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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요사이 곳곳에서 빛의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를 포함한 여러 건물들에서 성탄절 트리를 별빛으로 치장해서 입니다. 시청 앞이나 청계천에도 빛으로 꾸민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습니다.
빛의 축제는 여름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름 자체가 빛의 계절이고 뜨거움의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날씨가 춥고 낮이 짧은 겨울에는 빛의 축제가 어울립니다. 춥고 어두울 때 우리는 빛과 따뜻함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이 감사하고 반가운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때는 춥고 캄캄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춥고 어둡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입니다.
헤롯은 이 땅을 어둡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헤롯은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기에 기다림을 갖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권력자였습니다. 정치인으로서 탁월한 지략과 수완이 있었고,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잔인한 통치자이자 교활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여러 장애가 생기면서, 아니 어쩌면 그것이 그의 본래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신의 유대인 아내를 죽입니다. 장모도 죽이고, 장남을 비롯한 다른 두 아들마저 죽인 비정한 인간으로 역사 속에 남게 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헤롯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고 전해집니다.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을 많이 잡아들여서 감옥에 가두었다가 내가 죽는 순간에 그들도 다 처형해라.” 자신의 죽음 때문에는 슬피 울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함께 죽게 된 이들 때문에 백성들이 슬퍼하며 울 것이라 생각하여 그러한 일을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잔혹함과 비정함을 가진 헤롯 왕 시대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헤롯은 마음을 열고 새로운 왕을 기쁨으로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놀랐고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헤롯은 70세를 넘긴 노년의 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갓 태어난 메시아의 소식에 놀라 어린 예수를 죽일 방법에 대해 골몰했고, 결국 베들레헴 근처에 대학살 사건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헤롯은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태복음 2:3)
권력을 가진 자는 나이가 많든 적든, 또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의 등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자신의 권력이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헤롯은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마태복음 2:8)
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를 찾아 죽이기 위해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 예수님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가 있습니다. 가장 어두울 때, 하나님은 빛을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하나님은 소망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십니다.
동방박사들은 질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알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등장합니다. 점성술사라고도 할 수 있고 철인, 현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며 별을 연구하던 사람들로서, 유대 전승을 들어 유대 사상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인류 구원의 역사와 자신들이 연구하는 별을 연결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맞이한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방인이었던 동방에서 왔던 박사들이었고, 누가복음에 의하면 가장 낮고 천한 직업을 가진 목자, 목동들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돈 많은 사람이 제일 먼저 와서 예수님을 만났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께 경배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먼저 왔다’가 아니라, 이방인이 먼저 오고 비천한 목자가 먼저 와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질 우주적인 복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어야 할 생명의 소식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 앞에 나와 첫 번째로 무릎을 꿇는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에게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의 지식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기심을 호기심으로 두지 않고 계속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그 질문들이 그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질문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질문해야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질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셔도 내가 그 대답을 듣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질문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 (마태복음 2:2)
처음에는 아마 3인칭 지식으로 이루어진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질문을 하면서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질문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녀들을 키우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질문’ 아닙니까? “이게 뭐예요?” “왜 저 태양은 떨어지지 않아요?” “왜 하루가 자꾸만 돌아가요?” “왜 저녁이 되면 달이 떠요?” 아이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어른들은 질문에 지쳐 “이제 그만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질문이 멈추는 순간에 인간의 성숙과 배움의 역사는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호기심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호기심도 좋은 호기심과 나쁜 호기심으로 나뉩니다. 좋은 호기심이란 무엇일까요?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동방박사의 질문이 바로 좋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 왕의 질문은 달랐습니다. 그의 질문은 나쁜 호기심, 일종의 방어기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폐쇄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7절을 보면,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관심이 있고, 그래서 그것에 참여하겠다는 의도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질문을 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삶 가운데서 좋은 호기심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에 뭐가 있지? 도대체 어떻게 출애굽을 했다는 거지? 다윗은 어떤 인물이지? 엘리야라는 선지자는 무슨 일을 했지? 믿음의 사람들이 있는데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했지? 이런 호기심이 있어야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속에 질문이 없으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바로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그렇습니다. 호기심이 있을 때 책을 읽거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지 않습니까? 호기심이 있을 때 사람들을 만나 묻고 듣게 되지 않습니까?
