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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 17 ~ 20

김지철 목사

2015.01.04

기쁨을 잃은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한 십여 년간 한국 생활을 경험한 영국의 젊은 언론인, 다니엘 튜더(Daniel Tudor)가 한국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제목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원제 – Korea : The Impossible Country)입니다. 그는 책에서 대한민국이 엄청난 기적을 이루었지만, 놀랍게도 국민들은 불만족 속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음은 그의 글의 일부입니다.
“50년 전 한국은 가혹한 독재에서 혼란스러운 민주주의로 요동쳤다가 다시 독재로 빠져든, 가난과 전쟁으로 찢겨진 나라였다. 지금이야 한국이 전 세계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발돋움해 풍요와 안정을 이룩한 나라의 모델이 된 것은 물론, 대중문화적 성취까지 이뤄내고 있지만, 국가로서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했던 때도 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지난 세기 동안 도무지 믿기 어려울 만큼 인상적인 건국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이 이유만으로도, 한국은 ‘불가능한 (기적을 이룬) 나라’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 한국인은 물질적 성공과 안정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만족감을 크게 잃어가고 있다. 한국은 교육, 명예, 외모, 직업적 성취에서 스스로를 불가능한 기준에 획일적으로 맞추도록 너무 큰 압박을 가하는 나라인 것이다.”
다 똑같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경쟁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경쟁심 때문에 불만족에 허덕이며 기쁨을 상실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은 한마디로 ‘한국 백성은 대단한 백성이지만, 동시에 만족할 줄 몰라서 불행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경제 지표는 세계 1, 2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정작 자기 삶의 만족도는 100등을 넘어 꼴찌에 가까운 백성이 바로 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참되게 이끄는 힘은 기쁨입니다.

