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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함께 있을 때 가까이 있고 싶고, 헤어질 때 가슴 아픈 것입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가 있습니다. 첩보 액션물이면서 동시에 멜로드라마인 ‘아이리스’라는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사랑하는 연인간의 애틋하고 애잔한 모습이 나올 때마다 흐르는 테마곡이 있습니다. 그 테마곡의 제목은 ‘사랑하면 안되나요’입니다. 가사가 아주 애절한데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린 여기까지인가요. 허락된 시간조차 이제는 다한 건가요.
이렇게 또 우린 서로 사랑하면서 눈물을 감춘 채 돌아서야만 하나요.
못 다한 그 말 너무나 사랑한다고 단 한번만이라도 해줄 수 있다면
우리 어떻게 헤어져 우리 어떻게 헤어져
내 가슴이 그댈 놓지 못하는데 내가 안겨 쉴 곳 오직 하나 그대뿐인데.
우리 사랑 이대로 우리 사랑 이대로 끝인가요.
정말 이제 마지막인건가요. 우리에겐 더 이상 다음은 없는 건가요.
평생 서로 그리움에 아파하면서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야만 하나요.
시간을 돌려 그때 그날로 돌아가 단 하루만이라도 머물 수 있다면.
우리 어떻게 헤어져 우리 어떻게 헤어져
내 가슴이 그댈 놓지 못하는데 내가 안겨 쉴 곳 오직 하나 그대뿐인데.
우리 그냥 이대로 우리 그냥 이대로
사랑하면 안 되나요 사랑하면 안 되나요.
그대가 없다면 눈물로 살 텐데 그대 죽을 만큼 원하고 또 원한다 해도
우리 사랑 이대로 우리 사랑 이대로 끝인가요.
사랑하면 가까이 있고 싶고,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고, 헤어지면 가슴이 아픈 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가사 말입니다.
공간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근접학(Proxemics)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 학문은 인간이 다른 사람과 얼마만큼의 공간이 필요한지, 또 공간이 인간의 심리, 환경,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영화관에 갔는데 영화관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넓은 공간을 놔두고 내 바로 옆에 앉았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왜 내 옆에 와서 앉는 거지? 좀 멀리 떨어져 앉으면 좋을 텐데. 차라리 내가 자리를 옮길까?’ 왜 그렇습니까? 나의 공간을 모르는 사람에게 침범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그 사람으로 인해 불편합니다. 그런데 반대 현상도 있습니다. 친구와 모처럼 영화 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내 옆에 앉을 줄 알았던 친구가 나와 몇 자리를 건너서 앉았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마음이 불안해지고 친구가 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공간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을 구별하면서 인간에게는 보통 4가지 공간 구역이 설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친밀감의 영역, 즉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거리입니다. 에드워드 홀은 스킨십이 가능한 약 45cm까지가 친밀감의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대화를 함께 나누는 거리입니다. 애인들과 배우자들이 그렇습니다. 엄마와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이 거리에서 조금 멀어지면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개인적인 영역입니다. 이것은 45cm부터 1m 20cm까지의 거리로써 개인적인 자기영역을 만들어내는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나 직장, 교회에서 서로 알고는 있지만 그들이 내 영역에 너무 가까이 오는 것은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사회적인 영역입니다. 1.2m에서부터 3.5m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며 개인적인 용무가 아니라 일반적인 일을 할 때 생기는 거리입니다. 지하철을 타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할 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지나가도록 만드는 거리가 1.2m에서 3.5m 정도 됩니다.
네 번째는 공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3.5m 이상에서부터 시야가 미치는 거리까지의 영역으로써 일반적으로 공적인 모임이나 학교에서 강연 등을 할 때 적용되는 거리입니다.
남자들은 이러한 거리를 굉장히 정확하게 지키려고 하는 반면, 여자들은 이 거리를 쉽게 무너뜨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은 서로 좋아하면 가까이 가려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개인적인 자기 공간도 쉽게 무너뜨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 공간에 언제든지 들어와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자리가 친구의 자리이고, 애인의 자리이며, 함께 사는 부부의 자리입니다.
