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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올해 1월 5일자 The Wall Street Journal에 유럽 교회의 현실에 대한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습니다. ‘유럽에 텅 빈 교회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도발적인 제호로, 상당수의 유럽의 교회당들이 술집, 체육관, 상가, 놀이시설 등 세속적인 용도로 전용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전체 1600개 중 2/3의 가톨릭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개신교교회도 앞으로 4년간 700개가 문을 닫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한 해에 성공회교회가 20여 곳씩 문을 닫고 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최근까지 200개 안팎의 교회에 더 이상 신도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독일에서도 지난 10년 동안 515개의 가톨릭교회가 문을 닫은 것으로 파악되고, 개신교교회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외국뿐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 판교에 있는 통합 측 교회가 500억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절반가격으로 이단 교회에 매각되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텅 빈 교회당’, 이것은 한국 교회에 대한 경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럽교회가 문 닫는 소리가 우리에게도 아프게 들려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쓰리고 눈물이 납니다. 어찌할 줄 몰라서 잠이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 정도인데 하나님은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며 슬퍼하실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까요? 왜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왜 사라지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충격입니다. 예수님은 자랑스럽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자랑스럽지 못한 것 때문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도 듭니다.
한국 갤럽이 2014년 4월에 만 19세 이상 남녀 1,500명에게 현재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대답은 가지고 있다와 가지고 있지 않다가 1:1이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 전체 50% 중에 불교인이 22%, 기독교인이 21%, 천주교인이 7%였습니다. 2004년 조사에서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가 54%였는데, 10년이 지난 2014년에는 그 수가 4% 정도 줄어든 것입니다. 또 줄어드는 양상을 나이 대 별로 살펴보면, 20대가 45%에서 31%로, 30대가 49%에서 38%로, 40대가 57%에서 51%로 줄어들었습니다. 즉 20대, 30대에서 유독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젊은 세대의 신앙 교육이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 전승입니다. 우리가 면벽을 하다가, 혹은 도를 닦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누군가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누군가 전해주는 이 신앙의 전승이 한 세대라도 멈추게 되면 모든 것이 단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구의 텅 빈 교회들도 한 세대 전만 해도 천 명에서 이천 명이 모이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들이 한 세대가 지나면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말입니다.
또 갤럽은 개신교인들에게 언제부터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홉 살 이하가 31%, 10대 15%, 20대 17%, 30대 19%, 40대 13%, 50대 이후는 5% 이내로 줄어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회가 왜 다음 세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우리가 왜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역사를 더 많이 이야기해야 되는지를 이 통계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의 통계도 한 번 내보라고 했습니다. 2014년에 새신자로 등록한 사람의 수는 1,698명이었습니다. 2013년에는 1,922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나이별로 봤더니 19세 미만에 등록한 사람이 37%였고, 20세부터 39세까지가 약 40%에 육박했습니다. 40대는 10%, 50대 이후는 7~8%였습니다. 19세 미만에서 39세 미만까지를 합하면 약 80%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등록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소리입니다. 이것을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사랑을 쏟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기쁨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하는 질문을 수시로 던집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먼저 내 속에 기쁨이 생겨야 됩니다. 10년, 20년을 믿었는데 예수 믿는 기쁨을 모르겠다면, 지금 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먼저 주시고자 하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예배드리는 기쁨입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그들은 모일 때마다 예배를 드렸고, 그때마다 기쁨이 가득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6∼47)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쁘고, 모이는 것이 기쁘고,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고, 찬송 부르는 것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보며, 또 다른 사람들이 그들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쁨, 즉 예배드리는 기쁨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일까요?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존경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에 불과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심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는 아침 안개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져갈, 한 줌의 흙으로 바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내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고백하면서 우리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나를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그에게 내 죄와 슬픔과 절망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맡기셨습니다. 그가 그 모든 것들을 지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죽음을 당하게 하시므로 나의 모든 짐들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살리시므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낙심이 변하여 소망이 되며,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따라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이란, 벽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신 사랑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나의 영으로 예배드리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니 나의 진실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이 무엇일까요? 뜨거운 감성입니다. 진리는 무엇일까요? 진리이신 말씀 위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이 영과 진리는 함께 가는 것이 맞습니다. 영 없는 진리, 즉 성령의 뜨거움 없이 진리만 붙잡고 있으면 우리 가슴은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고 맙니다. 반대로 진리는 없고 감성만 붙잡게 되면, 영적 흥분만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이 천박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으로, 즉 간절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니 말씀 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입니다. 영과 진리가 함께 가면 감성은 풍성해지고, 지성은 겸손해지며, 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저는 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신앙이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신앙의 모습일까요? 바로 감사가 솟구치는 신앙입니다. 감사가 있으면 그 영혼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내 영혼에 기쁨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만큼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는 예배, 감사를 고백하는 예배에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을 뛰어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한복음 16:22)
“나는 지금 수난의 길을 가지만, 이제 부활의 하나님으로 너희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 너희의 기쁨이 크고, 이 세상 어떤 것도 너희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다.”
