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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로마서 강해 15 –

로마서 5: 3 ~ 6

김지철 목사

2015.09.20

도처에 고난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는,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쓴 말씀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설교란 목사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설교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고 또한 설교자의 생각과 성품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깊은 묵상과 고뇌의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그 말씀을 바르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주제가 기쁨이나 사랑, 감사면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저도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고난이나 환난, 죽음 등의 주제가 등장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도 하고, 때로는 이러한 주제가 내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 주위가 고통과 환난의 이야기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로, 질병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참으로 많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비극을 기억해 봅시다. 천안함 피격사건과 지뢰 폭발사건은 우리 국민 모두를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작년에 발생했던 세월호 침몰사건은 이 나라 전체를 비통하게 했습니다. 또 저 북녘 땅을 생각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을지 가슴이 미어집니다.
세계적으로는 네팔의 지진, 시리아 난민들의 비참한 모습, 그리고 IS( Islamic State)의 잔인한 학살을 지켜볼 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먹먹한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피하려 합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말을 듣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그만큼 고난은 우리에게 매우 버거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조롱당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집단적인 고난을 경험하게 될 때는 인간다움의 존엄성까지 마치 쓰나미에 휩쓸려가듯 사라지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다가오면 무력감을 느낍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까지 해체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고난의 자리에 들게 되면 인간의 자기 주도성을 박탈당합니다. 주도적인 인간도 고난이 다가오면 수동적인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는 기대와 소망을 품는 것조차 거절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부정적인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또 고난은 우리가 경험한 인간관계의 소중함조차 파괴해 버립니다. 예를 들면 가족 중 누군가가 무서운 질병에 걸리면 가족들 모두가 긴장하게 됩니다.
지난봄, 메르스가 집단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발생했을 때 그 공동체 전체가 혼돈 속에 빠져들었던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가까운 친구와 악수하는 것을 꺼리게 되고, 포옹하는 것도 힘들어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부모가 자녀를 먼저 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부모의 시신은 고향 동산에 모시고 자녀의 죽음은 평생 부모의 가슴에 심는다는 옛말이 그 아픔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 아플 때입니다. 내 몸이 죽을 것처럼 아프면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모든 것이 다 허무합니다. 온 세상이 내가 만난 불행에 관심을 기울일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고통이 힘든 이유입니다. 친구들이 와서 “안됐다. 너 참 힘들겠다” 말하지만, 그 고통을 감내할 사람은 오직 나뿐입니다. 그것은 부부 사이도, 부모와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대신 아파 줄 수 없습니다. 그저 혼자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세상은 여유 있게 잘 굴러가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때는 심각한 외로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불행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마지막에 반드시 질문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내게 이런 아픔과 고난이 닥쳐와야 합니까?”
이런 질문은 회의론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런 저항적인 질문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뭐하고 계세요?” 이 질문을 가장 격렬하게 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벌거벗긴 채로 고통을 당하시던 예수님의 최후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이것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질문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부끄럽고 가장 처참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런 저항적인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천 년 전에 이미 이 질문을 하셨기 때문에, 슬픔과 죄악, 탄식과 신음을 예수님이 먼저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 가운데 고독하게 홀로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짖은 덕분에 우리는 고난 속에 들어갈 때 하나님과 연관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신앙화되고 신학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우리의 문제들과 연약함, 외로움, 슬픔과 탄식을 주님 앞에 나와 토해 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매우 놀라운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로마서 5:3)

여기 보면 ‘즐거워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즐거움의 자리와 환경입니다. 바로 ‘환난’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세상에 누가 환난을 좋아합니까? 누가 고난 받기를 좋아합니까? 그런 점에서 이 말은 환난 자체를 기뻐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고난 받기를 좋아하라는 명령도 아닐 것입니다. 바울의 글 어디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져라’, ‘자기학대를 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문제 속에 들어가서 잠기라’는 식의 말씀을 바울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일까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는 말 전에 이미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평화를 가졌느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앞선 1절과 2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네가 혹 환난 속에 있을 때에도 그 기쁨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기쁨을 지속시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요?

고난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고난의 순환 고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마지막에 나타난 동사가 ‘안다’입니다. 즉 우리가 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이유와 목표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무신론자였던 니체는 이런 말을 합니다. “견딜 수 없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맞지 않습니까? 고통의 이유와 목표를 안다면 고난이 와도 그렇게 신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고통을 받는지, 이 고통이 어디로 가게 될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고난을 받은 대표자를 뽑으라고 하면 욥을 들지 않습니까? 욥은 고난을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께도 항의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가셨나?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왜 이 고난을 내게 주시는가?”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받는지 고난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욥이 천상회의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나눈 대화를 알았다면,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그토록 신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고난의 네 가지 고리가 있습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고리는 맞물려서 움직입니다. 이 순환 고리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서기로 작정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5:6)

우리가 연약하고 완악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자와 죄인 되었을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깊어지면 마지막으로 가는 자리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그에게 고난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이유와 목표는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놀라운 사실 앞에 그의 인생 전체가 뒤흔들리게 됩니다. 고난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고난이 외로운 것은 혼자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고난을 이겨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바울은 선언합니다. “너희가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으면 환난도 넘어서라”고 말입니다. 이미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2)

현재에 문제가 있더라도 고난의 이유와 목표가 주어졌으니 하나님의 영광의 미래를 바라보며 고난의 바다 속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그 즐거움을 놓칠 수가 없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나와는 어떤 관계일까?’ 물어보는 것입니다.

