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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말, 해서는 안될 말

사무엘상 6: 16 ~ 23

김지철 목사

2014.05.18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느낍니다. 특별히 세월호 참사를 통해 모두가 아파하는 것은, 잘못된 말 때문에 희생자가 더 많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배가 침몰하는 가운데 구명조끼를 입어라, 선실에서 기다려라, 배에서 탈출하라는 말들이 급박한 시간에 한 박자씩 지체가 되었습니다. 아니 배에서 탈출하라는 말은 선장과 선원이 다 탈출한 후에도 결국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적절한 시간에 탈출할 수 없었고, 결국 많은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요인입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생긴 현상은,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리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될 말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불신과 윗세대에 대한 거부가 팽배한 사회로 바뀌었다는 불행을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위험한 일이 생기면 각자도생해야 된다.” 단순한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주의적 사고를 만드는 이 사회 현실에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무엇과 동행할까요? 시간과 동행합니다. 장소와 함께 있습니다. 환경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말의 위력은 과거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습니다. 말에 힘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이며, 성품이며 인격입니다. 저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 알아보려면, 말을 시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 속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말은 생각의 집, 삶의 집, 인격의 집이라고들 했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자성어 중에 삼년불비(三年不蜚)라는 말이 있습니다. 3년 동안 날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중국 초나라에 장황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영특한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3년 동안 그저 환락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태자 시절, 그의 탁월한 능력을 보았던 신하들이 탄식하며 염려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장황은 ‘감히 왕에게 간언하는 자는 다 죽일 것’이라는 방을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그 앞에 나설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오고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왕에게 나갑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내며 조금 다른 각도에서 간언을 합니다. “큰 새 한 마리가 남쪽 언덕에 날아와 멈춰 서서는 3년 동안 날갯짓도 하지 않고 울지도 않고 있습니다. 왕은 이 새의 이름을 아십니까?” 왕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3년 동안 날갯짓을 하지 않은 것은 장차 더 크게 날기 위한 것이요. 지금은 비록 날지도 울지도 않지만 한 번 날면 더 높이 날아 하늘을 가릴 것이오. 한 번 울면 천하를 흔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그리고는 자기의 삶을 변화시켜 정사를 잘 돌보게 됩니다.
이렇듯 말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말은 중요합니다. 축복하는 말은 그 축복이 가고, 저주하는 말은 그 저주가 갑니다. 말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용기를 얻었습니까? 또 다른 사람의 비난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말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요? 거리가 멀수록 그 효과는 반감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무엇이라고 비난하고 욕을 하면 거기까지 달려가서 싸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은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향해서 비난의 말을 하면, 가슴이 울렁울렁합니다. 반대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그렇게도 기분이 좋고 즐겁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범주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범주는 넓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넓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범위를 좁혀 오다 보면,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좁혀 오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가정입니다. 내 부모와 내 자녀들입니다. 내 아내와 내 남편입니다. 이 가장 가까운 삶의 범주 안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쓰고 있습니까? 나는 부모님께, 내 배우자에게, 내 자녀에게 어떤 말을 씁니까? 나의 말로 공동체가 세워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너지고 있습니까?

다윗과 미갈은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 부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과 미갈 부부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잘못된 대화법의 예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대화를 통해서 피해야 할 대화법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과 미갈은 쇼윈도 부부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쇼윈도 부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실제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는 것이 쇼윈도 부부입니다. 왜 이런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사회적인 지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체면이 있고, 명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참 괜찮은 가정이네.’ 라고 여기는 것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싸움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둘만의 시간에는 대화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부부생활이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없습니다.
간혹 부부싸움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부부는 싸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싸움을 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정말 괜찮은 부부, 마치 성인과도 같은 부부이거나 쇼윈도 부부일 것입니다.
결혼하신 분들께 여쭤봅니다. 한 달에 몇 번 정도 싸움하는 것 같습니까? 아마 젊은 부부와 중년의 부부, 노년의 부부가 조금씩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젊은 부부들은 평균적으로 한 달에 두 번 내지 세 번 정도 부부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떨까요? 신앙이 있으니 싸움을 덜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이 두 번 내지 세 번 정도 싸움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횟수가 아니라 어떤 싸움이냐 하는 것입니다. 쉽게 사그라지는 싸움과 ‘너하고는 결별이다!’로 여겨지는 싸움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과 미갈은 서로 말을 잘못 했습니다. 서로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감정이 폭발하게 되고, 결국 둘은 갈라지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사무엘하 6:23)