한화 야구 감독으로 돌아온 김성근씨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합니다. 야구든 인생이든 만족하는 순간 끝이라는 것입니다. 신문기자가 그것은 병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생은 모 아니면 도다.” 얼마나 강력한 게임 승부사로서의 기질을 보여주는 말입니까?
애플의 CEO였던 스티브 잡스가 대학생들의 졸업 연설 자리에서 한 말도 꽤 유명합니다. “Stay foolish. Stay hungry.” 이 말은, 자신의 인생에서 늘 부족함과 모자람을 알고 성과를 내기 위해 달려가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처럼 소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승부사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업적과 성과를 내기 위한 언어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관점과 태도에는 약점이 있습니다.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런 방향으로만 가면 엄청난 경쟁심과 승부의식 속에서 사람이 피폐해지기 시작하고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의 모든 것이 모 아니면 도,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는 아니며, 인생이란 항상 승리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승부사적인 기질이 잠깐의 성취감을 안겨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근본적인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건강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자신의 내면세계의 느낌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 넉넉하게 자신을 개방시킬 줄 알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일을 성취시키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세계, 인간관계, 그리고 일의 성취라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바로 기쁨입니다. 기쁨의 힘은, 내면세계의 자존감을 살려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하며,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든 그 속에서 삶을 즐거워할 줄 아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2015년 한 해, 성도님들이 이 기쁨의 힘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평안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를 열 수 있고, 맡겨진 일이 크든 작든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는 기쁨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기쁨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을 때, 내 눈빛은 어떠합니까? 두려움과 미움, 분노가 나를 붙들어 매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이 공허하든지, 아니면 경쟁의식이라는 강박이 내 속에 가득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쁨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간직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삶이 전체적으로 기뻐야 한다는 것은, 인생에 걱정거리가 없다는 뜻도 아니고, 고난을 받을 일도 없다는,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고난을 알고, 슬픔을 압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남이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고, 내 속에도 눈물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우리 삶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삶의 모든 것들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소소한 기쁨에서 본질적인 기쁨으로 끊임없이 나가야 됩니다. 소소한 기쁨이 무엇일까요?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기쁨, 즉 ‘소유’에 대한 기쁨입니다. ‘성취’에 대한 기쁨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최고의 기쁨을 찾지만, 아닙니다. 이것은 시작하는 기쁨이지 궁극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이 소소한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합니다.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고, 먹고 마시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든지 먹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내게 주신 축복임을 알고 감사할 줄 알면, 기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이 소유의 기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작은 차를 사서 감사했습니다.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옆을 보니 남도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차보다 저 사람 차가 더 크네.’ 어디 차뿐이겠습니까? 모든 소유가 다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비교의식은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라면이나 자장면을 먹으면서도 기뻐하고 있는데, 더 좋은 것을 먹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면 처음의 기쁨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소유의 기쁨을 갖기 시작할 때는 비교를 멈춰야 합니다. 그냥 먹는 것이 감사하고, 가진 것이 감사하고, 내 삶의 환경에 감사할 줄 알아야 기쁨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족감이 사라지는 불만족의 세계, 불평과 불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의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창의성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소유, 나의 직업에 이 창의적인 태도를 가질 때 그것이 기쁨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제일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노동 아닙니까? 반복되는 작업이 힘들지 않습니까? 가정주부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매우 소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니까, 이 반복이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반복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창의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감성적으로 예민하고 기쁨을 잘 느끼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작품 하나를 끝내면 만족스러워하고 그 과정도 즐거워하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있는 창의적인 것들이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인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도 창의적인 쉼을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고, 친구들과 만날 필요가 있고, 취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자리가 창의적인 자리로 바뀌어야 기쁨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요사이에는 경제까지도 창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창조경제. 본래 이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신적인 개념인데, 이것을 곳곳에 집어넣는 이유는 그 일들이 잘되지 않아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큰 기쁨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사람과 관련되어 있을 때 생기는 기쁨입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이웃이 힘을 얻고 희망을 갖는다. 내가 하는 일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든다.’ 그렇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 일에 보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구나. 사람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일이구나.’
교회의 봉사가 이런 것 아닙니까? 나를 통해 교회의 공동체가 축복을 받고, 나의 섬김을 통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선교를 떠나는 분들을 보면, 갈 때는 걱정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갔다 오고 나면 다들 한결같습니다. 불평이나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감사하고, 전도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고, 내 손과 발을 움직여서 봉사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왜 그렇게 헌신적입니까? 내 아들딸이 바르게 서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누리며 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이 보여주는 것도 많은 아버지들의 지금까지의 삶이 얼마나 고생스러웠는가 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나의 어머니가 저렇게 살았구나.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런 축복을 받았구나.’ 하지만 우리 부모들에게는 그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왜입니까? 자녀를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이 인간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삶, 인간을 격려할 수 있는 삶이 될 때 이것은 기쁨이 됩니다. 때로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높은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생각, 나의 삶 자체가 사람과 관련된 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될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축복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이 기쁨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사도행전 2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사도행전 2:44)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 (사도행전 2:46∼47)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모습은 기쁨이었습니다. 기쁨. 모이니까 기쁘고, 예배를 드리니까 기쁘고, 함께 주님의 사랑을 나누니까 기쁘고, 모든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52절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의 모습을 기쁨 충만, 성령 충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것이 곧 성령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곧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을 때, 스스로를 다시 되돌아봐야 됩니다. ‘왜 내게는 기쁨이 없을까? 왜 내 영혼이 기뻐 뛰놀지 않을까? 왜 내 영혼은 감사가 없을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육하시는 방식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본래 제자들이 예수님을 뒤따른 것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면 나에게 뭔가 떨어지는 게 있겠지. 예수님을 뒤따르면 세상에서 출세할 수도 있겠지. 예수님을 뒤따르면 큰소리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겠지…’ 이러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눈을 자꾸만 열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눈을 여셨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너 자신만 생각했던 너, 너의 욕심만 중요했던 너, 이제는 너 자신을 세상을 향해서 열자. 이웃을 향해서 열자. 네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 마음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주시는 마음 아닙니까? 이웃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이 너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신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달았으면, 이것을 이웃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존재의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처음 전도를 해본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서울역에도 가봤고, 남산공원과 사직공원에도 가봤습니다. 때로는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요새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대학생일 때만 해도 그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증거를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열 명을 만나면, 일단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홉 명은 되었습니다. 그 아홉 명 중에서 일곱, 여덟 명은 놀랍게도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까지 했습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 저 사람이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 받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하니까 제가 더 기쁜 거예요. ‘하나님이 내게 이런 복음을 주시고, 또 내게 전도할 수 있게 하셨구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증거하라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귀신들이 쫓겨나갔고, 병이 치유되었고,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놀라운 모습을 보며 매우 좋아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여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누가복음 10:17)