환난이 결국 소망을 이룹니다.

구약에서 자기 백성의 고난과 멸망을 선포하며 가슴 아파했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선포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죽하면 예레미야애가서가 있겠습니까? 애가서를 읽어 보면 통탄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는 민족을 향한 통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멸하려 하시는 게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예래미야애가 3:33∼36)

근심과 염려가 덮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누군가에게 억압받고 밟히는 이런 모든 고난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녀처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자존감으로 이 세상에서 당당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것을 하나님의 본심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무너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고통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슬픔과 억울함과 외로움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속에 던지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의 네 고리, 환난, 인내, 연단, 소망이 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환난이 인내를 이룰까요? 외경인 구약의 집회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실로 황금은 불 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에서 단련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집회서 2:5)

황금이 불 속에서 단련되어 정금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성품도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놀랍게 단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가져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인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인내란 인생의 가장 우선적인 것 하나를 붙잡고 다른 것들은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고3 학생이 놀고 싶은 마음을 과감히 잘라내고 그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마주할 때 비로소 이러한 잘라내기를 시작합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그동안 산만하게 벌여 놓았던 것들 중 불필요한 것은 잘라 버립니다. 이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연단입니다. 연단은 시련, 끈기, 성품, 인격 등으로 번역이 되는데 영어성경에는 ‘character’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시련과 고난을 이긴 후에 얻게 되는 성품입니다. 이 연단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소망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자신을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 앞에 초청하신다는 소망을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광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고난의 마지막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과 우리의 마지막은 죽음이지만, 죽음 너머에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 부활의 사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영광의 사건이 있는 것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인생을 걸겠습니까?
“내 고난과 슬픔, 외로움과 탄식이 아무리 크고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광의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다짐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기쁨과 평안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고난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절대로 현실의 고통과 고난 속에 파묻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다가올 미래, 마지막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생명에서부터 오늘의 고난으로 거꾸로 인생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이 그 모든 고난을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 마지막에서부터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의 문제들을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신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척박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경험하신 생명과 부활과 영광의 자리를 통해서 오늘의 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고난을 이겨 나가는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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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 3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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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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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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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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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도처에 고난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는,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쓴 말씀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설교란 목사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설교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고 또한 설교자의 생각과 성품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깊은 묵상과 고뇌의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그 말씀을 바르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주제가 기쁨이나 사랑, 감사면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저도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고난이나 환난, 죽음 등의 주제가 등장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도 하고, 때로는 이러한 주제가 내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 주위가 고통과 환난의 이야기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로, 질병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참으로 많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비극을 기억해 봅시다. 천안함 피격사건과 지뢰 폭발사건은 우리 국민 모두를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작년에 발생했던 세월호 침몰사건은 이 나라 전체를 비통하게 했습니다. 또 저 북녘 땅을 생각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을지 가슴이 미어집니다.
세계적으로는 네팔의 지진, 시리아 난민들의 비참한 모습, 그리고 IS( Islamic State)의 잔인한 학살을 지켜볼 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먹먹한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피하려 합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말을 듣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그만큼 고난은 우리에게 매우 버거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조롱당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집단적인 고난을 경험하게 될 때는 인간다움의 존엄성까지 마치 쓰나미에 휩쓸려가듯 사라지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다가오면 무력감을 느낍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까지 해체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고난의 자리에 들게 되면 인간의 자기 주도성을 박탈당합니다. 주도적인 인간도 고난이 다가오면 수동적인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는 기대와 소망을 품는 것조차 거절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부정적인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또 고난은 우리가 경험한 인간관계의 소중함조차 파괴해 버립니다. 예를 들면 가족 중 누군가가 무서운 질병에 걸리면 가족들 모두가 긴장하게 됩니다.
지난봄, 메르스가 집단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발생했을 때 그 공동체 전체가 혼돈 속에 빠져들었던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가까운 친구와 악수하는 것을 꺼리게 되고, 포옹하는 것도 힘들어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부모가 자녀를 먼저 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부모의 시신은 고향 동산에 모시고 자녀의 죽음은 평생 부모의 가슴에 심는다는 옛말이 그 아픔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 아플 때입니다. 내 몸이 죽을 것처럼 아프면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모든 것이 다 허무합니다. 온 세상이 내가 만난 불행에 관심을 기울일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고통이 힘든 이유입니다. 친구들이 와서 “안됐다. 너 참 힘들겠다” 말하지만, 그 고통을 감내할 사람은 오직 나뿐입니다. 그것은 부부 사이도, 부모와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대신 아파 줄 수 없습니다. 그저 혼자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세상은 여유 있게 잘 굴러가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때는 심각한 외로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불행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마지막에 반드시 질문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내게 이런 아픔과 고난이 닥쳐와야 합니까?”
이런 질문은 회의론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런 저항적인 질문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뭐하고 계세요?” 이 질문을 가장 격렬하게 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벌거벗긴 채로 고통을 당하시던 예수님의 최후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이것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질문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부끄럽고 가장 처참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런 저항적인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천 년 전에 이미 이 질문을 하셨기 때문에, 슬픔과 죄악, 탄식과 신음을 예수님이 먼저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 가운데 고독하게 홀로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짖은 덕분에 우리는 고난 속에 들어갈 때 하나님과 연관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신앙화되고 신학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우리의 문제들과 연약함, 외로움, 슬픔과 탄식을 주님 앞에 나와 토해 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매우 놀라운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로마서 5:3)

