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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서른 살이 된 청년 때에 공식적으로 첫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 메시지는 두 가지 명령어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하나는 ‘회개하라’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믿으라’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천 년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다시 깨닫고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왜입니까? ‘삶의 변화’, ‘역사의 변혁’이라는 자기 혁신적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 시대는 지나갔으니 과거의 모든 삶의 찌꺼기들을 내버리라’는 회개를 향한 선포였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왔으니 믿으라, 복음 안에 들어와라’는 복음 전파였습니다.
마가복음은 새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 (마가복음 1:14)
이 말씀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표현을 통해 시간의 구분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구획도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대 종교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두리였던 갈릴리에 등장하셨습니다. 갈릴리는 버려진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곳을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인물을 뛰어넘고, 예루살렘이라는 종교 중심지를 넘어서서 갈릴리라는 버려진 도시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임한 것입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먼저 요한은 근본적으로 과거의 인물이었습니다. 구약에 머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지만, 그의 하나님 나라는 아직 현재에 들어와 있지 않은, 즉 미래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기다려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 속에 참여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요한은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과거의 죄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회개였습니다. 죄악의 소굴인 도시생활에 쪄든 몸과 마음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먼지들을 훌훌 벗어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죄의 흔적을 벗어버린 다음에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광야에 등장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사람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기존의 삶을 벗으라. 네게 있는 죄악과 불의의 찌꺼기와 쓰레기들을 다 털어내라!” 이것이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가 아닌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언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삶, 미움과 사랑이 혼재한 삶, 자랑과 주눅 듦,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임해야 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하나는 ‘회개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5)
회개하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뒤집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들을 써 붙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498년 전의 일입니다. 이제 2년 후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실제로 종교개혁은 당대 유럽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끌던 개혁자들에게는 핵심 표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천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라틴어로 ‘Ad fontes(to the fountains)’라는 이 말은, ‘샘의 원천을 향해 가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본래 성경에 기록된 말입니다. 시편 42편의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타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부분의 라틴어 번역이 “ad fontes aquarum”입니다. 영어로는 “unto the sources of water”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물의 원천을 향할 것을 주장한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였습니다. 인문주의 학자였던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원전 성경을 다시 편집한 인물입니다. 그는 당대의 헬라 클래식인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문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마틴 루터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진정한 개혁이 일어난다고 선포하면서 개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중세시대의 암흑기가 종식되게 됩니다. 이러한 중세시대의 종식을 이끈 개혁운동의 전통 속에 우리 교회도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종교개혁의 기초였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개혁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치개혁, 경제개혁, 교육개혁, 국방개혁,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공무원연금개혁, 재벌개혁, 노동개혁 등 개혁이 붙은 말들이 매일 언론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뒤집어 표현하면 개혁이 잘 안되고 있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개혁이 결코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개혁은 혁명과는 다릅니다. 혁명은 모든 것을 바꾸어 새로 세우는 것이지만, 개혁은 전통을 지키면서 잘못된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도 혁명만큼 어렵습니다. 수많은 개혁자들이 등장하지만, 개혁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개혁이 어려울까요? 이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가 당대 로마 가톨릭의 엄청난 힘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의 마음의 원천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95개 조항의 제1조에 그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 막 1:15)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들의 전체 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하신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전 생애에 걸쳐 계속해서 회개하고 변화해야 할 것임을 천명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때 중세의 라틴어 번역은 마가복음 1장 15절과 마태복음 4장 17절의 ‘회개하라’는 말씀을 ‘고해성사하라’고 오역했습니다. 헬라어 원본에는 ‘고해성사하라’가 아니라 ‘회개하라’였습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의 성례 중 하나인 ‘고해성사’와는 전혀 다른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노출시키라는 것입니다. 나의 부끄러움과 죄악을 하나님 앞에 토해 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종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억압하는 자리를 떠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개혁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개혁에 있어서도 역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회개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기 전에 먼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개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까? 왜 회개하기가 어렵습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내가 먼저 개혁이 되어야 진정한 개혁이 시작되는 것인데, 남에게만 개혁을 강요하고 나는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바뀌는 것을 보고 그때 나도 바뀌겠다’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종 들었던 말씀으로 생각됩니다만, 웨스터민스턴 대성당에 있는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습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죄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화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는지?”
