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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혼돈의 영, 창조의 영? – 성령과 악령 8 –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샬롬입니다.
오늘은 ‘혼돈의 영, 창조의 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제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란 사실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당시 제 안에 혼돈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젊음으로 충만한 것 같은데, 내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생각 따로 삶 따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내가 판단한 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패배자가 되는 것 같아 답답했습니다. 그렇게 혼돈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혼돈 가운데 창조하신 분임을 깨달으면서 감사를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1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 사역을 이루셨는지 압축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시간을 만드십니다. 시간의 시작은 태초입니다. 또 공간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창조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원 자료가 ‘혼돈’입니다. 공허였고 흑암이었으며 깊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둠의 심연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혼돈과 흑암 위에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운행하시며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아, 내게도 성령이 함께하시면 내 안에 새로운 창조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방향은 아주 명확합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갑니다. 공허에서 채움으로, 흑암에서 밝음으로, 깊음에서 높음으로 변화되는 역사입니다. 또한 창조의 결과도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매일 창조 사역을 끝내실 때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여섯째 날, 하나님을 닮은 인간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창조가 완결됩니다. 그리고 그때 다음과 같이 반응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을 바라보시며 감탄사를 발하십니다. “아, 보기에 참 좋구나!”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일곱째 날 완성됩니다. 그날 하나님은 ‘안식’을 취하십니다. 바로 샬롬입니다. 질서와 조화, 쉼과 평안이 함께 어울리는 안식의 자리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가슴이 설렜습니다. ‘아, 하나님을 믿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예수님을 믿는 게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구나! 샬롬을 갖는 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우리 삶은 혼돈과 질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혹시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혼돈입니까, 샬롬입니까? 혼란입니까, 질서입니까? 우리 삶을 돌아보면 혼돈과 질서가 뒤섞여 있습니다. 혼돈이란 카오스입니다. 질서란 코스모스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극단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혼돈이라고만 하기엔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질서라고만 하기에도 금방 혼돈으로 빠져드는 내 삶을 목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카오스 즉 혼돈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의 몸 곧 육체의 카오스는 ‘질병’입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몸의 질서와 조화가 잘 유지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그 질서와 조화가 깨지면, 질병이 찾아옵니다.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 질병에 걸려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남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시기하고 분노하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열등감에 빠져듭니다. 때론 우월감도 갖습니다. 열등감이란 자기보다 잘난 것을 못 봐주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도망가고 숨기도 합니다. 그러다 나보다 못난 누군가를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못살게 굽니다. 이런 교만이 우리 자신과 삶을 서서히 망가뜨립니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하면 불신앙의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교만의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교만 곧 마음의 카오스의 위험성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우리 영혼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절망’입니다. 절망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으면 모든 의욕이 사라집니다.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모든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대신 그 자리에 우울증이 들어섭니다. 흑암에 빠진 자신을 바라보며 생명의 기쁨을 놓칩니다. 그러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우리 가정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불륜’입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을 잃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한 가정의 비극입니다. 이혼을 향해 치닫는 부부가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불륜은 서로에게 상처와 치욕이 됩니다. 그것은 혼돈 자체입니다.
우리 사회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미움’과 ‘분노’입니다.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한 분노입니다. 그래서 남의 탓만 합니다. 서로를 적대합니다. 판가름하며 진영을 나눕니다. 마치 공동체의 하나 됨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처럼 몰아붙입니다.
국가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아나키즘(anarchism)입니다. 무정부주의입니다. 모든 권위를 무시하고, 모든 제도와 관습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무질서와 혼란을 겪었던 사사 시대에 다음과 같은 시대 묘사 표현도 있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7:6)
모두가 멋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공선도 없어졌습니다. 도덕도 사라졌습니다.