여기 보면 ‘즐거워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즐거움의 자리와 환경입니다. 바로 ‘환난’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세상에 누가 환난을 좋아합니까? 누가 고난 받기를 좋아합니까? 그런 점에서 이 말은 환난 자체를 기뻐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고난 받기를 좋아하라는 명령도 아닐 것입니다. 바울의 글 어디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져라’, ‘자기학대를 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문제 속에 들어가서 잠기라’는 식의 말씀을 바울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일까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는 말 전에 이미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평화를 가졌느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앞선 1절과 2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네가 혹 환난 속에 있을 때에도 그 기쁨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환경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기쁨을 지속시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요?

고난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고난의 순환 고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마지막에 나타난 동사가 ‘안다’입니다. 즉 우리가 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이유와 목표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무신론자였던 니체는 이런 말을 합니다. “견딜 수 없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다.” 맞지 않습니까? 고통의 이유와 목표를 안다면 고난이 와도 그렇게 신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고통을 받는지, 이 고통이 어디로 가게 될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고난을 받은 대표자를 뽑으라고 하면 욥을 들지 않습니까? 욥은 고난을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께도 항의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가셨나?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왜 이 고난을 내게 주시는가?”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받는지 고난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욥이 천상회의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나눈 대화를 알았다면,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그토록 신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고난의 네 가지 고리가 있습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고리는 맞물려서 움직입니다. 이 순환 고리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서기로 작정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5:6)

우리가 연약하고 완악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자와 죄인 되었을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깊어지면 마지막으로 가는 자리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그에게 고난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이유와 목표는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놀라운 사실 앞에 그의 인생 전체가 뒤흔들리게 됩니다. 고난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고난이 외로운 것은 혼자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고난을 이겨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바울은 선언합니다. “너희가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으면 환난도 넘어서라”고 말입니다. 이미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2)

현재에 문제가 있더라도 고난의 이유와 목표가 주어졌으니 하나님의 영광의 미래를 바라보며 고난의 바다 속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그 즐거움을 놓칠 수가 없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나와는 어떤 관계일까?’ 물어보는 것입니다.

환난이 결국 소망을 이룹니다.

구약에서 자기 백성의 고난과 멸망을 선포하며 가슴 아파했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선포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죽하면 예레미야애가서가 있겠습니까? 애가서를 읽어 보면 통탄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는 민족을 향한 통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멸하려 하시는 게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예래미야애가 3:33∼36)

근심과 염려가 덮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누군가에게 억압받고 밟히는 이런 모든 고난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녀처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자존감으로 이 세상에서 당당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것을 하나님의 본심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무너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고통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슬픔과 억울함과 외로움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속에 던지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의 네 고리, 환난, 인내, 연단, 소망이 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환난이 인내를 이룰까요? 외경인 구약의 집회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실로 황금은 불 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에서 단련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집회서 2:5)

황금이 불 속에서 단련되어 정금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성품도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놀랍게 단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실 만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가져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인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인내란 인생의 가장 우선적인 것 하나를 붙잡고 다른 것들은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고3 학생이 놀고 싶은 마음을 과감히 잘라내고 그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마주할 때 비로소 이러한 잘라내기를 시작합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그동안 산만하게 벌여 놓았던 것들 중 불필요한 것은 잘라 버립니다. 이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연단입니다. 연단은 시련, 끈기, 성품, 인격 등으로 번역이 되는데 영어성경에는 ‘character’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시련과 고난을 이긴 후에 얻게 되는 성품입니다. 이 연단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소망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자신을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 앞에 초청하신다는 소망을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광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고난의 마지막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과 우리의 마지막은 죽음이지만, 죽음 너머에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 부활의 사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영광의 사건이 있는 것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인생을 걸겠습니까?
“내 고난과 슬픔, 외로움과 탄식이 아무리 크고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광의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다짐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기쁨과 평안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고난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절대로 현실의 고통과 고난 속에 파묻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다가올 미래, 마지막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생명에서부터 오늘의 고난으로 거꾸로 인생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이 그 모든 고난을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눈을 통해 마지막에서부터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의 문제들을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신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척박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경험하신 생명과 부활과 영광의 자리를 통해서 오늘의 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고난을 이겨 나가는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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