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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믿음 : 베드로 – 예수님의 제자들 5 –

마태복음 14: 25 ~ 32

김지철 목사

2014.08.24

사람도 가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많은 가정에 한두 개쯤 보석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 손까지 이 보석이 왔을까요? 광부가 광산에서 원광석을 채취하면, 그 중에 양질의 원석을 골라서 적절한 형태로 잘라내게 됩니다. 그것을 대절단, 즉 크게 자르고 다시 세절단, 아주 작게 자르는 작업을 합니다. 그 후 연마판을 통해 매끄럽게 하나하나 가공하여 반지에 쓸 것인지, 목걸이에 쓸 것인지, 팔찌에 쓸 것인지에 따라서 적절하게 세팅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완성품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돈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보석뿐만 아니라 가구며, 옷이며,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런 식으로 가공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공의 작업을 거치는 것은 물건만이 아닙니다. 사람도 비슷합니다. 사람은 그냥 놔둔다고 해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대로 방치해 두면 저절로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가공’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훈련’이라고 칭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택하실 때, 이미 빛나는 보석 같은 사람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널려 있는 돌처럼 흔한 원광석을 택하셨습니다. 스스로 ‘이만하면 지식이 있지. 이만하면 종교심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기 삶에 부족함을 느끼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셨습니다. 갈고 닦으면 빛나는 원석이 될 사람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훈련과 교육,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못된 습관과 가치관들을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 화를 참지 못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에게 책임을 넘기는 비뚤어진 마음들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변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변화가 될까? 인간이 바뀔 수 있을까? 여러분이 스스로를 바라보면 어떻습니까? 바뀌셨습니까, 안 바뀌셨습니까? 바뀌고 있는 과정입니까? 사람들마다 이것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입니다. 인간을 악하게 보는 사람들은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하고, 인간의 선함을 믿는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악함과 선함을 동시에 붙잡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면 변하기 어렵지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나오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때 변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스스로가 문제 많은 인간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되고 변화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당대 최고의 지도자인 지식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꾸짖으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만하면 됐어. 이만하면 지식인이고, 이만하면 종교심도 뛰어나다고.’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아직도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화 있을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 하셨습니다.
둘째, 좋은 멘토, 존경할 만한 스승을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때로는 책이 될 수도,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멘토를 만날 때 배우는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멘토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배움은 사실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내 형제들이 멘토가 됩니다. 또한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고 교회에서는 교사와 목사들이 그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완벽하지 못하고 모두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완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완벽한 분, 우리가 따라가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최고의 멘토이며 스승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는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시며, 우리와 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말과 행동이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땅바닥에 던져진 돌멩이 같은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이 쓰실 만한 그릇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바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저절로 바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베드로에게 반복적인 실패의 과정이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아주 서서히 자신의 생각, 가치관, 인생의 목표 같은 것들이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말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베드로가 참 멋져 보였습니다. 그는 다혈질적인 사람이고 저는 우울질의 모습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많이 가진 베드로의 성격이 청소년, 그리고 대학 시절 부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하면 그대로 말로 표현했습니다. 말이 나오면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생각이 떠올라도 입으로 가기까지 참으로 쉽지 않은데 어떻게 그는 이토록 반응이 빨랐을까요?
요새 젊은 세대들은 많이 바뀐 것 같지만,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여전히 표현에 서툽니다. 화가 나도 쉽게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또 좋은 일이 있어도 표현을 안 합니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려울 때 표현을 하지 않아 속이 썩습니다. 속으로 힘들어 하고 답답해합니다.
저도 자의식이 강한 편이라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비추는 것이 싫어서 가능하면 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던 사람입니다. 이 방어의식이 때로는 필요합니다만, 때로는 그것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인간관계도 잘 할 수 있고 주어진 삶에도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소위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이 자의식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자신을 무너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면 손을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중·고등학교 시절 어떠셨습니까? 혹시 선생님이 질문하시면 손을 제일 먼저 들었던 분이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 대답해서 야단을 맞거나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칭찬도 받고 꾸중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참 부러웠던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 말하고 나서도 다음날이 되면 또 쌩쌩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한 번 실수해서 누군가에게 욕을 먹으면, 그 상한 마음이 그날 하루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주일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심지어 그 생각이 평생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났습니다. 남의 비난에 잠시 위축되었다가도 곧 쌩쌩하게 살아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인지 성경에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어부 아니었는가? 그런데 어떻게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낚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가 매일 바라봤던 것은 갈릴리 바다였을 텐데 그런 그가 어떻게 로마제국, 아니 전세계를 향한 꿈을 품고 복음을 증거하는 비전의 사람이 되었는가?’
베드로도 역시 고난을 받으면 도망가는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서, 오히려 “나에게 고난을 줘봐라. 아무리 그런다 해도 나는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제자 사역의 마지막 순간에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주셨습니다.