교회의 카오스란 무엇입니까? ‘거짓 우상’입니다. 형식만 남은 거짓 종교의 모습입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탄식하며 지적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1장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사야 1:3)
소도 자기 구유를 알고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자연히 거짓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날 거짓 우상은 돈입니다. 명예와 권력입니다. 거짓 우상이 세워지면, 악한 죄를 짓고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죄 속에 빠져 살면서도 양심이 무뎌집니다. 회개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죄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확대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겸손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오만한 인간들의 집단이 탄생합니다. 그러면 교회도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맙니다. 표면적으로는 교회이지만 더 이상 참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당은 있으나 그 안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렸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 없이 살아도 불편하지 않다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이것이 카오스입니다. 사탄은 이 카오스를 이용해 우리 마음과 영혼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성령이 기쁨으로 동참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카오스를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사탄을 이기는 영은 하나뿐입니다. 오직 ‘성령’입니다. 지혜의 영, 사랑의 영,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임하셔야 카오스의 세계가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뀝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성령이 혼돈과 공허, 흑암 위에 운행하시며 창조의 세계를 열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인 잠언 8장 27~28절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습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잠언 8:27~28)
창조의 역사가 기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행하실 때 내가 바로 그 옆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지혜 곧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지혜는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면서 창조주가 되었습니다. 요한도 이를 증언합니다(요1:1). 예수님 없이는, 말씀 없이는,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 때 성령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두 가지를 말해 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뻐한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만드실 때, 성령이 곁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3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잠언 8:30)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함, 하나님과 함께 기뻐함이 사탄을 이기는 힘입니다. 동시에 이 성령의 지혜가 한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즐거워하며,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기뻐한 일’입니다. 31절 말씀도 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31)
인자란 사람을 뜻합니다. 즉 사람을 기뻐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함께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주가 창조될 때 지혜 곧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면서 인간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이 카오스를 이깁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탄생을 빅뱅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빅뱅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질서와 조화의 코스모스로 확대될 수 있습니까? 우주는 무질서와 혼란, 카오스로 가지 않고 질서와 조화의 코스모스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그저 우연성으로 답합니다. 수억 년의 세월 동안 진화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의 탄생을 하나님의 창조로 답합니다. 그렇기에 창조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경탄과 뜻이 담겨 있다고, 지혜자이신 성령님의 기쁨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 그 가운데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악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게 죄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기쁨을 모른 채 우주 속에 담긴 질서와 조화를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의 생명의 자리까지 나아온 것도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몸에 비유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 몸엔 정상세포가 있습니다. 정상세포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다른 세포를 배려합니다. 옆의 세포와 협력하며 살아가는 게 정상세포의 모습입니다. 그러다 자기 역할이 끝나면 사라지는 게 정상세포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와 다른 세포가 있습니다. 암세포입니다. 이 암세포들에겐 사탄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혼돈을 조장합니다. 이기적이며 탐욕적입니다. 그들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무한 증식하며 자기 몫만 채웁니다. 더구나 암세포는 통제도 받지 않습니다. 다른 세포와 관계 맺기를 싫어하고, 자기만 무한히 증식하려 합니다. 이 암세포를 현미경으로 보면, 아주 흉측한 모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서와 조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다는 건 카오스의 상태에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엔 질서와 조화가 없고, 오직 이기심과 탐욕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의 사랑이 소중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왜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을 깨달으면, 온 우주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 자체가 감사로 다가옵니다. 반대로 하나님보다 내 욕심을 채우기 원하면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우선하는 시대, 하나님보다 권력과 명예를 우선하는 시대, 하나님보다 탐욕과 이기적 욕망을 우선하는 시대에 들어가면 혼돈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카오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질서와 아름다움의 코스모스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혼돈과 무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도 다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회복 탄력성을 선물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사랑입니다. 헌신입니다. 이 마음을 되찾을 때, 우리는 혼돈의 세계에서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상처가 많은 건 문제가 아닙니다. 혼돈 자체도 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 영적인 회복 탄력성이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질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내 안에 있다면 치유가 시작됩니다. 절망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있다면 절망이 오히려 믿음의 지름길이 됩니다. 미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미움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자이시며, 성령을 보내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혼돈의 세계를 생명의 세계로 바꾸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질병 걸린 자를 위로하시며 치료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희망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두려움으로 신음하는 자들에겐 샬롬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생명의 세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참된 평안, 참된 생명의 코스모스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생명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까? 혹시 혼돈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을 기뻐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세계,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기쁨으로 동참하면 됩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에 동참하면 됩니다. 함께 기뻐하며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저를 따라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것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신 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며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기쁨에 동참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때 어둠이 밝음으로, 혼돈이 질서로, 흑암이 생명의 빛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enjoy god’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모든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잠언 8: 22 ~ 31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샬롬입니다.
