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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사님들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떠오릅니다.
오늘 5부 예배 때, 새로운 권사님 110명을 임직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권사의 직분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교회 정치편 제8장 제52조의 기록입니다. “권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제직회의 회원이 되며 교역자를 도와 궁핍한 자와 환난 당한 교우를 심방하고 위로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힘쓴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은 이 교회의 신앙의 어머니들입니다. 성도님들이 주일예배를 잘 드릴 수 있도록 일찍 나와 예배부와 함께 섬기고 계신 분들입니다. 또한 성도님들의 경조사에 참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 아파할 때,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며 경조부 실행위원들과 함께 섬김의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남이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을 권사님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권사실에는 수많은 기도제목들이 걸려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일 년 내내 조를 짜서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중보기도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우리의 어머니면서, 아내입니다. 또 때로는 홀로 있지만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교회에 충성하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의 특징은 모두 쉰 살이 넘으셨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로, 교회의 각 곳에서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여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여인입니다.
마리아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성경은 여자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던 때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에 만든 창조물이 여자입니다. 하나님은 남자부터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을 보시며,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후, 보기에 좋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인을 만드셨습니다. 여인을 만들고 나서야 창조의 세계가 완성된 것입니다. 여인을 만들고 나서야 “보기에 참 좋구나.” 말씀하시면서 창조를 끝내십니다.
또 성경을 보면, 여자는 남자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가 우월하다고 여기는 가부장적인 남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는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 받고 있다며 자책감에 빠진 여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남자, 하나는 여자. 둘 다 다 인간으로 동등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에 대한 원칙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하와에서 마리아로’ 라고 잡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라는 여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를 숭상하는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우리도 마리아의 모습처럼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어머니들을 칭찬하고 싶은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이 말하는 여인에 대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마리아는 죽음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바꾸었습니다.
첫 여인 하와를 통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렇지만 둘째 여인 마리아를 통해서 인간은 새로운 해결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와가 만든 죄의 역사를 마리아는 믿음의 역사로 바꾸고 있습니다. 하와가 만든 죽음의 역사를 마리아는 생명의 역사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모형론적인 대비를 통해 비교를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므로 무너졌는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순종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와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하와와 마리아가 모형론적으로 대비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와라는 여인 속에는 우리의 옛 모습, 죄악된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인 속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는가’ 하는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하와가 만든 역사의 흐름과 마리아가 만들어 놓은 역사의 흐름은 두 개의 상이한 드라마처럼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타락의 드라마이고, 하나는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하와의 드라마는 죄악과 범죄의 드라마입니다. 죽음을 향한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분리될 수밖에 없었는지,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적대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이 타락의 드라마에서 하와는 주인공입니다. 아담은 조연입니다. 그리고 사탄을 상징하는 뱀이 총 감독이 되어 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1장에는 마리아의 구원의 드라마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생명의 드라마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적대적인 관계가 어떻게 화해의 관계로 바뀌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감독은 천사 가브리엘입니다. 주인공은 마리아이고, 요셉은 조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뱀은 사탄의 대리자입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은 말씀을 왜곡하는 존재입니다. 하와를 유혹하며 넘어뜨리는 존재입니다. 사탄의 가장 악한 특징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이간질합니다. 분노하게 하고, 공격하게 하고, 서로를 미워하게 합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신뢰였습니다. 왜냐하면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인간 이성으로는 도대체 용납할 수 없는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마리아도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그래서 거부했습니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남자를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게 임신이 가능합니까? 내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항의합니다. 그때, 천사가 대답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누가복음 1:35)
천사가 한 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 이 말씀을 듣고 난 후, 마리아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누가복음 1:38)
도대체 마리아는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습니다.