제자들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그들의 마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20)

“너희가 능력을 받았구나. 너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구나.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른다. 그 기쁨을 간직해라. 그러나 그 기쁨보다 큰 기쁨이 있다. 네가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이다. 그것으로 기뻐하라.” 많은 능력이 있고, 업적도 가졌지만, 그 소유로 기뻐하지 말고, 너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업적이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인이었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고백했을 때, 하나님이 내 이름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름을 하늘의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소유의 기쁨을 뛰어넘는, 존재 자체에 대한 기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다. 내가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책에 기록하셨다.’ 이 큰 기쁨을 갖고 모든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조그만 기쁨을 그냥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 때, ‘하나님, 내 손이 숟가락을 들 힘이 있네요!’, 음식을 입에 넣을 때, ‘이것을 씹을 이가 있고 소화하는 능력이 있네요!’ 곁에 귀한 사람들을 보내주신 것, 직장을 주신 것, 가정을 주신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을 즐거워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모든 것들이 감사의 내용으로 바뀝니다. 감사의 축복이 됩니다.
“네가 가진 것이 많아서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 하나님 앞에 나온 것, 그것을 내가 기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한 해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이 큰 기쁨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이 땅에서 누리면서, 감사함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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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 17 ~ 20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기쁨을 잃은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한 십여 년간 한국 생활을 경험한 영국의 젊은 언론인, 다니엘 튜더(Daniel Tudor)가 한국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제목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원제 – Korea : The Impossible Country)입니다. 그는 책에서 대한민국이 엄청난 기적을 이루었지만, 놀랍게도 국민들은 불만족 속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음은 그의 글의 일부입니다.
“50년 전 한국은 가혹한 독재에서 혼란스러운 민주주의로 요동쳤다가 다시 독재로 빠져든, 가난과 전쟁으로 찢겨진 나라였다. 지금이야 한국이 전 세계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발돋움해 풍요와 안정을 이룩한 나라의 모델이 된 것은 물론, 대중문화적 성취까지 이뤄내고 있지만, 국가로서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했던 때도 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지난 세기 동안 도무지 믿기 어려울 만큼 인상적인 건국 역사를 다시 쓴 것이다. 이 이유만으로도, 한국은 ‘불가능한 (기적을 이룬) 나라’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 한국인은 물질적 성공과 안정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만족감을 크게 잃어가고 있다. 한국은 교육, 명예, 외모, 직업적 성취에서 스스로를 불가능한 기준에 획일적으로 맞추도록 너무 큰 압박을 가하는 나라인 것이다.”
다 똑같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경쟁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경쟁심 때문에 불만족에 허덕이며 기쁨을 상실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은 한마디로 ‘한국 백성은 대단한 백성이지만, 동시에 만족할 줄 몰라서 불행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경제 지표는 세계 1, 2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정작 자기 삶의 만족도는 100등을 넘어 꼴찌에 가까운 백성이 바로 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참되게 이끄는 힘은 기쁨입니다.