…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한복음 1:42)

‘게바’는 아랍어이고, ‘베드로’는 헬라어이자 라틴어이기도 합니다. 즉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인물에게 ‘너는 베드로다. 너는 반석이다. 너는 바위다’라고 별칭을 내리신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바위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변덕쟁이에 들쑥날쑥하고 다혈질적이어서 안정성이 없고, 그래서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지만 꾸중을 받기도 한 그 시몬을 예수님은 왜 게바라, 베드로라 부르셨을까요? 저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거친 모습 속에서 보석과 같이 빛날 변화될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를 격려하고 새롭게 하기 위한 마음이 아니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중요합니다. 격려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볼 때, 물론 문제점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점만 지적하고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가장 잘 압니다. 그러나 부모가 갖는 특색은 자녀의 장점을 잘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자녀에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베드로가 가졌던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예수님도 편애하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도 편견을 갖고 사람을 대하신 것이 아닌가? 왜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만 특별히 좋아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읽어보니 예수님이 편견을 가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매우 좋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궁금해 하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늘 기대하던 제자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하실 때,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드린 것도 그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셨던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은 저녁이 되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를 건너갔습니다. 그때는 새벽이 오기 바로 전, 어둠이 가장 짙은 때였습니다. 얼마쯤 가다보니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사람 같은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성경을 보면 유령이 등장했다고 혼비백산하던 중에 가장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먼저 알아보게 돼 있습니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들이나 딸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수백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에서도 내 아이를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아들 좀 찾아달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찾습니다. 어머니만큼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모든 것을 꿰뚫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사랑을 가져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가져야 깨닫기 시작합니다. 유홍준이 쓴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권에서 그는 조선 정조 때 문장가였던 유한준의 글을 인용하며 해석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 것과 같지 아니하더라.”
사랑은 인식을 빨리 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빨리 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왜 이렇게 게으르냐고 야단을 치지만, 자녀들이 늘 게으른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붙잡기 시작하면 갑자기 부지런해집니다. 새벽부터 일어납니다.
우리가 본래 게으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어서 게을러지는 것입니다. 신앙에 게으름이 생겼다면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앞장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예수님께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보는 수많은 해석학이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해석학은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해석학,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해석학, 예수님이 사랑하신 인간을 우리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해석학,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최고의 해석학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깜깜한 중에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었던 그때, 예수님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부고 당신은 목수 아닙니까? 물에 있어서는 내가 프로고 당신은 아마추어입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누가복음 5:5)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고,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이 안심하라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대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어떻게 주님의 약속을 받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태복음 14:28∼29)