먼저는 마리아의 자의식, 즉 자기 정체성입니다. 자신을 바르게 아는 것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와는 놓쳤지만, 마리아가 되찾은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바로 이 자의식입니다. 자기 정체에 대해 질문하면서, 그 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물음이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도대체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알지 못해 우리는 방황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철학의 물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가?’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수많은 대답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대답을 미루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는 순간, 철학자의 역할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질문을 하고, 말씀으로 대답을 받습니다. 질문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답을 받습니다. 기독교인은 질문을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대답이 얻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대답을 받는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자의식은 ‘나는 주의 여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여성명사를 썼을 뿐이지, ‘여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즉,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와를 생각해 봅시다. 하와의 자의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사탄이 와서 꼬드긴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의식의 문제였습니다. “너에게 피조물이라는 자의식이 있지? 그거 없애버려.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교만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너에게도 신성이 있어. 너는 하나님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 네 속에 감추어진 신성을 개발해 봐!” 이것이 사탄이 하와를 유혹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갖고 있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는 이 시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존재임을 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이니, 그것을 개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계가 인생에게 요구하는 자의식입니다.
하지만 하와의 이 자의식은 마리아에게 와서 달라집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을 때, 겸손히 “저는 주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엄청난 자존감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에게만 예속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붙잡힌 존재라는, 자존감과 자부심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선포입니다. 이것은 비굴하고 비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붙잡을 것이 없으니 ‘그냥 하나님이라도 붙잡자’ 하는 도망자의 사고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선물임을 알고 기뻐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본질적이고 신학적인 기독교의 겸손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이런 자의식을 가졌을 때,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모습은 무엇일까요?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본문을 보면,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신앙 중에 신앙입니다.
신념이란 내 생각에 집착하는 것 아닙니까?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세상의 사상에 매몰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생명이 잉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와는 사탄의 말에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은 망각 속에 내동댕이칩니다. 그녀에게는 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천사의 말이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건 모르겠어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그녀는 신뢰하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뢰와 순종은 굉장히 용감한 태도였습니다.
신명기 22장을 보면, 결혼한 여인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 (신명기 22:20∼21)
가부장적 틀에 의한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성경은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 가부장적 종교의 전통을 깨부순 여인이 마리아입니다. 위협과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순종하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생명의 사건이 시작됩니다. 교만한 자들을 흩어버리고 겸손한 자를 세우시는 새로운 가치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등장할 것임을 보여주는 예표인 것입니다.
하와가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도망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하나님이 다가오면 도망가는 자, 수치스러운 자로 멈춰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여인 마리아가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그 영혼에 기쁨과 찬양이 생겼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매그니피캣(Magnificat)’이라는 마리아의 찬가가 그것 아닙니까? 그녀의 영혼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은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여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기를 열망했던 유대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마리아라는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엄청난 믿음이었습니다. 엄청난 용기였습니다. 민중들이 갖고 있는 열망을 자기의 것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천한 여인의 몸에 하나님 나라가 열릴 것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꿈을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또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요? 첫 여인의 실패는 남편의 실패로 이어집니다. 남편인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 공범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나쁜 짓을 혼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쁜 짓은 꼭 공범자를 끌고 다닙니다. 이것이 인류의 모습이고, 하와와 아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둘째 여인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그녀가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을 때, 남편 요셉도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와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 가인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이는 첫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이 땅에 펼쳐지게 됩니다.
말씀의 신앙, 순종의 신앙을 사모합시다.
오늘 이 말씀은, 새롭게 임직하시는 110명의 권사님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 내게 말씀을 펴서 읽게 하시옵소서.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내 것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이루어 주옵소서. 처졌던 내 영혼이 말씀을 듣고 벌떡 깨어 일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내 안에서 나를 억누르는 질병들이 말씀을 통해서 치유 받게 하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내 안에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선포해야 됩니다.
말씀의 신앙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목사가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맡으면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잡는 사람이 신앙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셔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나의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나의 것으로 삼을 때, 하나님을 떠났던 하와의 역사가 말씀에 순종했던 마리아의 역사로 바뀝니다. 마리아의 역사는 곧 생명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의 축복을 갖고, “하나님, 이제는 생명으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매일매일 생명의 사건을 만들 수 있게 도우소서.” 기도하며 세상을 향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3: 4 ~ 38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권사님들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떠오릅니다.