무슨 뜻입니까? 더 이상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서로 남남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정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왜 서로 맞지 않았을까요?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어려서부터 자라온 삶의 처지가 너무 달랐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바깥에 나가서 양을 돌보던 목동이었습니다. 더러운 똥과 오줌이 묻은 것도 마다하지 않고 양을 껴안을 수 있었던, 거친 양치기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갈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습니다. 아름답고 호화로운 곳에서 공주로 자랐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환경을 달랍니다.
살아온 환경과 여건이 다른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그 사랑이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의지력과 절제력도 필요합니다. 젊은 청년들이 사랑을 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하며 노력하지 않는 것, 자기를 절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하지 않음은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게 되었을 때 서로를 힘들게 하는 큰 요인이 됩니다.
미갈은 공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일생을 보내게 되는 여인입니다. 젊어서는 다윗을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아버지 사울과 남편 다윗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미움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울 편에 서야 할지, 남편 다윗 편에 서야 할지 늘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보내 한참을 살고 있는데 다윗이 왕이 되어서는 자신의 여자를 도로 찾겠다며 강제로 미갈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언제였습니까? 아버지 사울이 다윗과 싸우다가 죽은 때입니다. 오빠 요나단도 전사했습니다. 그러니 미갈의 마음에는 다윗을 향한 미움과 사랑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애증이 요동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오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오게 됩니다.

오늘의 사건은 이렇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언약궤인 법궤를 드디어 다윗성, 자기가 살고 있는 성으로 모시게 됩니다. 다윗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계집종들이 춤추는 것을 보다 못해 자신도 그 속에 뛰어 들어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됩니다. 왕의 옷을 벗어젖히고는 베옷을 입고 춤을 추다가, 베옷도 벗겨지면서 살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아내 미갈이 보았습니다. 그때 아내가 느낀 것은 이것입니다. ‘저것은 왕의 체면이 아닌데… 저것은 왕의 체통이 아닌데… 이스라엘 왕이 저렇게 벌거벗고 계집종들과 춤을 추다니…’ 그런 생각이 들자 다윗을 무시하게 되고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미갈의 마음이 이미 꼬였습니다. 마음이 이미 닫혔습니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다윗을 보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사무엘하 6:16)

‘여호와 앞에서’라는 것은 여호와의 법궤, 언약궤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그 앞에서 춤추는 다윗을 보며 어떻게 여겼다고요? 남편을 업신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부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이 아내가 남편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해서 거친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거친 말을 반복하다보면 그 사람을 무시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인식론적인 해석학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더라.’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예전에 모르던 것들이 사랑스럽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그런데 미움의 해석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워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생기면, 그렇게도 예쁘던 아내의 모습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마음의 생각이 삶의 많은 것들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어떤 선입견을 갖게 되면, 그 감정이 말로 나오게 됩니다. 미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 (사무엘하 6:20)

왕은 본래 영화로운 분이신데, 자신에게는 방탕한 자, 염치없는 자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 계집종들이 있는 데서 몸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에 대한 비난입니다.
아내에게 ‘방탕한 자, 염치 없는 자’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남자들은 돌아버립니다. 내 아내로부터 그런 말을 듣기 원하는 남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최근에 결혼한 신혼부부들에게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특별히 ‘나를 화나게 하는 말’에 대해 물었더니 대표적인 몇 가지 말들이 있었습니다. “야, 됐어. 이제 너하고는 말 안 해.” 대화의 상대로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상대가 나를 우습게 여긴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이거 다 당신 탓이야.”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당신과 결혼한 것 정말 후회돼.” 이런 말까지 하게 되면 정말 후회되는 길, 이혼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상대방의 감정과 마음을 상하게 하면, 화해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비꼬는 말만큼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갈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넘어가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고 있습니다. 바로 비교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얼마나 영화로우신지’라는 말에는 ‘내 아버지 사울 왕은 당신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었습니다.

가정을 살리는 비결은 언어에 있습니다.