“만일 주님이시면 내게 말씀하소서.” 베드로는 여기서도 말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라는 말씀을 듣고는 물 위로 발을 내딛게 됩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요청해야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단순하게 요청하십니다. “와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와라 그리고 보아라(come and see).”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한 가지로만 요약한다면 이것입니다.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에서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다른 제자들은 도망을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 곁에 있으려고 애썼습니다. 그것 때문에 실패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요21)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실패하고 절망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단순하게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괜찮습니다. 가정주부입니까? 학생입니까? 직장인입니까? 기업을 이끌고 있는 사람입니까? 특정 분야의 전문가입니까? 어떤 역할도 괜찮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기를 원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십시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십시오. 또다시 넘어질 수도 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다 무서운 것은 아닙니다. 회복할 수 있다면 뭐가 무섭겠습니까? 회복이 되지 않으니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니 이 땅에서의 호흡은 끝날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주셨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동안 주어진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지 꼭 확인해 보십시오. 그것을 확인하면서 오늘도 담대히 주어진 삶을 살아가시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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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 25 ~ 32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사람도 가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많은 가정에 한두 개쯤 보석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내 손까지 이 보석이 왔을까요? 광부가 광산에서 원광석을 채취하면, 그 중에 양질의 원석을 골라서 적절한 형태로 잘라내게 됩니다. 그것을 대절단, 즉 크게 자르고 다시 세절단, 아주 작게 자르는 작업을 합니다. 그 후 연마판을 통해 매끄럽게 하나하나 가공하여 반지에 쓸 것인지, 목걸이에 쓸 것인지, 팔찌에 쓸 것인지에 따라서 적절하게 세팅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완성품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돈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보석뿐만 아니라 가구며, 옷이며,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런 식으로 가공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공의 작업을 거치는 것은 물건만이 아닙니다. 사람도 비슷합니다. 사람은 그냥 놔둔다고 해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대로 방치해 두면 저절로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가공’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훈련’이라고 칭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택하실 때, 이미 빛나는 보석 같은 사람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널려 있는 돌처럼 흔한 원광석을 택하셨습니다. 스스로 ‘이만하면 지식이 있지. 이만하면 종교심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기 삶에 부족함을 느끼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셨습니다. 갈고 닦으면 빛나는 원석이 될 사람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훈련과 교육,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못된 습관과 가치관들을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 화를 참지 못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에게 책임을 넘기는 비뚤어진 마음들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변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변화가 될까? 인간이 바뀔 수 있을까? 여러분이 스스로를 바라보면 어떻습니까? 바뀌셨습니까, 안 바뀌셨습니까? 바뀌고 있는 과정입니까? 사람들마다 이것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입니다. 인간을 악하게 보는 사람들은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하고, 인간의 선함을 믿는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악함과 선함을 동시에 붙잡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면 변하기 어렵지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나오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때 변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스스로가 문제 많은 인간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되고 변화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당대 최고의 지도자인 지식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꾸짖으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만하면 됐어. 이만하면 지식인이고, 이만하면 종교심도 뛰어나다고.’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아직도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화 있을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 하셨습니다.
둘째, 좋은 멘토, 존경할 만한 스승을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때로는 책이 될 수도,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멘토를 만날 때 배우는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멘토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배움은 사실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내 형제들이 멘토가 됩니다. 또한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고 교회에서는 교사와 목사들이 그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완벽하지 못하고 모두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완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완벽한 분, 우리가 따라가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최고의 멘토이며 스승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는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시며, 우리와 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말과 행동이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땅바닥에 던져진 돌멩이 같은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이 쓰실 만한 그릇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바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저절로 바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베드로에게 반복적인 실패의 과정이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아주 서서히 자신의 생각, 가치관, 인생의 목표 같은 것들이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말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베드로가 참 멋져 보였습니다. 그는 다혈질적인 사람이고 저는 우울질의 모습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많이 가진 베드로의 성격이 청소년, 그리고 대학 시절 부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하면 그대로 말로 표현했습니다. 말이 나오면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생각이 떠올라도 입으로 가기까지 참으로 쉽지 않은데 어떻게 그는 이토록 반응이 빨랐을까요?
요새 젊은 세대들은 많이 바뀐 것 같지만,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여전히 표현에 서툽니다. 화가 나도 쉽게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또 좋은 일이 있어도 표현을 안 합니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려울 때 표현을 하지 않아 속이 썩습니다. 속으로 힘들어 하고 답답해합니다.
저도 자의식이 강한 편이라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비추는 것이 싫어서 가능하면 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던 사람입니다. 이 방어의식이 때로는 필요합니다만, 때로는 그것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인간관계도 잘 할 수 있고 주어진 삶에도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소위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이 자의식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자신을 무너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면 손을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중·고등학교 시절 어떠셨습니까? 혹시 선생님이 질문하시면 손을 제일 먼저 들었던 분이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 대답해서 야단을 맞거나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칭찬도 받고 꾸중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참 부러웠던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 말하고 나서도 다음날이 되면 또 쌩쌩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한 번 실수해서 누군가에게 욕을 먹으면, 그 상한 마음이 그날 하루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주일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심지어 그 생각이 평생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났습니다. 남의 비난에 잠시 위축되었다가도 곧 쌩쌩하게 살아 움직였습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인지 성경에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어부 아니었는가? 그런데 어떻게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낚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가 매일 바라봤던 것은 갈릴리 바다였을 텐데 그런 그가 어떻게 로마제국, 아니 전세계를 향한 꿈을 품고 복음을 증거하는 비전의 사람이 되었는가?’
베드로도 역시 고난을 받으면 도망가는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서, 오히려 “나에게 고난을 줘봐라. 아무리 그런다 해도 나는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제자 사역의 마지막 순간에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주셨습니다.