오늘 5부 예배 때, 새로운 권사님 110명을 임직하는 예식이 있습니다. 권사의 직분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교회 정치편 제8장 제52조의 기록입니다. “권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제직회의 회원이 되며 교역자를 도와 궁핍한 자와 환난 당한 교우를 심방하고 위로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힘쓴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은 이 교회의 신앙의 어머니들입니다. 성도님들이 주일예배를 잘 드릴 수 있도록 일찍 나와 예배부와 함께 섬기고 계신 분들입니다. 또한 성도님들의 경조사에 참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 아파할 때,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며 경조부 실행위원들과 함께 섬김의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남이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을 권사님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권사실에는 수많은 기도제목들이 걸려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일 년 내내 조를 짜서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중보기도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우리의 어머니면서, 아내입니다. 또 때로는 홀로 있지만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교회에 충성하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의 특징은 모두 쉰 살이 넘으셨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로, 교회의 각 곳에서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여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여인입니다.
마리아의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성경은 여자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던 때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에 만든 창조물이 여자입니다. 하나님은 남자부터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을 보시며,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후, 보기에 좋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인을 만드셨습니다. 여인을 만들고 나서야 창조의 세계가 완성된 것입니다. 여인을 만들고 나서야 “보기에 참 좋구나.” 말씀하시면서 창조를 끝내십니다.
또 성경을 보면, 여자는 남자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가 우월하다고 여기는 가부장적인 남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는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 받고 있다며 자책감에 빠진 여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남자, 하나는 여자. 둘 다 다 인간으로 동등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에 대한 원칙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하와에서 마리아로’ 라고 잡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라는 여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를 숭상하는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우리도 마리아의 모습처럼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어머니들을 칭찬하고 싶은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이 말하는 여인에 대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마리아는 죽음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바꾸었습니다.
첫 여인 하와를 통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렇지만 둘째 여인 마리아를 통해서 인간은 새로운 해결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와가 만든 죄의 역사를 마리아는 믿음의 역사로 바꾸고 있습니다. 하와가 만든 죽음의 역사를 마리아는 생명의 역사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모형론적인 대비를 통해 비교를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므로 무너졌는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순종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와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하와와 마리아가 모형론적으로 대비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와라는 여인 속에는 우리의 옛 모습, 죄악된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인 속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는가’ 하는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하와가 만든 역사의 흐름과 마리아가 만들어 놓은 역사의 흐름은 두 개의 상이한 드라마처럼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타락의 드라마이고, 하나는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하와의 드라마는 죄악과 범죄의 드라마입니다. 죽음을 향한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분리될 수밖에 없었는지,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적대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이 타락의 드라마에서 하와는 주인공입니다. 아담은 조연입니다. 그리고 사탄을 상징하는 뱀이 총 감독이 되어 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1장에는 마리아의 구원의 드라마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생명의 드라마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적대적인 관계가 어떻게 화해의 관계로 바뀌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감독은 천사 가브리엘입니다. 주인공은 마리아이고, 요셉은 조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뱀은 사탄의 대리자입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은 말씀을 왜곡하는 존재입니다. 하와를 유혹하며 넘어뜨리는 존재입니다. 사탄의 가장 악한 특징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이간질합니다. 분노하게 하고, 공격하게 하고, 서로를 미워하게 합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신뢰였습니다. 왜냐하면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인간 이성으로는 도대체 용납할 수 없는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마리아도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그래서 거부했습니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남자를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게 임신이 가능합니까? 내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항의합니다. 그때, 천사가 대답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누가복음 1:35)
천사가 한 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 이 말씀을 듣고 난 후, 마리아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누가복음 1:38)
도대체 마리아는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습니다.