성경은 결혼하면 남편과 아내의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기록합니다. 부부란 둘 사이의 모든 거리감을 극복하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사랑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절정이요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들마다 함께 걷는 모습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부부는 팔짱을 끼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부부는 서로 한참 거리를 두고 걸어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만 보고도 그들에게 어떤 형태의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간이 인간의 심리, 문화, 그리고 삶의 모든 자리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적대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엄청난 심연의 거리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거리를 직접 주도권을 가지고 매워주셨습니다. 이 땅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전혀 건널 수 없는 그 거리를 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멀어진 거리를 매우시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셨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관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가까이 가려합니다. 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됩니다. 그 사람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 사랑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마다 도망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마주보기 위해서 다가오시지만 인간을 외면합니다. 아니 뒤돌아서서 저 멀리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또 다시 찾아오십니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드셔서 고생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 읽다보면 명백한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장난감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주인을 마냥 뒤따라오는 강아지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하셨고, 하나님처럼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대로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조차도 인간의 마음을 붙들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붙들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찾아오실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인간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고 싶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성경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짝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때부터 내가 너희를 사랑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찾으면 그때부터 내가 너희를 찾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찾고 계셨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시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옆에 항상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바로 우리 옆에서 내가 네 옆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을 남녀 간의 사랑의 관계로 비유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약혼식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약혼식은 서로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혼식을 했어도 함께 동거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떨어져있어야 합니다. 집에 바래다주어야 합니다. 간헐적이고 임시적입니다. 만나는 것이 부분적입니다. 구약의 언약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보여 지는 예수님을 통한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결혼식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동거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포기할 때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도망간 적이 있어도 하나님은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알고자, 우리의 처지대로 해결해주시고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늘의 거룩한 분이 이 죄악 된 땅 속에 오는 것이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충격을 감당할만한 믿음의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마리아였고 요셉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난 사건은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령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마리아에게 오셔서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처녀가 임신하고,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해서 임신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돌로 쳐 죽이는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마리아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마리아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순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요셉에게 자신이 성령으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했을 것입니다. 처녀가 와서 성령으로 임신했다고 했을 때 요셉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거짓말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배신감이 그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아내 될 사람이 남의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하니 비참해졌을 것입니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의 명령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긍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을 살리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칼날을 들어 그녀를 내려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로 이 여인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고민하다가 이혼증서를 쓰고 조용히 그 여인을 보내려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에 대해서 성경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마태복음 1:19).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란 사랑이 있는 사람, 긍휼이 있는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요셉이 고심하던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0~21)
천사의 말은 마리아가 한 말과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천사의 말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요셉은 유대인으로서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요셉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에게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통해서 메시아가 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24절을 보면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였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고통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위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시 성경을 펴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를 찾고자하시는지,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시는지,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애인을 생각하면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시고 이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한다면, 어찌 우리가 쉽게 낙망하고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내 편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이제 더 이상 부수적인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 인생에 주인공으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래서 기쁜 소식이고 축복의 소식이며 감사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저 북녘 땅의 백성들에게, 아니 저 오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니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자랑스럽게 증거 하는 하나님의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 18 ~ 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사랑은 함께 있을 때 가까이 있고 싶고, 헤어질 때 가슴 아픈 것입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가 있습니다. 첩보 액션물이면서 동시에 멜로드라마인 ‘아이리스’라는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사랑하는 연인간의 애틋하고 애잔한 모습이 나올 때마다 흐르는 테마곡이 있습니다. 그 테마곡의 제목은 ‘사랑하면 안되나요’입니다. 가사가 아주 애절한데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린 여기까지인가요. 허락된 시간조차 이제는 다한 건가요.
이렇게 또 우린 서로 사랑하면서 눈물을 감춘 채 돌아서야만 하나요.
못 다한 그 말 너무나 사랑한다고 단 한번만이라도 해줄 수 있다면
우리 어떻게 헤어져 우리 어떻게 헤어져
내 가슴이 그댈 놓지 못하는데 내가 안겨 쉴 곳 오직 하나 그대뿐인데.
우리 사랑 이대로 우리 사랑 이대로 끝인가요.
정말 이제 마지막인건가요. 우리에겐 더 이상 다음은 없는 건가요.
평생 서로 그리움에 아파하면서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야만 하나요.
시간을 돌려 그때 그날로 돌아가 단 하루만이라도 머물 수 있다면.
우리 어떻게 헤어져 우리 어떻게 헤어져
내 가슴이 그댈 놓지 못하는데 내가 안겨 쉴 곳 오직 하나 그대뿐인데.
우리 그냥 이대로 우리 그냥 이대로
사랑하면 안 되나요 사랑하면 안 되나요.
그대가 없다면 눈물로 살 텐데 그대 죽을 만큼 원하고 또 원한다 해도
우리 사랑 이대로 우리 사랑 이대로 끝인가요.
사랑하면 가까이 있고 싶고,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고, 헤어지면 가슴이 아픈 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가사 말입니다.