이것은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개혁을 외쳐도, 내 삶의 자리부터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루터에게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그는 고뇌에 찬 물음을 품고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고해성사를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면죄부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을 흔들어 보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가? 내가 회개를 제대로 하는가?’를 묻다가 복음의 핵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동참한 사람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깊은 괴로움과 떨림을 경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처절하게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씀을 통해서, 심판자가 아니라 심판을 당하는 존재로 아들을 내려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를 억눌렀던 두려움과 떨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당대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교황이 “네 말을 취소하라” 했을 때, “나는 취소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다”고 담대히 대답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삶의 고뇌 가운데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로새서 1:13)
흑암의 권세에 억눌려 있고, 사탄의 종이 되어 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해 주셨다는 이 복음을 마틴 루터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잘못된 복음에 대한 해석, 잘못된 교회 교리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종교개혁운동이 불 일 듯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핵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복음이란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행동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을 보여 주셨다는 것,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권자로 이 땅에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공동체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 안에 복음이 있고, 사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사탄의 역사를 때려 부수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탄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고 회개이며, 곧 복음을 믿는 우리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자가 됩시다.
우리는 매일매일 회개하고 개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누구도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개혁되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가 가진 영적인 자기만족, 영적인 자기충족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괜찮지. 나만큼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우리 교회만 한 교회가 또 어디에 있어?’ 이것은 자부심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입니다. 여기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다른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신 대상은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만 되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만족에 빠져 자기만을 들여다보느라 하나님 말씀의 본뜻을 놓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오만한 자기충족을 보시며 “너희는 위선자다. 너희는 상을 이미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예수 잘 믿는 것입니까? 이만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뇌해 본 경험이 언제였습니까?
두 번째는 영적 자기만족과는 정반대인 영적인 패배주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별것 없네. 아니 십 년, 이십 년 믿었는데도 저 사람은 도무지 바뀌지가 않아. 옛 모습 그대로야. 심지어 목사, 장로도 다 똑같아.’ 교회 안에도 세상에서 나타나는 사건 사고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슬프고 아프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 패배주의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진정한 개혁과 변화를 막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삶이 변하여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 성도님, 그런 집사님, 그런 권사님, 그런 장로님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분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잘 지탱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있기에 여전히 한국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일에 앞장서기를 바라십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내가 영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반대로 영적인 패배주의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심드렁하게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예수님 안에서 축복의 역사를 누리고 오늘도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에 동참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1: 14 ~ 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서른 살이 된 청년 때에 공식적으로 첫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 메시지는 두 가지 명령어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하나는 ‘회개하라’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믿으라’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천 년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다시 깨닫고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왜입니까? ‘삶의 변화’, ‘역사의 변혁’이라는 자기 혁신적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 시대는 지나갔으니 과거의 모든 삶의 찌꺼기들을 내버리라’는 회개를 향한 선포였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왔으니 믿으라, 복음 안에 들어와라’는 복음 전파였습니다.
마가복음은 새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 (마가복음 1:14)
이 말씀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표현을 통해 시간의 구분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구획도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대 종교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두리였던 갈릴리에 등장하셨습니다. 갈릴리는 버려진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곳을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인물을 뛰어넘고, 예루살렘이라는 종교 중심지를 넘어서서 갈릴리라는 버려진 도시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임한 것입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먼저 요한은 근본적으로 과거의 인물이었습니다. 구약에 머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지만, 그의 하나님 나라는 아직 현재에 들어와 있지 않은, 즉 미래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기다려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 속에 참여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요한은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과거의 죄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회개였습니다. 죄악의 소굴인 도시생활에 쪄든 몸과 마음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먼지들을 훌훌 벗어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죄의 흔적을 벗어버린 다음에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광야에 등장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사람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기존의 삶을 벗으라. 네게 있는 죄악과 불의의 찌꺼기와 쓰레기들을 다 털어내라!” 이것이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가 아닌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언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삶, 미움과 사랑이 혼재한 삶, 자랑과 주눅 듦,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임해야 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하나는 ‘회개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5)