이처럼 호기심이 있다는 것, 질문한다는 것은, 늘 배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숙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도 넓어집니다. 반면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넓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다 안다고 생각하며 자신 속에 멈춰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인생에서 행복했던 일은 무엇이고 슬펐던 일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누군가에게 물어야 인간관계가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호기심과 질문이란, 삶의 영역을 넓히는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기독교는 질문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종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나님께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질문들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게 되면, 잘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무엇을 할까? 어떤 말을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넘어서, 바르게 살기 위한 동기가 부여된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후반부를 살고 계신 분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게 되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질문을 해야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하는데, 마치 자폐증 환자처럼 이미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질문은 성숙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꾸짖으신 것이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질문은 하지만 앞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폐쇄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헤롯 왕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헤롯 왕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당대의 율법학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서 메시아가 오느냐?” 그들은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정말 올까? 언제 올까?’에 대한 질문이 없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고 움직임이 시작되는데, 폐쇄적인 지식에 머무르다 보니,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지식,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지 않는 지식,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지식, 즉 이 율법사들과 종교인들의 지식은 결국 헤롯 왕에게 이용을 당하게 됩니다. 종교 지식이 권력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조정당하고 이용당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식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움직이는 지식이 참 지식입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은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매일 새로운 분으로 다가오시는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진지한 질문은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질문하는 것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대답을 듣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답을 하실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라고 대답하실까봐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왜 걱정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하시면, 그 예수님께 인생 전체를 맡겨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적당히 믿다가 구원받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거절하는 얄팍한 지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탁월성은, 질문하는 호기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지식을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꿨고, 2인칭에서 1인칭으로, 곧 자신의 삶의 내용으로 바꿨습니다.
나의 지식이 내 삶을 규정해야 그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 됩니다. 특별히 신앙의 지식이란, 그것이 내 생각과 내 말과 내 행동까지 이끌어야 진정한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지식은 살아있는 생명의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태복음 2:2)
그의 별을 보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별을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행동은 3인칭의 지식을 1인칭의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지성인도 중요하지만 행동하는 지성인이 참으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행동을 하게 되면, 3인칭의 정보 차원에서 머물러 있던 지식이 살아 움직이는 지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머리의 지식을 가슴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행동을 통해 그 지식을 자신들의 삶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지식에서 행동하는 지식으로 바꾸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익숙한 곳을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게을러질까요? 익숙한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익숙한 것을 내려놔야 하고, 때론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편한 습관과 환경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도님들께 주일뿐만 아니라 새벽에도 나와 보시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로는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보고, 때로는 젊은이들과 함께 선교 현장에도 나가 보시라는 것은 행동하는 기쁨을 느껴 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를 지나 가슴으로 들어와 삶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적 지식이 가지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기다리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타나셔도 못 봅니다. 기쁨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기다리며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별을 보고서 기쁨에 넘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태복음 2:10)
기뻐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쁨입니다.
예배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동방박사들은 경배하는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태복음 2:11)
‘경배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상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전체를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고백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버지를 존경해도 아버지를 예배하지는 않잖아요?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 있다 해도 그들을 예배하지는 않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만 예배한다는 것은, 내 삶을 하나님께, 예수님께 투자하겠다, 투신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내 삶 전체를 걸어도 아깝지 않다는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자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경배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아기 예수 앞에 내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왕이시구나.’ 그래서 황금을 내어놓았습니다. ‘이분은 거룩하신 분이구나.’ 그래서 향기로운 유향을 내어놓았습니다. ‘이분은 영원한 분이시구나.’ 그래서 썩지 않는 것, 시체를 바르는 몰약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감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도 그렇습니다. 헌금을 드릴 때 아깝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가 나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을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동방의 박사들도 아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찾아야 할 답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큰 사랑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면서 ‘나는 예수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싶다고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지 하나님께 물으며 주님으로부터 대답을 받는 복 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 1 ~ 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요사이 곳곳에서 빛의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를 포함한 여러 건물들에서 성탄절 트리를 별빛으로 치장해서 입니다. 시청 앞이나 청계천에도 빛으로 꾸민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습니다.
