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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시는 소통의 영

사도행전 2: 5 ~ 13

김지철 목사

2016.04.17

인간관계에서 소통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수요일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었습니다. 각 언론들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새누리당’이 제 2당이 되었고, ‘더불어 민주당’이 제 1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민회당’이 새로운 의석수를 차지했습니다. 가장 친여적이고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는 그 다음 날, ‘박대통령과 친박의 오만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다’라는 제목으로, 이제는 불통에서 소통의 길로 나갈 것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모든 사람과 다 소통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소통은 거리와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관계는 근심과 걱정, 염려가 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아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취업 포털 사이트인 ‘인크루트’에서 자사 직장인 585명을 대상으로 동료들에게 얼마만큼 스트레스를 받는지에 대해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93%가 직장 동료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직장 동료가 가장 비호감인가?’ 하는 물음에는, 말이 잘 안 통하는 동료(25.7%), 남의 험담을 하는 동료(20.1%),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동료(15.6%)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스트레스가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95%가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가정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과 부대끼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과 가까이 있는데 만약 소통이 잘 안 되거나 아예 단절된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구원은 곧 소통입니다.

성경은 소통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아, 나와 대화하자. 나는 네 이야기를 들을 테니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 봐라.”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들과 소통하면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감사하며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메시아의 날을 소통의 날, 평화의 날로 선포하십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 종말론적인 희망을 꿈꾸시면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6∼9)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될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어린 송아지가 이리와 표범과 사자와 함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어도 다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면, 이 모든 피조 세계에 소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양과 이리가, 아이와 독사가 함께 있어도 평화의 세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 메시아의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혔던 담을 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하나님이 다시 이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교만과 열등감으로 막혔던 담들, 미움과 분노로 높이 쌓였던 장벽들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깨부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자리에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나와 이웃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계와 소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참여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과 소통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지였고, 우리를 향한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성경을 통해 추적해 보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셨을 때 공관복음에서 동일하게 기록하는 한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닫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태복음 3:16)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마가복음 1:10)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누가복음 3:21)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늘이 열렸다’로, 마가복음에는 ‘하늘이 갈라졌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하늘이 갈라졌다’는 본래 뜻은 ‘하늘이 찢어졌다’입니다. 막혔던 것이 트여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즉 세례를 받으실 때의 핵심은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의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세계,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서를 보면,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1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에스겔 1:1)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은 간헐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이것은 간헐적인 사건이 아니라 상시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에게 다가온 새로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막혔던 담을 하나님께서 친히 허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모든 인간에게 허락하시려고 승천하시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속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열린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소통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 앞으로 오실 성령님이 어떤 일을 보여 주실지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누가복음 4:18∼19)

예수님의 생애와 성령 충만한 역사의 목표는 한 가지입니다. 자유이고, 해방입니다. 죄와 억눌림에서의 자유, 불안과 걱정에서의 자유,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자리로, 자유와 해방과 평화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만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억눌리고 병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에 얽매여 탄식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그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제는 네가 하나님과 소통해라. 이제는 내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소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소통이 열리면서 이웃을 향해서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오순절 때 성령이 강림하는 역사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교회의 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은 본래 봄의 수확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잔치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잔치가 되었습니다. 하늘의 잔치가 성령을 통해 이 땅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통하게 되었고, 이웃과 이웃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각 나라의 방언을 말하고 또 들음으로써 인간 사이를 막고 있던 담이 허물어졌음을 선언하는 것이 성령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자 역할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정반대입니다. 마귀는 서로 미워하게 하고, 불신하게 합니다. 분열과 다툼을 조장합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인간을 묶습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인간과 인간을 서로 만나게 합니다. 갈라진 것, 끊어진 것을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막힌 것을 뚫어 버리고, 높게 서 있는 장벽들을 부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막힌 곳을 찾아 뚫어 나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이고 사명입니다.
인류는 여러 가지 담을 쌓아 왔습니다. 종족별 담이 있었습니다. 지역 간에 담이 있었습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도 계급적인 담이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차별의 담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 쌓아 온 이 담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풀어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축복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정체성입니다. “이제 너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인 것을 확인해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해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는 복된 존재임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나는 이미 성령의 사람입니다.
둘째, 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기적인 삶을 버려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해라. 네 이웃과 소통해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의 아름다움과 소통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원하셨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소통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하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소통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나를 부르셨고, 또 나를 세상에 파송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는 처음에 소리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말로 이어지게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 (사도행전 2:2)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4)