한화 야구 감독으로 돌아온 김성근씨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합니다. 야구든 인생이든 만족하는 순간 끝이라는 것입니다. 신문기자가 그것은 병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생은 모 아니면 도다.” 얼마나 강력한 게임 승부사로서의 기질을 보여주는 말입니까?
애플의 CEO였던 스티브 잡스가 대학생들의 졸업 연설 자리에서 한 말도 꽤 유명합니다. “Stay foolish. Stay hungry.” 이 말은, 자신의 인생에서 늘 부족함과 모자람을 알고 성과를 내기 위해 달려가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처럼 소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승부사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업적과 성과를 내기 위한 언어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관점과 태도에는 약점이 있습니다.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런 방향으로만 가면 엄청난 경쟁심과 승부의식 속에서 사람이 피폐해지기 시작하고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의 모든 것이 모 아니면 도,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는 아니며, 인생이란 항상 승리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승부사적인 기질이 잠깐의 성취감을 안겨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근본적인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건강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자신의 내면세계의 느낌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 넉넉하게 자신을 개방시킬 줄 알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일을 성취시키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세계, 인간관계, 그리고 일의 성취라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바로 기쁨입니다. 기쁨의 힘은, 내면세계의 자존감을 살려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하며,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든 그 속에서 삶을 즐거워할 줄 아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2015년 한 해, 성도님들이 이 기쁨의 힘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평안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를 열 수 있고, 맡겨진 일이 크든 작든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는 기쁨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기쁨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을 때, 내 눈빛은 어떠합니까? 두려움과 미움, 분노가 나를 붙들어 매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이 공허하든지, 아니면 경쟁의식이라는 강박이 내 속에 가득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쁨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간직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삶이 전체적으로 기뻐야 한다는 것은, 인생에 걱정거리가 없다는 뜻도 아니고, 고난을 받을 일도 없다는,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고난을 알고, 슬픔을 압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남이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고, 내 속에도 눈물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우리 삶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삶의 모든 것들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소소한 기쁨에서 본질적인 기쁨으로 끊임없이 나가야 됩니다. 소소한 기쁨이 무엇일까요?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기쁨, 즉 ‘소유’에 대한 기쁨입니다. ‘성취’에 대한 기쁨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최고의 기쁨을 찾지만, 아닙니다. 이것은 시작하는 기쁨이지 궁극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이 소소한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합니다.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고, 먹고 마시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든지 먹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내게 주신 축복임을 알고 감사할 줄 알면, 기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이 소유의 기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작은 차를 사서 감사했습니다.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옆을 보니 남도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차보다 저 사람 차가 더 크네.’ 어디 차뿐이겠습니까? 모든 소유가 다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비교의식은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라면이나 자장면을 먹으면서도 기뻐하고 있는데, 더 좋은 것을 먹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면 처음의 기쁨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소유의 기쁨을 갖기 시작할 때는 비교를 멈춰야 합니다. 그냥 먹는 것이 감사하고, 가진 것이 감사하고, 내 삶의 환경에 감사할 줄 알아야 기쁨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족감이 사라지는 불만족의 세계, 불평과 불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의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창의성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소유, 나의 직업에 이 창의적인 태도를 가질 때 그것이 기쁨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제일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노동 아닙니까? 반복되는 작업이 힘들지 않습니까? 가정주부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매우 소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니까, 이 반복이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반복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창의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감성적으로 예민하고 기쁨을 잘 느끼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작품 하나를 끝내면 만족스러워하고 그 과정도 즐거워하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있는 창의적인 것들이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인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도 창의적인 쉼을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고, 친구들과 만날 필요가 있고, 취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자리가 창의적인 자리로 바뀌어야 기쁨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요사이에는 경제까지도 창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창조경제. 본래 이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신적인 개념인데, 이것을 곳곳에 집어넣는 이유는 그 일들이 잘되지 않아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큰 기쁨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사람과 관련되어 있을 때 생기는 기쁨입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이웃이 힘을 얻고 희망을 갖는다. 내가 하는 일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든다.’ 그렇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 일에 보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구나. 사람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일이구나.’
