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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은 하나님께! -요셉 이야기 5-

창세기 39: 19 ~ 23

김지철 목사

2013.07.28

긍정의 신비는 때로 감춰져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작품을 구경하다가 한 그림 앞에 서게 됐는데, 유독 그 앞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그림인가 봤더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였습니다.
제가 모나리자를 보고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원래 그림이 저렇게 작았던가?’였습니다. 모나리자는 가로가 53cm, 세로가 77cm인 유화로 그렇게 큰 그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 여인이 웃고 있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입니다. 보통 모나리자의 눈을 가리고 입만 보면 미소 짓는 그림이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반대로 입을 가리고 눈만 보면 정색하고 있는 여인의 차가움도 보이는 그림입니다.
미술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 얼굴을 양쪽으로 구분해서 보면, 오른쪽과 왼쪽이 대칭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른쪽만 보면 남자 같기도 하고, 왼쪽만 보면 여자 같기도 하다고 지적합니다. 또 입가를 보면 소년의 모습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소녀의 모습 같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이 그림을 사람들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한 심리학자가 모나리자의 얼굴을 분석한 결과, 그 얼굴에는 83%의 긍정적 미소와 17%의 부정적인 슬픔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매년 5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해 이 그림을 보는데, 어쩌면 신비하게 감추어진 이 긍정적인 미소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긍정심리학자들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감정에 이상적인 황금 비율이 있다고 말합니다. 긍정의 정서가 세 번 경험될 때 부정의 정서가 한 번 경험되고, 혹은 부정의 정서가 한 번 경험될 때 긍정의 정서가 세 번 경험되는 것이 삶에 활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100% 긍정성만 갖게 되면 오히려 삶에 도전과 변화가 없고, 자기반성이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부정의 정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이 긍정보다 더 커지게 되면 사람이 위축된다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루를 지내면서 부정의 정서가 한 번 있으면 세 번의 긍정정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삶이 훨씬 더 윤택해지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로 살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거울을 봅니다. 여러분은 오늘 몇 번이나 거울을 보셨습니까? 거울을 볼 때 무엇부터 보십니까? 눈부터 보십니까? 눈이 빛나고 있던가요, 아니면 멍한 눈빛이던가요? 얼굴빛은 어떠했나요? 환하고 긍정적인 자신이 느껴지셨습니까, 아니면 움츠러들어 있고, 우울해 보였습니까? 분명한 것은 내 생각이 내 얼굴 표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어떤 태도,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만, 인디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두 늑대 이야기를 한 번 더 나누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말합니다.
“얘야,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함께 살고 있단다. 그런데 두 늑대가 치열하게 서로 치고받으며 싸움을 하지. 하나는 악마 같은 못된 놈으로 분노, 질투, 미움, 교만, 탐욕을 담고 있는 놈이란다. 또 한 놈은 착한 놈으로 기쁨, 희망, 관대함, 겸손함, 신뢰, 사랑이 그 안에 담겨있단다. 두 마리 늑대는 늘 싸움을 하지. 이건 이 할아버지 마음에서도, 네 마음에서도,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린 손자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 줍니다. “네가 먹이를 계속 주는 놈이 이긴단다.”
우리는 어떤가요? 어디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미움과 분노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쁨과 사랑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그것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경험보다 나쁜 경험을 더 깊이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욕하고 비난한 것, 나를 조롱하거나 억울하게 모함한 것 등은 평생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집니다. 아니 미움과 분노가 생깁니다. 과거에 끝난 일이면 ‘시간이 약이지’하며 기다릴 텐데 지금까지 내 속에서 지속되는 경우라면 어느 누구도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절망하기에 충분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요셉은 어떠했을까요? 갑자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그것도 한 여인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이었습니다. 잘나가는 보디발의 가정총무로서 가졌던 모든 특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어둠침침하고, 음습한, 차디찬 감옥 속에 처박히게 됩니다.
우리는 요셉을 좋아합니다. 특별히 남자들은 그를 닮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셉을 떠올리며 30세에 애굽이라는 대제국의 국무총리가 된 것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가기까지 13년 동안이나 외로움의 길을 걸었습니다. 노예의 길을 걸었습니다. 게다가 허무맹랑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처절한 아픔을 통과하고 나서야 총리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의 과정 속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억울함에 괴로워했던 요셉의 모습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까요? 얼마나 원망스럽고 억울했을까요?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그동안 걸어온 인생의 모든 발걸음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을 것입니다. ‘형들에게 팔렸지? 여기서 종살이를 했지? 그리고 이제는 한 여인의 모함으로 감옥에까지 들어왔구나…’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 모든 일들이 그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요셉이 불평하거나 원망한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기록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절망하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혼자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화를 내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전설적인 인물, 상징적인 인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에게도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의문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입니까? 저놈은 멀쩡한데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고통이 지속되면 두 번째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언제야 이 고난이 끝나겠습니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겠습니까?”
거창한 고난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어도 우리의 삶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먼저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탓하는 것입니다. ‘나는 형편없어. 멍청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안 돼. 너무 비참해, 나는 정말 못났어!’ 하며 자기 자신을 꽁꽁 묶습니다. 자기연민과 열등감 속에서 스스로를 시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의 탓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꼭 훼방 놓는 사람이 있어. 나를 무너뜨리려고 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혹시 남에게 거절당해 본 적 있습니까? 모함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혼자 힘들어해 본 적 있습니까? 그러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겁이 납니다. 새롭게 일을 시도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청년들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들이 때로 시험에 한두 번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또다시 시험을 보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이번에는 될까?’ 하고 마음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인간관계도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연애할 때도 힘들어집니다. 남자들의 경우, 내가 좋아하는 여성이 있어도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이 겁이 납니다. 인간관계란 원래 어려운 것인데 거절을 당하게 되면 더욱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탓하는 것은 환경입니다. ‘이 모든 게 잘못된 환경 때문이야. 다 운명 탓이야!’ 이처럼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내 탓, 남의 탓, 환경 탓을 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우리를 붙잡게 됩니다.