초대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제자들에게 ‘말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터뜨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말하는 것은 듣는 사건으로 승화되기 시작합니다.
본래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져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레 언어가 흩어졌습니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언어의 장벽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의 사건이 있었을 때 언어가 서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닫힌 언어, 막힌 언어가 아니라 열린 언어, 이해하고 깨닫는 언어로 우리의 삶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사도행전 2:6)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사도행전 2:8)

말과 들음이 함께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소통은 늘 말과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듣고 말하게 될 때 소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초대교회는 무엇을 이야기했을까요?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사도행전 2:11)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 일’이란 바로 예수님이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초대교회의 신앙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동안 나를 중심으로 살았던 이기적인 옛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폐쇄적인 자아를 가지고 살았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중심의 삶을 통해 닫힌 자아를 확장시키라는 것입니다. 열린 자아를 갖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시대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소통을 시작하십시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이미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성령의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누구와 대화를 해야 될까요? 첫 번째,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잃어버렸던 대화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아뢸 때, 우리와 사랑으로 대화하며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은 내게 가르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소통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소통하기를 시작하십시오. 아내와 대화하고 남편과 소통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밥 달라. 물 달라”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명령입니다. 수직적이거나 경쟁적인 관계에서는 대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인간처럼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대화하고 싶어서 너처럼 낮아졌다. 그러니 이제 나와 대화해 보겠니?” 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가족 관계에서부터 소통을 열어 놓지 않으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성령의 공동체가 되기 어렵습니다. 소통의 공동체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보며 이 세상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이 갖는 축복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으로 우리의 삶이 열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영, 소통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이 제게 주신 믿음의 축복을 이 땅에서 마음껏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선언하면서 살아가시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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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 5 ~ 13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인간관계에서 소통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수요일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었습니다. 각 언론들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새누리당’이 제 2당이 되었고, ‘더불어 민주당’이 제 1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민회당’이 새로운 의석수를 차지했습니다. 가장 친여적이고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는 그 다음 날, ‘박대통령과 친박의 오만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다’라는 제목으로, 이제는 불통에서 소통의 길로 나갈 것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모든 사람과 다 소통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소통은 거리와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관계는 근심과 걱정, 염려가 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아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취업 포털 사이트인 ‘인크루트’에서 자사 직장인 585명을 대상으로 동료들에게 얼마만큼 스트레스를 받는지에 대해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93%가 직장 동료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직장 동료가 가장 비호감인가?’ 하는 물음에는, 말이 잘 안 통하는 동료(25.7%), 남의 험담을 하는 동료(20.1%),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동료(15.6%)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스트레스가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95%가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가정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과 부대끼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과 가까이 있는데 만약 소통이 잘 안 되거나 아예 단절된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구원은 곧 소통입니다.

성경은 소통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아, 나와 대화하자. 나는 네 이야기를 들을 테니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 봐라.”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들과 소통하면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감사하며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메시아의 날을 소통의 날, 평화의 날로 선포하십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 종말론적인 희망을 꿈꾸시면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6∼9)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될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어린 송아지가 이리와 표범과 사자와 함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어도 다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면, 이 모든 피조 세계에 소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양과 이리가, 아이와 독사가 함께 있어도 평화의 세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 메시아의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혔던 담을 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하나님이 다시 이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교만과 열등감으로 막혔던 담들, 미움과 분노로 높이 쌓였던 장벽들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깨부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동참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자리에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나와 이웃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계와 소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참여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과 소통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지였고, 우리를 향한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성경을 통해 추적해 보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셨을 때 공관복음에서 동일하게 기록하는 한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닫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태복음 3:16)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마가복음 1:10)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누가복음 3:21)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늘이 열렸다’로, 마가복음에는 ‘하늘이 갈라졌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하늘이 갈라졌다’는 본래 뜻은 ‘하늘이 찢어졌다’입니다. 막혔던 것이 트여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즉 세례를 받으실 때의 핵심은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의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세계,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서를 보면,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1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에스겔 1:1)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늘이 열리는 것은 간헐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이것은 간헐적인 사건이 아니라 상시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에게 다가온 새로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막혔던 담을 하나님께서 친히 허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모든 인간에게 허락하시려고 승천하시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속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열린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소통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 앞으로 오실 성령님이 어떤 일을 보여 주실지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누가복음 4:18∼19)

