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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보는 관점이 달라 갈등하고 다툽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뒷면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갈등하고 다투는 모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갈등과 다툼의 역사는 인류 역사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 사랑하는 부부간의 갈등, 인간관계에서의 갈등부터 시작해서 거창하게는 이념분쟁, 민족분쟁, 영토분쟁, 종교분쟁이라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갈등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도록 만드셨는데 우리는 사랑하기보다는 쉽게 갈등하며 아픈 것이 우리 스스로도 의아하게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갈등하는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로 우리가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이 생겨나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가치관과 목표가 다르고 관심과 의견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사는 우선순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서로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낳고 키웠지만 사실 자녀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모는 자녀에게 “너는 왜 나같이 생각하지 않느냐, 내가 너만 할 때는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다른 길로 가느냐”며 꾸짖고 갈등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만난 남편과 아내도 서로 이해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저자는 남녀가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다른 별나라에서 온 것처럼 서로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툰다고 말합니다.
사람들마다 성품과 성격이 달라서 충돌하고 다투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결코 나쁘거나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런 욕심이 있습니다. “너도 나처럼 생각해라. 나처럼 생활태도를 가져라. 나처럼 가치관을 가져라.”상대방에게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면서 우리의 만남이 부딪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불행해지고, 열등감이나 수치감을 가지면서 사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자원과 토지가 제한되어 있기에 갈등합니다.
둘째,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 토지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생겨 갈등합니다. 올해 원유 값이 배럴당 100달러 가까이 치솟으면서 에너지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석유 전쟁은 곧 자원 전쟁이고 에너지 전쟁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유국이 아니기 때문에 석유를 쓰는데 있어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를 여행해본 분들은 무엇보다 나라가 크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우리 국토도 외국의 어떤 나라보다 아름답지만 비좁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원은 제한되어 있으나 수요는 끝없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민족과 나라 간에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자원 속에 누려야할 몫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 기업인들과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갈등과 다툼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에도 인간의 갈등과 다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같은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창세기 13장). 그런데 하인들끼리 서로 충돌하여 분쟁합니다. 서로 함께 살기에는 땅이 너무 좁고 협소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런 제한을 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로 가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 13:8-9)
그들은 서로 함께 있던 자리를 이처럼 나누어서 새로운 땅으로 삶을 개척해서 분쟁의 역사를 끝냈습니다.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가족은 참 축복받은 가정입니다. 그런데 대가족으로 같이 있으면서 서로 갈등하고 다툰다면 때로는 나누어서 사는 것도 좋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조금 떨어지고 형제간에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부부간에는 아무리 갈등해도 서로 떨어져 살면 안 됩니다. 요사이에 말하는 ‘블루 오션’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므로 우리가 갖는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경을 넓히는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탐욕과 욕심의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다툽니다.
셋째, 더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로 힘 있는 자, 가진 자가 더욱더 가지려고 할 때 갈등이 생깁니다. 더 많이 가지려할 때,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할 때, 자기만 소유하려고 할 때 평화는 없고 다툼의 역사만 계속됩니다. 힘 있고 가진 게 많을수록 공동체에 자신의 것을 내놓을 때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시장경쟁을 하는 우리나라에서 경쟁이란 필연적이고 필수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경쟁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선의의 경쟁이란 인간을 성숙하고 발전하게 합니다. 하지만 경쟁만이 허용된 사회는 죽고 죽이는 사회입니다. 시기와 질투, 갈등과 다툼을 조장하는 사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모든 세계가 나 중심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이기적인 강박관념이 사람들 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은 사람이 사는 세상 속에서 갈등을 만드는 동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조 속에서 비교하며 누가 높고 낮은가 때문에 가슴아파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4:1)
이 말씀은 이기적인 탐심으로 인간사회 속의 다툼과 분쟁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과 다툼이 있어 그것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수동적으로 도피하려고 합니다. 갈등이 없는 곳, 어려움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곳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려고 하고, 스스로 갈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때로는 갈등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이 허무하다는 연민 속에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수동적인 태도는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능동적으로 해결하려다가 너무 공격적이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남을 비난하며 남의 탓이라고 돌립니다. 말만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까지 행사합니다. 이것이 집단화되면 분쟁이 생기고 국가로 확대되면 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해의 대가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갈등과 다툼의 진정한 해결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갈등과 다툼의 해결점으로 우리에게 화해를 가르쳐주십니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 가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 크고 작은 갈등이 있는데 사소한 갈등, 본질적인 갈등이 아닌 주변적인 갈등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낫습니다, 너무 관심을 갖지 않고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버려두는 것이 괜찮습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여 너무 빨리 분노하지 말고 조금 천천히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잠언 19:11)
누구나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화를 냅니다. 그러나 좀 천천히 한 템포를 늦추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입니다. 남의 조그만 잘못을 받아주고 용서해주는 것이 자기 자신의 영광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그마한 것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별것 아닌 문제, 놔두면 해결될 문제를 마치 큰 것처럼 악화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대화하며 협상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엄청난 대가가 요청됩니다.