요셉이 가진 희망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어렵고 힘든 것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탓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 하나님은 늘 내게 침묵하시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가신 거야?’ 이렇게 탓하고 나면, 환했던 빛이 하나하나 꺼지기 시작합니다. 슬퍼지고 외로워집니다. 스스로가 모든 것에서 단절된 듯 희망 없는 존재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요셉이 지금 바로 그런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희망을 갖기 어려운 순간에도 그의 가슴에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요셉보다 더 희망이 없는 상황입니까? 부모로부터 단절되거나 가족을 보지 못합니까? 자유자였는데 노예가 되었습니까? 요셉처럼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까? 요셉의 고통보다 우리의 고통이 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요셉보다 더 절망하고 있을까요? 왜 더 힘들어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왜 어찌할 줄 모르고 스스로 탄식하며 무너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희망은 어디서부터 생긴 것일까요?
그것은 환경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여건이 좋아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을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놀라운 말씀이 2절, 3절, 21절, 23절에 걸쳐 네 번씩이나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다른 사람이 볼 때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와서 “야,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는가봐!”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굉장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외부의 이러한 고백이 있으려면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먼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나 사랑하시죠?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와 동행하시죠?” 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볼 때 ‘저 놈은 실망해야 하는데 실망하지 않네. 저 놈은 이제 다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네. 도대체 왜일까? 아, 기도하고 있구나! 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나님께 자기의 인생을 위탁하고 있구나!’ 이렇게 깨달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 속의 역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진다는 말이 바로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입니다. 망각의 대상이 될까봐 괴로운 것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친한 친구들로부터, 이웃들로부터 ‘저 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것, 즉 잊혀지는 것이 우리에게 괴로움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큰 괴로움은 바로 하나님에게 잊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를 잊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꿈을 붙잡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꿈을 품기에는 현실이 너무 비참하고 자신이 모습이 처량했습니다. 죄인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꿈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붙잡은 것은 그 꿈을 준 하나님입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은 시간과 공간에 붙잡히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붙잡히면서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요셉은 고난 속에서도 자유자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었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했던 것, 물론 그것 때문에 형들이 시기심을 갖게 되어 요셉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고난 속에서 아버지의 그 사랑이 큰 버팀목이 되었숩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그는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그를 파괴시키지 못 했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고난이 그를 성숙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계십니까?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7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119:71)