가장 미련한 아내는 내 남편을 다른 남자, 다른 남편과 비교하는 아내입니다. 내 남편을 누구와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연애중이라면, 내 남자를 다른 남자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런 여자와 누가 함께 있고 싶겠습니까? 내 남편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셔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미갈의 이러한 말을 들은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해?’ 하며 다윗도 함께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미련한 남편은 아내를 공격하고 아내와의 말싸움에서 이기겠다고 하는 남편입니다. 만약 결혼을 하셨다면, 아내를 윽박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형편없다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정말 미련한 남자의 모습입니다.
사실 오늘 다윗은 가정으로 돌아가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언약궤를 다윗성에 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가족을 축복하기 원하면서 들어갔습니다. 20절 말씀의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 (사무엘하 6:20)

남편들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애쓰다가 가정으로 돌아갈 때는, 내 아내를 보고 싶고 내 아들, 딸을 보고 싶고, 그리고 내 가정을 축복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가정 상태가 어떠하든 마지막까지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으면 그 축복이 자신에게 들어오게 되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무조건 축복하십시오. 내 아내, 내 남편, 내 부모, 내 자녀, 내 형제에게 축복하세요. 이것이 가정과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특별히 남편들은 아내에게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남편들의 마음이 태평양 바다 같이 넓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남자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불평하기 시작하면, 딱 5분만 참으세요. 아내의 말을 경청해 주세요.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났어?”하며 공감해 주세요. 그러면 지혜로운 아내는 30초에서 1분 이내에 끝냅니다. 덜 지혜로운 아내는 2분 정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냥 그런 아내라고 해도 5분이면 끝날 겁니다. 그 5분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아, 당신 참 힘들었겠다.”라고 한마디 해 주세요. 아내에게 이겨보려고 맞받아치는 미련한 남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미갈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사무엘하 6:21)

다윗은 지금 건드려서는 안 될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를 버렸어. 네 가문을 다 버렸어. 나도 너를 버리려고 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축복의 언어, 사랑의 언어를 입술에 담으십시오.

결혼하고 나서 문제가 생기면 남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런 것 네 엄마한테 배웠어? 네 아버지한테 배웠어? 너희 집안은 다 이렇게 하냐?” 아니 내 아내가 한 일로 왜 그 집안까지 들먹거립니까? 아내의 일은 아내에게서 끝내야 합니다. 이러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감정을 다치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수많은 욕을 듣고도 참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욕하며 비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받아주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면,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하시며 반겨주십니다.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미움의 언어, 진노와 분노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축복의 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바뀝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가 먼저 해야 할 말,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분별하여 이 시대를 축복의 언어가 넘치는 시대로 새롭게 열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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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6: 16 ~ 23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느낍니다. 특별히 세월호 참사를 통해 모두가 아파하는 것은, 잘못된 말 때문에 희생자가 더 많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배가 침몰하는 가운데 구명조끼를 입어라, 선실에서 기다려라, 배에서 탈출하라는 말들이 급박한 시간에 한 박자씩 지체가 되었습니다. 아니 배에서 탈출하라는 말은 선장과 선원이 다 탈출한 후에도 결국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적절한 시간에 탈출할 수 없었고, 결국 많은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요인입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 생긴 현상은,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리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될 말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불신과 윗세대에 대한 거부가 팽배한 사회로 바뀌었다는 불행을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위험한 일이 생기면 각자도생해야 된다.” 단순한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주의적 사고를 만드는 이 사회 현실에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무엇과 동행할까요? 시간과 동행합니다. 장소와 함께 있습니다. 환경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말의 위력은 과거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습니다. 말에 힘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이며, 성품이며 인격입니다. 저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 알아보려면, 말을 시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 속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말은 생각의 집, 삶의 집, 인격의 집이라고들 했습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자성어 중에 삼년불비(三年不蜚)라는 말이 있습니다. 3년 동안 날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중국 초나라에 장황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영특한 왕자였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3년 동안 그저 환락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태자 시절, 그의 탁월한 능력을 보았던 신하들이 탄식하며 염려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장황은 ‘감히 왕에게 간언하는 자는 다 죽일 것’이라는 방을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그 앞에 나설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오고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왕에게 나갑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내며 조금 다른 각도에서 간언을 합니다. “큰 새 한 마리가 남쪽 언덕에 날아와 멈춰 서서는 3년 동안 날갯짓도 하지 않고 울지도 않고 있습니다. 왕은 이 새의 이름을 아십니까?” 왕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3년 동안 날갯짓을 하지 않은 것은 장차 더 크게 날기 위한 것이요. 지금은 비록 날지도 울지도 않지만 한 번 날면 더 높이 날아 하늘을 가릴 것이오. 한 번 울면 천하를 흔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그리고는 자기의 삶을 변화시켜 정사를 잘 돌보게 됩니다.
이렇듯 말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말은 중요합니다. 축복하는 말은 그 축복이 가고, 저주하는 말은 그 저주가 갑니다. 말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용기를 얻었습니까? 또 다른 사람의 비난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말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요? 거리가 멀수록 그 효과는 반감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무엇이라고 비난하고 욕을 하면 거기까지 달려가서 싸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은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향해서 비난의 말을 하면, 가슴이 울렁울렁합니다. 반대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그렇게도 기분이 좋고 즐겁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범주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범주는 넓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넓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범위를 좁혀 오다 보면,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좁혀 오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가정입니다. 내 부모와 내 자녀들입니다. 내 아내와 내 남편입니다. 이 가장 가까운 삶의 범주 안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쓰고 있습니까? 나는 부모님께, 내 배우자에게, 내 자녀에게 어떤 말을 씁니까? 나의 말로 공동체가 세워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너지고 있습니까?