공간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근접학(Proxemics)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 학문은 인간이 다른 사람과 얼마만큼의 공간이 필요한지, 또 공간이 인간의 심리, 환경,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영화관에 갔는데 영화관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넓은 공간을 놔두고 내 바로 옆에 앉았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왜 내 옆에 와서 앉는 거지? 좀 멀리 떨어져 앉으면 좋을 텐데. 차라리 내가 자리를 옮길까?’ 왜 그렇습니까? 나의 공간을 모르는 사람에게 침범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그 사람으로 인해 불편합니다. 그런데 반대 현상도 있습니다. 친구와 모처럼 영화 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내 옆에 앉을 줄 알았던 친구가 나와 몇 자리를 건너서 앉았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마음이 불안해지고 친구가 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공간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을 구별하면서 인간에게는 보통 4가지 공간 구역이 설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친밀감의 영역, 즉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거리입니다. 에드워드 홀은 스킨십이 가능한 약 45cm까지가 친밀감의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대화를 함께 나누는 거리입니다. 애인들과 배우자들이 그렇습니다. 엄마와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이 거리에서 조금 멀어지면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개인적인 영역입니다. 이것은 45cm부터 1m 20cm까지의 거리로써 개인적인 자기영역을 만들어내는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나 직장, 교회에서 서로 알고는 있지만 그들이 내 영역에 너무 가까이 오는 것은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사회적인 영역입니다. 1.2m에서부터 3.5m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며 개인적인 용무가 아니라 일반적인 일을 할 때 생기는 거리입니다. 지하철을 타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할 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지나가도록 만드는 거리가 1.2m에서 3.5m 정도 됩니다.
네 번째는 공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3.5m 이상에서부터 시야가 미치는 거리까지의 영역으로써 일반적으로 공적인 모임이나 학교에서 강연 등을 할 때 적용되는 거리입니다.
남자들은 이러한 거리를 굉장히 정확하게 지키려고 하는 반면, 여자들은 이 거리를 쉽게 무너뜨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은 서로 좋아하면 가까이 가려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개인적인 자기 공간도 쉽게 무너뜨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 공간에 언제든지 들어와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자리가 친구의 자리이고, 애인의 자리이며, 함께 사는 부부의 자리입니다.
성경은 결혼하면 남편과 아내의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기록합니다. 부부란 둘 사이의 모든 거리감을 극복하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사랑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절정이요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들마다 함께 걷는 모습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부부는 팔짱을 끼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어떤 부부는 서로 한참 거리를 두고 걸어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만 보고도 그들에게 어떤 형태의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간이 인간의 심리, 문화, 그리고 삶의 모든 자리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적대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엄청난 심연의 거리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거리를 직접 주도권을 가지고 매워주셨습니다. 이 땅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전혀 건널 수 없는 그 거리를 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멀어진 거리를 매우시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셨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관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가까이 가려합니다. 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됩니다. 그 사람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 사랑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마다 도망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마주보기 위해서 다가오시지만 인간을 외면합니다. 아니 뒤돌아서서 저 멀리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또 다시 찾아오십니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드셔서 고생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 읽다보면 명백한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장난감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주인을 마냥 뒤따라오는 강아지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하셨고, 하나님처럼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대로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조차도 인간의 마음을 붙들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붙들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찾아오실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인간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고 싶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성경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짝사랑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때부터 내가 너희를 사랑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찾으면 그때부터 내가 너희를 찾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찾고 계셨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시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옆에 항상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바로 우리 옆에서 내가 네 옆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을 남녀 간의 사랑의 관계로 비유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약혼식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약혼식은 서로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혼식을 했어도 함께 동거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떨어져있어야 합니다. 집에 바래다주어야 합니다. 간헐적이고 임시적입니다. 만나는 것이 부분적입니다. 구약의 언약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보여 지는 예수님을 통한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결혼식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동거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포기할 때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도망간 적이 있어도 하나님은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알고자, 우리의 처지대로 해결해주시고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늘의 거룩한 분이 이 죄악 된 땅 속에 오는 것이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충격을 감당할만한 믿음의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마리아였고 요셉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난 사건은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령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마리아에게 오셔서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처녀가 임신하고,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해서 임신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돌로 쳐 죽이는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마리아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마리아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순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요셉에게 자신이 성령으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했을 것입니다. 처녀가 와서 성령으로 임신했다고 했을 때 요셉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거짓말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배신감이 그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아내 될 사람이 남의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하니 비참해졌을 것입니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의 명령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긍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을 살리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칼날을 들어 그녀를 내려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로 이 여인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고민하다가 이혼증서를 쓰고 조용히 그 여인을 보내려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에 대해서 성경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마태복음 1:19).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란 사랑이 있는 사람, 긍휼이 있는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요셉이 고심하던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0~21)
천사의 말은 마리아가 한 말과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천사의 말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요셉은 유대인으로서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요셉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에게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통해서 메시아가 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24절을 보면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였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고통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위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시 성경을 펴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를 찾고자하시는지,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시는지,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애인을 생각하면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시고 이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한다면, 어찌 우리가 쉽게 낙망하고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내 편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이제 더 이상 부수적인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 인생에 주인공으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래서 기쁜 소식이고 축복의 소식이며 감사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저 북녘 땅의 백성들에게, 아니 저 오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니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자랑스럽게 증거 하는 하나님의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