빛의 축제는 여름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름 자체가 빛의 계절이고 뜨거움의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날씨가 춥고 낮이 짧은 겨울에는 빛의 축제가 어울립니다. 춥고 어두울 때 우리는 빛과 따뜻함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이 감사하고 반가운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때는 춥고 캄캄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춥고 어둡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입니다.
헤롯은 이 땅을 어둡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헤롯은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기에 기다림을 갖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권력자였습니다. 정치인으로서 탁월한 지략과 수완이 있었고,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잔인한 통치자이자 교활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여러 장애가 생기면서, 아니 어쩌면 그것이 그의 본래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신의 유대인 아내를 죽입니다. 장모도 죽이고, 장남을 비롯한 다른 두 아들마저 죽인 비정한 인간으로 역사 속에 남게 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헤롯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고 전해집니다.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을 많이 잡아들여서 감옥에 가두었다가 내가 죽는 순간에 그들도 다 처형해라.” 자신의 죽음 때문에는 슬피 울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함께 죽게 된 이들 때문에 백성들이 슬퍼하며 울 것이라 생각하여 그러한 일을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잔혹함과 비정함을 가진 헤롯 왕 시대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헤롯은 마음을 열고 새로운 왕을 기쁨으로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놀랐고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헤롯은 70세를 넘긴 노년의 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갓 태어난 메시아의 소식에 놀라 어린 예수를 죽일 방법에 대해 골몰했고, 결국 베들레헴 근처에 대학살 사건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헤롯은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태복음 2:3)
권력을 가진 자는 나이가 많든 적든, 또 다른 힘을 가진 사람의 등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자신의 권력이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헤롯은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마태복음 2:8)
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를 찾아 죽이기 위해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 예수님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가 있습니다. 가장 어두울 때, 하나님은 빛을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하나님은 소망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십니다.
동방박사들은 질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알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등장합니다. 점성술사라고도 할 수 있고 철인, 현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며 별을 연구하던 사람들로서, 유대 전승을 들어 유대 사상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인류 구원의 역사와 자신들이 연구하는 별을 연결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맞이한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방인이었던 동방에서 왔던 박사들이었고, 누가복음에 의하면 가장 낮고 천한 직업을 가진 목자, 목동들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돈 많은 사람이 제일 먼저 와서 예수님을 만났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께 경배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먼저 왔다’가 아니라, 이방인이 먼저 오고 비천한 목자가 먼저 와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질 우주적인 복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어야 할 생명의 소식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 앞에 나와 첫 번째로 무릎을 꿇는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에게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의 지식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기심을 호기심으로 두지 않고 계속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그 질문들이 그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질문이 없으면 대답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질문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질문해야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질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셔도 내가 그 대답을 듣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질문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 (마태복음 2:2)
처음에는 아마 3인칭 지식으로 이루어진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질문을 하면서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질문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녀들을 키우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질문’ 아닙니까? “이게 뭐예요?” “왜 저 태양은 떨어지지 않아요?” “왜 하루가 자꾸만 돌아가요?” “왜 저녁이 되면 달이 떠요?” 아이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어른들은 질문에 지쳐 “이제 그만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질문이 멈추는 순간에 인간의 성숙과 배움의 역사는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호기심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호기심도 좋은 호기심과 나쁜 호기심으로 나뉩니다. 좋은 호기심이란 무엇일까요?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동방박사의 질문이 바로 좋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 왕의 질문은 달랐습니다. 그의 질문은 나쁜 호기심, 일종의 방어기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폐쇄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7절을 보면,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관심이 있고, 그래서 그것에 참여하겠다는 의도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질문을 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삶 가운데서 좋은 호기심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에 뭐가 있지? 도대체 어떻게 출애굽을 했다는 거지? 다윗은 어떤 인물이지? 엘리야라는 선지자는 무슨 일을 했지? 믿음의 사람들이 있는데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했지? 이런 호기심이 있어야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속에 질문이 없으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바로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그렇습니다. 호기심이 있을 때 책을 읽거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지 않습니까? 호기심이 있을 때 사람들을 만나 묻고 듣게 되지 않습니까?