다윗과 미갈은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 부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과 미갈 부부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잘못된 대화법의 예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대화를 통해서 피해야 할 대화법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과 미갈은 쇼윈도 부부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쇼윈도 부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실제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는 것이 쇼윈도 부부입니다. 왜 이런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사회적인 지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체면이 있고, 명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참 괜찮은 가정이네.’ 라고 여기는 것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싸움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둘만의 시간에는 대화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부부생활이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없습니다.
간혹 부부싸움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부부는 싸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싸움을 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정말 괜찮은 부부, 마치 성인과도 같은 부부이거나 쇼윈도 부부일 것입니다.
결혼하신 분들께 여쭤봅니다. 한 달에 몇 번 정도 싸움하는 것 같습니까? 아마 젊은 부부와 중년의 부부, 노년의 부부가 조금씩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젊은 부부들은 평균적으로 한 달에 두 번 내지 세 번 정도 부부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떨까요? 신앙이 있으니 싸움을 덜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이 두 번 내지 세 번 정도 싸움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횟수가 아니라 어떤 싸움이냐 하는 것입니다. 쉽게 사그라지는 싸움과 ‘너하고는 결별이다!’로 여겨지는 싸움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과 미갈은 서로 말을 잘못 했습니다. 서로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감정이 폭발하게 되고, 결국 둘은 갈라지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사무엘하 6:23)

무슨 뜻입니까? 더 이상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서로 남남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정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왜 서로 맞지 않았을까요?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어려서부터 자라온 삶의 처지가 너무 달랐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바깥에 나가서 양을 돌보던 목동이었습니다. 더러운 똥과 오줌이 묻은 것도 마다하지 않고 양을 껴안을 수 있었던, 거친 양치기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갈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습니다. 아름답고 호화로운 곳에서 공주로 자랐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환경을 달랍니다.
살아온 환경과 여건이 다른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그 사랑이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의지력과 절제력도 필요합니다. 젊은 청년들이 사랑을 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하며 노력하지 않는 것, 자기를 절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하지 않음은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게 되었을 때 서로를 힘들게 하는 큰 요인이 됩니다.
미갈은 공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일생을 보내게 되는 여인입니다. 젊어서는 다윗을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아버지 사울과 남편 다윗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미움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울 편에 서야 할지, 남편 다윗 편에 서야 할지 늘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보내 한참을 살고 있는데 다윗이 왕이 되어서는 자신의 여자를 도로 찾겠다며 강제로 미갈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언제였습니까? 아버지 사울이 다윗과 싸우다가 죽은 때입니다. 오빠 요나단도 전사했습니다. 그러니 미갈의 마음에는 다윗을 향한 미움과 사랑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애증이 요동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오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오게 됩니다.

오늘의 사건은 이렇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언약궤인 법궤를 드디어 다윗성, 자기가 살고 있는 성으로 모시게 됩니다. 다윗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계집종들이 춤추는 것을 보다 못해 자신도 그 속에 뛰어 들어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됩니다. 왕의 옷을 벗어젖히고는 베옷을 입고 춤을 추다가, 베옷도 벗겨지면서 살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아내 미갈이 보았습니다. 그때 아내가 느낀 것은 이것입니다. ‘저것은 왕의 체면이 아닌데… 저것은 왕의 체통이 아닌데… 이스라엘 왕이 저렇게 벌거벗고 계집종들과 춤을 추다니…’ 그런 생각이 들자 다윗을 무시하게 되고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미갈의 마음이 이미 꼬였습니다. 마음이 이미 닫혔습니다.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다윗을 보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사무엘하 6:16)