먼저는 마리아의 자의식, 즉 자기 정체성입니다. 자신을 바르게 아는 것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와는 놓쳤지만, 마리아가 되찾은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바로 이 자의식입니다. 자기 정체에 대해 질문하면서, 그 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물음이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도대체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알지 못해 우리는 방황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철학의 물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가?’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수많은 대답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대답을 미루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는 순간, 철학자의 역할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질문을 하고, 말씀으로 대답을 받습니다. 질문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답을 받습니다. 기독교인은 질문을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대답이 얻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대답을 받는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자의식은 ‘나는 주의 여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여성명사를 썼을 뿐이지, ‘여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즉,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와를 생각해 봅시다. 하와의 자의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사탄이 와서 꼬드긴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의식의 문제였습니다. “너에게 피조물이라는 자의식이 있지? 그거 없애버려.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교만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너에게도 신성이 있어. 너는 하나님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 네 속에 감추어진 신성을 개발해 봐!” 이것이 사탄이 하와를 유혹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갖고 있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는 이 시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존재임을 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이니, 그것을 개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계가 인생에게 요구하는 자의식입니다.
하지만 하와의 이 자의식은 마리아에게 와서 달라집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을 때, 겸손히 “저는 주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엄청난 자존감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에게만 예속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붙잡힌 존재라는, 자존감과 자부심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선포입니다. 이것은 비굴하고 비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붙잡을 것이 없으니 ‘그냥 하나님이라도 붙잡자’ 하는 도망자의 사고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선물임을 알고 기뻐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본질적이고 신학적인 기독교의 겸손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이런 자의식을 가졌을 때,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모습은 무엇일까요?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본문을 보면,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신앙 중에 신앙입니다.
신념이란 내 생각에 집착하는 것 아닙니까?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세상의 사상에 매몰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생명이 잉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와는 사탄의 말에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은 망각 속에 내동댕이칩니다. 그녀에게는 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천사의 말이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건 모르겠어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그녀는 신뢰하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뢰와 순종은 굉장히 용감한 태도였습니다.
신명기 22장을 보면, 결혼한 여인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 (신명기 22:20∼21)
가부장적 틀에 의한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성경은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 가부장적 종교의 전통을 깨부순 여인이 마리아입니다. 위협과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순종하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생명의 사건이 시작됩니다. 교만한 자들을 흩어버리고 겸손한 자를 세우시는 새로운 가치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등장할 것임을 보여주는 예표인 것입니다.
하와가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도망갔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하나님이 다가오면 도망가는 자, 수치스러운 자로 멈춰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여인 마리아가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그 영혼에 기쁨과 찬양이 생겼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매그니피캣(Magnificat)’이라는 마리아의 찬가가 그것 아닙니까? 그녀의 영혼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은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여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기를 열망했던 유대인들의 간절한 소망을 마리아라는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엄청난 믿음이었습니다. 엄청난 용기였습니다. 민중들이 갖고 있는 열망을 자기의 것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천한 여인의 몸에 하나님 나라가 열릴 것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꿈을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또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요? 첫 여인의 실패는 남편의 실패로 이어집니다. 남편인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 공범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나쁜 짓을 혼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쁜 짓은 꼭 공범자를 끌고 다닙니다. 이것이 인류의 모습이고, 하와와 아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둘째 여인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그녀가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을 때, 남편 요셉도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와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 가인이었습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이는 첫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이 땅에 펼쳐지게 됩니다.
말씀의 신앙, 순종의 신앙을 사모합시다.
오늘 이 말씀은, 새롭게 임직하시는 110명의 권사님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 내게 말씀을 펴서 읽게 하시옵소서.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내 것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이루어 주옵소서. 처졌던 내 영혼이 말씀을 듣고 벌떡 깨어 일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내 안에서 나를 억누르는 질병들이 말씀을 통해서 치유 받게 하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내 안에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선포해야 됩니다.
말씀의 신앙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목사가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맡으면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붙잡는 사람이 신앙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셔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나의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나의 것으로 삼을 때, 하나님을 떠났던 하와의 역사가 말씀에 순종했던 마리아의 역사로 바뀝니다. 마리아의 역사는 곧 생명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의 축복을 갖고, “하나님, 이제는 생명으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매일매일 생명의 사건을 만들 수 있게 도우소서.” 기도하며 세상을 향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