사람과 화해해보셨습니까? 평화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해보셨습니까?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목사인 저도 쉽지 않습니다. 화해하는 사람으로 다가가 한마디를 시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이 땅에 화해자로 오셨지만 결코 쉽지가 않으셨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도, 사랑으로 다가서도 그들이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부딪치는 엄청난 갈등을 감당하기 위해서 인간의 분노와 미움을 스스로의 몸으로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죄에 대한 저주를 받으셔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해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인간의 미움과 분노를 전적으로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죄의 저주가 예수님께 하사되어 예수님은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화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만큼 화해가 어려운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란 때로는 정성이 필요하고, 생명을 담보하기까지의 고통이 뒤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며 평화를 만들어내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서로 보는 관점을 같게 할 때 평화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을 가지고 갈 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troublemaker)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꾸만 시비가 생깁니다. 문제를 파헤친다고 하면서 공동체에 위기를 초래합니다. 다른 하나는 평화를 창출하는 사람(Peacemaker)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갈등이 극복되고 따뜻한 친교의 역사가 생깁니다.
우리가 평화를 창출하는 사람이 되려면 첫째는 보는 관점을 같게 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 관계를 개선하는 첩경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매일 보는 부부간에도 서로의 마음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한 맹인이자 걸인이 이런 팻말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불쌍한 맹인입니다. 아주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사람 앞에 있는 깡통에 돈을 넣지 않았습니다.지나가던 한 사람이 몇 마디를 속삭이더니 팻말 뒷면에 새로운 문장을 써주었습니다.
“지금 봄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봄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깡통에 돈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지나가며 따뜻한 격려도 해 주었습니다.
이 두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앞의 문장은 내 입장에서 쓴 글이고, 뒤의 문장은 행인의 입장에서 쓴 글입니다. 배가 고파죽겠다는 하소연의 말에 사람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은 사람들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나는 이 화사한 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만끽하는데 저 맹인은 저 것을 보지 못하니 얼마나 불쌍한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등의 대부분은 말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야 설득과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차이가 있을 때 문제는 비판하되 사람은 공격하지 마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두 번째 지혜는 문제를 비판하되 사람은 공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도 처음에는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다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싸우다 보면 잘못된 문제는 사라지고 비난하는 상대방이 미워져 상대방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상대방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과 가문을 건드립니다. 단순한 문제에서 시작했다가 집안 전체의 갈등 상황으로 바뀌어 해결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인간과의 관계성까지 파괴시키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화의 능력과 기술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서로 좋은 대화를 하려고 마주보고 앉아 있더라도 대화가 아니라 갑자기 토론이 시작됩니다. 토론은 논쟁으로 바뀝니다. 논쟁하다보면 내가 옳고 더 잘났다고 하면서 마지막은 상대방을 비판하며 상처의 말을 합니다. 필요하면 누가 잘했나 잘못했는가를 가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을 거기에 쏟아 부으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으면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1)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말이 분노로 변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지적하고 문제에만 집중하면 분노가 가라앉습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지혜이기도 하고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공격적으로 보면서 발언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방어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인격을 모독하는 것에 대해서는 방어하는 마음이 생겨 또 다른 공격을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각과 언어를 바꾸십시오.