…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한복음 1:42)

‘게바’는 아랍어이고, ‘베드로’는 헬라어이자 라틴어이기도 합니다. 즉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인물에게 ‘너는 베드로다. 너는 반석이다. 너는 바위다’라고 별칭을 내리신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바위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변덕쟁이에 들쑥날쑥하고 다혈질적이어서 안정성이 없고, 그래서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지만 꾸중을 받기도 한 그 시몬을 예수님은 왜 게바라, 베드로라 부르셨을까요? 저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거친 모습 속에서 보석과 같이 빛날 변화될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를 격려하고 새롭게 하기 위한 마음이 아니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중요합니다. 격려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볼 때, 물론 문제점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점만 지적하고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가장 잘 압니다. 그러나 부모가 갖는 특색은 자녀의 장점을 잘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자녀에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베드로가 가졌던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예수님도 편애하신 것이 아닌가? 예수님도 편견을 갖고 사람을 대하신 것이 아닌가? 왜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만 특별히 좋아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읽어보니 예수님이 편견을 가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매우 좋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궁금해 하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늘 기대하던 제자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하실 때,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고백을 드린 것도 그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셨던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은 저녁이 되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를 건너갔습니다. 그때는 새벽이 오기 바로 전, 어둠이 가장 짙은 때였습니다. 얼마쯤 가다보니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사람 같은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성경을 보면 유령이 등장했다고 혼비백산하던 중에 가장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먼저 알아보게 돼 있습니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들이나 딸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수백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에서도 내 아이를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아들 좀 찾아달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찾습니다. 어머니만큼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모든 것을 꿰뚫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사랑을 가져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가져야 깨닫기 시작합니다. 유홍준이 쓴 『나의문화유산답사기』 1권에서 그는 조선 정조 때 문장가였던 유한준의 글을 인용하며 해석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 것과 같지 아니하더라.”
사랑은 인식을 빨리 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빨리 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왜 이렇게 게으르냐고 야단을 치지만, 자녀들이 늘 게으른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붙잡기 시작하면 갑자기 부지런해집니다. 새벽부터 일어납니다.
우리가 본래 게으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어서 게을러지는 것입니다. 신앙에 게으름이 생겼다면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앞장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예수님께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보는 수많은 해석학이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해석학은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해석학,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해석학, 예수님이 사랑하신 인간을 우리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해석학,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최고의 해석학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깜깜한 중에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었던 그때, 예수님은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부고 당신은 목수 아닙니까? 물에 있어서는 내가 프로고 당신은 아마추어입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누가복음 5:5)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고,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이 안심하라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대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어떻게 주님의 약속을 받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태복음 14:28∼29)

“만일 주님이시면 내게 말씀하소서.” 베드로는 여기서도 말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라는 말씀을 듣고는 물 위로 발을 내딛게 됩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요청해야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단순하게 요청하십니다. “와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와라 그리고 보아라(come and see).”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한 가지로만 요약한다면 이것입니다.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에서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다른 제자들은 도망을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 곁에 있으려고 애썼습니다. 그것 때문에 실패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요21)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실패하고 절망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단순하게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괜찮습니다. 가정주부입니까? 학생입니까? 직장인입니까? 기업을 이끌고 있는 사람입니까? 특정 분야의 전문가입니까? 어떤 역할도 괜찮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기를 원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십시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십시오. 또다시 넘어질 수도 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다 무서운 것은 아닙니다. 회복할 수 있다면 뭐가 무섭겠습니까? 회복이 되지 않으니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니 이 땅에서의 호흡은 끝날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주셨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동안 주어진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지 꼭 확인해 보십시오. 그것을 확인하면서 오늘도 담대히 주어진 삶을 살아가시는 복된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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