오늘은 ‘혼돈의 영, 창조의 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제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란 사실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당시 제 안에 혼돈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젊음으로 충만한 것 같은데, 내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생각 따로 삶 따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내가 판단한 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패배자가 되는 것 같아 답답했습니다. 그렇게 혼돈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혼돈 가운데 창조하신 분임을 깨달으면서 감사를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1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 사역을 이루셨는지 압축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시간을 만드십니다. 시간의 시작은 태초입니다. 또 공간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창조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원 자료가 ‘혼돈’입니다. 공허였고 흑암이었으며 깊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둠의 심연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혼돈과 흑암 위에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운행하시며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아, 내게도 성령이 함께하시면 내 안에 새로운 창조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방향은 아주 명확합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갑니다. 공허에서 채움으로, 흑암에서 밝음으로, 깊음에서 높음으로 변화되는 역사입니다. 또한 창조의 결과도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매일 창조 사역을 끝내실 때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여섯째 날, 하나님을 닮은 인간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창조가 완결됩니다. 그리고 그때 다음과 같이 반응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을 바라보시며 감탄사를 발하십니다. “아, 보기에 참 좋구나!”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일곱째 날 완성됩니다. 그날 하나님은 ‘안식’을 취하십니다. 바로 샬롬입니다. 질서와 조화, 쉼과 평안이 함께 어울리는 안식의 자리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가슴이 설렜습니다. ‘아, 하나님을 믿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예수님을 믿는 게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구나! 샬롬을 갖는 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우리 삶은 혼돈과 질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혹시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혼돈입니까, 샬롬입니까? 혼란입니까, 질서입니까? 우리 삶을 돌아보면 혼돈과 질서가 뒤섞여 있습니다. 혼돈이란 카오스입니다. 질서란 코스모스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극단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혼돈이라고만 하기엔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질서라고만 하기에도 금방 혼돈으로 빠져드는 내 삶을 목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카오스 즉 혼돈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의 몸 곧 육체의 카오스는 ‘질병’입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몸의 질서와 조화가 잘 유지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그 질서와 조화가 깨지면, 질병이 찾아옵니다.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 질병에 걸려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남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시기하고 분노하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열등감에 빠져듭니다. 때론 우월감도 갖습니다. 열등감이란 자기보다 잘난 것을 못 봐주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도망가고 숨기도 합니다. 그러다 나보다 못난 누군가를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못살게 굽니다. 이런 교만이 우리 자신과 삶을 서서히 망가뜨립니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하면 불신앙의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교만의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교만 곧 마음의 카오스의 위험성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우리 영혼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절망’입니다. 절망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으면 모든 의욕이 사라집니다.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모든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대신 그 자리에 우울증이 들어섭니다. 흑암에 빠진 자신을 바라보며 생명의 기쁨을 놓칩니다. 그러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우리 가정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불륜’입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을 잃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한 가정의 비극입니다. 이혼을 향해 치닫는 부부가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불륜은 서로에게 상처와 치욕이 됩니다. 그것은 혼돈 자체입니다.
우리 사회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미움’과 ‘분노’입니다.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한 분노입니다. 그래서 남의 탓만 합니다. 서로를 적대합니다. 판가름하며 진영을 나눕니다. 마치 공동체의 하나 됨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처럼 몰아붙입니다.
국가의 카오스는 무엇입니까? 아나키즘(anarchism)입니다. 무정부주의입니다. 모든 권위를 무시하고, 모든 제도와 관습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무질서와 혼란을 겪었던 사사 시대에 다음과 같은 시대 묘사 표현도 있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7:6)
모두가 멋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공선도 없어졌습니다. 도덕도 사라졌습니다.