기쁨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기쁨을 놓치면 신앙은 허무하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또 기쁨을 놓치면 나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면 곁의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있고, 내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에너지를 줄까요?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기쁨의 존재인 것을 확인할 줄 아는 사람, 자기가 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축복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어쩌면 기쁨으로 나온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그대로 갖고 나왔을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도 있을 것입니다. 답답한 심정을 어디에 토해낼까 하는 막막한 심정으로 나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온 시인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야기합니다.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3:5)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환경보다 더 큰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서,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참담한 현실조차도 하나님께 솔직하게 아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하나님, 내 슬픔을 만져주세요. 내 아픔을 그대로 고백하오니 하나님, 이 아픔에 참여해 주세요.” 고백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다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43:4)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큰 기쁨의 하나님입니다. 바로 그분에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기쁨,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주시려고, “얘야, 나에게 소망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인생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다셨습니다. 우리의 슬픔, 낙심, 절망, 좌절, 고통, 탄식, 신음, 외로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을 대신하여 예수님은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주님을 바라보며 이겨나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드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세상을 이기게 만듭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억누르며 신음하게 합니까? 무엇 때문에 답답합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는 것,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초청하시는 이유입니다.
참된 예배를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소망교회의 예배는 클래식한 예배입니다. 장미가 만개하기 전에 꽃봉오리를 살짝 열고 있는 것처럼 절제된 경건이 있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아주 압축적입니다. 이러한 공예배의 몇 가지 특성과 더불어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배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도님들이나 저나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연애할 때 소위 ‘밀당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 늦게도 가보고 조금 일찍도 가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밀당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앞에 있는 분,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나려고 할 때 일찍 나가서 준비하지 않습니까?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내가 준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앞에 시간을 정확히 드리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예배에 전념하고 몰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이 단절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아멘으로 응답하고, 찬송을 부를 때 영혼의 고백을 함께 하며,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즉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세상을 차단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현 문명이 낳은 최고의 이기(利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경도 찾고 찬송가 가사도 봅니다. 지금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찬송이나 성경을 보는 것으로만 스마트폰을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그 안에 기록을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로 인해 옆에 있는 사람까지 자꾸만 거기에 신경이 쓰입니다. 손을 움직이고, 가끔은 문자가 왔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러면 또 무엇이 왔나 하고 들여다보게 됩니다. 세상성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그래도 요즘 스마트폰은 좋아서 비행기 탈 때 하듯이 다른 것은 다 끄고 내가 사용하려는 것만 쓸 수 있으니 너무 막지 말라.” 예배드리려 들어오기 전에 스마트폰을 다 끄고 오라고 하면, 젊은이들이 화를 낸다고 합니다. “저 목사님은 구닥다리여서 스마트폰도 못 쓰게 한다!”
그런데 사실, 세상성과 구별되어 예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스마트폰을 끄고 들어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둘이 애인인가 봅니다. 예배를 드리러는 왔는데, 하나님보다 옆에 있는 애인이 더 사랑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이쪽 손도 만지고, 저쪽 손도 만집니다. 뒤에 있는 사람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왔는데 앞의 남녀가 자꾸 스킨십을 하면 신경 쓰이지 않겠습니까?