세 번째, 갈등의 뒷면을 보면 결국 인간의 욕심, 이기적인 탐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해결하려면 같이 나가야할 큰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 믿음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기뻐하실까?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가 있을까?’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하여 나 중심적인 사회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로, 나 중심에서 교회 중심적인 사고로, 나 중심에서 신앙 중심적인 사고로 바뀌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자체가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평강을 축복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평강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놓고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18)
서로 말이 안 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잠시 떨어져있어야 합니다. 떨어져서도 안 될 때가 있는데 그러면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통해서 화평해야 합니다.
화평하면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상속받는 자녀가 됩니다.
화평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모든 유산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평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이 땅위에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도 캘커타에서 사랑의 실천을 했던 테레사 수녀는 늘 그녀를 찾아와“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는 물음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 질병 걸린 사람이 곧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심정으로 그들을 만질 수가 있었습니다.”
화평의 복을 누리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인 한 분, 한분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입니다. 내 손이 예수님의 손입니다. 내 발이 예수님의 발입니다. 내 심장이 예수님의 심장입니다. 내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고 만지고 걸어갈 때 화평하게 하는 축복의 역사가 생깁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란 문제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똑같이 갈등과 문제가 있고 연약함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란 삶의 엄청난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어렵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평화의 역사가 꽃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따뜻한 미소 한번 지어주고 온화한 말 한마디로 격려해주며 사랑을 실천해 보세요. 그 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아, 저들이 하나님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 딸이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를 창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화평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해주시고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갈등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속에 갈등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있는 곳에 갈등과 다툼의 역사가 그치고 하나님의 주시는 평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오니 성령께서 임재 해주셔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 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5: 9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서로 보는 관점이 달라 갈등하고 다툽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뒷면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갈등하고 다투는 모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갈등과 다툼의 역사는 인류 역사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 사랑하는 부부간의 갈등, 인간관계에서의 갈등부터 시작해서 거창하게는 이념분쟁, 민족분쟁, 영토분쟁, 종교분쟁이라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갈등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도록 만드셨는데 우리는 사랑하기보다는 쉽게 갈등하며 아픈 것이 우리 스스로도 의아하게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갈등하는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로 우리가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이 생겨나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가치관과 목표가 다르고 관심과 의견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사는 우선순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서로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낳고 키웠지만 사실 자녀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모는 자녀에게 “너는 왜 나같이 생각하지 않느냐, 내가 너만 할 때는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다른 길로 가느냐”며 꾸짖고 갈등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만난 남편과 아내도 서로 이해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저자는 남녀가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다른 별나라에서 온 것처럼 서로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툰다고 말합니다.
사람들마다 성품과 성격이 달라서 충돌하고 다투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결코 나쁘거나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런 욕심이 있습니다. “너도 나처럼 생각해라. 나처럼 생활태도를 가져라. 나처럼 가치관을 가져라.”상대방에게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면서 우리의 만남이 부딪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불행해지고, 열등감이나 수치감을 가지면서 사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자원과 토지가 제한되어 있기에 갈등합니다.