교회의 봉사가 이런 것 아닙니까? 나를 통해 교회의 공동체가 축복을 받고, 나의 섬김을 통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선교를 떠나는 분들을 보면, 갈 때는 걱정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갔다 오고 나면 다들 한결같습니다. 불평이나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감사하고, 전도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고, 내 손과 발을 움직여서 봉사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왜 그렇게 헌신적입니까? 내 아들딸이 바르게 서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누리며 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이 보여주는 것도 많은 아버지들의 지금까지의 삶이 얼마나 고생스러웠는가 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나의 어머니가 저렇게 살았구나.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런 축복을 받았구나.’ 하지만 우리 부모들에게는 그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왜입니까? 자녀를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이 인간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삶, 인간을 격려할 수 있는 삶이 될 때 이것은 기쁨이 됩니다. 때로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높은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생각, 나의 삶 자체가 사람과 관련된 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될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축복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이 기쁨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사도행전 2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사도행전 2:44)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 (사도행전 2:46∼47)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모습은 기쁨이었습니다. 기쁨. 모이니까 기쁘고, 예배를 드리니까 기쁘고, 함께 주님의 사랑을 나누니까 기쁘고, 모든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52절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의 모습을 기쁨 충만, 성령 충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것이 곧 성령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곧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을 때, 스스로를 다시 되돌아봐야 됩니다. ‘왜 내게는 기쁨이 없을까? 왜 내 영혼이 기뻐 뛰놀지 않을까? 왜 내 영혼은 감사가 없을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육하시는 방식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본래 제자들이 예수님을 뒤따른 것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면 나에게 뭔가 떨어지는 게 있겠지. 예수님을 뒤따르면 세상에서 출세할 수도 있겠지. 예수님을 뒤따르면 큰소리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겠지…’ 이러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의 눈을 자꾸만 열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눈을 여셨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너 자신만 생각했던 너, 너의 욕심만 중요했던 너, 이제는 너 자신을 세상을 향해서 열자. 이웃을 향해서 열자. 네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 마음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주시는 마음 아닙니까? 이웃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이 너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신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달았으면, 이것을 이웃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존재의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처음 전도를 해본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서울역에도 가봤고, 남산공원과 사직공원에도 가봤습니다. 때로는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요새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대학생일 때만 해도 그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증거를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열 명을 만나면, 일단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홉 명은 되었습니다. 그 아홉 명 중에서 일곱, 여덟 명은 놀랍게도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까지 했습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 저 사람이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 받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하니까 제가 더 기쁜 거예요. ‘하나님이 내게 이런 복음을 주시고, 또 내게 전도할 수 있게 하셨구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증거하라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귀신들이 쫓겨나갔고, 병이 치유되었고,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놀라운 모습을 보며 매우 좋아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여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누가복음 10:17)

제자들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그들의 마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20)

“너희가 능력을 받았구나. 너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구나.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른다. 그 기쁨을 간직해라. 그러나 그 기쁨보다 큰 기쁨이 있다. 네가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이다. 그것으로 기뻐하라.” 많은 능력이 있고, 업적도 가졌지만, 그 소유로 기뻐하지 말고, 너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업적이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인이었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고백했을 때, 하나님이 내 이름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름을 하늘의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소유의 기쁨을 뛰어넘는, 존재 자체에 대한 기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다. 내가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책에 기록하셨다.’ 이 큰 기쁨을 갖고 모든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조그만 기쁨을 그냥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 때, ‘하나님, 내 손이 숟가락을 들 힘이 있네요!’, 음식을 입에 넣을 때, ‘이것을 씹을 이가 있고 소화하는 능력이 있네요!’ 곁에 귀한 사람들을 보내주신 것, 직장을 주신 것, 가정을 주신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을 즐거워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모든 것들이 감사의 내용으로 바뀝니다. 감사의 축복이 됩니다.
“네가 가진 것이 많아서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 하나님 앞에 나온 것, 그것을 내가 기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한 해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이 큰 기쁨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이 땅에서 누리면서, 감사함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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