예배드리는 것은 내 아내나 남편보다, 내 애인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끼리 손을 잡고 오다가도 예배당에 들어오면 일단 손을 놓고 하나님과 데이트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집중과 몰입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나로부터 세상을 차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첫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하면, ‘피 같은 돈’이라는 표현이 있겠습니까? 그 소중한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정성껏 말입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싼 옷, 사치하는 옷이 아니라 깨끗하고 단정한 옷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7:6∼7)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려지는 헌금과 옷이 중요한 이유는, 헌금과 입고 오는 옷에 나의 정성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제물인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동물을 죽여서 내 죄를 동물에게 지웠습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내 몸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 나왔을 때, ‘하나님, 내 옛 모습, 죄악과 탐욕과 교만과 거짓을 다 무너뜨리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마치 죽은 동물처럼 내 옛 자아는 죽고, 새로운 자아인 새 몸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먼저는 공적 예배에 참여하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세상으로 연장된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은 새로운 예배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처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옵소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옵소서.’ 하며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예배드리는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기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43: 4 ~ 2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올해 1월 5일자 The Wall Street Journal에 유럽 교회의 현실에 대한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습니다. ‘유럽에 텅 빈 교회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도발적인 제호로, 상당수의 유럽의 교회당들이 술집, 체육관, 상가, 놀이시설 등 세속적인 용도로 전용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전체 1600개 중 2/3의 가톨릭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개신교교회도 앞으로 4년간 700개가 문을 닫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한 해에 성공회교회가 20여 곳씩 문을 닫고 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최근까지 200개 안팎의 교회에 더 이상 신도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독일에서도 지난 10년 동안 515개의 가톨릭교회가 문을 닫은 것으로 파악되고, 개신교교회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외국뿐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 판교에 있는 통합 측 교회가 500억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절반가격으로 이단 교회에 매각되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텅 빈 교회당’, 이것은 한국 교회에 대한 경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럽교회가 문 닫는 소리가 우리에게도 아프게 들려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쓰리고 눈물이 납니다. 어찌할 줄 몰라서 잠이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 정도인데 하나님은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며 슬퍼하실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까요? 왜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왜 사라지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충격입니다. 예수님은 자랑스럽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자랑스럽지 못한 것 때문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도 듭니다.
한국 갤럽이 2014년 4월에 만 19세 이상 남녀 1,500명에게 현재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대답은 가지고 있다와 가지고 있지 않다가 1:1이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 전체 50% 중에 불교인이 22%, 기독교인이 21%, 천주교인이 7%였습니다. 2004년 조사에서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가 54%였는데, 10년이 지난 2014년에는 그 수가 4% 정도 줄어든 것입니다. 또 줄어드는 양상을 나이 대 별로 살펴보면, 20대가 45%에서 31%로, 30대가 49%에서 38%로, 40대가 57%에서 51%로 줄어들었습니다. 즉 20대, 30대에서 유독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젊은 세대의 신앙 교육이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 전승입니다. 우리가 면벽을 하다가, 혹은 도를 닦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누군가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누군가 전해주는 이 신앙의 전승이 한 세대라도 멈추게 되면 모든 것이 단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구의 텅 빈 교회들도 한 세대 전만 해도 천 명에서 이천 명이 모이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들이 한 세대가 지나면서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말입니다.
또 갤럽은 개신교인들에게 언제부터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홉 살 이하가 31%, 10대 15%, 20대 17%, 30대 19%, 40대 13%, 50대 이후는 5% 이내로 줄어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회가 왜 다음 세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우리가 왜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역사를 더 많이 이야기해야 되는지를 이 통계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의 통계도 한 번 내보라고 했습니다. 2014년에 새신자로 등록한 사람의 수는 1,698명이었습니다. 2013년에는 1,922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나이별로 봤더니 19세 미만에 등록한 사람이 37%였고, 20세부터 39세까지가 약 40%에 육박했습니다. 40대는 10%, 50대 이후는 7~8%였습니다. 19세 미만에서 39세 미만까지를 합하면 약 80%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등록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소리입니다. 이것을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사랑을 쏟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기쁨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하는 질문을 수시로 던집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먼저 내 속에 기쁨이 생겨야 됩니다. 10년, 20년을 믿었는데 예수 믿는 기쁨을 모르겠다면, 지금 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먼저 주시고자 하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예배드리는 기쁨입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그들은 모일 때마다 예배를 드렸고, 그때마다 기쁨이 가득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6∼47)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쁘고, 모이는 것이 기쁘고,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고, 찬송 부르는 것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보며, 또 다른 사람들이 그들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쁨, 즉 예배드리는 기쁨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일까요?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존경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에 불과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심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는 아침 안개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져갈, 한 줌의 흙으로 바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내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고백하면서 우리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나를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그에게 내 죄와 슬픔과 절망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맡기셨습니다. 그가 그 모든 것들을 지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죽음을 당하게 하시므로 나의 모든 짐들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살리시므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낙심이 변하여 소망이 되며,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따라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이란, 벽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신 사랑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나의 영으로 예배드리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니 나의 진실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이 무엇일까요? 뜨거운 감성입니다. 진리는 무엇일까요? 진리이신 말씀 위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이 영과 진리는 함께 가는 것이 맞습니다. 영 없는 진리, 즉 성령의 뜨거움 없이 진리만 붙잡고 있으면 우리 가슴은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고 맙니다. 반대로 진리는 없고 감성만 붙잡게 되면, 영적 흥분만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이 천박해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으로, 즉 간절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니 말씀 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입니다. 영과 진리가 함께 가면 감성은 풍성해지고, 지성은 겸손해지며, 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저는 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신앙이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신앙의 모습일까요? 바로 감사가 솟구치는 신앙입니다. 감사가 있으면 그 영혼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내 영혼에 기쁨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만큼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는 예배, 감사를 고백하는 예배에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을 뛰어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한복음 16:22)
“나는 지금 수난의 길을 가지만, 이제 부활의 하나님으로 너희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 너희의 기쁨이 크고, 이 세상 어떤 것도 너희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다.”