고난당한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고 승승장구했다면, 내 잘난 맛에 인생을 살았을 텐데 고난을 통해 나의 한계성도 알고, 또 내 가능성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펴서 읽게 되었고,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성숙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길이며 인격이 바르게 나타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통해 요셉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난아, 네가 나를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감옥아, 네가 내 육체를 가두고 있지만 내 자유로운 영혼을 억압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의 축복은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갖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자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내가 진리다.” 즉 예수님을 아는 것이 자유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내게 자유로운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이겨나갈 수 있는 은총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에 상관없이 넉넉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의 연약함에 동참하고 그들을 위로해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창세기 40:7)

이것은 곧, 감옥에 갇혀 있지만 요셉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의 얼굴에는 근심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얼굴빛을 염려하며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묻게 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관원장이 고민하고 있을 때 요셉이 한 말에 답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요셉)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세기 40:8)

꿈이란 인생의 현재와 미래입니다. 미지의 세계 속에 관련된 나의 삶입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해석자가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해석자이신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면서 주어진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요셉의 일생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요셉은 종이었지만 종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혔지만 죄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살았습니다.

인생의 해석자이신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을 슬프게 하고, 외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과 공간 속의 그 무엇이 우리를 억누르기 때문에 우리는 슬프고 외롭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만드신 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진수성찬을 차려 두고 맛있게 먹어도 마음은 허하고, 늘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시달리지 않습니까? 넓은 평수의 주택에서 최고급 침대에 화려한 이불을 덮고 자도 가슴이 시리지 않습니까? 도대체 뭐가 더 있어야 될까요? 하나님입니다. 내 영혼에 하나님이 계셔야 기쁨이 생기고 감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흘린 눈물을 예수님께서 닦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만져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면서 다시 시작하세요. 특별히 청년들이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멈추지 마십시오. 내 인생 끝났다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연애에 실패했어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시험에 실패했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하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삶의 자리에서 뭔가 잘 안 되었다고 해도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해석자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다시 출발하십시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 귀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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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9: 19 ~ 23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긍정의 신비는 때로 감춰져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작품을 구경하다가 한 그림 앞에 서게 됐는데, 유독 그 앞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그림인가 봤더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였습니다.
제가 모나리자를 보고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원래 그림이 저렇게 작았던가?’였습니다. 모나리자는 가로가 53cm, 세로가 77cm인 유화로 그렇게 큰 그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 여인이 웃고 있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입니다. 보통 모나리자의 눈을 가리고 입만 보면 미소 짓는 그림이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반대로 입을 가리고 눈만 보면 정색하고 있는 여인의 차가움도 보이는 그림입니다.
미술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 얼굴을 양쪽으로 구분해서 보면, 오른쪽과 왼쪽이 대칭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른쪽만 보면 남자 같기도 하고, 왼쪽만 보면 여자 같기도 하다고 지적합니다. 또 입가를 보면 소년의 모습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소녀의 모습 같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이 그림을 사람들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한 심리학자가 모나리자의 얼굴을 분석한 결과, 그 얼굴에는 83%의 긍정적 미소와 17%의 부정적인 슬픔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매년 5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해 이 그림을 보는데, 어쩌면 신비하게 감추어진 이 긍정적인 미소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긍정심리학자들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감정에 이상적인 황금 비율이 있다고 말합니다. 