교회의 카오스란 무엇입니까? ‘거짓 우상’입니다. 형식만 남은 거짓 종교의 모습입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탄식하며 지적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1장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사야 1:3)
소도 자기 구유를 알고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자연히 거짓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날 거짓 우상은 돈입니다. 명예와 권력입니다. 거짓 우상이 세워지면, 악한 죄를 짓고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죄 속에 빠져 살면서도 양심이 무뎌집니다. 회개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죄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확대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겸손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오만한 인간들의 집단이 탄생합니다. 그러면 교회도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맙니다. 표면적으로는 교회이지만 더 이상 참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당은 있으나 그 안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렸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 없이 살아도 불편하지 않다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이것이 카오스입니다. 사탄은 이 카오스를 이용해 우리 마음과 영혼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성령이 기쁨으로 동참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카오스를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사탄을 이기는 영은 하나뿐입니다. 오직 ‘성령’입니다. 지혜의 영, 사랑의 영,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임하셔야 카오스의 세계가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뀝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성령이 혼돈과 공허, 흑암 위에 운행하시며 창조의 세계를 열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인 잠언 8장 27~28절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습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잠언 8:27~28)
창조의 역사가 기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행하실 때 내가 바로 그 옆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지혜 곧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지혜는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면서 창조주가 되었습니다. 요한도 이를 증언합니다(요1:1). 예수님 없이는, 말씀 없이는,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 때 성령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두 가지를 말해 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뻐한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만드실 때, 성령이 곁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3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잠언 8:30)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함, 하나님과 함께 기뻐함이 사탄을 이기는 힘입니다. 동시에 이 성령의 지혜가 한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즐거워하며,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기뻐한 일’입니다. 31절 말씀도 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31)
인자란 사람을 뜻합니다. 즉 사람을 기뻐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함께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주가 창조될 때 지혜 곧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면서 인간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이 카오스를 이깁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탄생을 빅뱅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빅뱅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질서와 조화의 코스모스로 확대될 수 있습니까? 우주는 무질서와 혼란, 카오스로 가지 않고 질서와 조화의 코스모스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그저 우연성으로 답합니다. 수억 년의 세월 동안 진화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의 탄생을 하나님의 창조로 답합니다. 그렇기에 창조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경탄과 뜻이 담겨 있다고, 지혜자이신 성령님의 기쁨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 그 가운데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악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게 죄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기쁨을 모른 채 우주 속에 담긴 질서와 조화를 이야기할 순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의 생명의 자리까지 나아온 것도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몸에 비유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 몸엔 정상세포가 있습니다. 정상세포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다른 세포를 배려합니다. 옆의 세포와 협력하며 살아가는 게 정상세포의 모습입니다. 그러다 자기 역할이 끝나면 사라지는 게 정상세포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와 다른 세포가 있습니다. 암세포입니다. 이 암세포들에겐 사탄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혼돈을 조장합니다. 이기적이며 탐욕적입니다. 그들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무한 증식하며 자기 몫만 채웁니다. 더구나 암세포는 통제도 받지 않습니다. 다른 세포와 관계 맺기를 싫어하고, 자기만 무한히 증식하려 합니다. 이 암세포를 현미경으로 보면, 아주 흉측한 모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서와 조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다는 건 카오스의 상태에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엔 질서와 조화가 없고, 오직 이기심과 탐욕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의 사랑이 소중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왜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을 깨달으면, 온 우주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 자체가 감사로 다가옵니다. 반대로 하나님보다 내 욕심을 채우기 원하면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우선하는 시대, 하나님보다 권력과 명예를 우선하는 시대, 하나님보다 탐욕과 이기적 욕망을 우선하는 시대에 들어가면 혼돈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카오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질서와 아름다움의 코스모스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혼돈과 무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도 다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회복 탄력성을 선물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사랑입니다. 헌신입니다. 이 마음을 되찾을 때, 우리는 혼돈의 세계에서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상처가 많은 건 문제가 아닙니다. 혼돈 자체도 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 영적인 회복 탄력성이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질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내 안에 있다면 치유가 시작됩니다. 절망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있다면 절망이 오히려 믿음의 지름길이 됩니다. 미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미움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자이시며, 성령을 보내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혼돈의 세계를 생명의 세계로 바꾸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질병 걸린 자를 위로하시며 치료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희망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두려움으로 신음하는 자들에겐 샬롬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생명의 세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참된 평안, 참된 생명의 코스모스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생명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까? 혹시 혼돈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을 기뻐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세계,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기쁨으로 동참하면 됩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에 동참하면 됩니다. 함께 기뻐하며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저를 따라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것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신 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며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기쁨에 동참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때 어둠이 밝음으로, 혼돈이 질서로, 흑암이 생명의 빛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enjoy god’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모든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2017년 7월 2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혼돈의 영, 창조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2, 6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잠 8:22-31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태초에’,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지만 창조의 원재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이었습니다. 창조의 방향은 명확했습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공허에서 채움으로, 흑암에서 밝음으로, 깊음에서 높음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창조가 도달한 곳은 바로 안식, 샬롬이었습니다. 질서와 조화, 쉼과 평안입니다.