기쁨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기쁨을 놓치면 신앙은 허무하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또 기쁨을 놓치면 나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면 곁의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있고, 내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에너지를 줄까요?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기쁨의 존재인 것을 확인할 줄 아는 사람, 자기가 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축복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어쩌면 기쁨으로 나온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그대로 갖고 나왔을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도 있을 것입니다. 답답한 심정을 어디에 토해낼까 하는 막막한 심정으로 나온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온 시인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야기합니다.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3:5)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환경보다 더 큰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서,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참담한 현실조차도 하나님께 솔직하게 아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하나님, 내 슬픔을 만져주세요. 내 아픔을 그대로 고백하오니 하나님, 이 아픔에 참여해 주세요.” 고백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다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43:4)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큰 기쁨의 하나님입니다. 바로 그분에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기쁨,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주시려고, “얘야, 나에게 소망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인생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다셨습니다. 우리의 슬픔, 낙심, 절망, 좌절, 고통, 탄식, 신음, 외로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을 대신하여 예수님은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주님을 바라보며 이겨나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드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세상을 이기게 만듭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억누르며 신음하게 합니까? 무엇 때문에 답답합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는 것,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초청하시는 이유입니다.
참된 예배를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소망교회의 예배는 클래식한 예배입니다. 장미가 만개하기 전에 꽃봉오리를 살짝 열고 있는 것처럼 절제된 경건이 있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아주 압축적입니다. 이러한 공예배의 몇 가지 특성과 더불어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배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도님들이나 저나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연애할 때 소위 ‘밀당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 늦게도 가보고 조금 일찍도 가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밀당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앞에 있는 분,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나려고 할 때 일찍 나가서 준비하지 않습니까?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내가 준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앞에 시간을 정확히 드리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예배에 전념하고 몰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이 단절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아멘으로 응답하고, 찬송을 부를 때 영혼의 고백을 함께 하며,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즉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세상을 차단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현 문명이 낳은 최고의 이기(利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경도 찾고 찬송가 가사도 봅니다. 지금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찬송이나 성경을 보는 것으로만 스마트폰을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그 안에 기록을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로 인해 옆에 있는 사람까지 자꾸만 거기에 신경이 쓰입니다. 손을 움직이고, 가끔은 문자가 왔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러면 또 무엇이 왔나 하고 들여다보게 됩니다. 세상성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그래도 요즘 스마트폰은 좋아서 비행기 탈 때 하듯이 다른 것은 다 끄고 내가 사용하려는 것만 쓸 수 있으니 너무 막지 말라.” 예배드리려 들어오기 전에 스마트폰을 다 끄고 오라고 하면, 젊은이들이 화를 낸다고 합니다. “저 목사님은 구닥다리여서 스마트폰도 못 쓰게 한다!”
그런데 사실, 세상성과 구별되어 예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스마트폰을 끄고 들어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둘이 애인인가 봅니다. 예배를 드리러는 왔는데, 하나님보다 옆에 있는 애인이 더 사랑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이쪽 손도 만지고, 저쪽 손도 만집니다. 뒤에 있는 사람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왔는데 앞의 남녀가 자꾸 스킨십을 하면 신경 쓰이지 않겠습니까?
예배드리는 것은 내 아내나 남편보다, 내 애인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끼리 손을 잡고 오다가도 예배당에 들어오면 일단 손을 놓고 하나님과 데이트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집중과 몰입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나로부터 세상을 차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첫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하면, ‘피 같은 돈’이라는 표현이 있겠습니까? 그 소중한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정성껏 말입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싼 옷, 사치하는 옷이 아니라 깨끗하고 단정한 옷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7:6∼7)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려지는 헌금과 옷이 중요한 이유는, 헌금과 입고 오는 옷에 나의 정성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제물인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동물을 죽여서 내 죄를 동물에게 지웠습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내 몸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 나왔을 때, ‘하나님, 내 옛 모습, 죄악과 탐욕과 교만과 거짓을 다 무너뜨리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마치 죽은 동물처럼 내 옛 자아는 죽고, 새로운 자아인 새 몸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먼저는 공적 예배에 참여하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세상으로 연장된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은 새로운 예배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처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옵소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옵소서.’ 하며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예배드리는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기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