둘째,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 토지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생겨 갈등합니다. 올해 원유 값이 배럴당 100달러 가까이 치솟으면서 에너지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석유 전쟁은 곧 자원 전쟁이고 에너지 전쟁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유국이 아니기 때문에 석유를 쓰는데 있어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를 여행해본 분들은 무엇보다 나라가 크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우리 국토도 외국의 어떤 나라보다 아름답지만 비좁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원은 제한되어 있으나 수요는 끝없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민족과 나라 간에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자원 속에 누려야할 몫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 기업인들과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갈등과 다툼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에도 인간의 갈등과 다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같은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창세기 13장). 그런데 하인들끼리 서로 충돌하여 분쟁합니다. 서로 함께 살기에는 땅이 너무 좁고 협소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런 제한을 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로 가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세기 13:8-9)
그들은 서로 함께 있던 자리를 이처럼 나누어서 새로운 땅으로 삶을 개척해서 분쟁의 역사를 끝냈습니다.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가족은 참 축복받은 가정입니다. 그런데 대가족으로 같이 있으면서 서로 갈등하고 다툰다면 때로는 나누어서 사는 것도 좋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조금 떨어지고 형제간에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부부간에는 아무리 갈등해도 서로 떨어져 살면 안 됩니다. 요사이에 말하는 ‘블루 오션’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므로 우리가 갖는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경을 넓히는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탐욕과 욕심의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다툽니다.
셋째, 더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로 힘 있는 자, 가진 자가 더욱더 가지려고 할 때 갈등이 생깁니다. 더 많이 가지려할 때,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할 때, 자기만 소유하려고 할 때 평화는 없고 다툼의 역사만 계속됩니다. 힘 있고 가진 게 많을수록 공동체에 자신의 것을 내놓을 때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시장경쟁을 하는 우리나라에서 경쟁이란 필연적이고 필수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경쟁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선의의 경쟁이란 인간을 성숙하고 발전하게 합니다. 하지만 경쟁만이 허용된 사회는 죽고 죽이는 사회입니다. 시기와 질투, 갈등과 다툼을 조장하는 사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모든 세계가 나 중심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이기적인 강박관념이 사람들 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은 사람이 사는 세상 속에서 갈등을 만드는 동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조 속에서 비교하며 누가 높고 낮은가 때문에 가슴아파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4:1)
이 말씀은 이기적인 탐심으로 인간사회 속의 다툼과 분쟁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과 다툼이 있어 그것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수동적으로 도피하려고 합니다. 갈등이 없는 곳, 어려움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곳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려고 하고, 스스로 갈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때로는 갈등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이 허무하다는 연민 속에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수동적인 태도는 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능동적으로 해결하려다가 너무 공격적이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남을 비난하며 남의 탓이라고 돌립니다. 말만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까지 행사합니다. 이것이 집단화되면 분쟁이 생기고 국가로 확대되면 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해의 대가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갈등과 다툼의 진정한 해결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갈등과 다툼의 해결점으로 우리에게 화해를 가르쳐주십니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 가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 크고 작은 갈등이 있는데 사소한 갈등, 본질적인 갈등이 아닌 주변적인 갈등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낫습니다, 너무 관심을 갖지 않고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버려두는 것이 괜찮습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여 너무 빨리 분노하지 말고 조금 천천히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잠언 19:11)
누구나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화를 냅니다. 그러나 좀 천천히 한 템포를 늦추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입니다. 남의 조그만 잘못을 받아주고 용서해주는 것이 자기 자신의 영광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그마한 것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별것 아닌 문제, 놔두면 해결될 문제를 마치 큰 것처럼 악화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대화하며 협상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엄청난 대가가 요청됩니다.
사람과 화해해보셨습니까? 평화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해보셨습니까?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목사인 저도 쉽지 않습니다. 화해하는 사람으로 다가가 한마디를 시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이 땅에 화해자로 오셨지만 결코 쉽지가 않으셨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도, 사랑으로 다가서도 그들이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부딪치는 엄청난 갈등을 감당하기 위해서 인간의 분노와 미움을 스스로의 몸으로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죄에 대한 저주를 받으셔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해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인간의 미움과 분노를 전적으로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죄의 저주가 예수님께 하사되어 예수님은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화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만큼 화해가 어려운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란 때로는 정성이 필요하고, 생명을 담보하기까지의 고통이 뒤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며 평화를 만들어내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서로 보는 관점을 같게 할 때 평화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을 가지고 갈 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troublemaker)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꾸만 시비가 생깁니다. 문제를 파헤친다고 하면서 공동체에 위기를 초래합니다. 다른 하나는 평화를 창출하는 사람(Peacemaker)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갈등이 극복되고 따뜻한 친교의 역사가 생깁니다.