이처럼 호기심이 있다는 것, 질문한다는 것은, 늘 배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숙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도 넓어집니다. 반면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넓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다 안다고 생각하며 자신 속에 멈춰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인생에서 행복했던 일은 무엇이고 슬펐던 일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누군가에게 물어야 인간관계가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호기심과 질문이란, 삶의 영역을 넓히는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기독교는 질문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종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나님께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질문들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게 되면, 잘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무엇을 할까? 어떤 말을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넘어서, 바르게 살기 위한 동기가 부여된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후반부를 살고 계신 분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게 되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질문을 해야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하는데, 마치 자폐증 환자처럼 이미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질문은 성숙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꾸짖으신 것이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질문은 하지만 앞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폐쇄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헤롯 왕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헤롯 왕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당대의 율법학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서 메시아가 오느냐?” 그들은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정말 올까? 언제 올까?’에 대한 질문이 없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고 움직임이 시작되는데, 폐쇄적인 지식에 머무르다 보니,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지식,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지 않는 지식,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지식, 즉 이 율법사들과 종교인들의 지식은 결국 헤롯 왕에게 이용을 당하게 됩니다. 종교 지식이 권력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조정당하고 이용당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식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움직이는 지식이 참 지식입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은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매일 새로운 분으로 다가오시는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진지한 질문은 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질문하는 것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대답을 듣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답을 하실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라고 대답하실까봐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왜 걱정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하시면, 그 예수님께 인생 전체를 맡겨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적당히 믿다가 구원받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거절하는 얄팍한 지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탁월성은, 질문하는 호기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지식을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꿨고, 2인칭에서 1인칭으로, 곧 자신의 삶의 내용으로 바꿨습니다.
나의 지식이 내 삶을 규정해야 그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 됩니다. 특별히 신앙의 지식이란, 그것이 내 생각과 내 말과 내 행동까지 이끌어야 진정한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지식은 살아있는 생명의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태복음 2:2)
그의 별을 보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별을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행동은 3인칭의 지식을 1인칭의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지성인도 중요하지만 행동하는 지성인이 참으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행동을 하게 되면, 3인칭의 정보 차원에서 머물러 있던 지식이 살아 움직이는 지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머리의 지식을 가슴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행동을 통해 그 지식을 자신들의 삶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지식에서 행동하는 지식으로 바꾸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익숙한 곳을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게을러질까요? 익숙한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익숙한 것을 내려놔야 하고, 때론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용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편한 습관과 환경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도님들께 주일뿐만 아니라 새벽에도 나와 보시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로는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보고, 때로는 젊은이들과 함께 선교 현장에도 나가 보시라는 것은 행동하는 기쁨을 느껴 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를 지나 가슴으로 들어와 삶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적 지식이 가지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기다리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타나셔도 못 봅니다. 기쁨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기다리며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별을 보고서 기쁨에 넘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태복음 2:10)
기뻐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쁨입니다.
예배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동방박사들은 경배하는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태복음 2:11)
‘경배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상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전체를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고백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버지를 존경해도 아버지를 예배하지는 않잖아요?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 있다 해도 그들을 예배하지는 않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만 예배한다는 것은, 내 삶을 하나님께, 예수님께 투자하겠다, 투신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내 삶 전체를 걸어도 아깝지 않다는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자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경배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아기 예수 앞에 내어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왕이시구나.’ 그래서 황금을 내어놓았습니다. ‘이분은 거룩하신 분이구나.’ 그래서 향기로운 유향을 내어놓았습니다. ‘이분은 영원한 분이시구나.’ 그래서 썩지 않는 것, 시체를 바르는 몰약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감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도 그렇습니다. 헌금을 드릴 때 아깝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가 나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을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동방의 박사들도 아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찾아야 할 답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고,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큰 사랑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면서 ‘나는 예수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싶다고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지 하나님께 물으며 주님으로부터 대답을 받는 복 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