예수님의 생애와 성령 충만한 역사의 목표는 한 가지입니다. 자유이고, 해방입니다. 죄와 억눌림에서의 자유, 불안과 걱정에서의 자유,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자리로, 자유와 해방과 평화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만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억눌리고 병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에 얽매여 탄식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그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제는 네가 하나님과 소통해라. 이제는 내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소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소통이 열리면서 이웃을 향해서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오순절 때 성령이 강림하는 역사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교회의 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은 본래 봄의 수확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잔치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잔치가 되었습니다. 하늘의 잔치가 성령을 통해 이 땅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통하게 되었고, 이웃과 이웃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각 나라의 방언을 말하고 또 들음으로써 인간 사이를 막고 있던 담이 허물어졌음을 선언하는 것이 성령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자 역할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정반대입니다. 마귀는 서로 미워하게 하고, 불신하게 합니다. 분열과 다툼을 조장합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인간을 묶습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인간과 인간을 서로 만나게 합니다. 갈라진 것, 끊어진 것을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막힌 것을 뚫어 버리고, 높게 서 있는 장벽들을 부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막힌 곳을 찾아 뚫어 나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이고 사명입니다.
인류는 여러 가지 담을 쌓아 왔습니다. 종족별 담이 있었습니다. 지역 간에 담이 있었습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도 계급적인 담이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차별의 담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 쌓아 온 이 담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풀어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축복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정체성입니다. “이제 너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인 것을 확인해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해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는 복된 존재임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나는 이미 성령의 사람입니다.
둘째, 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기적인 삶을 버려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해라. 네 이웃과 소통해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의 아름다움과 소통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원하셨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소통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하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소통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나를 부르셨고, 또 나를 세상에 파송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는 처음에 소리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말로 이어지게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 (사도행전 2:2)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4)

초대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제자들에게 ‘말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터뜨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말하는 것은 듣는 사건으로 승화되기 시작합니다.
본래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져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레 언어가 흩어졌습니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언어의 장벽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의 사건이 있었을 때 언어가 서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닫힌 언어, 막힌 언어가 아니라 열린 언어, 이해하고 깨닫는 언어로 우리의 삶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사도행전 2:6)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사도행전 2:8)

말과 들음이 함께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소통은 늘 말과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듣고 말하게 될 때 소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초대교회는 무엇을 이야기했을까요?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사도행전 2:11)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 일’이란 바로 예수님이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초대교회의 신앙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동안 나를 중심으로 살았던 이기적인 옛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폐쇄적인 자아를 가지고 살았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중심의 삶을 통해 닫힌 자아를 확장시키라는 것입니다. 열린 자아를 갖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시대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소통을 시작하십시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이미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성령의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누구와 대화를 해야 될까요? 첫 번째,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잃어버렸던 대화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아뢸 때, 우리와 사랑으로 대화하며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은 내게 가르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소통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소통하기를 시작하십시오. 아내와 대화하고 남편과 소통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밥 달라. 물 달라”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명령입니다. 수직적이거나 경쟁적인 관계에서는 대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인간처럼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대화하고 싶어서 너처럼 낮아졌다. 그러니 이제 나와 대화해 보겠니?” 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가족 관계에서부터 소통을 열어 놓지 않으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성령의 공동체가 되기 어렵습니다. 소통의 공동체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보며 이 세상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이 갖는 축복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으로 우리의 삶이 열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영, 소통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이 제게 주신 믿음의 축복을 이 땅에서 마음껏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선언하면서 살아가시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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