우리가 평화를 창출하는 사람이 되려면 첫째는 보는 관점을 같게 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 관계를 개선하는 첩경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매일 보는 부부간에도 서로의 마음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한 맹인이자 걸인이 이런 팻말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불쌍한 맹인입니다. 아주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사람 앞에 있는 깡통에 돈을 넣지 않았습니다.지나가던 한 사람이 몇 마디를 속삭이더니 팻말 뒷면에 새로운 문장을 써주었습니다.
“지금 봄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봄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깡통에 돈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지나가며 따뜻한 격려도 해 주었습니다.
이 두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앞의 문장은 내 입장에서 쓴 글이고, 뒤의 문장은 행인의 입장에서 쓴 글입니다. 배가 고파죽겠다는 하소연의 말에 사람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은 사람들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나는 이 화사한 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만끽하는데 저 맹인은 저 것을 보지 못하니 얼마나 불쌍한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등의 대부분은 말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야 설득과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차이가 있을 때 문제는 비판하되 사람은 공격하지 마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두 번째 지혜는 문제를 비판하되 사람은 공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도 처음에는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다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싸우다 보면 잘못된 문제는 사라지고 비난하는 상대방이 미워져 상대방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상대방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과 가문을 건드립니다. 단순한 문제에서 시작했다가 집안 전체의 갈등 상황으로 바뀌어 해결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인간과의 관계성까지 파괴시키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화의 능력과 기술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서로 좋은 대화를 하려고 마주보고 앉아 있더라도 대화가 아니라 갑자기 토론이 시작됩니다. 토론은 논쟁으로 바뀝니다. 논쟁하다보면 내가 옳고 더 잘났다고 하면서 마지막은 상대방을 비판하며 상처의 말을 합니다. 필요하면 누가 잘했나 잘못했는가를 가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시간을 거기에 쏟아 부으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으면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1)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말이 분노로 변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지적하고 문제에만 집중하면 분노가 가라앉습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지혜이기도 하고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공격적으로 보면서 발언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방어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인격을 모독하는 것에 대해서는 방어하는 마음이 생겨 또 다른 공격을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각과 언어를 바꾸십시오.
세 번째, 갈등의 뒷면을 보면 결국 인간의 욕심, 이기적인 탐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해결하려면 같이 나가야할 큰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 믿음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기뻐하실까?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가 있을까?’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구하여 나 중심적인 사회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로, 나 중심에서 교회 중심적인 사고로, 나 중심에서 신앙 중심적인 사고로 바뀌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자체가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평강을 축복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평강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놓고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18)
서로 말이 안 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잠시 떨어져있어야 합니다. 떨어져서도 안 될 때가 있는데 그러면 각자 자기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통해서 화평해야 합니다.
화평하면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상속받는 자녀가 됩니다.
화평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모든 유산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평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이 땅위에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도 캘커타에서 사랑의 실천을 했던 테레사 수녀는 늘 그녀를 찾아와“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는 물음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 질병 걸린 사람이 곧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심정으로 그들을 만질 수가 있었습니다.”
화평의 복을 누리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인 한 분, 한분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입니다. 내 손이 예수님의 손입니다. 내 발이 예수님의 발입니다. 내 심장이 예수님의 심장입니다. 내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고 만지고 걸어갈 때 화평하게 하는 축복의 역사가 생깁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란 문제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똑같이 갈등과 문제가 있고 연약함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란 삶의 엄청난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어렵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의 평화의 역사가 꽃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따뜻한 미소 한번 지어주고 온화한 말 한마디로 격려해주며 사랑을 실천해 보세요. 그 안에 하나님의 평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아, 저들이 하나님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 딸이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를 창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화평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해주시고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갈등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속에 갈등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있는 곳에 갈등과 다툼의 역사가 그치고 하나님의 주시는 평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오니 성령께서 임재 해주셔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 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