‘여호와 앞에서’라는 것은 여호와의 법궤, 언약궤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그 앞에서 춤추는 다윗을 보며 어떻게 여겼다고요? 남편을 업신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부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이 아내가 남편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해서 거친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거친 말을 반복하다보면 그 사람을 무시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인식론적인 해석학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더라.’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예전에 모르던 것들이 사랑스럽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그런데 미움의 해석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워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이 생기면, 그렇게도 예쁘던 아내의 모습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마음의 생각이 삶의 많은 것들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어떤 선입견을 갖게 되면, 그 감정이 말로 나오게 됩니다. 미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 (사무엘하 6:20)

왕은 본래 영화로운 분이신데, 자신에게는 방탕한 자, 염치없는 자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 계집종들이 있는 데서 몸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에 대한 비난입니다.
아내에게 ‘방탕한 자, 염치 없는 자’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남자들은 돌아버립니다. 내 아내로부터 그런 말을 듣기 원하는 남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최근에 결혼한 신혼부부들에게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특별히 ‘나를 화나게 하는 말’에 대해 물었더니 대표적인 몇 가지 말들이 있었습니다. “야, 됐어. 이제 너하고는 말 안 해.” 대화의 상대로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상대가 나를 우습게 여긴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이거 다 당신 탓이야.”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당신과 결혼한 것 정말 후회돼.” 이런 말까지 하게 되면 정말 후회되는 길, 이혼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상대방의 감정과 마음을 상하게 하면, 화해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비꼬는 말만큼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갈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넘어가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고 있습니다. 바로 비교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얼마나 영화로우신지’라는 말에는 ‘내 아버지 사울 왕은 당신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었습니다.

가정을 살리는 비결은 언어에 있습니다.

가장 미련한 아내는 내 남편을 다른 남자, 다른 남편과 비교하는 아내입니다. 내 남편을 누구와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연애중이라면, 내 남자를 다른 남자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런 여자와 누가 함께 있고 싶겠습니까? 내 남편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셔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미갈의 이러한 말을 들은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해?’ 하며 다윗도 함께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미련한 남편은 아내를 공격하고 아내와의 말싸움에서 이기겠다고 하는 남편입니다. 만약 결혼을 하셨다면, 아내를 윽박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형편없다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정말 미련한 남자의 모습입니다.
사실 오늘 다윗은 가정으로 돌아가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언약궤를 다윗성에 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가족을 축복하기 원하면서 들어갔습니다. 20절 말씀의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 (사무엘하 6:20)

남편들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애쓰다가 가정으로 돌아갈 때는, 내 아내를 보고 싶고 내 아들, 딸을 보고 싶고, 그리고 내 가정을 축복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가정 상태가 어떠하든 마지막까지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으면 그 축복이 자신에게 들어오게 되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무조건 축복하십시오. 내 아내, 내 남편, 내 부모, 내 자녀, 내 형제에게 축복하세요. 이것이 가정과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특별히 남편들은 아내에게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남편들의 마음이 태평양 바다 같이 넓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남자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불평하기 시작하면, 딱 5분만 참으세요. 아내의 말을 경청해 주세요.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났어?”하며 공감해 주세요. 그러면 지혜로운 아내는 30초에서 1분 이내에 끝냅니다. 덜 지혜로운 아내는 2분 정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냥 그런 아내라고 해도 5분이면 끝날 겁니다. 그 5분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아, 당신 참 힘들었겠다.”라고 한마디 해 주세요. 아내에게 이겨보려고 맞받아치는 미련한 남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미갈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사무엘하 6:21)

다윗은 지금 건드려서는 안 될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를 버렸어. 네 가문을 다 버렸어. 나도 너를 버리려고 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축복의 언어, 사랑의 언어를 입술에 담으십시오.

결혼하고 나서 문제가 생기면 남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런 것 네 엄마한테 배웠어? 네 아버지한테 배웠어? 너희 집안은 다 이렇게 하냐?” 아니 내 아내가 한 일로 왜 그 집안까지 들먹거립니까? 아내의 일은 아내에게서 끝내야 합니다. 이러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감정을 다치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수많은 욕을 듣고도 참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욕하며 비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받아주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면,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하시며 반겨주십니다.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미움의 언어, 진노와 분노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축복의 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바뀝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가 먼저 해야 할 말,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분별하여 이 시대를 축복의 언어가 넘치는 시대로 새롭게 열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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