긍정의 정서가 세 번 경험될 때 부정의 정서가 한 번 경험되고, 혹은 부정의 정서가 한 번 경험될 때 긍정의 정서가 세 번 경험되는 것이 삶에 활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100% 긍정성만 갖게 되면 오히려 삶에 도전과 변화가 없고, 자기반성이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부정의 정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이 긍정보다 더 커지게 되면 사람이 위축된다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루를 지내면서 부정의 정서가 한 번 있으면 세 번의 긍정정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삶이 훨씬 더 윤택해지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로 살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거울을 봅니다. 여러분은 오늘 몇 번이나 거울을 보셨습니까? 거울을 볼 때 무엇부터 보십니까? 눈부터 보십니까? 눈이 빛나고 있던가요, 아니면 멍한 눈빛이던가요? 얼굴빛은 어떠했나요? 환하고 긍정적인 자신이 느껴지셨습니까, 아니면 움츠러들어 있고, 우울해 보였습니까? 분명한 것은 내 생각이 내 얼굴 표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어떤 태도,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만, 인디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두 늑대 이야기를 한 번 더 나누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말합니다.
“얘야,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함께 살고 있단다. 그런데 두 늑대가 치열하게 서로 치고받으며 싸움을 하지. 하나는 악마 같은 못된 놈으로 분노, 질투, 미움, 교만, 탐욕을 담고 있는 놈이란다. 또 한 놈은 착한 놈으로 기쁨, 희망, 관대함, 겸손함, 신뢰, 사랑이 그 안에 담겨있단다. 두 마리 늑대는 늘 싸움을 하지. 이건 이 할아버지 마음에서도, 네 마음에서도,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린 손자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 줍니다. “네가 먹이를 계속 주는 놈이 이긴단다.”
우리는 어떤가요? 어디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미움과 분노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쁨과 사랑에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그것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경험보다 나쁜 경험을 더 깊이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욕하고 비난한 것, 나를 조롱하거나 억울하게 모함한 것 등은 평생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해집니다. 아니 미움과 분노가 생깁니다. 과거에 끝난 일이면 ‘시간이 약이지’하며 기다릴 텐데 지금까지 내 속에서 지속되는 경우라면 어느 누구도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절망하기에 충분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요셉은 어떠했을까요? 갑자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그것도 한 여인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이었습니다. 잘나가는 보디발의 가정총무로서 가졌던 모든 특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어둠침침하고, 음습한, 차디찬 감옥 속에 처박히게 됩니다.
우리는 요셉을 좋아합니다. 특별히 남자들은 그를 닮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셉을 떠올리며 30세에 애굽이라는 대제국의 국무총리가 된 것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가기까지 13년 동안이나 외로움의 길을 걸었습니다. 노예의 길을 걸었습니다. 게다가 허무맹랑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처절한 아픔을 통과하고 나서야 총리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의 과정 속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억울함에 괴로워했던 요셉의 모습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까요? 얼마나 원망스럽고 억울했을까요?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그동안 걸어온 인생의 모든 발걸음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을 것입니다. ‘형들에게 팔렸지? 여기서 종살이를 했지? 그리고 이제는 한 여인의 모함으로 감옥에까지 들어왔구나…’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 모든 일들이 그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요셉이 불평하거나 원망한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기록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절망하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혼자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화를 내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전설적인 인물, 상징적인 인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에게도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의문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입니까? 저놈은 멀쩡한데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고통이 지속되면 두 번째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언제야 이 고난이 끝나겠습니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겠습니까?”
거창한 고난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어도 우리의 삶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먼저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탓하는 것입니다. ‘나는 형편없어. 멍청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안 돼. 너무 비참해, 나는 정말 못났어!’ 하며 자기 자신을 꽁꽁 묶습니다. 자기연민과 열등감 속에서 스스로를 시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의 탓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꼭 훼방 놓는 사람이 있어. 나를 무너뜨리려고 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혹시 남에게 거절당해 본 적 있습니까? 모함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혼자 힘들어해 본 적 있습니까? 그러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겁이 납니다. 새롭게 일을 시도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청년들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들이 때로 시험에 한두 번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또다시 시험을 보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이번에는 될까?’ 하고 마음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인간관계도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연애할 때도 힘들어집니다. 남자들의 경우, 내가 좋아하는 여성이 있어도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이 겁이 납니다. 인간관계란 원래 어려운 것인데 거절을 당하게 되면 더욱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탓하는 것은 환경입니다. ‘이 모든 게 잘못된 환경 때문이야. 다 운명 탓이야!’ 이처럼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내 탓, 남의 탓, 환경 탓을 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우리를 붙잡게 됩니다.