회개하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뒤집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들을 써 붙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498년 전의 일입니다. 이제 2년 후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실제로 종교개혁은 당대 유럽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끌던 개혁자들에게는 핵심 표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천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라틴어로 ‘Ad fontes(to the fountains)’라는 이 말은, ‘샘의 원천을 향해 가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본래 성경에 기록된 말입니다. 시편 42편의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타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부분의 라틴어 번역이 “ad fontes aquarum”입니다. 영어로는 “unto the sources of water”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물의 원천을 향할 것을 주장한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였습니다. 인문주의 학자였던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원전 성경을 다시 편집한 인물입니다. 그는 당대의 헬라 클래식인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문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마틴 루터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진정한 개혁이 일어난다고 선포하면서 개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중세시대의 암흑기가 종식되게 됩니다. 이러한 중세시대의 종식을 이끈 개혁운동의 전통 속에 우리 교회도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종교개혁의 기초였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개혁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치개혁, 경제개혁, 교육개혁, 국방개혁,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공무원연금개혁, 재벌개혁, 노동개혁 등 개혁이 붙은 말들이 매일 언론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뒤집어 표현하면 개혁이 잘 안되고 있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개혁이 결코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개혁은 혁명과는 다릅니다. 혁명은 모든 것을 바꾸어 새로 세우는 것이지만, 개혁은 전통을 지키면서 잘못된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도 혁명만큼 어렵습니다. 수많은 개혁자들이 등장하지만, 개혁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개혁이 어려울까요? 이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가 당대 로마 가톨릭의 엄청난 힘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의 마음의 원천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95개 조항의 제1조에 그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 막 1:15)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들의 전체 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하신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전 생애에 걸쳐 계속해서 회개하고 변화해야 할 것임을 천명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때 중세의 라틴어 번역은 마가복음 1장 15절과 마태복음 4장 17절의 ‘회개하라’는 말씀을 ‘고해성사하라’고 오역했습니다. 헬라어 원본에는 ‘고해성사하라’가 아니라 ‘회개하라’였습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의 성례 중 하나인 ‘고해성사’와는 전혀 다른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노출시키라는 것입니다. 나의 부끄러움과 죄악을 하나님 앞에 토해 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종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억압하는 자리를 떠나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개혁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개혁에 있어서도 역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회개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기 전에 먼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개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까? 왜 회개하기가 어렵습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내가 먼저 개혁이 되어야 진정한 개혁이 시작되는 것인데, 남에게만 개혁을 강요하고 나는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바뀌는 것을 보고 그때 나도 바뀌겠다’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종 들었던 말씀으로 생각됩니다만, 웨스터민스턴 대성당에 있는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습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죄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화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는지?”
이것은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개혁을 외쳐도, 내 삶의 자리부터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루터에게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그는 고뇌에 찬 물음을 품고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고해성사를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면죄부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을 흔들어 보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가? 내가 회개를 제대로 하는가?’를 묻다가 복음의 핵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동참한 사람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깊은 괴로움과 떨림을 경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처절하게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씀을 통해서, 심판자가 아니라 심판을 당하는 존재로 아들을 내려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를 억눌렀던 두려움과 떨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당대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교황이 “네 말을 취소하라” 했을 때, “나는 취소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다”고 담대히 대답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삶의 고뇌 가운데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로새서 1:13)
흑암의 권세에 억눌려 있고, 사탄의 종이 되어 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해 주셨다는 이 복음을 마틴 루터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잘못된 복음에 대한 해석, 잘못된 교회 교리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종교개혁운동이 불 일 듯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핵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복음이란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행동이 복음이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을 보여 주셨다는 것,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권자로 이 땅에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공동체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 안에 복음이 있고, 사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사탄의 역사를 때려 부수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탄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고 회개이며, 곧 복음을 믿는 우리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자가 됩시다.
우리는 매일매일 회개하고 개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누구도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개혁되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가 가진 영적인 자기만족, 영적인 자기충족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괜찮지. 나만큼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우리 교회만 한 교회가 또 어디에 있어?’ 이것은 자부심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입니다. 여기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다른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신 대상은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만 되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만족에 빠져 자기만을 들여다보느라 하나님 말씀의 본뜻을 놓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오만한 자기충족을 보시며 “너희는 위선자다. 너희는 상을 이미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예수 잘 믿는 것입니까? 이만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뇌해 본 경험이 언제였습니까?
두 번째는 영적 자기만족과는 정반대인 영적인 패배주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별것 없네. 아니 십 년, 이십 년 믿었는데도 저 사람은 도무지 바뀌지가 않아. 옛 모습 그대로야. 심지어 목사, 장로도 다 똑같아.’ 교회 안에도 세상에서 나타나는 사건 사고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슬프고 아프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 패배주의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진정한 개혁과 변화를 막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삶이 변하여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 성도님, 그런 집사님, 그런 권사님, 그런 장로님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분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잘 지탱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있기에 여전히 한국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일에 앞장서기를 바라십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내가 영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반대로 영적인 패배주의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심드렁하게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예수님 안에서 축복의 역사를 누리고 오늘도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에 동참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