈등이 있는 자리를 보면,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더 갈등을 조장하고 더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더욱 속상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신앙으로 싸움을 하기 때문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사랑과 화해로 나아가기가 어려운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이 곧 하나님의 주장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반항아로 몰았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지적하면 이단으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중세 시대에 발생한 역사의 비극이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인간의 역사는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는 달리 갈등과 다툼의 연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친히 대면했던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번째 부부였지만, 하나님을 떠나 인생의 탐욕을 추구한 순간부터 하나 되는 축복을 상실했습니다. 첫 번째 형제였던 가인과 아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이는 첫 살인을 저지릅니다. 이것이 동족 간의 살상과 다른 민족 간의 살상으로 확대된 것을 성경은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사건을 생각해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천년 전의 역사를 보면, 평화의 왕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큰 갈등과 다툼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헤롯 왕은 메시야를 갈등의 주범으로 몰아갔습니다. 당시 베들레헴 근처에서 어린 예수님을 찾지 못한 헤롯 왕은 두 살 미만의 어린 아이를 모두 학살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그 탄생의 소식에 권력을 뺏길까 두려웠던 헤롯은 죄 없는 아이들을 마구 죽인 것입니다. 얼마나 비극적이고 또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이러한 아이러니는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입니다. 그 속에 인간의 미움, 인간의 분노, 인간의 죄악,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야망과 탐욕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란 하나님과 인간의 갈등을 증폭시킨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속에 인간의 모든 죄악과 갈등과 미움, 분노를 수렴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갈등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갈등이 나쁜 것일까요? 갈등 없는 삶이 존재할까요? 갈등 자체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갈등이 없는 인간관계나 공동체는 없습니다. 문제는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갈등 자체를 싫어하고 무서워해서 갈등이 생기면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갈등이 있는 자리는 피합니다. 하지만 갈등이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갈등을 경험하면서도 갈등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문제가 많은데 화평한 척하며 방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문제 해결을 지연시킬 뿐입니다. 모른 척한 갈등은 어느 순간에 강력한 폭발력으로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갈등이 생기면 공격적으로 대응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려드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소중함보다는 ‘무조건 내가 이겨야 된다’는 자기과시가 큰 경우에 그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별것 아닌 것을 확대해석하여 상대방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폭언을 일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느 곳에 문제가 있는지 곳곳을 뒤지듯 살피면서 갈등을 싸움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갈등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갈등의 이유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논쟁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갈등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은 초대교회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사도들의 회의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 만났습니다. 두 교회는 모두 성령 충만한 교회였고, 지도자들 또한 영적으로 위대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교회에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핍박받던 헬라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도망가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의 중심인물은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그들은 이방 선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안디옥 교회를 세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이 교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을 가지고 온 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히브리파 정통 유대인이지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중심인물로는 베드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맞아.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해야 하고, 유대 율법을 지켜야 해.’ 믿음에 행위를 추가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결국 두 교회는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비판하고,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두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논의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가? 어떻게 하면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가?”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 (사도행전 15:2)

‘바울과 및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고, ‘그들’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사이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은, ‘into sharp dispute and debate with them’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집에서 산다고 해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문제, 아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서로가 내놓고 대화할 수 있어야 건강한 부부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자신의 걱정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안을 수 있어야 복된 가정입니다.
갈등이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갈등을 숨기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갈등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깨닫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두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로 선언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모두 기도와 말씀이 있는 교회였고,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입장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입장이 차이는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나와 똑같은 사람만 존재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나와 얼굴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가운데 서로 간에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을 존중할 수 있는 관계가 건전하고 복된 관계입니다.
6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사도행전 15:6∼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보수적인 입장을, 안디옥 교회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서로의 입장은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다는 것에는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강조점이 다른 것은 서로 용납하자고 뜻을 모읍니다.
소망교회는 통합 측 장로교회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이름 지어진 교회는 많습니다. 거기에는 소망교회와 같은 통합이 있고, 합동이 있고, 개혁, 합심, 정통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교단에 속해 있었는지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는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믿는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아는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에 관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장벽과 차별성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교회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차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5:9)

입장은 다르지만 믿음이 같기 때문에 차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다를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믿음이 다른 것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이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본래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단에는 주인 행세를 하는 교주가 있습니다. 교주는 성도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고,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치 재림주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모두 죄악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성도이고, 그분에게 예배드리는 공동체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는 서로에게 믿음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을 확인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고, 외모에 대한 차별이 없고,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많이 공부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소중하다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 두 교회가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부분으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선언하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우주적 종교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시니 (사도행전 15:11)

구원은 ‘주 예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내 능력, 내 실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역사를 받는 것입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사도행전 15:8)

그들은 자신들에게 성령을 주신 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거룩한 영을 주셔서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역사를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함부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과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믿음의 형제자매이니 서로 사랑하며 세상의 갈등과 다툼을 멈추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문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부터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화해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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