설교의 요약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요? 혼돈? 샬롬? 혼란? 질서? 우리의 삶은 이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혼돈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몸의 카오스는 질병입니다. 우리 마음의 카오스는 교만입니다. 우리 영혼의 카오스는 절망입니다. 우리 가정의 카오스는 부부간의 불륜입니다. 사회의 카오스는 미움입니다. 국가의 카오스는 아나키즘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카오스는 무엇일까요? 바로 거짓 우상입니다. 형식만 남은 거짓 종교입니다(사1:3). 인간이 악한 죄를 짓고도 더 이상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의 죄가 아니라 사회 전역으로 확대 전염됩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오만한 인간들의 집단이 됩니다. ‘교회는 있으나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배는 있으나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도 불편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지혜의 영입니다(27절). 지혜는 성령입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태초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그 옆에 함께 계셨습니다.(창1:1-2)
지혜, 곧 성령께서는 혼돈과 흑암을 질서와 조화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첫째, ‘하나님을 기뻐하셨습니다.’(30절). 둘째, ‘인간을 기뻐하셨습니다.’(31절). 우주 탄생을 말하는 빅뱅이 무질서와 혼란으로 가지 않고, 질서와 조화로 가는 이유가 바로 이 성령의 기쁨 때문입니다. 무질서라는 엔트로피 법칙을 꿰뚫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질서와 조화로 가는 이유는 바로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 몸의 혼돈, 암세포들을 봅시다. 정상세포의 특징은 자기 역할을 하고 사라지는 것인데 반해, 암세포들은 전혀 통제를 받지 않고 무한히 분열하며 증식합니다. 다른 세포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자기 세포만을 증식합니다. 결국 스스로 무너집니다. 죄악이 암처럼 사회 전역에 전염병처럼 확대됩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시대입니다. 자기 소견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대입니다. 죄악 속에 빠져 살아가면서도 모든 감각이 무뎌져 버린 시대입니다.
이런 위기를 넘어서려면 그동안 혼돈과 무질서에 빠져있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회복탄력성을 갖는 비결입니다. 질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있으면 칠 있으면 치유가 됩니다. 절망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있으면 절망은 가장 강력한 신앙으로 승화됩니다. 미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미움을 악과 거짓에 대한 미움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삶을 뒤돌아봅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창조하신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품고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내 속에 그런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습니까? 더불어 나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며,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내 안의 암세포와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교만인가요? 게으름인가요?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그 부분이 무엇인지 나눠 봅시다.
2.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의 세계에 동참하며 감사하는 삶을 위해 지금 내가 무엇을 결단해야 할까요?
3.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조화를 만들기 위해 서로의 기도제목을 기록하고 기억하며 일주일 동안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질서와 조화의 성령을 보내 부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며, 참으로 보기 좋다 말씀하시기에 부족한 없는 삶으로 응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