요셉이 가진 희망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어렵고 힘든 것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탓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 하나님은 늘 내게 침묵하시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가신 거야?’ 이렇게 탓하고 나면, 환했던 빛이 하나하나 꺼지기 시작합니다. 슬퍼지고 외로워집니다. 스스로가 모든 것에서 단절된 듯 희망 없는 존재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요셉이 지금 바로 그런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희망을 갖기 어려운 순간에도 그의 가슴에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요셉보다 더 희망이 없는 상황입니까? 부모로부터 단절되거나 가족을 보지 못합니까? 자유자였는데 노예가 되었습니까? 요셉처럼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까? 요셉의 고통보다 우리의 고통이 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요셉보다 더 절망하고 있을까요? 왜 더 힘들어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왜 어찌할 줄 모르고 스스로 탄식하며 무너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희망은 어디서부터 생긴 것일까요?
그것은 환경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여건이 좋아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을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놀라운 말씀이 2절, 3절, 21절, 23절에 걸쳐 네 번씩이나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다른 사람이 볼 때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와서 “야,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는가봐!”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굉장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외부의 이러한 고백이 있으려면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먼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나 사랑하시죠?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와 동행하시죠?” 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볼 때 ‘저 놈은 실망해야 하는데 실망하지 않네. 저 놈은 이제 다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네. 도대체 왜일까? 아, 기도하고 있구나! 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나님께 자기의 인생을 위탁하고 있구나!’ 이렇게 깨달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 속의 역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진다는 말이 바로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입니다. 망각의 대상이 될까봐 괴로운 것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친한 친구들로부터, 이웃들로부터 ‘저 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것, 즉 잊혀지는 것이 우리에게 괴로움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큰 괴로움은 바로 하나님에게 잊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를 잊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꿈을 붙잡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꿈을 품기에는 현실이 너무 비참하고 자신이 모습이 처량했습니다. 죄인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꿈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붙잡은 것은 그 꿈을 준 하나님입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은 시간과 공간에 붙잡히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붙잡히면서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요셉은 고난 속에서도 자유자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었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했던 것, 물론 그것 때문에 형들이 시기심을 갖게 되어 요셉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고난 속에서 아버지의 그 사랑이 큰 버팀목이 되었숩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그는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그를 파괴시키지 못 했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고난이 그를 성숙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계십니까?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7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119:71)

고난당한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고 승승장구했다면, 내 잘난 맛에 인생을 살았을 텐데 고난을 통해 나의 한계성도 알고, 또 내 가능성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펴서 읽게 되었고,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성숙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길이며 인격이 바르게 나타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통해 요셉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난아, 네가 나를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감옥아, 네가 내 육체를 가두고 있지만 내 자유로운 영혼을 억압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의 축복은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갖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자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내가 진리다.” 즉 예수님을 아는 것이 자유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내게 자유로운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이겨나갈 수 있는 은총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에 상관없이 넉넉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의 연약함에 동참하고 그들을 위로해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창세기 40:7)

이것은 곧, 감옥에 갇혀 있지만 요셉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의 얼굴에는 근심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얼굴빛을 염려하며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묻게 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관원장이 고민하고 있을 때 요셉이 한 말에 답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요셉)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세기 40:8)

꿈이란 인생의 현재와 미래입니다. 미지의 세계 속에 관련된 나의 삶입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해석자가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해석자이신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면서 주어진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요셉의 일생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요셉은 종이었지만 종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혔지만 죄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살았습니다.

인생의 해석자이신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을 슬프게 하고, 외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과 공간 속의 그 무엇이 우리를 억누르기 때문에 우리는 슬프고 외롭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만드신 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진수성찬을 차려 두고 맛있게 먹어도 마음은 허하고, 늘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시달리지 않습니까? 넓은 평수의 주택에서 최고급 침대에 화려한 이불을 덮고 자도 가슴이 시리지 않습니까? 도대체 뭐가 더 있어야 될까요? 하나님입니다. 내 영혼에 하나님이 계셔야 기쁨이 생기고 감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흘린 눈물을 예수님께서 닦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만져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면서 다시 시작하세요. 특별히 청년들이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멈추지 마십시오. 내 인생 끝났다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연애에 실패했어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시험에 실패했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하십시오. 여러분이 있는 삶의 자리에서 뭔가 잘 안 되었다고 해도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해석자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다시 출발하십시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 귀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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